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한서(漢書)도 “대고조선 지배설 ‘기자조선’ 허구”

입력 2015-09-12 22:5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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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기자조선(箕子朝鮮)은 중국인이 꾸며낸 위사(僞史)
 
필자는 지난 칼럼을 통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진위(眞僞)를 살펴보았다. 이번 칼럼도 기자조선왕조설(箕子朝鮮王朝說)에 관해 그 허구성을 문서역사(文書歷史)와 사회과학적(社會科學的)인 관점에서 고찰, 과연 기자조선(箕子朝鮮)이 국가형태를 갖춘 것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실체가 없는 기자조선은 역사빈혈증(歷史貧血症)에 걸려 있는 중국이 조작한 거짓 역사가 맞는 것인지 그 진위(眞僞)를 밝히고자 한다.
 
기자(箕子), 가장 강대했던 한민족에 피난민 중 한명…‘한민족 지배설’은 완벽한 허구
 
중국에 대한 사대관계에서 벗어난 한말(韓末)부터는 비합리적인 소위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과 관련해 기자왕조(箕子王朝)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통설(通說)이 됐다. 조선조(朝鮮朝)까지 사대관계 사상을 답습해 중국계도 아닌 기자와 위만을 무리하게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에 의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 진위(眞僞)가 확실해 졌다.
 
조선사편수회에 몸담고 있던 이병도(李丙燾) 박사도 기자가 먼저 고조선에 오고 위만도 중국의 혼란한 틈을 타서 우리 한민족 집단을 거느리고 탈출하여 고조선을 찾아온 ‘귀환동포’라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와 옷차림 등으로 보아서 귀환동포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근래 역사자료에 의하면 기자가 조선에 망명해서 국왕이 되었다는 망설(妄說)의 경우 기자(箕子)가 왕이 된 사실이 없다. 기자는 중국에 그대로 살면서 주(周)의 왕과 왕래하다가 중국이 통일되어 그대로 살기가 어렵게 되자 그 후손 기비(箕丕)가 고조선 말기 조선으로 피해 와서 간청하여 변방 작은 지역의 제후(諸侯)가 됐다.
 
기자(箕子)가 조선에 망명을 한 동기도 서전고명편(書傳畢命篇)에 보면 ‘毖殷頑民 遷于洛邑’이라고 했다. 즉, 은(殷)의 완민(頑民)을 뽑아서 주(周)의 서울 낙읍(洛邑)에 이주시켰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완민(頑民)은 은(殷)의 독립운동자를 가리킨 것이다. 그 당시 은(殷)의 충신들이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함으로 주무왕(周武王)은 그들을 학대하면서 주(周)의 서울 낙읍(洛邑)에 강제로 포수(捕囚)한 것이다.
 
은(殷)의 충신(忠臣)인 기자(箕子)가 택할 길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주(周)의 서울에 강제로 이주되어 포로생활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강대한 외국에 탈출해 그 국가를 배경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기자(箕子)가 외국에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길을 택할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그 당시에 사방민족(四方民族) 중 높은 문화를 가지고 강대한 국력을 가진 자는 오직 한민족뿐이다. 이에 기자가 조선에 동래할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그 때 은의 유민과 동이(東夷)의 일부가 동으로 이동한 것은 당연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자(箕子)가 반드시 조선에 정치적 망명을 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학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역사를 왜곡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 기자조선왕조설(箕子朝鮮王朝說)을 사실로 믿어 의심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학자들은 그것을 사실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기자(箕子)가 실제로 조선에 정치적 망명을 했다는 사실은 없었고, 만에 하나 조선에 왔다고 가정해도 그가 조선에 온 것은 정치적 망명자로서가 아니라 피난 이민단의 일개인이었다. 역사위조를 다반사로 하는 중국사가(中國史家)가 주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왕으로 임명하고 기자(箕子)가 주무왕(周武王)의 임명을 받아 동래(東來)해 한민족(韓民族)을 지배했다고 위조한 것이다.
 
