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닫은 조선, 기회 잡은 일제의 태왕비 난언

입력 2016-05-01 11:33:17

원문 링크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명치유신 이후 노골화된 일본의 조선 침략
 
일본은 1873년부터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 정한파(征韓派)가 조선출병을 주장했다. 이를 일본의 일부 사족 층(士族 層)이 불만전환 등을 하려는 의미도 있어서 라고 주장한다. 오구보(大久保利通) 등이 반대했다고 했으나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실시의 시기, 정부 내의 주도권싸움이 본질적인 대립요인이었다. 때문에 1874년에는 오구보는 대만 출병을 단행 하고 이에 반대한 기도(木戶孝允)도 1875년 운양호가 강화도에 불법침입하고서도 강경한 방침을 주장한 것이다.
 
또 1876년 불평등의 한일수호조규를 맺고 조선에 불평등개국을 강요 강제하고, 부산, 인천, 원산의 개항과 일본영사재판권의 승인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부속협정’, ‘무역규칙’에서 조선의 ‘관세자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화폐의 유통을 인정하게 했다.
 
이것은 막부(幕府) 말 일본이 구미열강으로부터 강요된 불평등조약과 같은 내용의 조약을 조선에 강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구미(歐美)에 대한 ‘굴종과 타협’, 아시아에 대한 ‘강압과 간섭’이라는 근대 일본의 이중성격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이를 직시하지 못하고 당파싸움과 부정부패로 일본이 광개토태왕의 비(碑)마저 훼손조작하며 역사를 거꾸로 메우고 있는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일본공사관을 불태워 배상금 지불과 공사관수비대의 주둔 등을 인정, 침략을 가속화시켰다.
 
또한 1884년에는 ‘갑신정변’과 ‘동학란’ 등 혼란을 지속하고 있었는데도 외세의 움직임에는 관심이 없고 쇄국의 족쇄를 걸고 국제정세에는 아예 문을 닫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일본은 청일전쟁(1894~95년)의 승리로 청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배제하고 1902년 영일동맹(英日同盟)을 계기로 조선과 만주를 둘러싼 러일의 충돌은 급기야 러일전쟁(1904~05년)으로 발전해 영국과 열강의 도움을 받아 일본을 승리 하게한다.
 
당시 일본은 전비부족과 무기결핍으로 전쟁계속능력이 없었음에도 국제정세는 러시아 혁명전선의 격화, ‘피의 일요일 사건’ 등으로 전쟁계속이 곤란하였을 때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포스마스조약’을 중개하며 조선은 무원고립이 된다.
 
그 결과 조선에 있어서 일본이 독점적 지배권을 인정하여 일본이 조선침략에 박차를 가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략에의 군사적 거점이 되게 한다.
 
이같이 일본은 대륙침략에의 음모를 일찍부터 계획을 세우고 그 준비를 역사적 사실에서도 찾는 결과 광개토태왕 비 조작을 거침없이 하게 되는 만행을 감행하게 된다.
 
오늘은 일본이 광개토태왕비의 발견과정에서 야기된 연대의 조작에서부터 가증스러운 자획조작과 탁본이 조작된 전후의 사실 관계를 밝혀 사실을 바로 하려는 것이다.
 
과연 광개토태왕의 비는 언제 발견했고 탁본은 언제 했나
 
분명한 것은 일본은 태왕의 비 발견도 속이고 탁본도 속이는 음모를 감행했다. 청말~ 중화민국 초에 동북(만주)각 현의 지현(知縣=知事)을 지낸 담국환(談國桓)의 기술(記述)과 ‘봉천통지(奉天通志)에 의하면 장월(章樾)이 회인현(懷仁縣)의 설치위원이 된 것은 광서(光緖) 3년으로서 동 8년 1월까지의 지현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렇다면 장월과 종시 행동을 같이 해온 관월산(關月山)은 광서 8년 1월에는 회인현을 떠나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장월이 지현을 근무하던 광서 8~9년에 비를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관월산의 기억이 잘못인가, 들은 것이 잘못들은 것인가. 잘못된 것이었다.
 
실제는 1881년(광서 7년)의 여름경에 ‘황연만초중(荒煙蔓草中)’에 비를 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담국환의 부(父)는 개평현(蓋平縣)이나 승덕현(承德縣)의 지현을 근무한 담광경(談廣慶)에서들은 이야기를 다음 같이 말 하고 있다.
 
