▲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필자는 지난 1968년 일본에 유학해 일본이 낳은 세계적 법학자로 일본의 헌법과 노동법을 기초한 마쓰오가 사부로(松岡三郞) 교수의 연구실에서 선생의 지도하에 8년간 수학하고 1978년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너무 건강이 좋지 않아 건강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고 귀국하려고 1년을 더 머물렀다. 이 기간 중 일본을 더 알려고 그동안 가보지 못한 곳을 찾은 일이 있다.
우선 사는 곳에서 가까운 우에노 공원(上野公園)안에 있는 우에노 박물관(上野博物館)을 보는 기회를 가졌다. 박물관 안에서 필자는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우리나라 고대 유물들을 우연히 볼 수 있었다. 동경에서의 박물관(上野博物館)은 처음 보는데,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그곳에는 발굴지(發掘地)와 연도가 안 쓰인 불분명한 눈에 익은 우리의 삼국시대 기와장 등의 유물들이 많이 있었다. 그 때 느낌은 이 유물들이 일본의 고대유물로 둔갑해서 내놓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 이듬해 귀국해서 지금 까지도 그 유물이 언젠가는 일본의 고대 야마토(大和)시대나 그 이전의 것으로 둔갑돼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일본은 우리 유물을 둔갑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은 고대부터 우리역사를 뒤집고 역사를 구성하고 있기에 그들이 내세우는 역사가 진실과는 다르게 거꾸로 뒤집고 조작되는 일은 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들은 우리역사 뒤집기를 8세기 초부터 해 왔다.
지금 일본은 562년 신라에 망한 가야(伽倻)의 분국(分國)이며 식민지인 일본에 세워진 임나(任那)가 4세기 후반에 야마토(大和)에 복속된 양 다시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숨길 수 없다. 일본에는 양심적인 학자들도 있기에 일본 학자들 까지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믿는 자가 없어 교과서에서도 취급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아베신죠(安倍晋三)가 다시 일본수상이 되면서 독도영유권을 비롯해서 위안부강제연행 등도 부정하며 침략을 정당화하려고 임나(任那) 역사마저 또 왜곡하고 있다. 미나마 일본부(任那日本府)가 4세기 중엽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역사왜곡을 작정하고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끝이지 않고 경남창녕에서 출토된 금제왕관을 비롯해 용무늬 고리자루칼과 새날개모양의 관꾸미게 등 주로 4세기~6세기에 걸쳐 출토됐던 유물 8개의 출토장소를 창녕이 아닌 임나(任那)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유물을 보관 하고 있는 도쿄국립박물관은 출토지역을 한국 창녕이라고 하고 있음에도 삼국시대의 우리 유물까지도 임나(任那)유물이라고 억지 춘향을 만들고 우기며 일본문화청의 홈페이지에 표기하는 만행을 다시 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고고학을 좀 더 분명히 정립해야 할 이유가 된다. 고고학(考古學)은 문헌이 없는 시대의 역사를 명백하게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분명히 조명하는 일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변조를 원천 봉쇄할 수 있는 일이다. 이에 이번 칼럼도 계속해서 고조선 후국(侯國)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천년 지속 우리민족 서국(徐國), 중국 36~50여국 조공 받으며 ‘황제국 지위’ 누려
사학자들의 대다수 통설에 의하면 우리 조상의 주류는 북 몽골족에 속하는 종족으로 알타이어족의 말을 쓰는 사람들이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이나 만주, 몽골, 터키 등은 수천 년 전에는 같은 혈족이었다”며 “중국의 한족(漢族)을 조선족과 동족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또 몽골족은 오랜 옛날 우리와 같은 조상의 후손일수는 있지만 연대의 선후로 보아 조선족이 몽골족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런 우리 조상들을 중국인은 인방(人方), 동인(東人), 혹은 동이(東夷)에 속하는 종족이라 하고 숙신국(肅愼國) 또는 예맥족(濊貊族)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어떤 종족이 언제 어디서 왔는지 지금 와서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 조상 족들이 치수법(治水法), 맥궁(貊弓), 단궁(檀弓)이라는 기록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활 등 무기 같은 선행(先行)문화를 지니고 중국 한족에 앞서 우리 한민족이 먼저 중국에 선주(先住)해 대륙을 지배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중국의 한족과는 어계(語系)나 먹는 음식이 다룰 뿐 아니라 다른 문화전통을 가진 선진민족이다. 고조선 지역의 청동기문화 시작이 중국 황하유역보다 수백 년 앞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국의 동양미술 학자 죤 코벨(Jon Carter Covell(1910~1996) 또한 “조선 한족(韓族)이 동아시아에 정착한 연대는 현재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앞섰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문화가 일찍부터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바라보고 일제가 단군을 전설화한 것과는 정반대로 단군의 존재를 인정했다. “한민족 그 문화가 중국 것이 아니고 독특하다. 단군은 단군이다”고 코벨은 지적했다. 그 지적은 우리 고대사를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이 주장은 옳다.
