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일본의 역사 왜곡은 8세기부터다. 4세기 후반 야마토정권의 조선출병과 조선남부경영설은 8세기 처음으로 편집된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도출돼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서 이용되는 것이 광개토태왕 왕릉의 비문이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의 제19대 왕으로서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의 영토 확대에 맹렬히 활약한 왕이다. 호태왕(好太王)이라고도 불리는 이 왕은 국가영토를 가장 많이 넓힌 왕이었다. 그러나 38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崩御)했다.
광개토태왕이 붕어한지 2년 후인 서기 414년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어받은 왕자 장수왕(長壽王)은 부왕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부왕의 묘 옆에 높이 6.3m의 비를 세웠다. 그리고 비석 4면에 1775자(字)의 비문을 새겨 넣었다.
이 비는 압록강 중류에 있는 고구려의 도시인 집안(輯安)에 현존하고 있다. 이 비가 주목하게 된 것은 1883년 간첩으로 남만주 각지를 정탐하러 다니던 사고가게아끼(酒勾景信) 중위가 비문을 가지고 간 데서 시작된다.
그 비문 중에는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口口口羅以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口軍討利殘國”이라는 문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문구 중 일본 학계에서는 백잔(百殘)을 백제(百濟)라고 억지주장을 하면서 갑진년(甲辰年. 서기404년) 일본이 평양 부근까지 왜군이 북상해서 격전을 전개했다고 해석 할 수 있었다고 하고 있다. 왜 일본은 이런 거짓된 무리한 해석을 하는 것인가.
일본이 잘못되고 왜곡된 서술을 하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하여 완전한 식민지로 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한민족 역사의 뿌리를 잘라내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억지 해석은 앞뒤가 맞지 않는 허구일 뿐이다.
명치유신 이후 그들은 조선을 식민지로 하기 위해 조선 각지는 물론 청국과 시베리아 일대까지 군인밀정을 파견했다. 조선고대사까지 연구하고 있던 명치 10년대의 일본육군참모본부가 고대에 일본이 조선 지배를 증명하려는데 마침 광개토태왕의 비문의 출현하니 역사 왜곡을 하는데 암야(暗夜)의 등대로 비쳐졌던 것이다.
그들은 광개토태왕의 비문을 조작왜곡하기 위해 일본육군참모본부에 편집과를 두고 이 과가 중심으로 저명한 한학자로 하여금 비문의 해독, 해석을 하게 했다. 그리고 6년 후인 1889년(명치22년) 6월, 이를 ‘회여록(會餘錄)’이라 하고, 제 5집으로 편집해 책으로 출판하게 된다. 이것이 광개토태왕의 비문 왜곡의 발단이 된다.
같은 해 동경제국대학에는 국사과(國史科)를 증설하고 ‘사학회잡지(史學會雜誌)’가 이해에 창간한다. 그리고 이해에 명치헌법과 ‘황실전범(皇室典範)’도 공포하고 그 이듬해 ‘교육칙어(敎育勅語)’가 발표돼 침략적인 체제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시기에 문제의 ‘회여록’이 출판된 것이다.
오늘은 일본이 광개토태왕 비문을 훼손하고 비에 회를 바르고 글자를 훼손하고 새로운 글자를 새겨 넣고 그 뜻을 다르게 조작해 왜곡한 내용과 그들의 만행, 망언, 허구에 대해 규명하고 져 한다.
한국사에 백잔을 백제라고 기록은 한곳도 없다
일본은 광개토태왕 비문에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口口口羅以臣民”이라는 문구가 있는 것을 왜곡해 “신묘년(辛卯年)에 바다를 건너와서 百殘口口口羅를 격파해 신민(臣民)을 만들었다”고 내세운다.
그러나 일본은 그 당시 대륙에서나 대양에서 맹위를 떨치는 백제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백제가 자기들이 왜곡한 한반도를 전제로 하고 있으나 이 당시 백제는 중국대륙에 있었다. 앞뒤가 안 맞는다.
또 일본사가(史家)는 백잔(百殘)을 백제(百濟)로 해석하고 “口口口羅”를 신라라고 해석해 왜가 백제, 신라를 격파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한국의 식민사가 중에도 이를 그대로 받아 일본사가와 같은 해석하는 자가 있겠으나 이런 해석은 매우 잘못 된 것이다.
한국사 서책 어디에도 백제를 백잔이라고 칭한 예는 없다.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일본이 ‘일거에 신라 백제를 격파하여 신민을 삼았다’ 함도 논리에 맞지 않은 것이다. 백잔은 백제가 아니며 그런 능력도 없는 일본이었다.
그 당시 일본은 백제, 신라를 복속시킬만한 국력이나 체제가 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미 다 밝혀진 바와 같이 4~5세기 일본의 국내도 통일되지 못한 상태에서 무엇을 말하겠는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어불성설의 황당한 말을 진실인양 왜곡하고 있다.
더구나 갑진년(甲辰年. 서기404년), 고구려 평양 부근까지 왜군이 북상해서 격전을 전개했다고도 해석 할 수 있다고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이 어느 정도인지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광개토태왕이 왜를 칠 때의 수도는 지금 한반도의 평양도 아니다. 광개토태왕의 비문이 발견 된 시기는 청조시대(淸朝時代)인 1883년이다. 여기서 광개토태왕 비문에 나타난 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일본의 사학가 나가스카(中塚)도 “당시 일본은 통일이 완성되지 못했는데 대군을 보내었다함은 이해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와가타로(和歌森太郞) 교수는 “확실히 4세기에 일본정부가 군을 조선에 보내는 것은 용이 한 일이 아니다”고 했다. (日本每日新聞 1971, 8,9, 日本史の虛像と實像).
