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 일제, 거짓 들통나니 잠잠한 일본

입력 2016-05-08 11:56:08

원문 링크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 부국강병을 앞세운 일본야욕 역사 침탈혈안
  
일본의 소위 명치유신(明治維新)은 봉건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에로의 출발점이 됐다. 에도막부(江戶幕府)를 넘어뜨리고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수립한 일본은 안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구미제국의 자본주의에 비해서 개국 시의 일본 산업은 매우 뒤져 있었다.
 
막부도괴(幕府倒壞)와 봉건제도의 폐지에 성공한 메이지정부(明治政府)는 선진자본주의 제국(諸國)에 따라가는 것을 제일의 목표과제로 하였다. 당시 일본의 민간자본은 매우 약체이었기 때문에 메이지정부는 관영모범공장의 설치, 외국인 과학기술자의 도입, 유학생을 파견에 의한 기술자의 양성을 하는 한편 적극적인 근대화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은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이라 불러지고 있다. 그 재원(財源)은 1873년 7월 지조(地租)개정에 의한 농민으로부터 공조(貢租)가 중심이었다. 소위 식산흥업(殖産興業)인데 이것은 농민의 희생위에 강행한 것이라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청일, 러일전쟁 전의 이야기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엄청난 배상과 영토를 할양받았다. 청일전쟁의 결과 청국은 요동반도, 대만, 팽호제도(澎湖諸島)의 할양(割讓)과 배상금 2억량(2億兩. 당시 일본의 2년 예산에 맞먹었다)을 받았다. 여기서 그들은 전쟁이 돈을 번다는 것을 알았다.
 
10년 후의 러일전쟁은 그 10배가 넘는 배상금과 화태남반(樺太南半)의 할양(割讓), 여순(旅順), 대련(大連)의 조차권(租借權), 남만주철도이권의 양도, 연해주연안의 어업권양도는 침략에로 혈안이 된다.
 
여기서 메이지정부(明治政府)는 구미압박에 대항하며 그 대상(代償)을 조선 등 근접한 아세아 여러 나라를 침략했다. 일본자본주의는 군수산업(軍需産業)을 중핵(中核)으로 해서, 지금의 선진국이 다 그렇듯이, 일본도 이를 따르며 발전해 갔다.
 
여기서 1880년대 일본의 국책은 ‘부국강병’이라는 슬로건으로 인접국의 침략과 그 희생 위에 일본의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일본은 여기에 끝이지 않고 우리나라 고대사 침탈을 위해서도 첫 작업이 광개토태왕의 비문조작이었다. 거침없이 자행한다.
 
일본이 광개토태왕의 비 조작에 얼마나 심혈을 기우렸는지는 1880년 비 발견후의 상황을 살펴보면 자명해진다. 왜 그들은 광개토태왕의 비문조작에 집념하며 이미 보아온 바대로 조작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이 있지도 않은 일본이 고대부터 대륙을 정벌하고 지배했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진실은 숨길 수 없다. 오늘은 비문이 언제부터 읽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군부까지 동원하여 해독작업을 어떻게 하였고 조작은폐에 보여주는 그들의 작태는 어떠하였는지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탁본작성을 둘러싼 의혹 드러나다
 
비문이 언제부터 읽게 되고 본격적인 탁본은 언제부터였나는 일본이 제멋대로 말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미 기술한바와 같이 비의 발견은 1880년이고 그 이듬해인 1881년 관월산(關月山)비를 실견(實見)한 때는 비가 이끼와 넝쿨로 덥혀있어서 전 비문의 탁본이 뜰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 때 그가 뜬 몇 자의 탁본을 1885년 청말 ~ 민국 초에 동북(만주) 각 현의 지현(知縣=知事)을 하고 있는 담국환(談國桓)에게 보내고 있으나 이것은 관월산(關月山)의 상역(上役)인 장월(章樾)이 회인현(懷仁縣)의 직을 그만 둔 1882년까지 전 비문이 읽을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1882년부터 12월까지 회인현(懷仁縣)의 지현(知縣=知事)을 하고 있는 자는 진사예(陳士藝)이다. 그는 1886년 6월에 오대징(吳大澂)에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재임 중에 비면을 덥고 있는 이끼와 넝쿨을 불태워, 전 비문을 읽을 수 있는 상태된 것은 사실이다.
 
한편 이 때 이마니시 류(今西 龍)가 비의 옆에 살고 있는 주민 초붕도(初鵬度)의 말로는 “지현(知縣=知事)의 명을 받들어서 장화(長花)를 불태워서 글자를 나타냈으나 일부를 훼손했다”라고 했다. 그 당시 지현(知縣=知事)은 진사예(陳士藝)가 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대징(吳大澂)은 제정(帝政) 러시아와 혼춘(琿春)방면의 국경선을 획정하는 청국대표로서 부임도중, 철령(鐵嶺)에서 일박(一泊)을 할 때 그 현의 지현(知縣=知事)이었던 진사예(陳士藝)의 방문을 받아 앞의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을 받았다.
 
