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인공노할 일제, 위대한 광개토태왕비 훼손·조작

입력 2016-03-27 12:07:22

원문 링크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호태왕 비에 석회 바르고 글자 새겨놓은 일본
 
압록강 중류 북안의 구도(舊都), 환도성지(丸都城址)에서 발견된 광개토태왕 비에 대해 일본은 한반도 진출을 나타내는 역사왜곡의 좋은 사료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왜가 신라 백제를 정복하고 고구려와 대립하며 싸웠다”고 조작했다.
 
즉 고대 조선 출병과 조선남부의 경영설을 세웠다. 신묘년(辛卯年), 서기 391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가서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고 북방의 고구려와도 싸웠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다 허구 임에도 일본의 역사왜곡은 조선침략을 위해 거침없이 행해졌다.
 
광개토태왕 비문과 ‘일본서기’의 신라정벌 등과 결부시켜서 도출된 것이라는 일본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 없는 조작된 것이다. 이에 관해서 우리의 연구는 어떠한가.
 
광개토태왕 비의 해석은 일본의 정설과는 현저하게 다르고 그 시각도 판이하게 정반대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광개토태왕 비의 연구가 어느 정도 인가 살펴 볼 필요를 느낀다.
 
이 비가 언제 발견 되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조선과 중국 일본 학자에 알려 졌는가 라는 매우 초보적인 것까지도 의론(議論)이 여러 가지로 나눠져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진실을 전해주고 있는가. 판단이 용이하지 않다. 태왕비는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에 휘말려 있다. 일본이 역사왜곡자료로 첫 손꼽히는 이 비에 관해서 우리는 어떻게 연구되고 있으며 그 자료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비의 탁본이 만들어진 연대나 촬영한 연대와 확실한 비문의 탁본, 사진을 기준으로 해서 각 자료에 만들어진 시기의 전후관계를 명확한 위치를 점하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각 연구자의 의론을 자료적으로 검토 할 필요가 있다. 이번 회는 이에 관해 비가 발견된 후의 상황과 조작에 대하여 살펴보고 져 한다.
 
비문발견 후 상황과 탁본에 대한 그 의문점과 진상
 
비문발견 후의 상황을 보면, 1880년 발견하고 그 2년 후 1882년 9월~12월간에 비면을 덮고 있었던 이끼와 덩굴을 불살라서 비문의 판독이 가능하게 된 점, 그러나 거친 불로 태워서 비표면의 각처가 벗겨져서 귀중한 비문이 다수 잃었던 점 등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탁본을 뜨기가 어려웠다. 이끼 등이 불살라진 다음 비면이 노출됐고 그 당시 현지에는 요절(凹凸)과 같이 매우 심히 울뚝 불뚝한 비면에 견딜 수 있는 대형의 종이와 양질의 먹, 솜씨가 좋은 탁본(拓本)을 뜰 탁공(拓工)이 없었다.
 
때문에 처음에는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엄지와 식지와 장가락으로 글자의 획 주위를 돌려가며 글자의 획과 자형(字形)을 그려내는 탁본)이 만들어진 점으로 보아 제대로 된 탁본을 뜰 수 없었다.
 
본격적인 탁본을 뜰 수 있었던 것은 발견 5년 후 1887년이 돼서다. 그런데 1899년인지 그 전년(前年) 가을경 비 전면에 회를 바르고 그 석회면 위에 원 비문과 다른 많은 비문이 일본의 의도적으로 글자를 새겨져 있는 사실도 분명하게 됐다.
 
광개토태왕의 비문이 어떻게 연구 됐는가를 주목해온 이진희 선생(명치대학 강사)은 연구과정에서 일어난 의문점을 하나하나 풀어나갔고 결국 “학문적 해결이 끝나 아무 문제도 없다”는 기존 결과를 깨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호태왕비 수수께끼 ‘好太王碑の謎’의 저자이기도 한 이 선생은 연구과정은 감추어진 비문의 연구에서 놀라운 의문의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호태왕 비가 교통이 불편한 산속 깊은데 있었기 때문에 학자가 직접 가서 연구하는 것이 어려웠다. 따라서 주로 쌍구가흑본에 의해서 연구해 왔다는 것이다.
 
거기서 현존하고 있는 비문의 탁본이나 사진을 비교검토해 보면 고고학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여러 의문이 나와서 어느 각도에서 연구해 봐도 벽에 부딪쳤다고 이진희 선생은 말하고 있다.
 
고고학이나 금석학(金石學)의 상식에서는 예전부터 명확히 판독 된 비문이 풍화작용이나 탁출회수(拓出回數)의 증가에 따라서 점차 불명확 하게 되는 것인데 호태왕비는 일본 육군참모첩자들에 의해서 조작됐기 때문에 그 전반대여서 어려운 점이다.
 
