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삼황오제’ 빼앗아 중국사 뿌리로 날조했다

입력 2015-09-20 10:28:43

원문 링크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천손(天孫) 한민족 삼신오제(三神五帝) 빼앗은 중국
 
기자조선(箕子朝鮮)은 문서역사(文書歷史)와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고찰을 해봐도 기자(箕子)가 한민족(韓民族)을 지배한 일이 없는 것이 판명됐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중국과 일본은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변조한 위사(僞史)를 논한다. 그들은 역사에 대한 열등감이 그들을 왜곡의 길로 인도했다. 중국은 사마천(司馬遷)이 중국 고대사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처음에는 반고(盤固)가 중국에서 개벽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상고사가 없음을 인정한 그들은 한민족(韓民族)이 천손(天孫=천민天民)을 알고 우리 삼신(三神五帝)의 신앙을 본떴다.
 
상고사 뿌리와 근본이 없는 중국은 3신5제 삼신 신앙을 기반으로 한 우리 역사를 지우고 자기들 역사라고 조작하면서 조작된 삼황오제(三皇五帝)를 내놨다. 우리 환인의 환국과 환웅의 배달국 역사를 아예 빼앗아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기자조선이 우리 역사의 효시라고 터무니없는 내용을 붙여버렸다. 일본도 단군조선을 반 조각으로 잘라 버리는가 하면 기자조선이 우리역사의 효시라고까지 세계사에 싣고 우리역사를 폄하했다. 이번 칼럼은 이런 허무맹랑한 기자조선(箕子朝鮮)에 대한 날조된 역사를 증거하는 세 번째 마무리 글을 쓰고자 한다.
  
한민족 삼황오제 빼앗아 중국역사로 둔갑삼황(三皇)은 수인(燧人), 복희(伏羲), 신농(神農)
 
중국역사는 시작부터가 왜곡·조작된 역사다. 삼황(三皇)도 우리의 조상인데 자신들의 조상으로 둔갑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분명한 수인(燧人), 복희(伏羲), 신농(神農)씨 등을 빼앗아 갔다. 중국은 삼황을 복희(伏羲), 여와(女煱), 신농(神農)씨라고 주장한 것이다.
 
중국 역사는 반고(盤固)가 개천(開天)하고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를 거쳐 하(夏), 은(殷), 서주(西周), 춘추전국시대를 거쳐서 진(秦)의 전국통일시대에 이어 유방(劉邦)이 진(秦)을 넘어뜨리고 한(漢)나라를 세운 기록을 내세우고 있다. 나아가 한(漢)나라가 마치 고조선을 넘어뜨린 양 조작하지만 일고의 가치가 없는 위조 조작의 역사다. 또 중국의 역사를 반추해 보면 중원에서 우리가 그들을 지배했음을 알 수 있다.
 
반고(盤固)는 환국(桓國)의 우루국에서 대인(大人) 환웅(桓雄)을 따라 태백으로 오던 삼천무리중의 일개 부장(部長)일 뿐이다. 반고(盤固)는 태백산에 도착하기 전에 환웅(桓雄)에게 길을 나누어 갈 것을 제의해 환웅(桓雄)의 허락을 받고 현 감숙성 란저우 삼위산 납림이라는 곳으로 따르는 무리들과 같이 가서 그곳 주민들을 회유해 왕이 됐다고 기록되어 있다.(桓檀古記, 神市本紀 參照)
 
오제(五帝) 치우천황, 헌원 등 한민족헌원은 현 중국민족 화하족(華夏族) 왕 등극
 
이 반고(盤固)나 삼황오제(三皇五帝)는 배달국시대의 사람들로서 오제(五帝)도 치우천황(蚩尤天黃), 헌원(軒轅), 전욱고양(顓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제요도당(帝堯陶唐), 제순유우(帝舜有虞)인데 모두 한민족(韓民族)이다. 치우천황(蚩尤天黃)은 배달국 제14대 자오지 천황(慈烏支天黃)이고, 헌원(軒轅)은 한민족(韓民族)으로 중국 화하족(華夏族)의 왕이 된 자다. 그는 치우천황(蚩尤天黃)과 73회나 싸웠으나 이기지 못한 화하족(華夏族)이 왕으로 모셔간 자다.
 
