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인정한 우리 고대사…광개토태왕비 조작한 일제

입력 2016-02-07 10: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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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일본사가(史家)의 역사왜곡 상상초월
 
우리나라 상고사는 세계 명문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나라의 역사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조상에 대하여 큰 죄를 짓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도 우리는 중국과 일본의 왜곡한 역사를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얼마 전 사단법인 구국실천연대의 이연우 대표가 보내온 글에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재미 한국인 학자가 쓴 “미국의 자발적 한국 상고사인정(Voluntary Recongnition of Korea Acient History in U, S, A)”이라는 글을 접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이홍범 교수는 “Asian Millenarinism(아시안 이상주의)” 책속에 이미 많은 미국의 역사학자들이 중국, 일본의 역사왜곡을 인정하고, 한국의 상고사가 1만 년 전, ‘깨달음 역사’, ‘인류 시원 역사’를 인정한다고 전했다.
 
이 책은 2007년에 하버드대학을 위시해 지금은 예일대학, 프린스턴대학, 펜실베니아대학, 스탠포드대학, 그리고 캐나다의 맥길대학, 이태리국립대학 등 세계로 퍼져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책속에는 중국과 일본이 고대 한국에서 갈라져 나와, 고대 한국의 도움으로 성장한 국가이고, 중국본토가 원래, 고대 한국의 영토이고, 중국 대부분의 나라는, 한국이 세운 국가이며, 종교도 유교, 불교, 도교, 모두 고대 한국 종교 천도교, 선교, 선도문화에서 파생됐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도 고대 한국인의 한 가지(枝)라고 언급했다. 이 책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하여 힐러리 미 민주당 대통령 후보도 정독했으며, 한국의 위대한 정신과 문화 역사에 감탄을 하고 한국 상고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함에도 우리 학계는 아직도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의 멍에에서 못 벗어나 우리나라의 역사를 그릇치고 상고사가 실종되고 있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부도 상, 고대사를 바로 세우는 데 아무런 손을 쓰지 않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은 일제가 역사왜곡에 어떻게 심혈을 기우렸는가를, 명치유신(明治維新) 전후의 상황과 관련해 그 실제 있었던 일들도 살펴보고 져 한다.
 
메이지 왕의 명령, 일본육군성이 역사왜곡 앞장
 
일본은 1853년 미 동인도함대사령관 페리가 일본에 내항(來航)해 ‘미일화친조약’에 관한 ‘통상조약’이 체결로 쇄국이 끝났다. 이 ‘조약’은 일본에 불리한 ‘불평등조약’이었다. 개국을 계기로 막부의 독재는 1867년에 끝나고 막부 세력은 전멸했다.
 
1867년 12월 막부를 폐지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권이 탄생은 왕정복고였다. 신정권은 봉건제도를 해체해서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출발점이 됐다. 이 개혁을 일본은 소위 ‘명치유신(明治維新)’이라고 한다.
 
메이지 정부는 ‘정한론(征韓論)’을 펴며 1875년 영국 상선을 군함으로 개조한 운양호가 조선영해를 침범해 강화도 부근에서 측량과 연습을 실행했다. 이에 강화도 우리 진지에서는 포격을 하였으나 신식대포를 탑재한 일본군함에 미치지 못했다.
 
그 결과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 조약은 일본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조선의 관세자주권’을 인정하지 않은 불평등조약이었다. 이를 계기로 부국강병을 내세운 일본은 노골적으로 정한론의 실천에 옮겼다.
 
한편 일본은 대륙침략을 하기위해 메이지 왕의 명령으로 일본육군성은 당시 육군 포병 소위였던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를 1880년 9월3일 청나라로 보내 3년1개월 동안 정보 수집과 아울러 역사유적 정보를 수집하게 했다.
 
정보수집의 첫 단계로 조선각지와 청국 및 시베리아 일대까지 군인밀정을 파견할 뿐만 아니라 조선 침략을 위하해 조선고대사까지 연구해온 1880년대의 ‘일본육군참모본부’에 있어서 고대에 조선 지배를 증명하는 뒷받침으로 자료가 필요했다.
 
이런 때 1883년 만주각지에 밀정으로 누볐던 사가와가 광개토태왕 비(廣開土太王 碑)를 발견하고 그 비문(碑文)을 탁본(拓本)해 일본에 가져간다. 그 탁본을 본 일본은 일본고대사를 상상을 초월하는 조작에 착수한다.
 
당시 사가와의 보고로 광개토태왕 비의 출현은 조선침략을 하려는 일본제국에 있어서 암야(暗夜)의 등대(燈臺)와 같이 비쳐지기도 한 것이었다.
 
일본육군성은 왜 역사조작에 앞장섰나!
 
광개토태왕 비가 일본에 주목을 받게 된 것은 8세기 초에 편집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사로부터 도출된 4세기 후반에 있어서 ‘조선출병과 조선남부의 경영설’을 뒷받침할 자료를 광개토태왕 비에서 왜곡조작해 이를 이용함에서다.
 
있지도 않은 일본의 ‘조선출병’과 조선남부의 ‘경영설’을 합리화 하기위해 사가와는 ‘광개토태왕 비’에 새겨진 글자를 깨트리고 회(灰)를 바르고 글자를 조작해 놓는 데 큰 공헌을 한 자이다.
 
그러기에 그는 1859년 3월14일 특지를 받아 종 6위로 진급한다. 그런데 그가 진급한 그 이튼 날 15일에 몰(沒)했다고 했다. 이것은 일제가 역사왜곡이 외부로 새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입을 막은 것으로 추정됐다.
 
