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조선 침략 전초, 호태왕릉비 조작사건

입력 2016-05-22 12:11:00

원문 링크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는 조작의 하수인
 
조선이 쇄국과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을 때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에도막부(江戶幕府)를 넘어뜨리고 메이지정부(明治政府)가 성립한 후, 신정(新政)의 ‘기본강령’을 발표한다. 그것은 공의세론(公議世論)의 존중, 개국화친(開國和親)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1869년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1870년에는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평민에게도 성(姓)을 쓰게 했다. 그리고 1871년에는 폐번치현(廢籓置縣)으로 통일정치기구를 성립시킨다.
 
1873년부터 관료제도(내무성설치, 동경경시청설치)등 정비와 지조(地租)개정과 군사제도로서 징병령을 발해 국민계병제, 참모본부설치로 통수권(統帥權)의 독립(1878년), 헌병제도 설치(1881년) 등을 실행한다.
 
한편 교육과 종교정책으로 학제를 의무교육제도와 국민교육의 개시로 대교선포(大敎宣布)(1870년)를 해 신도(神道) 중심(中心)의, 제정일치(祭政一致)로 천황(정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정신을 양성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교통통신제도로 전신, 우편, 철도, 사유철도와 도쿄(東京)에 8개의 은행을 설치하고 의식주를 서구화한다. 태양력을 1872년부터 사용하고 가스등(燈) 사용(1872년)과 전등 사용(1882년) 등을 하며 조선 등 아시아로 침략의 마수를 펼쳐나갈 준비를 한다.
 
대륙침략의 합리화로 우리 고대사를 왜곡하기 위한 음모가 일본의 육군참모본부에 의해 진행되고 그 하수인으로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등장한다. 그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원대하게 역사조작을 했는가는 상상을 초월한다.
 
오늘은 우리 고대사를 왜곡하는데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사가와(酒匂景信)에게 무엇을 어떻게 지시하고 그가 이름을 고쳐 숨기며 호태왕능비 왜곡의 중심적 역할을 했는지 그의 행적과 일본이 무엇을 노렸는지 등 당시의 음모의 단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50년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 이름 은폐는 왜 했나?
 
사가와 가게노부(酒匂)가 광개토태왕의 비문을 가져온 것을 접한 일본의 육군참모본부는 편찬과(編纂課)에서 다수의 한학자와 역사가로 하여금 만 5년 이상에 걸쳐서 해독작업을 하게한다.
 
해독작업이 마무리 되자 사가와쌍구본(酒匂雙鉤本)은 사폭(四幅)에 표장(表裝)돼 탁본답게 보이게 하기위해 문자둘레의 순위번호 붙이고 1888년(明治21년)12월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의 이름으로 메이지천황(明治天皇)에게 헌상됐다.
 
그리고 1890년(明治23년) 7월에는 비(碑)의 존재를 널리 선전하기 위해서 제국박물관에 옮겨진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가와(酒匂)의 이름이며 이 사실을 비밀로 해서 50여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왜 일까?
 
우리 고대사를 왜곡, 조작하기위해 취해진 조치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고대의 조일관계사와 일본고대사의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것을 제공한 ‘공적(功績)’을 남긴 사가와(酒匂景信)의 이름까지 숨기며 단행 했다는 점이다.
 
왜 그들은 사가와(酒匂)의 이름까지 숨기며 비를 일반에 공개하면서도 ‘회여록(會餘錄)’에는 ‘료우(僚友)’나 ‘료우(僚友)나 ‘사고우대위(酒勾大尉)’로 하던 것도 ‘일본인 모씨(某氏)’로 하며 철저하게 그 이름을 숨기고 있다.
 
이러한 숨김은 참모본부 편집과원이었던 요고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이외의 사람에게는 사고우대위(酒勾大尉)가 사가와(酒匂)라는 성씨명도 몰랐던 것 같다. 그런데 1898년에 발표된 미야게 요네기치(三宅米吉)의 고려고비고(高麗古碑考)’에는 육군포병대위 사고우(酒勾)로 돼있다.
 
이 사고우(酒勾)가 육군포병 대위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로 되는 것은 1918년이나 그것도 논문 속에 명백히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역사지리학회의 예회(例會)의 석상에서 퇴역육군중장 오시가미 모리소(押上森藏)가 말을 함으로서 알게 됐다.
 
오랜 세월을 걸쳐서 숨겨진 그의 씨명의 관직은 이렇게 해서 점점 분명해졌으나 그가 참모본부 사고우(酒勾)냐 사가와(酒匂)냐는 분명하지 않고 또 그가 참모본부 사고우(酒勾)포병대위인 것은 그가 비문을 갖고 간 때로부터 50년 후 1933년에 되어서다.
 
