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필자가 일본유학 시절 만난 재일사학자인 장효(張曉) 선생은 한국의 문화는 ‘붓의 문화’이고 일본의 문화는 ‘칼의 문화라 했다. 고대 가야가 일본을 지배할 때는 가야도 힘을 내세운 칼의 문화였다. 그리나 당시 가야는 철을 주로 생산했고 특히, 칼은 유명했다.
(일본은) 당시 쇠(鐵)와 농산물이 풍부한 ‘가야국’에 자주 와서 교역을 하던 왜국에 가야가 진출해 그곳에 미마나(任那)라는 작은 분국(分國)을 만들고 그들과 연맹해 가야를 압박하는 서쪽의 백제와 동쪽의 신라에 대항한 나라가 바로 가야였다.
이러한 가야가 일본에 분국을 둔 후부터 신라와도 맞섰다. 이에 가야와 왜에 시달리던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청했다. 이 구원요청에 응한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서기 399년 가야를 치고 바다를 건너가서 왜를 치고 함락시켰던 것이 당시 조일역사이다.
이후 명치유신 이후 명치왕의 명령으로 일본밀정인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로 하여금 광개토태왕의 비를 깨트려 비에 새겨진 글자를 깨트리게 했다. 1898년 또는 1899년 비 전면에 회를 바르고 그 석회면 위에 원문의 비문과 다른 많은 비문이 조작된 사실이 밝혀졌다.
일본은 비를 조작하고 군부에 탁본비문의 연구, 해독(解讀)에 힘을 기우렸다. 동시에 한국침략을 감행한 일본조선총독부는 우리의 역사자료 22만여 권을 약탈하고 없앴다.
이것도 모자라 대마도 종가(宗家)에 전래되는 사서도 몰수하여 일본 궁내성문고(宮內省文庫)안에 감춰 버렸다. 더 지독한 것은 한국인들이 대대로 소장해온 역사책들을 관청의 관리를 동원해 빌리는 형식으로 모아들여 불태워 버렸다.
그러고 나서 총독부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고 교토제국대학의 이마니슈 류(今西 龍)를 중심으로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역사를 잘라버리고 역사를 왜곡 변조시켰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명치유신 이래 일본이 대한(對韓) 침략사관과 역사왜곡은 너무나도 비사실적이고 그 정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대도 지금 우리나라 역사교재는 여전히 이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어용학자들을 내세워 거짓 조선역사를 만들기 위한 비틀어진 학설을 주장했다. 이 학설만을 신주 모시듯 하는 식민사학자는 왜곡역사만을 믿고 제나라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
이들 식민사관에 졸고 있는 자들은 포섭된 식민주의적 한국인이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이런 매국노와 진배없는 이들로 인해 한국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이번 회는 일본의 호태왕비 조작경위 전의 상황의 사실에 대해 살펴보고 져 한다.
누가 비에 석회 바르고 무엇 때문 비문에 거짓글자를 새겨 놓았나!
일본이 무엇 때문에 광개토태왕비에 석회를 바르고 비문을 재현한 것인지, 이러한 중대한 사실이 어찌해서 오늘날 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몰랐던 것인지, 또 석회를 바른 시기가 러일전쟁 이전 어느 때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중국의 문헌을 보면 양수경(楊守敬)이라는 사람이 1902년 북경의 우인(友人)에게 부탁해 청일전쟁(1894~95년)경의 것이라고 말해지는 탁본을 구입했으나 그것은 문자가 하나같이 불분명 한 것이었다.
그 후 옛 친구로부터 초기탁본이라고 말해지는 것이 보내왔는데 그것은 글자가 없는 결자(缺字)의 곳도 있으나 남아 있는 자획(字劃)이 명확하게 잘 나타나 있어서 앞서 입수한 것과는 크게 달라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획이 명확한 탁본은 환우정석도(寰宇貞石圖 1909년)에 게재(揭載)돼 있는데 그것은 전면(全面)에 석회를 바른 후의 탁본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 전면에 석회가 발라져 ‘비문’이 조작한 것은 양수경이 자획이 명확하게 입수한 해로부터 추론컨대 1902년 이전이라는 것이 된다.
