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곳곳 지금도 우리 선조들에게 제사 지낸다

입력 2015-08-08 23:3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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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한민족은 고대부터 중원(中原)의 주인
 
우리 한민족은 인류사상 최초로 등장한 문화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이 소위 대중화(大中華)라는 제국주의에 편향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로 위조해 그 사실이 숨겨지고 말았다. 지금도 우리나라 사학계는 이를 못 벗어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고조선이 한(漢)나라에 의해 멸망했다는 잘못된 역사기술이다. 이는 어불성설의 허구다. 우리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처럼 중국과 일본의 단군고조선에 대한 왜곡·변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양계초(梁啓超), 사부아(謝扶雅) 등 중국학자들 조차도 “중국을 중심으로 한 허구의 역사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한 예로 “주무왕(周武王)이 은(殷)을 멸한 후에 기자(箕子)를 조선왕으로 임명하고, 기자가 주무왕(周武王)의 임명을 받아 조선왕이 되어 한민족(韓民族)을 지배하고,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다시 기자조선을 계승하여 한민족의 지배자가 되고,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을 정복 후 한사군을 설치해 한민족(韓民族)을 지배했다’는 등의 기록은 철저히 허구다. 우리 한민족은 외부인의 영향을 받지 않고 환국과 신시시대 배달국 말기 단군개국 초에 이미 농경사회로 발전했다. 이번 칼럼은 지금까지 살펴 본 고조선 역사의 개괄적 사실을 리뷰하는 형식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최태영 선생 “단군조선이 2096년 간 47대 단군(왕), 업적 뛰어난 단군임금만 압축”
 
우리가 역사 구분을 할 때 타제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해서 수렵(狩獵), 채집(採集)을 하던 시대를 구석기시대라 하고, 마제석기(磨製石器)를 사용하여 농경(農耕), 목축을 시작한 시대를 신석기시대라 하는데 우리는 이때부터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중원(中原-황하유역)까지 진출하여 서기전 15~서기전 12세기경에는 각지에 도시국가를 세웠다. 이후 한민족은 청동기 문화기에 들어서는 광대한 영역의 강대한 국가를 이루었다.
 
환국시대에 환인(桓因) 임금에 이어 신시배달국시대에 아사달 배달임금이라 불리던 환웅(桓雄) 임금이 배달임금으로 불린 이후 고조선시대에는 단군왕검이라는 한자(漢字) 칭호로 바뀌었다. 그런데 아무근거 없이 식민사관의 학노(學努)들이 고조선을 굳이 대동강유역설로 고집하며 이를 부인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환국이 53대 3301년, 배달국이 37대 1565년, 단군조선이 47대 2096년 넘게 존속하며 여러 민족 후국(侯國)을 지배했다. 최태영 선생은 “고조선의 여러 임금 중 그 업적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진 단군임금만을 추려 47대로 압축 된 것이 아닌가”하며 기술하고 있다.(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21면) 필자는 지금까지 기술한 고조선에 대해 살펴본 바 단군의 후손들은 2000년 후의 먼 후세까지 계승하는 동안 때로는 단결해 강성했고, 때로는 흩어져 쇠약하기도 하였는데 대체로 한족(漢族)을 주력으로 한 중국과는 평화 혹은 대립해 밀고 밀리기를 한 적도 있으나 거의 우리 한민족이 한족(漢族)을 지배했다.
 
대학자 정인보(鄭寅普) “단군은 신도 하느님도 아닌 고조선 개국한 우리의 실존 조상”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 하는데 이 말은 단군이 개국한 나라의 백성이라는 말이다. 수많은 한민족(韓民族)이 혈통 상 모두 단군의 피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단군할아버지’라는 호칭은 ‘대통령 할아버지’처럼 조상을 친근히 부르는 말일 뿐이다. 단군 설화는 상고시대부터 전해지는 것인데 이 설화에서 말하는 곰의 아들은 신(神)도 하느님도 아니며, 고조선을 개국한 우리의 실존 조상이다. 이를 주장한 사람이 대학자 정인보(鄭寅普)선생이다. 단군조선역사의 출발점을 정인보 선생은 정확히 본 것이다.
 
최태영 선생의 역사관도, 필자의 관점도 이와 동일하다. 최태영 선생은 어렸을 때인 조선시대에도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폈지만 선생의 세대까지도 단군을 변함없이 국조(國祖)로 받들어 당시 조선의 아이들이 천자문(千字文) 다음으로 배우는 동몽선습(童蒙先習)에서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때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가르쳤다고 회고담을 말하고 있다. 그의 저서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21면’에 보면 이는 의문의 여지가 없이 조선족 대대로 수천 년 간 전해지던 시대 상식이었다. 대한제국의 신식 군대에서 군가(軍歌)로 부르던 “단기 내려 고 강산에 우리나라 새롭도다” 하는 노래를 선생도 동요처럼 불렀다고 말했다. 중국은 이런 우리역사를 변조·왜곡하기 위해서 여러 번에 걸쳐서 지명과 지도까지 바꾸었다.
 