이것이 명백해 진 것도 육군소장 다게우치 에이기(竹內榮喜)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고우(酒勾)냐 사가와(酒匂)는 분명치 않고 그가 언제 비가 있는 집안(輯安)까지 간 것인가, 그 목적은 무엇이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비문을 갖고 갔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가 비문을 가지고 갔다는 1884년경의 조선이나 청국과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보면 서울이나 북경에 둔 일본 공사관원이나 관부(館付) 무관(武官)이 아니면 각지를 자유로 걸어 다닌다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사가와(酒匂)가 이 공관의 명단에는 없다. 그 명단에 사고우(酒勾)란 이름이 없으면 자유로 각지를 자유로 다닐 수 없다. 사가와(酒匂)가 어떻게 해서 집안(輯安)까지 간 것인가! 그 이름을 숨기고 다른 이름으로 행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밝혀진 사고우(酒勾)의 경력과 한 일은 무엇이었나
 
사가와(酒匂)는 가명(假名)을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참모본부에 의해서 사가와 가게아끼(酒匂景明)가 1879년에 십 수 명의 장교를 주재무관, 어학유학생의 명목으로서 청국에 파견해서 청국을 염탐하고 있었다. 여기의 군인이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광개토탱왕능의 비를 연구해온 나라(奈良))여자대학의 나가스가 아기라(中塚明)교수는 그의 논문 ‘사상(思想)’(1971년3월호)에 발표한 것은 광개토태왕 능비의 연구사상 특필한 것이었다.
 
이 논문을 받아서 북해도대학의 사에기 아리기요(佐伯有淸)교수는 육군참모본부 리원(陸軍參謀本部吏員)을 실마리로 ‘관원록(官員錄)’과 ‘직원록’ 등을 긴밀히 검토함에 의해서 사고우(酒勾)의 자세한 경력을 밝혔다.
 
사에기 아리기요(佐伯有淸)교수는 1972년4월 ‘일본역사’ 제287호에 발표한 논문 속에서 종래 사고우 가게 아끼(酒匂景明)이라고 한 것은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의 잘못인 것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의 경력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는 당초는 포병과의 육군소위였다. 1882년 중위가 되고 그 이듬해 1883년2월에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이 되고, 1884년에는 참모본부 의정관(議定官)으로 돼 있다.
 
1885년 및 1886년2월 ‘개정 관원록(官員錄)’에서는 이름이 삭제되어 있으나 동년12월 ‘직원록’에는 근위포병연대 제1대대중대장으로서 다시 그 이름을 게재하고 있다. 그 때 위계훈위(位階勳位)는 포병대위 정(正)7위훈(位勳)5등으로 되어 있다.
 
그 후 근위부관부(近衛副官部) 무고주관(武庫主管), 감군부요새(監軍部要塞) 포병감부 연습소 부관을 역임하고 있으나 1891년4월 이후 ‘개정관원 록’에는 그 이름을 볼 수 없다. 이를 명백히 밝히려 그 보주(補註)로서 그가 어떻게 죽은 것 까지 밝히고 있다.
 
즉 대식사랑씨편(大植四郞氏編) ‘명치과거장물 고 인명사전(明治過去帳物 故人名辭典)에 등재되어 있는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이력에 육군포병대위 종육위훈(從六位勳五等), 마야사키겡사족(宮崎縣士族)으로서 소위(少尉)에 임명됐다.
 
또 메이지 17년 대위로 진급하고 정칠위훈(正七位勳)에 올라가고 메이지 24년3월14일 특지를 받고 종육위(從六位)에 진급 후 그 이튿날 15일 몰했다고 돼 있다. 사고우 가게노부(酒勾景信)는 메이지 24년 3월15일 사망한 것이 판명됐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사고우 가게노부(酒勾景信)는 거의 70년 만에 겨우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의 성도 사고우(酒勾)가 아니라 사가와(酒匂)로 정식 이름은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임이 분명해 졌다.
 
그런데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청국 각지를 스파이로서 돌아다닌 것은 나가스가 아기라(中塚明)교수의 연구에서는 분명해 졌으나 단지 그것만의 이유로서 그 이름까지 숨길 필요가 있는가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이런 의문은 1900년경 에 비(碑) 전면에 회를 바르고 거기에 원 비문을 지우고 새로운 ‘비문’을 새겨 놓은 자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였는지 의문이 더하여 진다.
 
사가와는 무엇 하러 집안에 갔나
 
여기서 일본 참모본부의 사가와(酒匂)가 무엇 때문에 집안(輯安)갔는가를 규명해야 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일본의 참모본부의 성립과 그 성격을 당시 사회적 배경과도 아울러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육군참모본부가 설치되는 것은 1878년 12월로서 그 임무는 ‘육군성(陸軍省) 연혁사’에 의하면 본부장 하에 관동 관서 2국 및 총무과가 있고 관서국은 중, 서부 감군부(中, 西部 監軍部)를 뒀다.
 