한편 일본학자가 비문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회여록(會餘錄)’이 출판된 1889년에 북경 유리창(琉璃廠) 석공(石工) 이운종(李雲從)이 현지에 가서 탁본을 뜨고 돌아온 후였다. 그 탁본은 불명확한 개소(個所)가 많았었다.
또 5년 후의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취해서 돌아온 고마쓰 미야(小松宮) 탁본은 이미 지적한바와 같이 석면 요절이 심하기 때문에 자형(字形)이 선명하지 못해 읽기 어려운 곳이 많았다.
그런데 미야게 요네기치(三宅米吉)가 이 탁본에 의해서 논문을 쓴 것은 1898년이었다. 이렇게 해서 비전면에 석회를 바른 시기는 청일, 러일전쟁의 중간에 해당하는 1900년 전후로 추측할 수가 있다.
잘못된 역사관을 시도한 일본의 음흉한 음모
일본이 광개토태왕의 비문 조작사건의 결과 지금까지 4~5세기의 일본고대사나 조일관계사(朝日關係史)를 논하는 위에서 근본자료로서 이용해온 호태왕비문의 탁본은 원 비문으로부터 뜬 탁본이 아니라 석회면면의 위에 새겨놓은 비문으로부터 뜬 탁본이다.
이 잘못된 비문을 ‘의심할 여지없이 조선 측의 금석자료’로 믿어온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전후 일본의 고대사 연구는 과학적인 자료조작과 달리 잘못된 역사관을 바로잡기 씻기 위해 시도(試圖)한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이미 살펴 본바와 같이 근본자료인 광개토태왕능의 비문에 관해서는 어떠한 검토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잘못된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 측에서는 제대로 된 고증은 하나도 제대로 나와 있지 않다.
석회 바른 후의 비문과 원비문간에는 어느 정도 잘못이 있는가! 누가무엇 때문에 석회를 바르고 비문을 새겨놓은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지금도 해답이 나와 있지 않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비가 언제 발견됐으며 발견시의 비면은 어떠한 상태로서 언제 어떠한 이유로서 요절(凹凸)이 말할 수 없이 비면이 바꿔져 있으며 더욱이 석회를 바른 것이 어떠한 문제로 부터 나왔는지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말도 되지 않은 조작을 하는 일본이지만 일본역사를 조작하며 광개토태왕비를 왜곡한 것은 무모한 짓이다. 일본이 4~5세기의 상황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보면 자명해진다.
이를 제대로 아는 길은 가야가 일본에 가서 일본을 변화시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의4~5세기는 석기시대와 같은 삶을 하고 국가가 통일되지도 않은 미약한 수준에서 일본이 백제, 신라, 고구려를 정벌하고 지배했다는 것은 당치도 않다.
국력으로나 모든 수준이 우리보다 미진한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다함은 만화와 같은 이야기이다. 분명한 사실은 고대한민족 중 먼저 일본을 지배한 것은 바로 가야였다.
일본은 그 가야를 미마나 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곳에 있었다고 우리 역사를 뒤집어 놓으려고 획책하고 있으나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
가야국 유력자들이 왜의 땅에 일본국을 건설 통치했다
이미 살펴 본대로 ‘가야’는 신라보다 100년 뒤늦게 고조선제후국인 한(韓)의 지배를 받던 변한(弁韓)지역에 세워진 나라였고 임나(任那)는 우리 한민족인 가야가 왜 땅에 건설한 식민지임에 변함이 없다. 그들은 1000년부터 우수했으나 우리의 지배를 받았다.
일본인들은 가야를 마마나(任那)라고 부르나, 옛적 가야인이 규슈(九州)등에 만든 가야의 식민지 미마나(任那)와 혼동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생각과는 180도 다르다.
우리는 그들에게 끝까지 은혜를 베풀었으나 그들은 유민의 한(恨)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은 아직도 신라와 가야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가야가 신라에 병합했기 때문에 가야와 신라를 같은 나라(가야=신라)로 잘못알고 있다. 이러한 한일 간의 역사 인식은 문제이다. 가야는 고대일본을 통치했다.
그들은 일본이라는 나라도 나라이름도 생기기 전인 4세기부터 6세기 사이에 소위 ‘임나 일본부’라는 것을 한반도에 설치하고 가야를 지배하고 신라, 백제, 고구려까지 정벌하고 지배했다는 주장은 거론의 가치조차 없는 가소로운 허구일 뿐이다.
