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주 두고 싸운 사마대국…가야 계승한 日 최초 女國

입력 2015-11-29 12:2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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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우리는 문화로 일본을 지도하고 무력으로 일본 지배했다
 
무릇 국가는 그 국민을 이끌어 나아갈 위대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국민정신이 부패, 혼란에 빠진다.
 
오늘 우리나라 사회가 도무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 정치인, 언론인, 학계, 국민까지도 너나없이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국가공동체의식이나 연대의식은 그리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역사교재 국정화(國定化)는 가치관(價値觀)의 회복차원(回復次元)에서도 반드시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는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은 이제 종극(終極)을 봐야 한다. 근래 우리나라 정신상황을 보면, 이 나라가 진정 법과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법치주의국가사회인가 착각 할 정도다. 지금 정치권이나 사회에 벌어지는 현상은 너나없이 할 것 없이 제정신이 아니다. 아직도 19세기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수준에 있다.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은 다시 일본사에 신라 백제 고구려가 일본의 속국인양 역사교재를 만들어 가르치고, 또다시 임나(任那)가 일본의 식민지인양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일본이 고대한국을 지배하였다는 군국주의시대의 역사교육을 다시 재판(再版)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고대일본을 지배한 것을 거꾸로 자기들이 한국을 지배한 양 군국주의시대의 교육을 재판함으로 자국민의 침략적 사기를 북돋고 민족적 자주성과 자존심을 높여 우리 한민족의 민족정신을 좀먹게 하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일제가 벌인 지난날의 질곡의 역사를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21세기 지식 기반사회에 살면서도 19세기 망령(亡靈)을 못 버리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서다. 필자는 지난 7월말 일본에 회의차 가서 도쿄(東京) 간다(神田)의 서점에 들렀을 때 본 것은 어느 책점도 혐한(嫌韓)의 책들이 많이 진열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배신죠가(安倍晋三)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혐한론(嫌韓論)을 들먹이며 나오는데 우리는 아무런 대응조차 못하고 있다. 이래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일본을 책하기 전에 우리도 민족적 자각(自覺)과 철저한 대책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자각이 없다.
 
고대 우리 한민족이 일본을 정복하고 지도 지배한 역사를 제대로 가르침으로 민족적자 자긍심과 자부심을 북돋고 위대한 한국사상을 다시 발견하여 국민사상이 중핵(中核)의 확립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다. 오늘은 계속해서 일본을 정복한 우리 한민족 본래의 역사를 간추려 쓰는 것이 요청되고 있음에서 가야유민역사를 계속 쓰려고 한다.
 
한민족(韓民族)이 일본지도하고 무력으로 일본 지배한 사실들
 
중국의 동북공정 못지않게 일본의 고대역사 왜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왜곡하고 있음을 본다. 역사연구를 하며 보는 것은, 일본사는 고대사 전부가 너무 왜곡되고 있다. 일본은 임나(任那)를 근거로 백제와 신라를 예속시키고 동양의 패자 고구려까지 지배하였다는 대담한 날조를 스스럼없이 대담하게 역사왜곡을 하는 일본의 주장은 거의 전부 허구이다.
 
일본역사(日本歷史)에 있어서 임나문제(任那問題)의 기원(起源)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스진덴노(崇神天皇)65년 추(秋) 7월에 임나가 소나갈잘자(蘇那曷叱智)를 보내어 조공하였다는 조문(條文)이다. 그 외 다른 곳에는 임나(任那)를 통치 지배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그럼으로 일본사가(日本史家)는 스진덴노(崇神天皇)65년 추(秋) 7월에 임나조공설(任那朝貢說)을 근거로 임나를 통치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최초에 일본을 개국한 자는 진무(神武)가 아니고 스진(崇神)이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스진(崇神)시대는 씨족시대로 소부락생활을 하고 일본국내도 통일을 못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이 멀리 해외에 진출하여 이민족(異民族)을 통치할 수 없다. 특히 일본보다 문화와 무력이 발달한 선진국 임나를 지배할 수 없다.
 
