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게 없는 대한민국, 아직도 일제망령 서렸다

입력 2015-08-29 23: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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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 광복70년 달라진 것이 없다
 
우리는 올해 광복70년을 맞아 ‘과연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을 잊지 않고 있는가’에 대해 냉철하게 자문해 보고 자성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들을 곧잘 잊어버리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일제가 지난날 우리민족을 과연 어떻게 했는가를 통렬하게 되짚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이번 칼럼은 우리가 일제의 만행으로부터 겪은 것을 되짚어 보는 글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의미를 새김질 해보고자 한다.
 
명성황후 시해, 위안부 문제, 난징 대학살인간이길 거부한 짐승만도 못한 만행
 
일본은 1895년에 그 극악무도함이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명성황후를 무참히 칼로 낭자하는 칼질을 하고 집단 겁탈을 한 뒤 살아있는 황후를 타오르는 기름불에 던져 태워 시해(弑害)했다. 도무지 인간의 행위로는 믿어지지 않는 짐승보다 못한 만행을 일본은 태연스럽게 저질렀다.
 
또한 어린 소녀들의 처녀성을 무참히 짓밟고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을 내팽개치며 고귀한 생명까지 무참하게 앗아간 위안부 문제도 그에 못지않다. 이토마사노리(伊藤正德)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종군기자가 태평양전쟁 후 쓴 1960년 문예춘추사(文藝春秋社) ‘제국군의 최후’(帝國軍の最後) 책을 보면 위안부 존재가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의 아베신죠(安倍晋三)는 이마저도 후안무치의 궤변을 늘어놓으며 부인하고 있는 중이다.
 
1937년 8월 일제는 난징(南京)에 무차별 폭격을 시작했다. 그해 12월 난징(南京)을 점령한 일본군은 시민들을 생매장한 것은 물론 갓난아기부터 노인까지 불태우고 목을 베어 잔인하게 죽였다. 그 수가 무려 수십만명에 달했다. 일본군은 6주간에 걸쳐 이 같은 대량학살과 강간, 방화 등의 추악한 만행을 저질러 놓고도 이를 미화하는 천인공노할 이중적 행동을 보였다.
당시 상해주둔 일본사령관인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는 전시문민(戰時文民)을 보호해야함에도 뻔뻔스럽게도 이에 대해서는 한마디 없었다. 오히려 그는 “아시아는 한 가족으로, 중일전쟁도 형이 잘못된 동생을 사랑하다 못해 때린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러한 일본의 만행들을 우리는 제대로 아는지 모르는지 과거를 잊어가고 있다. 우리는 달라진 것이 없는 일본에 대해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다.
 
강토를 도둑질한 강도 일제, 민족의 혼과 역사 말살하며 간도까지 중국에 넘겼다
 
19세기 말을 전후한 시기 조선에서는 1863년 흥선대원군 집권, 1885년 경복궁 중건, 188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및 갑오개혁. 1895년 을미사변, 1896년 독립협회 설립, 1898년 만민공동회 개최, 1905년 을사늑약, 1908년 의병 서울진공작전, 1909년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이등박문(伊藤博文) 저격 등 우리 민족에게 울분과 회한을 사무치게 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안중근 의사가 침략의 원흉을 사살하기까지 했지만 민족의 운명은 일제의 지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1910년 11월 대한제국의 국권은 끝내 일제에 피탈 당한다. 포악한 일본은 고종황제를 만국평화회의의 밀사파견을 이유로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을 병합시켰다. 이후 우리의 생명과 재산은 물론 역사며 사상과 제도 등 모든 것을 수탈당하게 된다.
 
총독부의 자료만 봐도 일제는 1912년에 토지조사를 시작으로 농토수탈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한일 합방 후 10년 동안 일본은 전 농토의 50%(10만ha) 이상을 도둑질했다. 그 결과 농민의 75%가 토지를 잃었다. 그들 중 42%가 소작인이나 토지 관리인으로 전락했다. 약탈한 토지는 일본인 지주에게 귀속시켰다. 더구나 그나마 토지를 가진 조선인에게는 혈세를 부과해 당시 총독부 수입의 50%를 차지할 정도였다. 1910~1919년 약 10간 쌀 18배, 면화 27배를 증수했다.
 
나아가 일제는 민족성의 철저한 말살에 전방위적으로 나섰다. 우리의 고대사 등 역사왜곡을 위해 고서 22만 수천권의 책들을 불사르는 만행(실재는 30만권이 넘는다)으로 문화동화정책을 강권적으로 전개했다. 한일합방을 반대하는 우국지사들에 대해서는 1907~8년 사이에 1만5000여명이나 죽이는 잔인성을 드러냈다.
 
1919年 3·1절 때는 당해에 8000여 애국지사를 살해했는데, 1만6000여명은 부상당했다. 또 20만명 이상이 투옥됐다. 태평양전쟁의 패전이 짙어지던 당시에는 징용 80만명(일본발표, 실제 150만명 추정)과 학도병 36만명이 무참히 끌려갔다. 정신대(군위안부)로는 5만명(실제는 그 몇배인 20만 추정)을 전쟁터로 내몰아 희생시켰다.
 
1930년에는 대륙침략의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민족말살정책을 감행, 말과 글은 물론 국기와 애국가 및 신앙까지도 싹을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숭배하게 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나아가 창씨개명까지 강제적으로 하는 철권정치를 강행했다. 이는 우리 강토는 물론 민족의 혼과 정신을 송두리째 유린한 것이었다.
 