이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은 반조음(潘祖蔭)이 입수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다. 그는 1885년 이홍장(李鴻章) 전권대신과 같이 부 전권(副全權)으로서 이등박문(伊藤博文)과 ‘천진조약’ 체결에 관여하여 1886년 제정(帝政)러시아와 교섭을 진행시키는 청국대표였다.
 
오대징(吳大澂) 그도 광개토태왕의 비 탁본을 솜씨 좋은 탁공(拓工)으로 하여금 탁출(拓出)을 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는데 이것은 그 때까지 현지에서 본격적인 탁본이 작성 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오대징(吳大澂)은 그 후 1889년의 이운종(李雲從) 탁본을 봐서 비로소 정탁본이라고 쓰고 있어, 담광경(談廣慶)에게도 부탁해서 다른 탁본을 입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몇 가지 자료가 시사(示唆)하는 바와 같이 진사예(陳士藝)가 회인현(懷仁縣)의 지현(知縣=知事)을 하고 있던 1882년 9월~12월 사이에 이끼와 칙 넝쿨을 불살우고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이 만들어 졌으나 정탁본(精拓本)은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1883년에 일본에 가져간 것이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인 것도 비면을 불사른 직후여서 현지에서 탁본이 작성되지 않은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본은 왜 1887년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을 만든 것인가
 
여기서 언제 본격적인 탁본이 만들어 졌는가의 문제로 하는 것은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으로서는 이것을 작성하는 자가 어떻게 판독하느냐에 따라서 틀린 비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자료로서 쓰기에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1882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이끼와 칙 넝쿨을 불살아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이 만들어 졌는가. 그것은 앞서 말한 엽창치(葉昌熾)와 담국환(談國桓)이 쓰고 있는 바와 같이 현지에는 요철(凹凸)로 매우 심한 비면으로부터 견딜 수 있는 질기고 대형의 종이와 양질의 묵(墨)과 솜씨 좋은 석공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다.
 
밀정인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의 견문담(見聞談)에 따라서 미야게 요네기치(三宅米吉)의 ‘고려고비고(高麗古碑考)’에 ‘비면이 결손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있는 부분도 요철(凹凸)이 심하면 큰 종이를 써서 한 번에 탁본을 뜨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지의 사정을 미야게 요네기치(三宅米吉)는 바로 전하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의 비의 본격적인 탁본을 작성한 것은 이미 언급한 대로 1887년의 양O(楊O) 탁본이었다.
 
이 양O(楊O)는 자(字)가 자이(子異)이고 순천부부승(順天府府丞),을 지낸 후 1885년, 광서(光緖) 11년 8월부터 13년1월 까지 순천부부승(順天府府丞) 겸 학정(學政)을 맡고 후에 병부좌시랑(兵部左侍郞)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의 비문이 중국의 금석학자나 화가에 널리 이용된 것은 1889년의 이운종(李雲從) 탁본이었다. 청말(淸末)~민국초의 대표적인 금석학자, 오대징(吳大澂)이나 오중희(吳重憙), 나진옥(羅振玉)등이 다투어 입수한 것도 이 탁본이다.
 
비문해독작업은 참모본부였고, 일본에 알린 것은 1884년이었다. 비문을 제멋대로 훼손하고 회를 바른 후 다시 글자를 조각하고 자기들 구미에 맞게 왜곡한 내용의 탁본을 일본에 알린 것은 1884년(明治 14년)으로 그 탁본을 가지고 간 자가 사가와 가게 아끼(酒匂景明) 대위라고 되어 있다. 그는 이름을 필요에 따라 여러 번 바꾸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참모본부의 첩자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이다.
 
그가 가지고 간 세상에 알려 진 것은 1889년(明治22년) 6월에 출판된 ‘회여록(會餘錄)’ 제5집(集), 아시아협회 편(編)에 게재되어서이나 그것이 출판 되자 많은 학자가 주목을 끌어 명치 20년대부터 고대 조일관계사의 연구가 갑자기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간 것은 탁본이 아니라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이었다. 또 그의 이름도 최근 까지도 바로 전해지고 있지 않으며 쌍구가흑본을 가지고 간 연대도 1884년이 아니라 그 전년인 1883년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가와(酒匂)가 그것을 가지고 가서 어떠한 경로를 거쳐서 ‘회여록(會餘錄)’이 출판되었는가, 그것을 출판한 ‘아세아협회(亞細亞協會)’가 어떠한 단체인가도 불분명하며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광개토태왕의 비 연구를 심층적으로 심도 있게 연구해온 이진희(明治大學講師)선생은 일본에서 이 비문이 어떻게 연구되었는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가와(酒匂)가 그것을 가지고 가서 ‘회여록(會餘錄)’이 출판하기까지 참모본부 편찬과(編纂課)에서 비문해독작업이 행해진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때까지 해독본(解讀本)은 15종류였으나 그것들은 참모본부가 남긴 것이 아니라 모든 원본으로부터 사진을 옮긴 것이다. 제일 오래 된 것은 1885년(明治17년)에 쓴 아오에 히데(靑江秀)의 그것이고, 제일 새로운 것은 1889년(明治 22년 6월)의 나가무라 주세이(中村忠誠)의 해독본이다.
 
