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우리나라 사대주의 학자와 식민사관의 학자는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한민족을 침략하고 한민족을 지배했다고 중국사의 위조를 그대로 번역, 우리나라 중·고교의 교과서에까지 싣고 있는 우를 범하고 있다. 중국이 위조한 것을 한국사로 편찬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치욕적인 일이다. 필자 역시 초등학교부터 이런 잘못된 역사를 배워왔었다. 이런 중국사를 맹신하면 우리의 혼을 영원히 잃고 만다. 위만이 우리 한민족을 지배치 못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분명히 하는 일은 위대한 제국 고조선의 면면한 피와 혼이 오늘의 우리로 계승되고 있다는 역사적 진실을 증거하는 일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오늘은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우리를 지배한 일이 없다는 것을 문서역사를 통해 규명하는 칼럼을 쓰고자 한다.
은혜 배신한 위만(衛滿)의 행각(行脚), 강국들 틈에서 사기와 협잡꾼 행적(行蹟) 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진 제국(秦 帝國)이 불과 15년만인 서기전 207년에 망하고 5년간에 걸친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치열한 항쟁이 있은 후 유방이 승리해 서한(西漢)이 세워진다. 그런데 서한(西漢) 초인 서기전 195년에 위만은 서한(西漢)의 후국(侯國)인 연(燕) 기자국(箕子國)으로부터 망명해 국경지대에 살면서 “서한(西漢)의 침략을 방어하겠으니 허락하여 줄 것”을 기자 분봉국의 준왕(準王, 작은 지방관)에게 청했다.
준왕(準王)은 위만을 믿어 박사로 삼아 국경지대인 패수(浿水, 지금의 난하)의 동부유역에 봉지(封地)를 주어 그 곳에 살게 했다. 그러나 위만은 패수유역에 거주하면서 중국지역으로부터 망명자와 그 지역의 토착민들을 규합해 세력을 형성한 다음 군사를 일으켜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준왕(準王)을 공격하고 정권을 빼앗았다. 준왕(準王)은 위만의 침공을 받아 지금의 발해로 도망했다.
위만이 기자국(箕子國)을 탈취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가 서한(西漢)으로부터 기자국(箕子國)으로 망명한 후 오래지 않은 시기였기에 서기전 195년부터 180년 사이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배은망덕하게도 기자국(箕子國)의 일개 지방관으로서 정권을 탈취한 위만(衛滿)은 서한(西漢)의 요동태수(遼東太守)를 통해 서한 정부의 외신(外臣)이 돼 변방을 방어 할 것을 약속했다. 위만은 그 조건으로 서한(西漢)으로부터 군비(軍備)와 재정(財政)적인 원조를 받았다.
서한(西漢)의 지원을 받은 위만은 주위를 공략해 고조선왕국의 서부를 침략해 들어갔다. 결국에는 지금의 요하에 조금 못 미치는 지역까지 차지, 위만조선이 성립되고 그 동쪽에 위치한 고조선 왕국과 병존하는 국면이 됐다. 고조선왕국은 마침 도읍을 대능하(大凌河) 동부 연안의 장당경(藏唐京-지금의 북진北鎭으로부터 요하遼河 동부 연안에 위치한 심양沈陽의 동남지역)으로 옮기게 됐다. 그곳이 고조선 4번째 도읍지로 전해오는 아사달이었으며 바로 첫 번째 도읍지였던 평양(平壤城)이기도 했다.
당시 고조선은 그 강역이 광활했기에 여전히 넓은 영역을 통치지역으로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 서부를 위만(衛滿)에게 빼앗기고 때마침 나머지 영역마저도 충분히 지배 할 수 없을 정도로 통치력이 약화되는 상황이었다. 위만은 서한(西漢)의 지원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고조선 변경에 위치한 소제후국(小諸侯國)국이었던 기자국(箕子國) 정권을 탈취했을 뿐이었다. 다시말해 위만(衛滿)이 대 제국이었던 고조선 왕국의 서부를 공략해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 내부에 일어난 모순과 갈등 때문이었다.
고조선은 후기로 오면서 서부 변경지역으로부터 이주해 온 망명집단(亡命集團)의 증가와 한민족(韓民族)이 개발한 철기(鐵器)가 보급되어 종래의 경제구조, 사회구주가 붕괴됨에 따라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현저했다. 이에 따라 통치 질서가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고조선의 철재보급은 무기뿐 아니라 농기구의 보급으로 토지의 경병현상을 일으키고 모순과 갈등을 격화시켰다.
이 같은 고조선 내부의 자체모순으로 국력이 약화돼 위만(衛滿)의 성장을 쉽게 만들었다. 위만(衛滿)은 기자국(箕子國)으로 망명하기 전에 중국지역에 거주하면서 전국시대의 토지 겸병을 위한 각국의 항쟁, 진국(秦國)에 의한 중국의 통일과 중앙집권적 군현제의 실시, 농민의거(農民義擧), 변변치 못한 머슴계층 출신인 유방(劉邦)에 의한 서한제국(西漢帝國)의 건국 등을 직접 체험하였기 때문에 고조선왕국에서 일어난 읍제국가(邑制國家) 구조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다.
