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광개토태왕비 이끼 불태우고 글자 조작

입력 2016-04-24 11:4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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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일본시조연대부터 조작 역사구성 첫 단추부터 허구
 
어느 나라나 고고학(考古學)의 시대구분은 물건을 가공(加工)하는 이기(利器)의 발달에서 찾았다. 이 이기의 발달은 인류 생산발전의 기초가 되고 있기에서이다. 이같이 고고학에서는 문화의 발전단계를 이기의 재료에 의해서 구분함이 상식이다.
 
즉, 그것은 석기시대와 금속시대로 대별되고 석기시대는 타제석기(打製石器)를 쓰는 구석기시대와, 마제석기(磨製石器)를 사용하는 신석기시대로 나누고 또 금속기(金屬器)시대는 청동기(靑銅器)시대와 철기(鐵器)시대로 나누어 말하고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일본열도의 성립은 언제인가? 일본은 지금부터 약 1만년 전 대륙으로부터 분리되고 일본인은 원주민과 한국 등 주위의 민족과 혼혈로 돼 있다. 일본은 구석기시대에는 거주한 흔적이 없고 신석기시대에 와서야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일본의 역사를 보면 신석기시대 일본인들이 수렵(狩獵)과 어로중심(漁撈中心)의 삶을 할 때 대륙에서 건너간 우리 유민에 의해 일본에 농경(農耕)이라는 생활의 변화에 의해서 점차 현 일본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목축은 후에야 개시된다.
 
문화도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일본에 건너간 유민이 선주(先住)민족을 정복했음에도 일본은 이도 아니라 하며 중국 한민족(漢民族)의 문화발전이 일본열도에 미쳤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 역사조작의 효시인 신무기원(神武紀元)도 창작한다.
 
이는 일본 학자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의 소위 진무덴노(神武天皇)가 즉위한 해가 서기전으로 결정된 것은 세이토쿠 다이시(聖德太子)의 수사(修史)사업과 관련해서 중국 참위설(讖緯說)의 신유혁명설(辛酉革命說)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즉, 신유년(辛酉年)에는 혁명이 일어나는데 신유년(辛酉年)이 21회가 거듭 반복되면 더욱 큰 혁명이 일어난다는 사상이다. 스이코덴노(推古) 9년 신유년(辛酉年. 1601년)을 기점으로 해서 이보다도 1260년 전의 신유년(辛酉年) 서기전 660년을 진무덴노(神武天皇) 즉위의 해로 제멋대로 정한 것이다.
 
진무덴노(神武天皇)의 즉위는 서기전 660년이 아니다. 이는 허구이다. 일본의 1대왕은 오우진(應神. 서기363~394년)이다. 이것을 봐도 일본의 역사가 얼마나 제멋대로 고무줄 같이 1000년을 늘리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은 1000년을 늘리고 있다고 이런 일본의 역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던 일본은 우리를 침략하면서 이런 거짓 역사를 매 꾸기 위해 고대에 우리나라를 정벌하고 지배한 것 같이 조작하기 위한 호자료(好資料)로 광개토태왕의 비를 조작해 마치 일본이 고대에 대륙에 진출한 것처럼 있지도 않은 사실을 조작한 것이다.
 
이번 회는 일본이 광개토태왕의 비를 1880년 발견하고도 이를 숨기며 그간 제멋대로 글자를 훼손하고 조작하는가를 거짓 왜곡을 바로 잡기 위해 좀 더 깊이 살펴보고자한다.
 
호태왕비 1880년 발견 이끼제거 불로 태운 후 글자 조작한 일본
 
광개토탱왕비에 관한 최초의 문헌은 1888년 11월에 나온 무라오카 료스케(○岡良弼)의 고구려고비(高句麗古碑 如蘭史話卷八)이고, 1889년 6월에 출판된 ‘회여록(會餘祿)’ 제5집(集)에는 현지사람의 말로서 땅속에 묻혀있던 비가 300년 전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런데 1888년 천진(天津)의 공인(工人) 4명이 이것을 파내어서 비면을 씻어서 겨우 비문이 읽게 되어 때때로 현지에 간 일본인 모(某)가 공인(工人)이 만든 탁본(拓本) 두 폭 중 한 폭을 얻어서 갔다고 쓰여 있다. 그 이름도 밝히지 않는다.
 
이 문장에서는 비가 언제 발견되고 탁본을 일본에 처음으로 누가 갖고 갔는지 시기는 언제인가를 알 수가 없다. 광개토탱왕 비에 관해서 최초의 본격적인 논문인 1891년 쓴 간 마사도모(管 政友)의 ‘고려호태왕비명고(高麗好太王碑銘考)’-(史學會雜紙 第22~25號) 등이 비의 발견을 1882년으로 잡고 있다.
 