그리고 나고야, 오사카, 히로시마, 구마모도, 등, 지리정지(地理政誌)를 상세히 하도록 했다. 또 이와 겸해 조선과 청국 연안에까지 미치게 하고 유사시 같이 그 참획(參劃)의 도략(圖略)을 갖추도록 돼 있다.
 
한편 1880년 참모본부가 편찬 한 ‘참모연혁지(參謀沿革誌)’제1호에 의하면 관동국 관서국총무과의 2국 1과가 설립당시의 참모본부의 본체로서 별도로 반속(伴屬)으로서 지도과(地圖課), 편찬과, 번역과, 측량과, 문고과(文庫課)를 뒀다.
 
이러한 과중에서도 특히 편찬과의 임무는 “본부 및 외국의 정지지리(政誌地理)에 관한 자들에게 각국의 병제(兵制), 내와 각지의 전사(戰史)등을 찬집하고 혹은 본부장의 특명을 따라서 일종의 편찬에 종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참모본부의 임무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41세의 산현유붕(山縣有朋)은 서남전쟁(西南戰爭)전쟁으로부터 동경에 돌아온 1878년 10월, 참의(參議)겸 육군경(陸軍卿) 그대로 의정관(議政官)을 겸임(兼任)하게끔 돼 있다.
 
이 때 참모본부설치를 말한 상신서(上申書)를 써서 그 속에 참모국장의 임무는 일본 총 육군의 정제절도(定制節度)를 심의해 병모병략(兵謀兵略)을 명확히 해 기무밀모(機務密謀)를 참획(參劃)해 평시에 있어서도 정지지리(政誌地理)를 심의하게 했다.
 
전시에 있어서는 도안(圖案)을 내고 부서를 정하여 노정(路程)을 한정하고 전략을 구획하는 등 군령에 관계하는 것은 국장이 관여하고 “원대(遠大)의 모략 외에 이를 행하게 하고 있다. 이것이 육군의 근기(根基)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참모본부가 설치된 이듬해인 1879년 에는 일본대리공사 화방의질(花房義質)이 4년 전에 체결한 강화도조약을 앞세워 인천 원산의 개항을 조선에 강요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오키나와의 귀속을 둘러싸고 일본과 청국의 대립이 점차 격화했다.
 
이러한 일본의 대외 침략정책이 강화하는 중에서 참모본부는 동년10월 관서국장에 독일공사관의 무관으로서 군사행정을 배우고 돌아온 가스라 타로(桂太郞)중좌를 발탁하여 그에게 대청(對淸)침략 작전의 대책을 기초하게 하는 한편 10여명의 장교를 은밀히 청국에 보내어 군사전략적견지로부터 병제, 군비, 지리를 조사, 연구하게 했다.
 
또 그 이듬해인 1880년에는 중국어학생의 명목으로 10여명을 보낸다. 그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안남(安南), 페루시아 방면 까지 참모본부의 군인이 파견 됐다.
 
그들의 파견이 ‘기밀의 규획(規劃)내에 이뤄지고 원대한 모략 외에 행하는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참모본부 편찬(編纂)과 편집(編輯)의 ‘인방병비략(隣邦兵備略)’(1880년)과 지나지지(支那地誌)는 이러한 조사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참모본부는 조선에도 군인을 보내고 ‘조선지지(朝鮮地誌)’를 편찬 하는 등 대조선(對朝鮮) 대청(對淸)침공 작전의 준비를 진행 하는 한편 산현유붕(山縣有朋) 참모본부장을 중심으로 군비(軍備)의 대 확장과 야전을 위한 정비를 강력히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자료만으로는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언제 어디로 파견되어 어느 지방을 돌아다녔는지 언제 돌아왔는지를 아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파견된 앞서 말한 대 조선(對朝鮮), 대청(對淸)침공 작전의 필요상 나가 미지요(那珂通世)가 쓰고 있는 바와 같이 조선과 중국을 돌아다니며 압록강을 건너 비가 있는 곳에 다 달은 것은 확실이다.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집안輯安)에 잠입했을 때 우연히 비가 있는 것을 알아 비문을 직접 읽어봐서 그 이용가치가 큼을 느껴 토지의 사람을 조수로 써서 비문을 쌍구(雙鉤)하든가 토지임자에 쌍구(雙鉤)시켜서 돌아갔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중국각지를 은밀히 조사하고 다닌 참모본부의 군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서 그의 이름까지 은폐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은 왜인가. 이름뿐만 아니라 비문의 해독작업이 행해진 것까지도 모두 숨기는 것은 왜인가! 이것은 중대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이상은 ‘李進熙’‘好太王碑の謎’74面~125面參照引用)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우창수, ‘아사달! 인류최초의 문명을 품다.(상)‘인류학적으로 본 조선 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 ‘明治維新から現代へ’.외 다수서책을 참조, 본문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이을형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0
감동이에요
0
화나요
0
슬퍼요
0
댓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