중국 역사서 한서(漢書) “기자가 조선에 망명, 주무왕이 조선왕 임명한 사실 없어”
 
기자조선의 허구성을 보기 위해서는 중국 문헌을 통해 기자조선의 정체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역사인 한서(漢書)에 ‘箕子 去之朝鮮(師古曰 史記云 武王伐紂 封箕子於朝鮮 與此不同)’이라고 했다. 즉, 기자(箕子)가 스스로 조선(朝鮮)에 망명(亡命)한 것이요, 주 무왕(周 武王)이 임명을 받아 한민족을 지배한 적이 없다고 분명히 한 것이다.
 
주 무왕(周 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왕(朝鮮王)으로 임명했다는 주장은 상서(尙書) 홍범장 (洪範章 주(註)에 (武王 封箕子于朝鮮)이라는 문구(文句)에 근거한 것이다. 즉, 주 무왕(周 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왕으로 봉했다는 근거로 주장한 것인데, 봉(封)은 임명(任命)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원문(原文)을 검토하면 봉자(封字)는 분명한 위조다.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箕子 嘗言 商其淪喪 我罔爲信僕 史記 亦載箕子 陳洪範之後 武王 封箕子于朝鮮 而不臣也 盖箕子 不可臣 武王 亦遂其志 而不臣也’라고 했다. 즉, 기자(箕子)가 일찍이 나는 은(殷)이 망한 후에 주무왕(周武王)의 임명을 받는 신복(臣僕)이 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였다.(漢書 券之28, 地理志 第8下). 분명히 중국도 기자(箕子)가 왕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기(史記)에도 또한 기자(箕子)가 천도(天道)인 홍범(洪範)을 설교 한 후에 주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고 임명하는 신복으로 대우하지 아니 하였다고 언급했다. 대개 기자(箕子)는 임명할 수 없음으로 주무왕(周武王)이 그 뜻을 따라서 임명하는 신복으로 대우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이 원문(原文)을 다시 검토하면 임명을 뜻하는 봉자(封字)는 분명한 위조다. 그러함에도 기자조선 운운(云云)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중국인은 일방적으로 인류의 종주국이라고 자처하며 타민족을 신복으로 간주하는 전통이 있다. 조선과 일본 간의7년 전쟁(임진왜란)때도 명나라가 조선과 연합해 일본의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군대와 싸웠다. 그러면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명나라의 적이다. 그런데 명나라 황제라는 신종(神宗)은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일본왕(日本王)으로 봉했다고 했다.(明史 卷20, 神宗1). 기자(箕子)를 봉(封)했다는 것도 이와 같은 위조다.
 
이 같은 예를 또 하나 예를 든다면 송(宋)나라의 왕응린(王應麟), 청(淸)나라의 고염무(顧炎武), 청나라의 가경시대(嘉慶時代)의 왕계배(汪繼培) 등이 시전한혁장(詩傳韓奕章)의 한씨(韓氏)를 근거로 한씨조선설(韓氏朝鮮說)을 역설하여 역사를 위조한다. 즉, 왕계배(汪繼培)는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옛날 주선왕(周宣王) 때에....한서(韓西)가 한씨(韓氏)로 성(姓)하였다가 위만(衛滿)에게 망하였다’는 문구(文句)를 들어서 ‘한씨조선(韓氏朝鮮)의 억설(臆說)’을 내세웠다.(王符)의 潛夫論, 卷구九 志 氏姓)
 
해동역사(海東繹史) “기자는 중국인 난민 5천명을 거느리고 동래(東來)한 부족 수준”
 
기자(箕子) 당시의 사회는 고조선과 같은 국가형태는 찾기 힘든 부족시대로 많은 부족이 병립(竝立)하고 한민족 전체를 대표한 통일정권이 없었다. 그러므로 기자(箕子)가 한민족의 지배자가 되었다면 한 부족의 족장이 되는 것이요 한민족(韓民族) 전체를 지배 할 수 없다. 당시 부족시대는 씨족기반(氏族基盤)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씨족기반이 없는 자는 부족의 족장(族長)으로 추대되지 못한다. 중국에서 동래(東來)하여 씨족기반이 없는 기자(箕子)가 부족의 족장으로 추대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고찰하면 기자(箕子)는 한민족 전체를 대표하는 지배자가 될 수 없다. 기자(箕子)는 한민족 전체를 지배할 상황이 아니었다. 한민족(韓民族) 일부분도 지배치 못한 것이다. 이는 사회조직에 의해 기자(箕子)는 한민족(韓民族)을 지배치 못한 것이 입증된다.
 
