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일본은 자기들 역사의 빈약하고 열등함을 극복하는 길은 우리 한국사를 훼손해 그 자리에 일본 역사를 끼어 놓는 수법을 택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파렴치한 짓을 전전(戰前)과 전후(戰後)에도 멈추지 않고 있다.
역사를 제멋대로 조작하고 왜곡하는 그들은 일본국 성립이 자생적으로 생성되고 일본국과 일본왕가도 자생왕조라고 말하고 있으나 일본왕조 발생은 일본열도에서 자생한 것이 아니고 한국에서 건너갔다. 즉 한국유민이 세운 나라가 일본이다.
분명한 것은 단군 이래 한국이 일본왕조의 발상지이고 실크로드라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를 ‘상가야 왕조사’라고 지칭하며 한국고대사와 일본역사의 접점을 찾는 중요자료로 ‘환단고기’가 덧붙여져 일본서는 이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본은 자기들의 역사를 말할 때 ‘고사기’, ‘일본서기’를 내세우나 이 ‘고사기’와 ‘일본서기’도 성덕태자(聖德太子)가 손본 것이 본(本)이 됐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건너간 유민이 일본의 호족이 돼 이 호족들 역사가 합해져 ‘고사기’ ‘일본서기’가 됐다.
일본은 역사에 관한 한 처음부터 그 출발이 그 인물 연대 등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지금 일본왕가의 계보(系譜)와 계도(系圖)도 제멋대로 위조되고 있는 것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 일본은 원래 외래문화민족이었다.
그러던 그들이 일본인 고유의 민족으로서 형성된 것은 세계사적으로 보면 거의 근대사에 속하는 시대였다. 즉 7세기에 와서 야마토(大和)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일 간의 민족은 확실히 외국인 관계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국가성립과 문화도 그들의 소위 도래인(渡來人)이라는 우리 유민에 의해서 왕조(王朝)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우리 유민에 의해 문화발전도 한 것은 제 아무리 일본이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712년에 나온 ‘고사기’는 한일공유(韓日共有)의 비사(秘史)로 암호화해서 전승돼 왔다. 너무나 기괴한 환시적(幻視的) 수법을 쓰고 있기 때문에 ‘텐무(天武 673~686년) ’이후의 황손(皇孫)에 전해지는 책이다.
그러나 인황(人皇) 1대로부터 10대까지의 황통(皇統)이 중복해서 쓰여 진 것을 아직도 일본인 자신들도 모르고 있다고 일본역사 학자들이 말하고 있을 정도다.
한편 일본왕가의 창고 같이 여기는 ‘고사기’가 한국과의 역사의 결별인양 말하는 작자도 있으나 그 ‘고사기’의 내용인즉 바로 우리의 역사기록이 대부분이다.
이 ‘고사기’는 텐무왕(673~686년)의 명령으로서 성별을 알 수 없는 히에다 노아레(稗田阿禮)가 송습(誦習)한 전승(傳承)을 안만려(安萬呂)가 712년 찬록(撰錄)한 3권을 말한다.
즉 신대(神代)로부터 스이코(推古 593~628년)까지의 황실계보와 역대천황의 설화(說話)가 기술돼있는데 5~6세기경의 제기(帝紀) 구사(舊辭)가 개작(改作)돼서 편집된 것이다. 그 문체(文体)는 한자 음훈(音訓)을 혼용해서 고어(古語) 그대로 기록돼 있다.
‘일본서기’ 역시 ‘백제사서’를 참고해 우리역사를 베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고사기’ ‘일본서기’ 등 국가체제 확립에 대응하는 국가적 문화사업으로서 천황중심의 정치의식이 크게 세워지는 나라다. 광개토태왕 비 조작도 그 일환으로 된 것이다.
일본은 가야(伽倻)가 일본에 가서 일본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도 감추려 하는데 역사의 진실은 감출 수 없다. 가야는 뒤져있는 일본의 농업을 비롯해서 각기 기술을 가진 자가 일본에 가서 청동기와 철 등 대륙의 문물 문화를 일본에 전수했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기술(記述)은 다 아는 바와 같이 ‘승리는 과장하고 패배는 고쳐서 개서(改書)하고, 망명은 서술(敍述)하지 않는다’는 수법이 역사를 작성하는 기본원칙이었기에 일본역사는 이래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즐기는 일본 스모(씨름)도 노미스쿠네 라는 가야인이 전해줬다. 일본에서는 이 노미스쿠네를 스모의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 스모도 일본고유의 전해오는 일본의 씨름이라 하나 이 ‘스모’도 우리가 전해준 것이다.