그럼으로 일본부(日本府)는 분명히 일본이 우리 민족을 통치한 정치기관이 아니다.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임나에 토착한 일본인정치연합이 아니다. 일본부(日本府)는 우리민족이 일본을 통치한 정치기관이라 봐야 한다. 특히 임나는 일본보다 먼저 개국한 선진국이다.
 
임나(任那)가 선진국으로서 일본을 가르치고 경제적으로 일본을 후원하였다. 그럼으로 신라가 임나(任那)를 정복하니 일본은 역대천황이 임나(任那)를 회복하려고 전 국력을 다하여 신라와 싸운 것이다.
 
또 임나문제(任那問題)에 대한 기록은 웅략기(雄略紀)와 흠명기(欽明紀)에도 보인다. 웅략기(雄略紀)는 이미 기술한바와 같이 웅략(雄略)은 왜왕무(倭王武)시대 고구려가 일본을 정벌하니 일본은 저항치 못하여 송(宋)에 구원을 요청한 것과 그리고 킨메이시대(欽明時代-540~570년)에 신라가 일본을 누르고 임나를 탈취한 기록이다.
 
우리민족이 일본을 누르고 일본이 우리민족의 압박을 받을 때에 나타난 일본부(日本府)는 분명히 우리민족이 일본을 통치한 정부기관이다. 그러나 일본국민은 삼류소설 같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날조된 거짓역사를 그대로 받아 들여 우리와 대립하고 있다.
 
일본최초의 사마대국(邪馬臺國)은 어떠한 나라였나
 
분명한 것은 서기전 500년경 일본에 상륙한 가야족(伽倻族)의 그 맹주(盟主)는 미오사마국(彌烏邪馬國)이였고 구주일원(九州一圓)은 당연히 그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이 역사연구가의 공통된 주장이다. 여기서 필자는 가야족의 세운 야마국(邪馬國=邪馬臺國)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기술하여 이를 밝히려하는 것이다.
 
과연 구주(九州)에 세운 사마대국(邪馬臺國)은 어떠한 나라이었나! 라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종주국(宗主國)이 있는 조선반도의 상황이 여실히 그들에게도 영향이 미쳤다는 것이다.
 
3세기에 들어와서 부족국가의 난립(亂立)시대를 벗어난 조선반도에서는 3개의 나라가 세력을 넓혀갔다. 즉 고구려 백제 신라이다. 서기전 100년 이전에는 진한(辰韓)의 한 소국이었던 백제는 3세기에 들어와서 급속히 그 세력을 증대시켜 4세기 중반에는 구진한(舊辰韓) 마한(馬韓)의 영역을 거의 수중에 넣어 점점 강대해져 갔다. 4세기 중엽에는 낙동강유역도 백제의 수중에 떨어져 현재의 김해 부산의 근방밖에 남지 않았다.
 
적어도 서기 100년부터 350~60년간 260년간에서 백제의 세력은 점진적 그것도 확실히 남하(南下)해 갔다는 것이다. 남하하는 도중에 무엇이 있었는가. 야마국(邪馬國)의 본국 미오사마국(彌烏邪馬國)이 있었다. 이 미오사마국(彌烏邪馬國)이 백제의 남하세력에 접수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오사마국(彌烏邪馬國)이 접수된 때가 언제이냐는 것이다. 지리상황을 봐서 이에 대하여 박병식씨는 백제남하를 3단계로 나눠서 말하고 있다. (이상은 朴炳植 ‘日本語の悲劇’.136~138(面) 참고인용).
 
그 제 1단계는, 180년부터 19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면 본국 가야(伽倻)의 위급존망(危急存亡)때 분국(分國)인 일본의 야마도(邪馬臺)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 의하면 187년에 내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즉 본국의 세력이 쇠퇴하는 징조가 야마도의 맹주(盟主)와 야마국의 영향력과 권력의 상대적 저하를 가져와서 야마도에 정착하고 있던 제국간(諸國間)에 맹주(盟主)의 자리를 둘러 싼 세력다툼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추찰할 수가 있다.
 