그러면 기자조선(箕子朝鮮)은 무엇인가. 해동역사(海東繹史)에 보면 기자(箕子)가 중국인 5천명을 거느리고 동래(東來)했다고 했다.(海東繹史 第二, 箕子朝鮮). 그 당시는 인구가 적고 토지가 많음으로 동일한 부족도 딴 지방에 진출하여 부족집단을 창설하고 딴 부족을 형성함으로 많은 부족이 병립(竝立)했던 시대다. 그러면 기자가 중국인 5천명의 난민(難民)들과 같이 동래하여 공간지(空間地)에 중국인의 집단인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하고 그 지배자가 됐을 것이다.
 
기자조선 허구 입증되면서 들고 나온 온 한씨조선설(韓氏朝鮮說)도 허위역사 입증
 
역사조작을 잘하는 중국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이 문헌입증이 안 되자 한씨조선설(韓氏朝鮮說)을 들고 나온다. 즉, 중국의 역사위조자 왕계배(汪繼培)는 ‘한(韓)은 조(朝)의 오자(誤字)요 서(西)는 선(鮮)과 동일하다하고 한서韓(西)는 선(鮮)과 동일하다고 하며 한서(韓西)는 즉 조선(朝鮮)’이라고 억설(臆說) 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다. 그런데 기자는 한씨(韓氏)가 아니다. 그 실증을 댄다면 위략집본(魏(略輯本)에 기자(箕子)의 후손인 기준(箕準)이 ‘인(因)하여 한씨(韓氏)로 모성(冒姓)하였다’고 했다. 모성(冒姓)은 가성(假姓)을 말함이다.
 
위만이 기자조선(箕子朝鮮)을 탈취하고 기자(箕子)의 후손을 압박함으로 그들의 본성을 감추고 한씨(韓氏)라는 가성(假姓)을 사용한 것이다. 가성(假姓)이 한씨(韓氏)라는 것은 본성(本姓)이 한씨(韓氏)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중국사가가 무리하게 한씨조선설(韓氏朝鮮說)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민족을 중국인으로 조작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시전한혁장(詩傳韓奕章) 주(註)에 ‘孔氏曰韓武之穆也’라고 했다. 즉, 한씨(韓氏)는 주무왕(周武王)의 후손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한(韓)은 국명(國名)이요, 후작(侯爵)이요, 무왕(武王)의 후손이라고 했다. 우리 민족을 주무왕(周武王)의 후손으로 조작하기 위해여 한씨조선설(韓氏朝鮮說)을 위조한 것이다.
 
중국은 지명(地名) 인명(人名), 성(姓), 지도(地圖)까지 바꾸며 고대부터 역사위조는 그 악명이 높다. 이러한 무리한 조작과 위조한 역사를 그대로 번역하여 우리나라 학자들이 많은 오류(誤謬)를 범하는데, 이러한 위서(僞書)들을 참고하여 중국사서(中國史書)를 그대로 번역하고 받아들이면 우리민족과 역사를 말살하는 대오류(大誤謬)에 빠진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고조선의 통치체제’, 고조선학회 ‘고조선 연구 제1호 소수(所收)’, 윤내현· 박선희·하문식 공저 ‘고조선강역을 밝힌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 유적지 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하’,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백원 김백룡 원저·단동 김정일 편저 ‘天符經’,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 - 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高橋徹 ‘古代の遠近法’, 猪俣幸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林承國 ‘韓國正史’,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우창수 ‘아사달 상·하’, 김부식 ‘삼국사기’, 南帝 ‘命理속의 哲學’,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태백과 압록’ 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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