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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일본 참모본부설치와 조선침략 호태왕비 흉모(凶謀) 획책
1860년대 명치기의 일본인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기치 아래 구미제국에의 대항의식이 강하고 온 국민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심정이 기조가 돼 있었다.
여기서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란 민족의 발전을 강하게 바라는 의사(意思), 또는 행동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조선의 상황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천황에 따르는 민족’으로서의 의식이 강하게 교육돼, ‘국민의 행복보다 국가의 이익과 번영’이 우선하는 경향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근대화에 초점을 맞추고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반면 조선은 국가와 민족의 장래나 근대화에 관심을 두지 않고 외세가 몰려오는데도 국가수호를 위한 아무런 방비도 책략도 없었다. 대외정세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성리학의 전통적 가치에 매몰돼 척사위정(斥邪衛正)에만 몰두하고 있는 형세였다.
일본은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생산과 자본의 독점과 집중이 진행돼 대자본은 은행자본과 결부돼 금융독점자본이 성립하면서 금융자본이 전 산업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일본은 국내시장의 독점에 만족하지 않고 국외로 눈을 돌려 국외시장과 원료를 획득하기 위해 식민지화를 진행해 가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무력침략이 수반해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작태는 조선의 명성황후까지 시해하며 거침없이 가는 것이었다.
당시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획득 전쟁이 격화하며 열강들이 대립이 격화돼 가는 것을 본 일본은 조선, 만주에 권익의 독점적 지배를 노리며 침략의 마수를 펼쳐오는데도 우리는 눈앞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있었다.
이 과정에서 1875년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호태왕릉비를 발견 후 비를 자기들 구미에 맞게 글자를 넣기 위해 가진 흉모를 획책하는 이들이 일본 참모본부가 있었다. 이번 회는 이 본부가 언제 설립하고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 참모본부의 설립과 호태왕릉비조작 내면
일본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 화란, 포르투갈 등 서구열강이 식민지전쟁이 격화하는 때 명치유신이라는 격변과 정변을 거듭하면서 서구화에 다가서며 대륙침략의 야욕을 위한 침략에 혈안이 돼 있었다.
이를 완성하기 위해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호태왕릉비 발견으로 명치유신 10년 후인 1878년에 일본은 참모본부를 설치하고 일본고대사의 왜곡을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 그 중심에 참모본부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은 영국 상선을 현대식군함으로 개조한 운양호를 강화도로 보내어 조선영역을 침범하고 불법적인 측량으로 조일 간에 충돌하게 된다.
결과는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할 수 없어 1876년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라는 불평등의 ‘강화도조약’을 체결해 한국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다. 이는 일본이 일찍부터 조선침략을 위한 계획된 수순을 밟는 것에 불과했다.
조선과 만주 침략을 완수하기 위해 운양호사건 2년 후 참모본부가 설립된 것이었는데, 이 참모본부를 주축으로 일본고대사를 구축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역사를 조작하기 위해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천인공노할 호태왕릉비의 변조를 한다.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1883년 가져온 호태왕릉 비문을 만 5년에 걸쳐서 한자학자와 역사가를 동원해서 해석이 행해졌는데 그 이전부터 일본 참모본부는 여러 가지 형태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은밀하게 비 조작에 관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일본학자가 호태왕릉비의 존재를 알고 현지에 가기 이전부터 참모본부는 밀정을 통해 통제되고 있었다. 처음으로 일본에 가져온 본격적 탁본도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취해서 가져온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일본은 철저하게 숨겨왔으나 1922년이 돼서 ‘남연서(南淵書)’를 조작한 곤도 세이교(權藤成卿)가 처음으로서 이후 마스오카(松岡靜雄)도 청일전쟁 때 탁본이 일본에 왔음을 인정하고 있다. (歷史公論 第2권(卷)第 5號, 1933年).
일본군이 가지고 온 탁본이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고마스(小松宮) 소장(所藏)의 탁본에서 처음으로 일본학자 간에 연구를 하게 된 것은 이 고마스(小松宮)탁본에 의해서 미야게 요네기치(三宅米吉)의 ‘고려고비고 추가(高麗古碑考追加)’(1898년)로 보고 있다.