‘봉천통지(奉天通志)에 의하면 그는 담국환의 발어(跋語)에 보는 바와 같이 승덕현(承德縣)지현이였던 광서(光緖)11년6월 황제의 부름에 도입(都入)해 그 후 바로 장월이 동현(同縣)에 부임하고 있어서 담국환이 관월산과 만난 과정과 연대에 관해서 발어의 기술은 바른 것이라 보아진다.
 
그런데 담국환의 기술은 회인현의 설치위원으로서 현지에 향한 장월의 부하인 관월산의 말에 따른 것이나 그가 만초(蔓草)에 뒤덮여 있는 비를 보고 있었던 점, 전비문의 탁본은 만들 수 없어 수문자(數文字)만 수탁(手拓)한 것 등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사학(査學)을 위해 현지에 간 대유침(戴裕抌)이 비면은 처음 창태(蒼苔)에 뒤엉켜져 있었다는 사실과 합치한다.
 
따라서 비 발견의 경로에 관해서의 담국환의 그것은 신뢰가 된다고 말 할 수 있다. 여기서 반조음(潘祖蔭)의 제자로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을 하고 있는 청말(淸末)부터 민국초의 비문연구의 대가 엽창치(葉昌熾)의 기술을 보면, 그는 어석(語石) 속에서 비는 1880년(광서 6년)에 벌채 개간 작업 중에 농민이 발견했다.
 
1885년에 이홍예(李鴻裔)가 탁본을 2부 입수해서 그 중 1부를 반조음에게 보낸 점, 그것은 30~40매가 있었기 때문에 10일 이상 걸려서도 연결이 되지 않아 만날 수 없었던 점, 그 후 이운종(李雲從)이 그곳으로 감에 따라 비로소 정탁본(精拓本)을 얻을 수 있었던 것 등을 말하고 있다.
 
엽창치(葉昌熾)는 김정희(金正喜) 등 조선의 금석학자(金石學者)와의 교유(交遊)를 통해서 조선의 금석학에도 밝게 또 기술의 정확함에서도 정평이 있는 학자이다. 특히 반조음의 제자이었기 때문에 비문이 북경에 알려진 경로의 기술은 정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중국인 학자의 기술을 비교검토 했으나 그 결과 엽창치의 기술하는 바와 같이 비는 1880년 광서 6년, 일본류로 말한다면, 메이지 13년에 개간 작업을 하고 있던 농민이 발견했다.
 
이 보고를 받은 지현인 장월이 그 이듬해인 1881년, 금석학에 밝은 관월산으로 하여금 조사시킨 것이 명백해 졌다.
 
처음 탁본은 관월산이 몇 자만 탁본한 것
 
현지에 도착한 관월산은 전면에 이끼와 넝쿨에 얽혀 있는 비를 실견(實見)해서 비문이 읽을 수 있는 개소(個所)를 선택해서 몇 자만 탁본에 의해서 금석애호가에게 나눠 줌과 동시에 자신이 비를 발견한 양 말을 돌린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또 장월을 비의 발견자라고 기록한 문헌이 있는 것은 그가 이 때 회인현의 지현이었기 때문에 그리 보고 있다.
 
또한 문헌에 의해서 비의 발견 연(年)을 막연(漠然)과 광서 초로 기록 한 것도 있어 그 광서초를 고변광(顧變光) 등과 같이 광서초년 또는 광서원년이라고 잘못된 기술도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미생(李眉生)이 북경의 반조음에게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을 건 낸 것은 비가 발견 후 5년 후인 1885년의 일이었다. 북경의 금석학자가 ‘광개토태왕 비’의 존재를 아는 것은 비문이 일본에 가져간 2년 후의 일이었다.
 
북경에 가져간 비문은 엽창치가 쓰고 있는 바와 같이 30~40매의 종이에 사본(寫本)인 쌍구가흑본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연결해서 전 비문을 읽어서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거기서 성욱(盛昱) 등이 자금을 모아 1889년에 이운종에 탁본용지와 묵(墨), 식량 등을 줘서 집안(輯安)에 보내어 정탁본(精拓本)을 만들게 했다. 일본에서는 이해에 이미 비문의 해독본(解讀本) ‘회여록(會餘祿)’이 출판되는 것이었다.
 
쌍구가흑본은 언제 만들 졌나? 그 허구조작 밝혀짐
 
1885년에 처음으로 북경의 금석학자에 알게 된 비문이 4년 후에 이운종이 떠서 돌아간 ‘정탁본(精拓本)’과 어떻게 다른가를 명백히 하는 것이 광개토태왕의 비와 관계되는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께우치(池內宏) 동경제국대학 교수는 1935~36년의 저서에 근거해서 비의 본격적인 탁본이 만들어 진 것을 말한다. 1882년에서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1884년에 가지고 간 비문이 영희가 1882년에 방단산(方丹山)을 파견해서 만든 정탁본(精拓本)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학계에서 널리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가지고 간 것은 봉화현(奉化縣)의 지현인 영희가 만든 정탁본이 아니다. 광개토태왕의 비를 몇 종류를 본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탁본이 아니라 비문 위에 종이를 넣고 문자의 윤곽을 테두리를 두른 후 묵을 가해서 정본(拓本)같이 만든 쌍구가흑본이라는 것이다.
 