고대 일본의 국가 상황을 고찰하면 왜가 백제, 신라를 격파 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한 것임에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를 하기 위해 역사 왜곡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데서 무리한 역사 조작을 감행하고 있음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백잔은 한 부족의 이름이다
일본은 백잔을 백제라 하나 이는 잘못됐다. 전혀 맞지 않다. 이 비문에 백잔과 흥망을 같이한 과잔(科殘)이라는 부족이 있다. 백잔은 과잔과 같이 잔자(殘字)가 동일하고 과잔과 운명을 같이한 것을 보면, 과잔과 같이 잔자권(殘字圈)에 속하는 부족이다.
그리고 이 비문에 왜가 신라국경을 침략하다가 광개토태왕의 관군에 쫓기어 임나가라(任那加羅)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는 왜가 신라를 격파하지 못하고 임나가라를 점거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설령 배제 신라가 한반도 에 있었다고 가정해도 “口口口羅”는 임나가라이다. 임나가라는 지금의 낙동강 하류 김해 근처에 있었다. 임나가라와 연결 병칭되는 백잔도 낙동강 하류에 있는 부족이다. 광개토태왕이 백잔, 과잔을 정벌할 때에 수군(水軍)을 사용했다.
그 당시의 백제는 한산(漢山)에 수도를 정하고 북한산 청목진에 국방선을 설정했다. 즉 고구려가 백제를 침략키 위하여 남하하는 데는 큰 강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백제를 침략할 때에 육군을 사용하고, 또한 백제는 고구려를 방위 할 때에 북한산 청목진 등 산악을 이용했다. 만약 백잔이 백제라면 광개토태왕이 육군을 사용하고 수군을 사용치 아니 하였을 것이다.
고구려는 국가 영역이 대륙에 있기 때문에 전투는 해전보다 육지에서의 전투가 중심이다. 고구려는 해전보다 육전에 능했다. 대륙을 호령한 고구려가 백제를 정벌하는데 구태여 해전을 선호할 이유가 없다. 수군을 사용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관민이 합작한 자의적 자료를 조작한 것이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를 정벌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광개토태왕이 수군을 사용한 것을 보면 광개토태왕의 비문의 백잔은 백제가 아니고 분명히 낙동강 하류에 있는 무명의 부족을 정벌 한 것이다.
즉 임나가라와 같은 동일한 지방에 있음으로 임나가라와 연결해 격파했다고 한 것이다. 요컨대, 광개토태왕 비문은 왜가 신라의 변두리에 잠시 침입했다가 쫓기어 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광개토태왕의 비문이 세상에 알려지자 도쿄제국대학의 간 마사도모(管 政友) 교수는 장문의 논문을 ‘사학회잡지’에 기고해서 고구려가 백제를 정벌한 것인양 사실을 호도한다.
또 2년 후에는 동양사의 대가라는 나가 미찌요(那珂通世)가 글을 쓰고 1898년에는 고고학자라는 미야게 요네기찌(三宅美吉)가 두 편의 논문을 “고고학회잡지(考古學會雜誌)”에 발표한다. 즉 백잔을 백제라고 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이 비문은 일본 조야가 나서서 표적이 됐다. 그래서 조선침략을 해서 식민지를 하려는 간계가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이 일본은 1890년대부터 지금까지 4세기말~5세기 초에 걸쳐서 조일관계사의 근본자료로서 무한의 공헌을 해왔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稻葉岩吉[朝鮮史硏究評論]<歷史敎育>(七卷九號).
그러나 광개토태왕 비는 이 허위의 자의적인 자료조작에 의해서 제멋대로 조작하고 왜곡한 것이다. 이것을 허장성세로 자화자찬하나 이것은 모두 사실과는 다른 것이다. 고구려가 백제를 정벌한 것이 아니기에 서다.
그리고 일본은 8세기에 나온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도 4~5세기의 천황의 즉위나 사거 년(死去 年)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에도시대(江戶時代) 후반 이래 여기에 관해서도 여러 의견이 일본에서도 나올 정도이다.
때문에 일본의 고대사상(古代史上)의 기년(紀年)이 문제가 재연되고 있다. 그리해 지금도 ‘일본서기’의 대 조선관계의 기사와 ‘고사기’의 분주(分註), 천왕사거 년(死去 年)의 간지(干支)의 고증(考證)등이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다.
신공(神功)황후의 신라침공이며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에 관한 역사를 제대로 알았으면 한다. 신공황후의 신라침공도 기자조선도 위만조선도 역사 사실이 잘못 왜곡한 것을 받아들임은 연구부족에서 허황된 사실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조작은 모두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지화를 겨냥한 허구의 역사라는 것을 우리 온 국민이 제대로 알고 지금도 일본의 사주를 받는 사이비 좀비 족들이 이 땅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국민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바로세우기를 바라는데서 이 글을 쓰게 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윤내현, 박선희, 하문식 공저 ‘고조선강역을 밝힌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黃聖圭, 韓泰鎬 共著 ’近代日本政治文化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高橋徹 古代の遠近法,. 猪俣幸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사회과학원 조선고고학 총서 52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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