오늘은 광개토태왕의 비문조작을 둘러싼 연관관계에서 고구려 수도였던 집안(輯安)의 역사와 일본에 의한 비문변조 왜곡상황에 대한 논점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집안은 고구려의 황성, 황성평이었다
집안은 고구려의 옛 도읍지의 하나이다. 고구려는 수도를 8번이나 옮겼다. 그러나 나라를 잃으면 도성이름도 잃는 것인가! 집안은 고구려의 수도 중의 하나였으나 우리는 이마저도 모르며 다 잊고 살아 왔다.
더욱이 고구려가 멸망한 후 이민족이 집안을 지배하게 되자 아예 고구려와는 무관 한 것 같이 됐다. 그것은 동북지방에서 새로 등장해 이 지역을 지배한 금과 원 대에 와서도 우리와는 관계없는 양 모르고 살아왔던 것이다.
이같이 모르고 지내온 것은 우리 측의 문헌은 물론 중국 측에서도 집안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집안이 조선의 문헌에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은 조선의 국방상, 압록강 대안(對岸)의 움직임이 주목되기 시작한 14세기 후반에 들어 와서이다.
즉 고려는 북방으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1361년 강계(江界)에 독노만호(禿魯萬戶)를 뒀으나 그 9년 후 인 1370년 북방의 여진족을 치기 위해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북원(北元)의 동녕부(東寧府)를 치고 있다.
이때 이성계 장군은 집안을 통과하고 있는데 15세기에 편집된 ‘고려사’에는 그 곳을 황성(皇城)이라고 쓰고 ‘조선왕조실록’에는 ‘황성’은 여진(女眞)의 ‘황제성(皇帝城)’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집안을 망각하고 있었다.
광개토태왕비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문헌은 1445년에 편집돼 그 2년 후 주(註)를 붙여 완성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다. 여기에 보면, 집안은 속전(俗傳)으로서 ‘대금성황제(大金城皇帝)’ 라고 말하는 고성지(古城址)가 있어 그 북방 7리(里)의 곳에 비도 북방에 석릉(石陵) 2기(基)가 있다고 쓰여 있다.
여기서 기술 내용이나 이정(里程)이 정확한 것을 봐서 이것은 실제의 견문에 따른 기술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광개토태왕릉비를 실제로 안 봤기 때문에 고성지가 금의 ‘황제성’이라하는 속전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때 이미 비가 이끼와 덩굴에 덮여져 비문판독이 할 수 없는 상태가 돼 있기 때문이다. 명(明)나라 문헌에는 ‘황성’이 ‘제도(帝都)’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를 피해 음이 상통하는 황성(黃城)으로 맞춰 놓았다.(高麗史 辛口 5年條).
15세기 중엽 이후 여진족이 때때로 조선 북방 국경지대를 침범하게 되자 침입의 거점에 이용되는 집안 동정에 주의를 끌게 되어 그 문헌이 글로 남아 있으나 집안을 황성, 황성평으로 돼 있다.
‘용비어천가’ 보다 41년 후의 1486년에 편집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집안을 황성평으로, 장군총을 황제묘로 설명 하고 있다. 1487년에 국경지대를 시찰한 성현(成俔)의 시(詩) ‘망황성교(望皇城郊)’에는 광개토태왕비에 관한 묘사가 있으나 거기에도 ‘한불독자(恨不讀字)’로 돼 있다.
역시 이끼와 넝쿨 때문에 비문이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성현보다 50년 후의 1536년 2월, 집안 주변의 스며든 여진족에 대해서 압록강 반(畔)으로부터 퇴거하게끔 한 유고(諭告)한 심언광(沈彦光)도 시를 써서 남겼다. 그는 “황제유분 거갈비존(皇帝遺墳巨碣(碑)存)”이라고 거비(巨碑)가 있다고만 말하고 있다.
더욱이 심언광보다 60년 후의 1595년, 청의 태조 누루하치(奴兒哈赤)를 찾아가 그들과 통호(通好) 요청에 답하는 한편, 그 동정을 살피고 돌아온 신충일(申忠一)은 그 때의 견문을 기록한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을 남겼다.
이 도기에는 조선 만포진(滿浦鎭)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집안을 거쳐서 누루하치의 거성(居城) 흥경노성(興京老城)에 이르기까지의 형세와 요해(要害), 주요지명의 이정 및 크고 작은 50에 이르는 여진부락이며, 그 추장의 이름 등을 옆의 지도에 자세히 기록했다.