그 당시의 왜의 문화수준은 구석기시대인 야요이(彌生)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물론 중앙집권화 된 통치능력도 없었던 것은 역사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일본도 도쿄대학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교수가 ‘기마민족설’을 말 한 대로 가야가 일본을 변화시킨 ‘기마민족’인 것임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일본은 역사왜곡을 위해 이를 외면할 뿐이다.
그러나 후에 가야의 국가형세가 변해 532년 신라가 금관가야를 병합하고 또 백제가 가야의 영토를 쳐서 빼앗았다. 우리나라 3대 명장군의 한분인 김유신 장군도 금과가야의 마지막 왕의 자손이었다.
세력이 약해진 가야는 명맥을 유지하다가 562년 ‘대가야’마저 신라에 병합됨으로서 6가야가 아주 멸망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가야의 유민들이 일본열도에 건너가서 일본에 많은 영향을 줬고 백제와 더불어 많은 사람이 건너가서 분국을 세웠다.
일본에 건너간 유민들은 활발한 문화전수를 행하여 일본에 가야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것이다. 어찌하여 지금까지도 일본 땅에 ‘가야’란 이름이 그렇게 많은가!
지금도 일본에는 가야라는 지명이 수 없이 많음은 가야가 기마민족으로 일본에 건너가 그들을 통치하고 재배한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광개토태왕비 발견당시의 집안(輯安)과 당시 정황
구석기시대를 면치 못한 일본이 신라 백제 고구려까지 지배한 양 어불성설의 말을 하나, 고구려의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왜가 서기 훨씬 전인 기원 전 1세기반경부터 668년에 왕조가 넘어지기까지 700여년 존속한 초강국이었다.
고구려의 최강한 때의 영역은 최소한으로 말해도 요하이동(遼河以東)으로부터 한반도 한강 하류역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 기초를 구축한 것이 광개토태왕과 그 다음의 장수왕(長壽王)이 군림한 4세기 말부터 5세기 말인 100년간이다.
이때 일본이 고구려와도 쟁투를 하였다니 한심한 사람들이다. 더구나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두에는 수차에 걸친 수(隨) 당(唐)의 침략군을 물리치고 동양의 제패자(制覇者)였다. 일본역사는 고대사, 근대사 할 것 없이 파렴치한 위조를 감행한 역사이다.
수나라가 멸망한 것은 고구려를 침범하였다가 백만이 넘는 군대가 2000여명만 살아가는 전멸되다시피 한데서였음은 세계전쟁사가 말하여 주고 있는 사실이다.
한편 광개토탱왕의 비가 있는 집안은 장수왕이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까지의 200여년 간 고구려의 수도로서 번창했다. 여기에는 도성지(都城址)를 비롯해 산성(山城), 대단히 많은 고분(古墳)이 남겨져 있다.
70년대 초 일본에서 발견된 다카마스 쓰가(高松塚) 벽화의 고분이 발견 후 주목된 무용총(舞踊塚)은 집안에 현존하고 있다. 집안은 668년에 고구려 왕조가 멸망 후 폐허화(廢墟化)해 1880년 광개토태왕 비가 발견 될 때 까지 그곳이 고구려의 수도인 것도 잊고 있었다.
그것은 고구려 왕조의 멸망 후 이 지방이 조선 영역 외에 있었던 것이 되어있는 점과 특히 17세기 이후 소위 봉금제(封禁制)가 시행되었기 때문에 조선의 금석학자가 그곳까지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왕조가 멸망한 7세기 후반이후 압록강 이남의 영역은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 그 이북은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지배에 들어간다. 발해는 여기에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 하의 4주(州)의 하나로서 환주(桓州)를 두었다.
925년 발해의 멸망 후 이 방면을 지배한 요(遼)도 녹주(淥州)를 집안에 뒀다. 이후 요(遼)가 멸망하는 1125년까지는 집안은 고구려 구도(舊都)의 하나라는 것이 알려지고 있었다. 이곳에 일본정탐꾼인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대륙침략야욕에서 집안을 정탐하면서 비를 발견하여 변조한 것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은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윤내현, 박선희, 하문식 공저 ‘고조선강역을 밝힌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黃聖圭,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詳說日本史,‘ 猪俣幸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사회과학원 조선고고학 총서 52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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