하지만 고조선은 한(漢)에 의해 살아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부여나 고구려 등도 중화하족(中華夏族)에 밀리지도 않았던 역사는 지금도 계속 밝혀지고 있다. 한(漢)나라는 예맥(銳麥=濊貊)에게도 밀리고 흉노(匈奴)에게도 밀렸다. 한민족(韓民族)은 중국문화의 개척자이며 순(舜)은 물론 중국문화의 대종사(大宗師) 공자(孔子)뿐만 아니라 중국병가(中國兵家)의 대종사(大宗師) 강태공(姜太公)까지 한국이 대국(大國), 구국(舊國)이라고 찬양했다. 이들은 한국에서 무기뿐만 아니라 문화까지 수입해야 한다고 했다.
 
예맥은 3000여 년 전 중국인들도 구국(舊國-흑룡·黑龍江 志稿64面)에 실릴 정도로 매우 강성해서 한나라가 위축상태였다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가 수도를 여러 번 옮겼으나 한족(漢族)에 밀려서 옮긴 것도 아니다. 고구려의 도읍지는 졸본(홀본이 맞고 졸본이 잘못), 눌현,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동황성, 평양성, 장안성 등으로 필요에 따라 대륙 정벌을 위해 옮겼으나 한족(漢族)에 늘 압도적 위엄으로 그들을 지배했다. 이런 과정에서 황제제도(皇帝制度)도 한국에서 창조됐다.(周易 卷之 24 (說卦傳 54面)
 
중국고대지리지(中國古代地理誌) 산해경(山海經)…한민족 선조들의 대제국 기록 남아
 
오늘날 침묵(沈黙)의 화석(化石)은 인류가 걸어온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은 19세기 말 이래 각지에서 화석인골(化石人骨)이 발견돼 인류 조선(祖先)의 모습을 명백하게 하게 되었다. 인류가 나온 것은 거의 200만 년 전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 시기는 지구상에서 빙하시대가 시작한 때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200만년에 미치는 오랜 여정(旅程)이었다. 그 후 고대인들은 벽화 등 예술을 낳게 했고, 손으로 간단한 도구를 만들 수 있게 됐다. 또 원시인들은 불을 사용하고 언어가 상당히 발달하면서 지혜를 얻었다. 우리 선조들은 궁시(弓矢) 등의 발명으로서 사냥을 진보시켜 현대인과 같은 특징의 선두에 있었다. 그것이 1만 년 전이다. 다시말해 인류 발달사의 첫 무대이자 중심에 한민족이 있었다.
 
인류역사를 돌아보면 고대인들은 죽은 자를 매장하는 행위 등으로 종교를 만들어 냈다. 또 인류를 원숭이로부터 분리·진보시킨 것은 노동이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노동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세기 중엽 독일 나일강 지류의 네안데르다르에서 돌을 캐는 작업 중 우연히 화석인골(化石人骨)이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병자(病者)의 인골이라고 해서 인류의 조선(祖先)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으나 그 후 발굴과 연구가 진행되어 20세기 초, 20만년~7만년 전의 인류라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말 자바(Java)섬에서도 화석인골(化石人骨)이 발견되어 연구결과 50~30만년 전의 인류 조선(祖先)이라고 인정되었다. 또 1920~30년대에 북경 교외의 주구점(周口店) 동굴에서 40체(體)이상을 발견, 자바(Java)인과 같은 시대의 인류인 것이 인정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200만년에 이르지만 학자에 따라 그 연대도 달라지게 나오고 있다. 우리 역사도 중국과 일본의 역사변조 왜곡에 의해 절단됐다. 그러나 근래 요하문명을 비롯해 우리의 역사가 고대부터 바이칼호수와 시베리아대륙, 만주, 중국, 한반도, 일본열도에 이르는 동서가 2만리요, 남북이 5만리의 영역에 1억8000만명의 사람이 살았다는 방증자료가 나오고 있다. 중국고대지리지(中國古代地理誌) ‘산해경(山海經)’은 그 대표적인 기록이다.
 
실제로 최근까지만 해도 중국 산동 등지에는 단군사당이 많았고, 중국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흩어져 있는 단군릉과 단군사당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온다. 지금도 중국의 북경을 비롯해서 각 곳에서는 우리 선조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최태영 선생은 직접 중국을 답사한 후 그 사실을 증거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의 통치체제’, 고조선학회 ‘고조선 연구 제1호’,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윤내현·박선희·하문식 공저 ‘고조선의 강역을 말한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김부식 ‘삼국사기’,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김세환 ‘고조선역사답사기’ ‘동남아유적지를 찾아서’ ‘노을속의 메아리’,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南帝 ‘命理속의 哲學’,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その步み’, 日本 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七千年の歷史’, 高橋 徹 ‘古代への遠近法’, 近江昌司 外6人 箸 ‘天理大學の古代史敎室'ヤマト王權の成立’, (日本)西東社出版部 編 ‘日本の古墳, 古代遺跡’, Joseph Eidelberg 著·中川一夫 譯 ‘大和民族は ユダヤ人だった’,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외 다수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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