조작한 비문(碑文)에 의의제기(疑義提起)
 
당시 제국박물관(帝國博物館)의 감독관이었던 미야게 요네기치(三宅米吉)는 1898년에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라는 군인이 1884년(실제는 그 전년인 1883년)에 가져온 탁본을 연구해 ‘고려고비고(高麗古碑考)’를 썼다.(考古學會誌) 第2編 第1~3號).
 
그리고 얼마 없어 이를 정정(訂正)하는 논문 ‘고려고비고추가(高麗古碑考追加)’를 썼다(考古學會誌) 第2編 第5號). 그는 새로 쓴 이유로서 전 수호(數號)에 쓴 게재한 고려고비고는 사가와(酒匂景信)의 원납본(原납本)인, 현재 제국박물관에 진열한 것에 의해서만 고증하게 돼서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가와(酒匂景信)의 납본에는 반드시 자획(字劃) 및 위치가 다소 잘못돼 있다고 보았는데, 당시 일본에는 그자 외에 비교할 납본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고마쓰 미야 덴가(小松宮殿下)의 소장(所藏)한 별본(別本)을 볼 수 있어서 구 납본이 신 납본과 다른 것이 있음을 알고 이를 지적했다. 계속해서 청일전쟁 때 만들어진 ‘고마쓰 미야(小松 宮)’ 소장(所藏)의 탁본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신 납본은 달아 없어진 것이 많아서 “석면의 요철이 심하기 때문에 자형이 선명하지 않은 곳이 많아 매우 읽기 어려운 곳이 있어 매우 유감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비문조작(碑文造作)
 
그런데 그 9년 후의 1907년 4월 프랑스의 동양사학자 샤반느가 현지에서 입수한 탁본(拓本) ([通報]Ⅱ~Ⅸ, 1908年)은, 진흑(眞黑)의 자획이 명확한 문자가 탁출(拓出)돼 있다.
 
또 그로부터 6년 후 1913년에 세끼노 데이(關野 貞), 이마니시 류(今西 龍)가 조사 시 촬영한 사진에는 비면(碑面)에 종선(縱線)이 그어져 있어서 그 간의 비문이 정연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다. (朝鮮古蹟圖譜) 第)1卷 1915年과 1935年 寫眞 參照)
 
한국역사조작의 원흉(元兇)인 이마니시 류는 그 때의 조사에 따라서 이 20척(尺) 8촌(寸) 5분(分)의 높이가 있는 방주형(方柱形)의 거석(巨石)의 사면(四面)에 비명(碑銘)을 새겨 각행(各行) 41자(字) 결로 해서 선을 그었다.
 
각행 41자 결로해서 제1면에 11행(行), 제2면에 10행, 제3면은 14행, 제4면은 9행으로 괘선(罫線)으 그어서 각행을 구획(區劃)해 상하의 양단(兩端)에 횡선(橫線)을 그었다고 쓰고 있다.([廣開土境好太王陵碑に就て] [(朝鮮古史の硏究)].
 
한편 1935년 집안을 실지 조사한 이케우치 히로시는 “사면의 상부와 하부에는 횡선이 있어서 명문의 천지(天地)를 그리고…명문의 각행을 그리기위해서는 약 5촌(寸)의 간격을 둔 종선이 여러 계선(界線)을 연거푸 그어져 있다”고 했다.([廣開土王碑發見の由來と碑石の現狀], [史學雜誌)第49編 第1號).
 
그런데 고마쓰 미야(小松宮) 탁본(拓本)에 보아지는 바의 비면(碑面)은 요절이 매우 불선명한 비문이 많았는데 후에 탁본에는 전보다 더 선명하게 예외 없이 글자가 명확한 비문이 탁출돼 있다.
 
즉, 1913년과 1935년 촬영한 사진이 말해주듯 광개토태왕의 비문은 더 선명해지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는 고고학이나 금석학(金石學)의 상식으로는 생각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조작한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본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인가. 광개토태왕 비문에 관해서는 4~5세기의 역사를 조립하는 위에서 근본자료로서 지금까지 많은 논문이 쓰여 지고 있는데 그것은 있지도 않은 허구의 ‘조선출병’을 일본은 역사교육을 통해 국민적 상식이 되게 했다.
 
그런데 일본은 잘못된 기본 자료에 대한 비판이나 시정은 하지 않고 은폐하고 조작하고 왜곡된 역사를 번듯하게 만들어 열등의식을 불식하고 우리 역사를 폄하하며 배제하는 수법을 쓰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8세기 이후 더욱 노골화 됐다.
 