단군조선은 서기전 2333년쯤부터 2천년 넘게 존속하는 동안 추, 맥, 예, 진번, 임둔, 발, 직신(또는 숙신)양이, 양주, 유, 청구, 고구려, 고죽, 옥저, 시라(尸羅), 진(辰) 등 대부족연맹체적 성격으로 형성돼 있었다.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徐偃)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외
또한 불이지국 같은 정복국가들 뿐만 아니라 예맥 같은 강성한 나라는 한나라도 그 위력에 굴복했다. 이처럼 우리 한민족이 강한 제후국들의 위상으로 중국 대륙을 지배했음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이 때의 동이족이 조선족임을 신채호 선생도 지적하며 이 지역에서 매우 강성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고조선 제후국 불이지(弗離支)…직예(直隸), 산동(山東), 산서(山西) 지역 정복·지배
고조선시대는 중국의 왜곡된 역사기술이 너무 차이가 난다. 예컨대 예맥은 후(候), 읍(邑), 군(君)이라는 3부족이 연합해 통치했는데 한무제(漢武帝)가 예맥의 강성함을 약화시키려고 많은 재물로 군(君)이라는 부족 남려(南閭)를 매수한 후 창해군(倉海郡)을 설치했다가 1년 반 만에 철수했다. 이는 한족(漢族)이 무력으로 우리 한민족의 예맥에 저항치 못한 것을 가리킨다. 또한 한(漢)나라가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으나 26년 만에 진번·임둔 2군을 탈취하고 현토군도 대부분 탈취했다. 이는 고조선 후국(侯國)도 중국 한족을 지배한 것을 고증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중국고사(中國古史)는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실위(室韋)도 동이족(東夷族)이라 기록하고 동이(東夷)가 100여국으로 분립했다고 기록했다.(晉書斠注 卷三, 帝紀, 第三)
신채호 선생은 고조선 연구에서 서기전 10세기경부터 그 후 대략 5~600년 동안은 대 단군조선(大 檀君朝鮮)의 전성시대로 보았다. 수문비고(修文備考)에 고죽국(孤竹國-지금의 영평부·永平府)은 조선종(朝鮮種)이라 한 바 백이(伯夷) 숙제(叔齊)형제는 고죽국의 왕자로서 왕위 상속권을 헌신짝 같이 버리고 지나(支那)의 주(周-지금의 협서성·陜西省)에 유력(遊歷)하다가 주무왕(周武王)에 대해 격렬히 비전론(非戰論)을 주장했다. 그 때 양자강 회하(淮河) 유역에 조선인이 많이 이식(移植)하여 다수 소왕국을 건설하더니 서언왕(徐偃王)이 그 중에 굴기(崛起)하여 인의(仁義)를 행하니 지나(支那) 36국이 조공했다고 신채호 선생은 고증했다. 이는 조선의 본국과 정치적 관계가 없는 식민 중 호걸들의 기록이다.
서기전 5~6세기경에 불이지(弗離支)란 자가 조선의 병(兵)을 율(率)하고 지금의 직예(直隸), 산서(山西), 산동(山東) 등 성(省)을 정복하고 대현(代縣)부근에 1국(國)을 건(建)하여 자기 명(名)으로 국명(國名)을 삼아 불이지(弗離支)라고 했다. 주서(周書)에 ‘불이지(弗離支)’와 사기(史記)에 ‘이지(離支)’가 모두 ‘불이지국(弗離支國)’을 가리킨 것이다. 불이지(弗離支)가 그 정복하는 지방을 그 성 곧 불(弗)의 음으로 지명을 지었다. 요서의 ‘비여(肥如)’, 산동의 ‘부역(鳧繹)’, 산서의 ‘비이(卑耳)’(관자·管子에 보임)가 다 ‘불’의 역(譯)이다.
상고에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다 연륙(聯陸)하고 1개의 대호(大湖)가 있었는데, ‘발해(渤海)’의 ‘발(渤)’도 음이 ‘불’이요 또한 불이지(弗離支)가 준 이름이다. 불이지(弗離支)가 산동을 정복한 뒤에 조선의 유(狖), 초(貂), 고(孤), 리(狸) 등 모구(毛裘)와 직물을 수출하여 발해를 중심으로 한 산업이 진흥했다는 기록이 있다.(申采浩, 朝鮮上古史, 改訂版 丹齋 申采浩全集 상권, P87~88) 이것은 고조선과 정치적 관계를 갖고 있던 불이지(弗離支)가 직예(直隸), 산동(山東), 산서(山西) 지방을 전복해 ‘불이지(弗離支)’ 또는 ‘불령지(弗令支)’라고 부르던 나라를 세우고 이 지방을 지배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의 통치체제’, 고조선학회 ‘고조선 연구 제1호’,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윤내현·박선희·하문식 공저 ‘고조선의 강역을 말한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김부식 ‘삼국사기’,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김세환 ‘고조선역사답사기’ ‘동남아유적지를 찾아서’ ‘노을속의 메아리’,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南帝 ‘命理속의 哲學’, 日本 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その步み’, Joseph Eidelberg 著·中川一夫 譯 ‘大和民族はユダヤ人だった’,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高橋 徹 ‘古代への遠近法’ 외 다수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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