서한(西漢)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고 주변의 다른 민족을 제압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동북부의 고조선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위만(衛滿)을 이용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위만은 이 조차 반하는 일을 자행했다.
중국 사서들에 기록된 위만(衛滿)의 한고조(漢高祖) 배신과 고조선 망명 증거들 많다
고조선의 소제후국(소제후국·小諸侯國)이었던 기자국(箕子國) 정권을 고조선왕국으로부터 빼앗아 반란세력이 된 위만(衛滿)으로서는 신흥세력인 서한의 지원을 받아 군림(君臨)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위만(衛滿)은 한민족을 지배치 못한 사실이 판명된다.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에 ‘盧綰 豊)人也 與高祖同里 盧綰親 與高祖太上皇 相愛 及生男 高祖 與盧綰 同日生’ ‘高祖己定天下 酒立盧綰 爲燕王 上曰盧綰果反矣 使樊瞺擊燕’이라 는 기록을 남겼다. 즉, ‘한고조(漢高祖)와 노관(盧綰, 위만은 노관의 부하였음)이 동향인(同鄕人)이요 노관(盧綰)의 부(父)와 한고조(漢高祖)의 부(父)가 사랑하고 한고조(漢高祖)와 노관(盧綰)이 생일이 동일(同一)하다. 이로 인해 한고조가 천하를 얻은 후에 노관(盧綰)을 연(燕)나라 왕(王)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노관(盧綰)이 배반함으로 한고조가 노관(盧綰)을 토벌(討伐)했다’고 한 것이다.
전한서 조선전(前漢書 朝鮮傳)에 ‘燕王盧綰反人匈奴 燕人衛滿 亡命’이라고 했다. 즉, ‘노관(盧綰)이 한고조(漢高祖)를 배반하다가 실패하고 흉노(匈奴)에 도피하니 노관(盧綰)의 부하로서 노관(盧綰)과 같이 한고조(漢高祖)를 배반하던 위만(衛滿)이 조선에 망명했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전기(前記) 사기(史記)에 ‘太史公曰 盧綰 砒素積德累善之世 徹一時權變 以詐力成功.....內見疑强大 外倚蠻貊以爲援 是以日䟽自危 事窮智困 卒赴匈奴 蚩不哀哉’라고 했다. 즉, ‘노관(盧綰)이 덕망과 선치(善治)가 없고 일시적 권모술수로서 성공했다. 노관(盧綰)은 안으로 한고조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밖으로 예맥(銳麥=濊貊)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키다가 실패하고 흉노에 도피했다’고 한 것이다. 이는 노관(盧綰)의 부하 위만이 일개 사기꾼으로 안으로는 한고조의 불신을 받고 오직 예맥(銳麥)을 배경으로 반란을 시도하다가 패망한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한서(漢書)에 ‘高帝四年 北貉燕戀人 來致梟騎助漢’이라고 했다. 즉, ‘한고조 4년에 예맥의 용감한 기병(騎兵)을 보내어 한(漢)을 도와주었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고조가 예맥의 군사적 원조를 받았다는 의미다. 노관(盧綰)과 위만이 예맥을 등에 업고 한고조를 배반하고 한고조가 예맥의 군사적 원조를 받은 것은 예맥의 국력이 한고조의 국력보다 빈약하다면 노관(盧綰)과 위만이 예맥을 등에 업고 한고조를 배반 할 수 없고, 예맥의 국력이 한고조의 국력보다 빈약하다면 군사적으로 한고조를 후원 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런데 한고조에게 격멸당하고 빈손으로 조선에 망명해 유명무실한 고조선의 소제후국(小諸侯國)국이었던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계승한 위만이 한고조의 국력보다 강대한 예맥(銳麥)을 정복하고 우리민족을 지배했다 함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위만이 조선에 망명할 때에 한민족(韓民族)의 의복을 입고 한민족의 상투를 곡지었다. 이는 한민족인 예맥(銳麥)을 배경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위만이 한민족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한민족을 가장 한 방증이다.
한민족(韓民族)을 가장하고 한민족의 보호에 의해 생명을 보존한 망명객 위만이 세운 정권은 한 지방에서 명맥(命脈)을 유지하는 미약한 존재로서 감히 예맥(銳麥)을 정복하고 우리민족을 지배 할 수 없었다. 고대사 허위조작으로 정평이 있는 중국역사를 고찰 할 때에 문면(文面) 그대로 믿지 말고 이면(裏面)에 숨어있는 사실을 발견하는 검토작업이 필수인 것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고조선의 통치체제’, 고조선학회 고조선 연구 제1호 소수(所收)‘, 윤내현· 박선희·하문식 공저 ‘고조선강역을 밝힌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백원 김백룡 원저·단동 김정일 편저 ‘天符經’,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우창수 ‘아사달, 상·하’, 김부식 ‘삼국사기’, 南帝 ‘命理속의 哲學’,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 - 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高橋徹 ‘古代の遠近法’, 猪俣幸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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