설령 이께우치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1882년에 정탁본이 만들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 3년 후에 북경에 가져 온 것이 쌍구가흑본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이께우치 설을 철석같이 믿으려한다. 그들의 조작이 사실이기를 바라는데서이다. 그래서 일본 참모본부 편집과장인 오하라 리겐(大原里賢)이 수집(蒐集)한 ‘영희본(榮禧本)이 있음이 니시가와 겐(西川權)의 ’일한상고사의 이면(日韓上古史裏面)(1910년)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그 조작들은 다 거짓임이 명백하게 들어난다. 그들은 제국대의 교수를 동원하고 관리, 군인, 농민, 탁공(拓工) 등을 동원하여 속이고 잘못 비를 조작하는 과정의 난언(讕言. 막되먹거나 증거가 없는 말)은 가관이다. 여기서 그들의 난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봉화현의 지현인 영희가 쓴 저서가 중국에서는 간행이 되지 않음에도 일본에서는 이상한 관심을 모우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현상이 일어난다. 왜 이들은 이런 관심을 가지는 것인가.
 
일본이 요란스럽게 말하는 난언이 중국에서는 단행본 책이 단 한권도 나와 있지 않다. 이것은 일본이 말하는 광개토태왕비에 관한 난언이 모두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간행이 되지 않음에도 일본에서는 이상한 관심을 모우며 불가사의한 현상이 일어난다. 왜 이들은 이런 관심을 갖는 것인가. 광개토태왕의 조작내용이 사실로 되기를 열망함에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 거짓으로 빗나간다.
 
동양문고소장(東洋文庫所藏)의 사본을 보면, 영희는 1903년 12월에 ‘고고구려영락태왕묘비문고(古高句麗永樂太王墓碑文攷)’를 써서 거기에는 비를 처음 발견한 것은 회인현의 순검(巡檢)으로 근무한 왕언이라고 쓰고 있다.
 
즉, 광개토태왕비는 1882년에 봉화현의 지현였던 영희가 입기단산(入丌丹山)을 보내서 비로소 완벽한 탁본을 할 수 있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영락태왕 묘비란언(高句麗永樂太王 墓碑讕言)’과 그 때 탁본에 의해서 썼다는 전 비문(全碑文-결자(缺字)는 5~6문자 뿐)을 뜬 ‘고구려영락태왕비’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환인현지(桓仁縣志)’를 보면, 회인현 통구구(通溝口)에 순검을 두게 된 것은 광서 4년으로서 그 때 순검(巡檢)으로 부임한 장익(張翼)은 광서에서 16년 까지 근무하고 있어서 비를 발견했다는 1882년 광서 8년에 왕언장은 여기 순검에 근무한 사실자체가 없다.
 
왕언장이 통구구에 순검이 된 것은 1899년 광서 25년으로서 그 이듬해 다른 데로 전출하고 있다. 영희가 말하는 1882년과 17년이 차가 있다.
 
한편 ‘봉천통지(奉天通志)’에 의하면 영희가 탁공을 파견했다는 광서 8년의 봉화현의 지현은 영희가 아니라 왕위징(王爲澂)이다. 영희가 부임한 것은 1900년 광서 26년이 되어서이다.
 
또 문헌에 의하면 그가 파견했다는 탁공(拓)工)의 이름이 방단산(方丹山), 변단산(卞丹山), 형단산(邢丹山)등 가지각색이다. 광개토태왕의 비 발견과 처음 탁본이 탁출에 관해서의 난언의 기술과 조작에 나오는 지내굉(池內宏), 세키구치 유세이 등이 말하는 탁본은 조작이고 거짓임이 판명됐다.
 
이상과 같이 볼 때 1882년에 완벽한 탁본을 떴다는 것은 거짓으로 동경대학교수인 이께우치의 학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가 거짓의 기사에 휘말려서 1882년 ‘탁출설(拓出說)’을 낸 것이었으나 일본은 이 거짓을 그대로 밀고 가는 것은 용납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상은 주로 ‘李進熙’ ‘好太王碑の謎’.41面~78面 參照 引用하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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