미야게 요내기치(三宅米吉) 이전의 간 마사도모(菅政友)나 나가 미지요(那珂通世)의 논문은 ‘회여록(會餘錄)’에 의한 것이고, 미야게(三宅米吉) 이후 처음으로 쓰여 진 본격적인 논문은 1913년의 실지조사에 따라서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것뿐이었다.
고마스(小松) 탁본에 관해서 미야게(三宅米吉)는 ‘사면(四面)을 각1매로 떴다.’고 하는데 높이 3m가되는 탁본용지는 비의 높이에 맞추어서 준비해서 간 것이라 판단된다.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 의 1893년에 참모본부편집과의 구라(倉辻) 공병대위에 의한 비의 조사는 1894년의 탁본 작성과 아무관계가 없었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자기 밑에 2인을 데리고 조선의 창성(昌城), 위원(渭原), 만포(滿浦)를 거쳐서 다시 만주에 가서 성경성(盛京省) 통화현(通化縣) 동구(洞溝)에 와서 고구려비를 보고 갔다.
참모본부의 고대사 왜곡에 적극적 개입 다 들어난다
먼저 결론부터 말한다면 일본은 수차례에 걸쳐서 호태왕릉비를 깨어서 회를 바르고 조작한 글자만도 수백 자에 이른다. 도쿄대학(東京大學)이 조작 변조한 것만도 240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 중심에 일본의 참모본부가 있었다. 여기서 파견된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집안(輯安)에 들어간 것도 의도된 호태왕릉비의 조사가 목적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청국(淸)國)과 조선 지배를 두고 청일 간에 긴장이 극도로 민감한 시기에 참모본부의 현역군인인 사가와(酒匂)가 창성, 위원, 만포를 거쳐서 만주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
한편 청일전쟁 때 사가와(酒匂景信)가 가지고 간 비문을 해독한 중심인물인 요고이 다다나오(橫井忠直)가 육군편수의 명함으로서 직위가 제2군사령부와 행동을 같이 한 것은 우연이었을가? 물론 아니다.
일본 참모본부편집과는 호태왕릉비에 관한 중국인의 문헌을 다 모우고 있었던 것이다. 니시가와 겐(西川權)의 ‘일한상고사의 이면(日韓上古史の裏面)에 영희본호태왕비문(榮禧本好太王碑文-(大原 少佐蒐集本)이 있는 것이 그 예로서 오하라소좌(大原少佐)는 당시 편집과장을 한 인물이다.
이와 같이 참모본부에 의한 조선, 중국 등 각국의 지형조사, 특히 민간조사가 1891~92년경에 일단락을 하고, 그 후는 군사전략 이외의 것은 제국대학(東京大學)에 맡기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태왕릉비에 관해서는 여전히 참모본부가 주도하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비문을 가져가기 전의 1882년에는 이미 고대에 있어서 조선 지배를 논한 ‘임나고(任那考)가 참모본부 편찬과(編纂課)에서 쓰여 지고 있었다.
이러한데서 일본학자가 현지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1905년 가을 이미 그 이전부터 참모본부는 호태왕릉비 조작에 깊이 관계하고 있었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참모본부는 비에 석회를 바르는 것이 사가와 쌍구본(酒匂雙鉤本)의 보강에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미나마 일본부(任那日本府)의 용병(傭兵)이라고 하는 ‘안라인술병(安羅人戌兵) 밑에 [만(滿)] 자(字)를 조작하는 등, 비를 훼손하며 비 변작을 자행한다.
이같이 왜(倭)의 활동을 보강하는 의도적 개찬(改纂)을 하고 미나마 일본부(任那日本府)가 가야지방에 있는 양 조작하였으나 지금 이를 믿는 일본학자는 70년대부터 살아지고 있다. 그것은 허구의 조작된 역사이기에서다.
그러나 아직도 호태왕릉비의 조작이 일본인들은 사실같이 믿으려 하나 이 조작 역시 다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교재에는 아직도 완전히 지우지 않고 일본이 고대부터 우리를 지배한 것 같이 왜곡하고 있다.(‘李進熙’ ‘好太王碑の謎’18面~132面參照)
위에서 보듯 왜곡목적으로 기획하고 조작을 자행한 것은 메이지 왕의 명령에 의해서 민간이 아닌 군(軍)이 작전일환으로 앞장서서 한 것은 바로 일본육군의 참모본부였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石井進外, ‘詳說日本史,‘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 ‘明治維新から現代へ’.외 다수서책을 참조, 본문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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