거기서 호태왕의 비는 역사왜곡에 가믐에 단비를 만난 것으로 변조조작 왜곡에 전력을 경주(傾注)한 것이다. 따라서 그 조작은 시기가 내려가면 갈수록 전에 없었던 종선(縱線)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이 비를 조작한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시기가 지남에 따라서 비문이 현저히 달라지는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도 그 원인을 찾고 그들의 조작을 밝히기 위해서는 촬영연도와 탁출년(拓出年)을 확실한 것을 기준으로 해서 자료의 편년(編年)을 바로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마디로 편년작업이라 하지만 자료가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본이 갖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도 용이하지 않다. 때문에 일본이 조작한 종선(縱線)을 그은 것을 밝힐 수도 어렵다. 그래서 일본은 역사왜곡이 더 과감하게 감행해 갔다.
 
비문조작은 비 전면에 회를 바르고 멋대로 했다
 
이 광개토태왕비에 대하여 한국인으로 가장 앞장선 사람이 이진희 선생인데 그는 그의 저서 ‘好太王碑の謎’에서 그 사실들을 많이 밝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가와의 원납본 외에 교토 대학의 히비노 다케오(日比野丈夫) 교수는 나이토 고난의 구장(舊藏)의 탁본(拓本)과 사진 등을 보고 있는데 그 내력을 전해주고 있다.
 
나이토(內藤湖南)는 1906년 5월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간도문제의 역사적 조사를 의뢰받아 그해 여름 서울과 심양(瀋陽)에 가서 문헌조사(文獻調査)를 했다.
 
나이토 사진은 1909년((明治42年) 10월부(付)의 교토 우편국 소인(消印)이 있는 봉투에 탁본과 같이 들어 있어서 , 통감부 간도임시파출소(統監府 間道臨時派出所)의 시노다 지사쿠(蓧田治策)으로부터 보내진 것이 확인됐다.
 
1907년 8월, 통감부의 지령으로서 젊은 군인 등이 간도에 들이닥쳐 간도의 남반분(南半分)을 실질상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일본외무성은 현지지세의 급변을 봐서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우선 ‘간도를 식민지화’하는 가치가 있는가, 아닌가를 확인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 임무를 나이토에게 맡긴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三田村泰助 [內藤湖南] 中公新書 參照). 나이토는 그 이듬해인 1908년 여름 간도 각지의 실지조사를 해서 그때 용정(龍井)마을의 통감부임시파출소 소장 사이토(齊藤季治郞) 육군대좌 시노다 지사쿠(蓧田治策)와, 남야준성(楠野俊成) 두 사무관과 만나고 있다.
 
시노다 지사쿠(蓧田治策)가 이틈 해 광개태왕능비(陵碑)의 탁본과 사진을 나이토에게 보낸 것은 이 때 나이토로부터 자료수집의 의뢰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나이토 사진에서 보는 비 조작과 은폐
 
나이토 사진을 보면 사면에 비문이 있는 곳에는 석회가 두텁게 바르고 문제의 종선이 지워져 있다. 그래서 그 위에 석회를 바른 그들은 제멋대로 비를 변조한 새 비문을 새겨 놓은 것이다. 즉 글자를 변조 한 것이다.
 
여기서 석회를 두텁게 바른 것에 대하여 1913년 비를 자세하게 조사한 이마니슈 류는 이미 비4면 전면에 석회를 바르고 자형만을 나타나게 하여 자외(字外)의 면에는 소 요절을 메워서 평평하게 했음을 확인하고 있다.
 
이는 이마니슈 류가 그의 논문에 이 회를 두텁게 바른 것은 탁공이 한 것이라고 쓰고 있으나 전면에 석회를 덥고 있는 사실에 관해서 간파(看破)하고 있는 것이다.([廣開土境好太王陵碑に就て] [(朝鮮古史の硏究) (參照)].
 
한편 이마니슈 류가 조사 5년 후 1918년에 비를 조사한 도쿄제대(東京帝大)교수인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는 탁본을 선명히 하기위해서 의미가 의문시 되는 문자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고 궤변을 토하고 있다. [(歷史地理)] 第32卷第5號)].
 
일본은 회를 바를 필요도 없는 비에 회를 바르고 또 평평하게 한 것은 그들의 의도대로 역사왜곡의 목적이 있기에서다. 이는 어떤 변명으로도 답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은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윤내현, 박선희, 하문식 공저 ‘고조선강역을 밝힌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黃聖圭,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詳說日本史,‘ 猪俣幸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사회과학원 조선고고학 총서 52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이을형 필진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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