이 역사상 [사마대국(邪馬臺國)의 동란(動亂)]이라고 불리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 도일(渡日)한지 70~80년간이 되자 유민들은 서로 상공(相(攻)의 싸움으로 혼란하자 각국에 의해서 공립(共立)된 것이 히미고(卑彌呼)왕이었다는 것이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의 기록인 것이다.
 
이 히미고(卑彌呼)를 여왕으로 하는 통일야마도국가가 왜 [사마국(邪馬臺國)]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간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즉[사마대국(邪馬臺國)이란 미오사마국(彌烏邪馬國)이 대(臺-중심 또는 기초)로 되어 성립한 나라인 것이다.
 
사마대국(邪馬臺國)은 미오사마국(彌烏邪馬國)을 계승한 것
 
이미 쇠퇴하여 없어진 나라인 미오사마국(彌烏邪馬國)은 유서(由緖) 바른 나라이다. 때문에 일본에 나라를 세웠으나 완전히 미오사마(彌烏邪馬)의 것은 아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마대국(邪馬臺國)]인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사마대국(邪馬臺國)은 히미고(卑彌呼)의 지도에 의해 제 부족의 통일국가로서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일본은 아직도 그 위치가 구주설과 기내설로 나눠지나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은 그 위치가 최태영 선생이 답사한 구주(九州)) 현재의 후쿠오카겡이도군(福岡縣系島郡=(九州)에 있었다.
 
당시 구주(九州)에서는 어떠한 추이(推移)였나! 하면, 가야족의 진출당시는 대가야(大伽倻) 미오사마국(彌烏邪馬國)의 세력이 북구주에 있고, 본가야 구사국(狗邪國)이 남쪽에 분포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본국의 가야제국의 맹주권(盟主權)이 서기42년 수로왕(首露王)이 등장 이래 구사국(狗邪國)에 옮겨 갔으나 반도에서의 힘이 증대하면 동시에 구주(九州)에 있는 구노국(狗奴國)도 세력을 증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본가야 구사국(狗邪國)이 세력이 증대하기 시작하자 대가야계(大伽倻系)는 그 주축(主軸)을 기내(畿內=근기(近畿)로 옮겨 갔던 것이다. 그 후 구노국(狗奴國)은 남쪽에서 점점 팽창해 갔다.
 
이리하여 백제의 남하에 따라서 미오사마국(彌烏邪馬國) 대가야(大伽倻)는 존망(存亡)에 처했어도 구사본국(狗邪本國)의 세력은 건재하고 구주(九州)라는 해협(海峽)을 끼어서도 거의 직할(直轄) 경영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가 구노국(狗奴國)은 구주전체를 자기 것으로 한다. 어찌 되었거나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 보는 사마대국(邪馬臺國)은 여국(女國)이고 구노국(狗奴國)은 남국(男國)으로서 양자(兩者)는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최초의 나라는 여국(女國)인 사마대국(邪馬臺國)이었고 이 나라는 여왕이 비(婢) 천(千)을 두고 파견한 대관(大官)이 있고 군국(郡國)을 감사(監査)하고 보고관(報告官)을 두어 보고를 받았으며 또 자사(刺史)와 같은 자가 항구(港口)에서 검사를 하게했다고 하고 있다.
 
남자는 1인만 음식을 나르는 자가 있어 출입하고 궁실(宮室) 루관(樓觀), 성책(城柵)을 엄하게 하고 거기에는 항상 사람이 있고 병졸들을 지키게 하였다고 하고 있다.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윤내현, 박선희, 하문식 공저 ‘고조선강역을 밝힌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백원, 김백룡 원저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高橋徹 古代の遠近法,. 猪俣幸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黃斌 ‘箕氏朝鮮史話’. 黃斌, 劉厚生 共著 ‘夫餘國’. 黃斌, ‘大遼國史話’. 사회과학원 조선고고학 총서 52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도 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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