1893년에 쓰여진 나가미치요(那珂通世)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사학잡지 제47~49호)와 1898년의 미야게요네기치(三宅米吉)의 ‘고려고비고(高麗古碑考)’-고고학회잡지 제2편 제1~3호) 등은 종래 일본 학계에서 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말하고 있다.
 
즉, 일본에서는 광개토태왕비의 발견은 1882년이라는 것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발견 당시의 비문 상태에 관해서는 크나큰 의견들이 나눠지고 있다.
 
명치년간(明治年間)의 일본문헌에는 흙속에 묻혀 있었다든가 흘러가는 물에 씻어졌기 때문에 비면이 요철(凹凸)이 일어났다고 돼 있으나 대정기(大正期)의 문헌에는 비면에 자라난 이끼(苔)를 불살랐기 때문에 요철(凹凸)이 매우 달라졌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1935년에 집안(輯安)을 조사한 이게우치 히로시(池內宏)는 비가 발견된 것은 회인현(懷仁縣)의 설치된 1876년에 지현(知縣=知事)이었던 장월(章樾)이 배하(輩下)의 관월산(關月山)이 덩굴(蔓草)속에서 비를 발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通溝 3卷, 1938年).
 
이러한 일본의 문헌에서는 그 출판된 시기에 의해서 비가 발견한 해와 그 경로, 당시 비면의 상태에 관해서 기술이 현저하게 달라서 어느 것을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중국문헌에서의 기록은 어떠한가
 
중국의 연구논문은 일본보다 늦은 1895년의 왕지수(王志修)의 ‘고구려영락태왕고비가(高句麗永樂太王古碑歌)’가 최초이다. 그는 봉천부군량서(奉天府軍糧署)의 근무한 인물로서 1895년 4월에 비의 ‘초탁본(初拓本)’을 보고 비의 건립연대 고증을 시도했다.
 
그러나 비가 언제 발견되고 ‘초탁본(初拓本)’이 어떻게 해서 봉천에 전해졌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며 비문에 관해서 금석학적(金石學的) 검토와 석문의 작성도 하지 않고 있다.
 
또 왕지수(王志修)보다 5년 후의 1900년에 정문작(鄭文焯)의 ‘고려영락태왕비석문찬고(高麗國永樂太王碑釋文纂攷)’가 간행됐다. 거기에는 그가 북경의 유리창(琉璃廠)에서 비의 ‘정탁본(精拓本)’을 산 것은 1898년으로 기록한다.
 
이것은 이미 왕지수(王志修)와 성욱(盛昱)이 ‘고증문(考證文)’을 쓴 것을 들은 후이다. 그 자신이 본 육심원(陸心源)과 전운룡(傳雲龍)의 발문(跋文)은 간단해서 내용도 불충분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계속해서 그는 전 비문을 살펴봄과 동시에 각 문자와 사건 지명 등에 관해서 많은 문헌을 펴서 세밀하게 고증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비문은 유리창(琉璃廠)에서 산 정탁본(精拓本)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이 1889년 6월에 출판된 ‘회여록(會餘祿)’에 출판된 제5집의 그것을 베낀 것에 불과 했다. 또 비의 존재를 알리는 과정도 ‘회여록’에 휘말려 비가 땅속에 묻혀있는 것이 300년 전에 점차 나타났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정문작(鄭文焯)의 저서에 의해서 비 발견의 과정을 알 수는 없었다.
 
다음으로 청말(淸末)~중화민국초의 대표적 금석학자 라진옥(羅振玉)은 1909년에 ‘용려일찰(俑廬日札)’과 ‘신주국광집(神州國光集)’을 쓰고 그 속에서 광개토왕비의 건립연대를 고증을 함과 동시에 석문(釋文)을 작성하고 있다.
 
그의 석문은 중국에 있어서 비문연구에 큰 영향을 줬으나 그는 엄격한 비문 비판을 하지 않고 자획(字劃)이 명확한 것이 오래다고 하는 금석학의 상식에 따랐기 때문에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 더욱이 비 발견에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청말의 고명한 금석학자 양수경(楊守敬)도 1909년 ‘고려호태왕비(高麗好太王碑)’를 출판해 ‘환우정석도(寰宇貞石圖)’에 자획이 명확한 탁본을 실었다.
 
그 ‘고려호태왕비’에는 그가 청일전쟁(1894~95년)경의 만든 소위 탁본을 구입했으나 문자의 불명확한 곳이 많아 일본인의 석문이 있었기 때문에 겨우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 적혀 있다.
 