왜 일본 군부는 광개토태왕 비에 변조에 관여하며 그렇게 관심을 가졌는가? 그리고 군부에서 군사문제와 별도로 그렇게 탁본한 비문의 연구해독에 힘을 기울였던 것은 왜일까?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
 
이는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해 완전한 식민지를 삼기위해 군인들까지 동원해 역사왜곡을 자행한 것이다. 그들은 침약야욕을 합리화하기 위해 철저히 그 준비를 우리 고대 역사에서부터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왜곡, 조작하기 위해서였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제19대 왕이다. 영락대왕(永樂大王)으로도 말해지는 대왕으로서 영토의 확대에 눈부신 활약을 했고 대륙을 종횡하며 고구려의 영역을 최대로 넓힌 대왕이며 38세의 젊은 나이로 영면한 위대한 태왕이다.
 
태왕이 사후 2년 후인 서기414년 식자(息子)인 장수왕(長壽王)이 그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태왕의 능 옆에 높이 6.3m의 비를 세워 4면에 1800여자의 비문을 조각해 넣었다. 여기의 비문을 일제는 뭉개고 회를 바르고 역사를 변조시킨 것이다.
 
이 비는 압록강 중류의 이전에 고구려의 도시였던 집안(輯安)에 현존하고 있다. 이 비가 일본에 주목하게 된 것은 지금부터 133년 전, 남만주 각지를 돌아다니며 밀정을 하던 사가와가 비를 발견하고 비문을 탁본해서 가져간 것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본다.
 
비문의 내용과 음모의 자료조작
 
그 비문 안에는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 羅以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利殘國]이라는 문구(文句)가 있기 때문이다.
 
이 문구의 일본은 변조해 “백잔(百殘-백제), 신라가 속민(屬民)으로 조공을 해 왔으며(由來朝貢), 이는 왜(倭)가 신묘(辛卯)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와 ○○, 신라를 격파(擊破)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로 조작한 것이다.
 
이렇게 읽으며 “以六年丙申” 이하 기사와 거리를 둠과 동시에 비문을 보면 왜를 야마토정권이 보낸 군대로 보며, 신묘년(辛卯年-서기391년)에는 이미 야마토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가서 백제와 ○○-(가야를 지칭한듯하다.), 신라를 격파하고 이를 지배했다고 되어 있다.
 
또 조작된 비문에는 경자년(庚子年 서기399년)에 왜가 신라성에 충만해 있던 임나가라(任那加羅)까지 추격해 야마토의 용병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식으로 조작하고 있다. 참으로 못 말리는 족속임에는 틀림이 없다.
 
즉, 안라인술병(安羅人戌兵)을 괴멸했다고 읽을 수 있는 곳이 있고, 더욱이 갑진년(甲辰年 서기404년) 조(條)는 평양 부근까지 왜군이 북상해서 격전을 전개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고 있지도 않은 사실을 대담하게 말하고 있다.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해 완전한 식민지로 넣기 위해 조선 각지는 물론 청국과 시베리아 일대까지 군인밀정을 파견할 뿐만 아니라 조선 고대사까지 연구하고 있던 명치 10년대의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저명한 한자 학자를 모이게 해서 비문의 해독과 해석을 하게 했다.
 
이후 6년 후인 1889년(명치22년) 6월 “회여록(會餘錄)” 제5집을 정리해서 출판함과 동시에 동년 제국대학인 도쿄대학에 국사과가 증설돼 “사학회잡지(史學會雜誌)”가 이 해에 창간되어서 일본 근대 사학을 출범시킨 해이다.
 
한편 이해(1889년)에 명치헌법(明治憲法)과 황실전범(皇室典範)이 공포되고 그 이듬해(1890년)에는 교육칙어가 발표됐다. 말하자면 군국주의 체제 만들기에 급속도로 진행된 시기다 이 때에 문제의 ‘회여록’을 출판했다.
 
광개토태왕 비문 나오자 어용학자들 왜곡역사서 출판
 
이런 때 ‘일본사’를 하는 간 마사도모(管 政友) 도쿄대 교수는 1891년 장문의 논문을 “사학회잡지”에 내고, 2년 후에는 ‘동양사’ 대가라는 나가 미찌요(那珂通世)가, 199년에는 고고학 의 미야게 요네기지(三宅米吉)가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이리하여 태왕의 비문은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사실로 조작돼 나왔다. 이나바 이와요시(稻葉岩吉)의 “조선사(朝鮮史)” 연구평론 역사교육 7권 9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후 4세기말~5세기 초에 걸쳐서 조일관계사의 역사는 일본 여명(黎明)의 근본자료라며 일본학계에 조작 발표해 조선역사를 왜곡시켰던 것이다. (이상은 李進熙 著 <好太王碑の謎’>.P18~20의 참고, 인용).
 
한편 “교토 대학 일본사Ⅰ”는 일본사의 허구를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문명인이 할 짓이 못되는 일이지만 일본은 야만적인 역사왜곡으로 허구의 역사를 거침없이 탄생시킨 것이다. 그들은 거침없이 역사조작을 자행한 것이 일본사이다.
 
그러나 4~5세기 일본의 실정을 고찰하면 일본의 역사가 얼마나 허구인 것이 자명함에도 일본은 허구의 역사조작을 멈추지 않고 그 조작 왜곡한 역사를 일본의 역사라고 하며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역사 그것도 고대사는 거의가 왜곡의 역사라 믿을 수 없는 역사라는 것이 세계석학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상, 고대사를 바로 세워 국가와 민족의 중흥을 역사에서 살길을 찾아야 국가 장래가 있음을 자각할 때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윤내현, 박선희, 하문식 공저 ‘고조선강역을 밝힌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高橋徹 古代の遠近法,. 猪俣幸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사회과학원 조선고고학 총서 52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이을형 필진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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