해독작업의 중심인물은 일본 육군참모본부 편찬과의 과료(課僚)로 육군대학교 교수로 있는 요고이 다다나오(橫井忠直)로서 그 외의 저명한 한학자, 역사가(歷史家)다. 이 작업에 참가했다.
 
그러나 사가와(酒匂)가 가지고 간 비문이 각 면 30여 매에 쌍구(雙鉤)한 것이기 때문에 해독작업에만 5년이나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혼란이 더해 만족한 해독본이 없었다.
 
거기서 1888년(明治 22년 10월) 그의 출석을 요구해서 해독작업을 끝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해독작업이 끝난 후 ‘회여록(會餘錄)’이 출판하기까지에 원고는 몇 번이고 신중히 고쳐 쓰여 져서 1889년 6월에야 겨우 출판되게 된 것이다.
 
이상의 사실은 재일사학자 이진희(明治大學 講師) 선생이 밝히기 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에 있어서 광개토태왕릉 비문의 연구와 그 이용되는 방향에 대한 것을 논하는 경우 빠질 수 없는 사실이나 이것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구 일본 육군참모본부(舊 日本陸軍參謀本部)에 의한 은폐(隱蔽)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작된 비문만 전문지 게재 바로 쓴 연구는 무시하는 일본의 흉계
 
일본에서 발표된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관한 최초의 문헌이라고 되어 있는 ‘회여록(會餘錄)’보다 5년 전의 1884년에 아오에 히데(靑江秀)라는 인물이 비문해독 문을 쓰고 있었다.
 
아오에 히데(靑江秀)가 지적했다는 것은 종래 1884년(明治 17년)에 사가와 가게 아끼(酒匂景明)라는 군인이 비문을 갖고 가서 어떠한 경로를 거쳐서 ‘회여록(會餘錄)’ 출판된 것을 조금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스다니 데이지로(水谷悌二郞)의 논문(‘호태왕(好太王碑考’‘書品’ 第100號 1959年)는 미스다니(水谷)씨가 소장한 탁본 등에 의해서 각 연구자의 석문(釋文)에 관해서 자료적 견지로부터 몇 개의 탁본과 석문(釋文)을 비교해서 서로 다른 비문에 관해서 한문의 지식만을 교정하는 종래의 연구와 달리 비판을 가한 것이었다.
 
이것은 이미 호태왕의 비문은 ‘해결됐다’고 하는 비문에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던진 노작(勞作)이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의 비문연구를 크게 전진시킨 논문이라고 하나 역사전문지에 발표되지 못하고, 서도(書道)의 잡지에 게제 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전쟁에 패전 후에도 이런 현상은 변함이 없다. 미스다니(水谷) 논문같이 훌륭한 연구의 공표가 늦어지거나 발표를 못하게 한 것은 학문의 발전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아오에 히데(靑江秀)가 쓴 ‘동부여영락태왕비명지해(東夫餘永樂太王碑銘之解)’는 비문이 일본에 가져온 과정을 기록하고, 간단한 서문(序文)과 해독문(解讀文) 및 이것을 고증한 ‘고구려 제19세광개토왕묘비지해(고구려(高句麗第19世廣開土王墓碑之解)논문도 제대로 발표를 저해하고 있음을 본다.
 
이진희 연구가는 일본 도서관에 가서 논문을 보면 비문의 행이 바꿔져 있을 정도로 정정(訂正)을 하고 있어서, 모두(冒頭)에 메이지(明治) 21년 10월 요고이 다다나오(橫井忠直)가 저술하고 곳곳에 석문(釋文)을 비교가미(加味)했다는 첨서(添書)를 달고 있다.
 
또한 고증문(考證文)에는 구리다 히로시(栗田寬)와 나가무라 후노우사이(中村不能齊)가 이를 교열(校閱)한 부전(付箋)을 달고 있을 정도로 일본은 제대로 된 광개토태왕비문의 해석이나 논문을 규제해 왔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일본이 그들의 왜곡을 숨기고 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以上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63面~91面 參照, 引用).
 
그들이 분국이라고 미마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한국에 세웠다고 우기다가 그 허구가 들어나자 1970년대부터 잠잠 하는 것과 같이 광개토태왕비의 조작왜곡도 우리들의 심층적 연구와 고증을 통하여 그들의 음모로 된 광개토태왕비문 사실을 잠재울 수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 ‘明治維新から現代へ’.외 다수서책을 참조,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이을형 필진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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