잔인한 수탈과 민족말살을 자행한 일본은 청일전쟁 후 청일간의 ‘간도(間島) 조약’을 통해 우리 땅을 넘겨버렸다. 일본은 당시 패전을 전제로 해 우리나라의 영토를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획정하는 간계를 꾸민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 국회는 헌법 제3조 국경조항부터 고치고 가야 한다. 우리의 영토는 간도와 한반도 및 제주도와 독도 등 그 부속 도서이지, 청일 간 간도조약에서 맺은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국경을 획정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또한 일본은 패전 후 한국을 둘로 나누는 38선을 만든다. 일제는 관동군(關東軍) 절반을 남방으로 보내며 일본 대본영(大本營)이 38선 이남을 맡게 했고, 그 이북을 관동군이 나눠서 지킨다며 38선을 설정해 분단의 고리를 만들고 말았다.
 
일제는 패전 후에도 25일간 총독부가 허위 정보를 전달하게 해 하지중장으로 하여금 우리를 적대시하게까지 했다. 일본의 수상 요시다 싱애루(吉田 茂)는 음흉하게도 “한국은 강화조약을 반대한다”는 거짓말을 미국에 전하는 식으로 음해하여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우리의 참가를 막았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는 결국 피해자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범국의 중대범죄를 상당부분 용서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지금도 일본은 막대한 자금과 외교력을 동원해 이런 식의 한국 음해를 계속하고 있다.
 
폭압적 탄압에 당당히 맞선 문무 병행한 독립투쟁…1945년 광복절은 대한민국 전승절
 
1919년 3월 31일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임정은 독립신문을 간행하고 광복군을 조직해 일본군에 문무로 맞서 싸웠다. 이후 중국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독립보장을 약속했다. 임정은 우리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만주에서도 독립군이 조직돼 1920년 6월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개 대대병력을 무찔렀다. 같은 해 10월에는 김좌진(金佐鎭) 장군과 이범석 장군이 청산리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맞아 10여차례 크게 승리하는 청산리대첩을 이끌어 냈다. 1920년 6월10일에는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이어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물산장려운동을 펼쳤다.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어 국민계몽과 문맹퇴치운동을 폈다.
 
일본은 폭압정치(暴壓政治)에서 문화정책(文化政策)으로 바꾸고 총독도 군인에서 민간으로 바꾸었다. 이 시기 이병도(李丙燾) 등의 친일역사학자들이 엉터리 역사를 가르치도록 해 우리 한민족을 열등(劣等)한 족속으로 폄하시켰다. 이에 맞서 우리는 진단학회를 조직했다. 1929년에는 원산노동자 총파업과 광주학생 항일운동, 1932년에는 이봉창(李奉昌) 의사의 일왕 수류탄투척 의거가 일어났다. 같은 해 윤봉길(尹奉吉) 의사는 중국 홍구공원에서 시라가와(白川) 대장 등을 폭살(爆殺)시켜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렸다.
 
1933년 주시경(周時經), 최현배(崔鉉培) 선생 등은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를 조직해 해방 후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제정한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말을 금지하며 이름도 전부 일본식으로 바뀌게 한다. 1938년에는 조선말은 물론 역사를 아예 못 배우게 했다. 이듬해인 1939년 세계 제2차 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독일, 이태리와 삼국동맹(三國同盟)을 맺었다. 이에 1940년 우리는 한국광복군을 결성하고 결사 무력항전의 고삐를 더 죄고 나섰다.
 
일본은 1941년 12월8일 하와이 진주만을 선전포고 없이 폭격하는 광기 어린 전쟁에 나섰다. 진주만 공습 이듬해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을 벌려 국어 국문학자를 체포하고 진단학회(震檀學會)를 해산시켰다. 이즈음 1943년 6월 이태리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1945년 5월에는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한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은 끝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다.
 
21세기 살면서 중화주의·식민사관 답습…광복70년 불구 대한민국 독립은 미완성
 
필자가 이미 알려진 사실들을 굳이 다시 열거한 것은 뼈아픈 우리의 역사를 새김질 해보자는 의미다. 우리 국민들 중 상당수는 21세기에 살면서도 아직도 일제의 사고방식에 얽매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광복 70주년이라고 외치고 있지만 우리의 역사, 법과 행정은 아직도 일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역사의 경우는 아직도 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35권의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답습하며 가르치고 있다.
 
우리 국민들은 일제의 침략과 수탈에 대한 것들조차 망각하고 있다. 뼈아픈 역사적 사실들을 제대로 모르고 심지어 남의 일같이 여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찾아야 할 역사가 도륙 당했는데도 통렬한 반성과 노력이 없다. 한민족의 사상과 전통 그리고 철학이 송두리째 빼앗겼는데도 사고방식이 일제 식민시대와 다르지 않은 것이 많이 보인다. 이런 식으로는 극일(克日)을 할 수 없다.
 
진정한 광복은 역사를 바로 찾는 길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잃어버린 동북3성 등 우리영토를 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화주의와 일제식민사관을 청산하고, 이를 통해 그릇된 가치관을 회복시키는 일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 민족의 강점인 공동체의식과 연대의식을 회복시킬 수 있다. 제2의 건국은 이로부터 시작하기에 광복 70년이 지나는 지금에도 대한민국의 완전한 독립은 아직 미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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