누루하치의 본영도에서도 확인
한편 누루하치의 본영도(本營圖)에는 97항목에 걸친 견문사항이 기록하고 있다. 집안 부근에의 관찰은 매우 정확해 “황성(皇城=통구성通溝城)을 좌우로 보면서 거시항고개(巨柴項古介=고개의 뜻) 길을 건너가면 왼쪽에 비가 보이고 더 나가 오른 쪽에 황제묘(皇帝墓=장군총將軍塚)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비 가까이 있는 대왕능(大王陵)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그 때 이미 대왕능이 붕괴해서 오늘 보는 것과 같은 석괴(石塊)산이 돼 있기 때문이 아닌가 보고 있다. 장군총은 우리 대왕이 묻힌 곳으로 보고 있다.
이상과 같이 보면 조선에서는 북원(北元)이나 명(明)과의 관계, 15세기 중엽이후는 여진족의 국경 침범과 관련해 그들의 침입로에 해당하는 집안 지방의 동정이 국방상 매우 중시됐다.
때문에 자세한 조사, 관찰이 행해져서 그때마다 기록이나 변방의 지도가 작성됐다. 이러한 기록에는 예외 없이 ‘장군총’이나, 광개토태왕릉 비의 기록이 기재돼 있음에도 그것들을 다 금(金)의 ‘황성’ ‘황제묘’라고 돼 있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비가 여전히 이끼와 넝쿨로 덮여 져 있어서 비문판독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곳이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것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진 각 부족을 연합한 누루하치는 1627년과 1636년 두 차례에 걸쳐서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범했다. 그러나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용감한 반격을 맞아 패퇴를 거듭한다.
그 결과 청의 지배계급은 조선에의 침략을 더 할 수 없어 1637년 조선과 청국 간에 소위 봉금제(封禁制)를 하기로 결정해 시행하게 된다. 그것은 압록강 대안의 청국 측에 광대한 무인(無人)지대를 둬 사람들의 거주는 물론 간전(墾田)도 금지해 위반자는 사형을 포함한 엄벌로 처치했다.
여기서 집안 지방이 ‘봉금지대’에 들어간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그 때문에 광개토태왕비의 발견은 더욱 늦어진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일본의 간첩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에 의한 발견으로 훼손과 마멸 회를 바르고 비문조각을 새겨 놓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조선이 늦어진 비 발견과 고증이 왜 이뤄지지 않았나? 그 이유
조선은 17세기 후반 경부터 조선에서는 실학사상이 발생과 함께 조선의 역사 지리의 실증적 연구가 성해 각지의 금석자료의 수집이 행해졌다. 그러나 봉금제 때문에 금석학자(金石學者)는 집안까지는 가지 못했다.
따라서 광개토태왕릉 비와 집안의 고적(古蹟)에 대한 종래의 잘못된 지식을 고칠 기회가 없었다. 18세기의 고명한 금석학자 김재노(金在魯)가 편집한 ‘금석록(金石錄)’에 광개토태왕릉 비에 관한 것이 빠져 있다.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 정다산(丁茶山-1762~1836년)이 환도성(丸都城) 등의 고구려의 지명 고증 속에 집안의 고적과 결부시키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중국인 간에서 장군총을 송(宋)의 휘종(徽宗)의 묘(墓)라고 하는 말이 흘린다든가 조선지도에 통구성(通溝城)이 오국성(五國城)이 됐다고 하는 것도 집안의 유적에 관해서 바른 판단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뛰어난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는 전국을 구석구석을 답사해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들고 그 속의 ‘변방고(邊方考)’에는 국경지대의 방위시설에 관해서 자세히 말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대안의 만포(滿浦)나 벌등진(伐登鎭)까지 가고 있으나 집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또한 ‘대동여지도’에는 ‘황묘’와 ‘황성’을 말한데 끝이고 비의 존재를 말하고 있지 않다.
조선금석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것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이다. 그는 금석문을 문헌사료의 보족자료로 보고 몸소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의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성비와 황초영비(黃草嶺碑)의 연구는 특히 유명하다.
그러나 그도 광개토태왕릉비의 존재에 관해서는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뿐만 아니라 이것은 도광연간(道光年間. 1821~50년)에 수록된 유희해(劉喜海)의 ‘해동(海東金石苑)’은 김정희와 그의 친구 조인영(趙寅永) 등의 힘을 빌어서 수집한 자료에 의한 것이나 그 속에 광개토태왕릉 비문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유희해의 제자이고 청말 고관으로서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반조음(潘祖蔭)도 많은 조선 금석학자와 교유(交遊)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885년에 이홍예(李鴻裔)라는 중국인 학자로부터 광개토태왕릉 비의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을 받을 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보고 조선 고문헌에 보는 바와 같이 비의 존재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으나 비문이 판독을 할 수 없는 상태 때문에 집안을 금(金)의 황성 또는 황성평이라 하는 잘못된 속전(俗傳)을 고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상의 글들은 주로 李進熙 著, ‘好太王碑の謎’ 55面~62面,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4面 以下 參照引用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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