그 후 1902년 겨우 동북지방(만주)에서 관리를 한 조O경(曺O卿)으로부터 자획이 명확한 탁본이 보내온 것이 쓰여 있다. 그러나 비 발견의 경로와 그 연대를 알 수 있는 기술은 여기에도 없었다.
 
이상과 같이 보면 지금까지 중국문헌에서는 비가 언제 발견되고 발견시의 비문의 상태가 어떠하였는지! 에 대해 아무것도 적혀 있지가 않아 알 수가 없다.
 
개간 작업하던 농민이 발견 그 후 탁본유출과 계획된 음모
 
1918년 고변광(顧變光)은 ‘몽벽이석언(夢碧簃石言)’을 쓰고 그 속에서 예전부터 지금까지의 사학(査學)의 목적으로서 집안에 간적이 있는 대유침(戴裕抌)으로부터 들은 말을 옮기고 있다.
 
그것은 비는 1875년 개간 작업을 하고 있던 농민에 의해서 발견됐다고 쓰고 이어서 이끼가 비면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분(糞)을 바르고 비면을 태워서 비면의 이끼를 제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승간은 ‘몽벽이석언(夢碧簃石言)’보다 4년 후 출판한 ‘해동금석원보유(海東金石苑補遺-1922)속에서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이 처음으로 북경의 반조음(潘祖蔭)의 손에 들어온 것은 1874년의 일이다.
 
청조(淸朝)의 국자감제주(國子監祭酒)의 성욱(盛昱)이 자금을 모아 북경의 유리창(琉璃廠)의 명탁공(名拓工) 이운종(李雲從)을 파견해서 본격적 탁본을 만들게 한 것은 1889년이라고 쓰고 있다. 이 기록이 틀림없는 것이라면 비가 발견된 것은 1874년이나 그 이전이라고 할 것이다.
 
‘요동문헌징략(遼東文獻徵略)’에 쓰여진 장연후(張延厚) 발어(跋語)에는 반조음(潘祖蔭)이 비문을 입수한 것은 광서초(光緖初)의 일로서 반조음(潘祖蔭)이 이대룡(李大龍)이라는 석공에 명해서 50본의 탁본을 만들었다고 쓰고 있다.
 
더욱이 청말~중화민국초에 동북 각 현(縣)의 지현을 한, 담국환(談國桓) ‘요동문헌징략(遼東文獻徵略)=수찰(手札)’에는 회인현(懷仁縣)을 둘 때 그 지현(知縣)이었던 장월(章樾)의 부하 관월산(關月山)이 넝쿨에 휩싸인 비를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쓰고 있다.
 
그 후 그는 1929년이 돼서 요녕성박물관 소장(所藏)의 탁본에 발어(跋語)를 써서 거기에는 관월산(關月山)이 비를 발견한 것은 ‘광서(光緖) 8, 9년(1882, 3년)에 일이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탁본은 봉천성독학사(奉天省督學使)의 양고가 그의 부친께 부탁해서 탁출(拓出)한 것이라는 것, 그 때 비면의 요철(凹凸)이 매우 심하였기 때문에 선덕지(宣德紙)로부터 단단한 조선지로 바꿈에 의해서 탁출(拓出)이 가능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광개토태왕의 비 발견의 시기와 그 과정에 관해서 중국인 학자의 기술(記述)이 현저하게 달라져 있다. 그런데 농민이 이 지방에 들어가 개간 작업이 시작한 것은 회인현(懷仁縣)을 둘 때인 1876년(光緖 2년)보다 후이기 때문에 1874년 발견설과 1875년 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또 장연후(張延厚)의 광서(光緖)초 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인 폭을 가지면 틀리다고는 할 수 없으나 반조음(潘祖蔭)이 이대룡(李大龍)을 파견해서 50본의 탁본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다.
 
반조음(潘祖蔭)이 이대룡(李大龍)을 시켰다는 것은 그와 매우 친한 관계에 있었던 오대징(吳大澂)이나 엽창치(葉昌熾)가 이를 모를 리가 없는데도 그들은 이대룡(李大龍)의 파견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다.
 
또 오대징(吳大澂)은 성욱(盛昱)이 파견해서 취한 이운종(李雲從) 탁본에 관해서 처음으로 본 정탁본(精拓本)이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의 비문은 철저한 음모에 의해서 계획적으로 조작 왜곡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은 李進熙 著, ‘好太王碑の謎’ 63面~70面, 以下 參照引用했다.)
 
이 비의 발견은 1800년에 발견됐음에도 이를 숨긴 일본의 음모를 다음 칼럼에서 더 깊고 폭넓게 일본이 광개토태왕 비문을 계획적으로 조작한 사실을 밝혀 가고자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이을형 필진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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