제요도당(帝堯陶唐), 제순유우(帝舜有虞)는 옛조선의 제후(諸侯)였던 자이며 전욱고양(顓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역시 모두 우리 한민족(韓民族)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들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하고 있으나 아니다. 위에서 말하는 반고(盤固)나 삼환오제(三皇五帝)가 다름 아닌 우리 한민족(韓民族)이다. 이러한 중국의 역사왜곡은 다음 칼럼에서 말하려는 위만조선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은 역사조작을 작정하고 제 멋대로 하는 나라다. 환국, 배달국에 이은 단군조선의 개국(開國)은 요(堯)와 같은 시대인 4천 수백 년임이 확실한데도 후세에 사대관계(事大關係)로 요(堯)보다 수십 년 후로 조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며 처음부터 요(堯)와 같은 시대인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기자국(箕子國), 고조선 왕실의 양해 하에 고조선 지역 피난 후 고조선 제후국 불과
 
고조선은 여타민족과는 달리 일찍부터 천민사상(天民思想), 인간사(人間思想), 중물사상(重物思想)에 바탕을 둔 고유한 문화를 갖고 당시 모든 면에서 강력한 선진국을 이루었다. 기자(箕子)가 조선에 난민(難民)으로 이주해 왔을 당시 고조선은 윤리, 도덕, 사상, 법규범과 문화가 어느 민족보다 앞서 있었고 국내학자들도 기자(箕子)가 우리 한민족을 지배한 사실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기자(箕子)의 동래설(東來說)에 관해 윤내현 교수는 이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조선 왕국은 후기에 이르러 서부변경지역이 중국 망명집단(亡命集團)들에 의해 소란해지게 됐고, 대내적으로는 철기(鐵器)가 보급돼 종래의 경제구조, 사회구주가 붕괴됨에 따라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현저했다. 이에 따라 통치 질서가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중국지역에서는 서기전 12~11세기경에 상왕국(商王國)이 멸망하고 서주왕국(王國)이 건립돼 봉건제도를 확장, 구체화 했는데 그에 따라 기자(箕子)가 그의 봉지(封地)를 잃고 그의 일족과 함께 동북쪽으로 이동해 연(燕)나라의 변방인 지금의 난하 서부연안에 자리하게 됐다. 그런데 연국(燕國)과 기자국(箕子國)과의 관계도 원만치 못하게 됐다. 결국 기자국(箕子國)은 서기전 300년경에 연국(燕國)의 장수 진개에 의해 통일되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郡縣制)가 실시되자 기자국(箕子國)은 더 이상 거주 할 수 없게 되자 고조선 왕국의 영역인 난하의 동부 연안으로 이주하게 됐다”
 
‘기자국(箕子國)의 고조선 지역으로의 피난은 고조선 왕실의 양해 하에서 이루어 졌을 것이고, 이에 기자국(箕子國)은 고조선 왕국의 정치질서 안에 속해 고조선 왕국의 작은 제후국(諸侯國)과 같은 위치에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기자국(箕子國)이 위치했던 난하의 동부 연안은 고조선 왕국의 변경이 되었는데, 그 지역 지명(地名)은 역시 조선이었다. 이곳은 후에 서한의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할 때 낙랑군의 조선현(朝鮮縣)이 됐다. 한사군은 지금의 난하로 부터 요하(遼河)까지 이르는 지역에 설치됐는데, 그 지역은 고조선왕국 전체중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기자국(箕子國)이 위치했던 영토의 크기는 고조선왕국 전체면적의 200분의 1쯤 됐던 곳이다.
 
그런데 과거에 고조선 왕국과 기자(箕子)의 자손이 봉(封)해졌던 작(爵)은 지역인 조선현(朝鮮縣)의 명칭이 동일했기 때문에 기자(箕子)가 고조선왕국의 통치자가 됐던 것처럼 오류를 범하기도 했던 것이다. 기자국(箕子國)이 난하 동부 연안으로 이동해 오자 고조선 왕국은 도읍을 지금의 대능하(大凌河) 중류 동부연안에 위치한 북진(北鎭)으로 옮겼는데, 그 곳이 고조선 왕국의 세 번째 도읍지로 전해져오는 장당경(藏唐京)이다. 서기전 221년경의 일이다. 그 후 중국지역에서는 통일세력이었던 진제국(秦帝國)이 15년 만인 서기전 207년에 멸망하고 5년간에 걸친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항쟁이 있은 후 유방이 승리해 서한(西漢)이 세워졌다.
 
부여·고구려 시조 동명왕(東明王) 단군조선의 맥 이었다기자·위만 끼어들 틈 없어
 
기자(箕子)는 고조선의 한민족(韓民族)은 고사하고 일부분도 지배치 못한 것이 중국문헌과 우리의 문헌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필자가 고찰한 결과도 우리 한민족을 지배한 기자조선왕조(箕子朝鮮王朝)는 없었다. 이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왕(東明王)이 단군의 아들이라고 하였다’(三國遺事 王歷第一, 高麗, 東明王)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단군조선을 계승한자가 기자(箕子)가 아니고 동명왕(東明王)이라 한 것이다.
 
한민족의 단군조선은 BC 238년 제국의 끝을 마감했지만 이듬해인 239년 북부여로 그 국통이 계속 이어진다. 북부여 또한 동명왕에 의해 건국됐다. 부여는 나중에 다시 동명성왕으로 불리는 고주몽에 의해 고구려로 이어졌다. 고주몽 또한 부여의 동명왕과 명칭도 탄생기록도 유사한 것을 보면 고조선의 맥이 이어졌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 사이 기만과 위만조선의 맥을 끼어들 틈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중국을 중심으로 위조하는 중국역사에 기자(箕子)가 한민족(韓民族)을 지배한 일이 없다고 기록한 것은 분명히 옳은 것이다. 한민족을 계승한 자는 기자(箕子)가 아니고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이라 기록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국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위조하는 중국사가(中國史家)와 조선이 중국에 예속됐다고 위조하는 지금의 한국 사대사가(事大史家)까지도 기자(箕子)가 한국을 지배한 일이 없고, 단군조선을 계승한 자는 한민족(韓民族)이었음을 인정케 한 것이다.
 
최태영 선생의 결론도 ‘근래 역사자료에 의하면 기자(箕子)가 조선에 망명해 와서 조선의 국왕이 된 사실이 없으며 기자(箕子)가 중국에 그대로 살면서 주(周)의 왕과 왕래하다가 중국이 통일되어 그대로 살기가 어렵게 되자 그 후손 기비(箕丕)는 고조선 말기에 조선으로 피해 와서 간청해 변방 작은 지역의 제후(諸侯)가 됐다고 했다. 또 그의 아들 기준(箕準)이 역시 탈출해 조선으로 들어온 위만(衛滿)을 신임해 변방을 수비하는 박사(博士)라는 관직에 있다가 위만(衛滿)의 속임수에 빠져 제후(諸侯)의 자리를 빼앗기고 반도로 한왕(韓王)이라 일컬어지다가 후손도 없이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최태영 한국상고사 54면)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고조선의 통치체제’, 고조선학회 ‘고조선 연구 제1호 소수(所收)’, 윤내현·박선희·하문식 공저 ‘고조선강역을 밝힌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 유적지 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백원 김백룡 원저 ·단동 김정일 편저 ‘天符經’,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 - 天皇家 七千年の歷史’,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高橋徹 ‘古代の遠近法’, 猪俣幸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林承國 ‘韓國正史’,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우창수 ‘아사달, 상·하’, 김부식 ‘삼국사기’, 南帝 ‘命理속의 哲學’,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태백과 압록’ 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이을형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0
감동이에요
0
화나요
0
슬퍼요
0
댓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