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계획적인 조선침략과 역사왜곡 끝이 없어
“일본사는 어디까지가 진실인가”를 쓰니 독자 가운데 필자가 반일적인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는 분도 계신데 필자는 이미 밝힌바 대로 반일도, 친일도, 아니다. 오직 ‘지일파(知日派)’로서 역사를 바로 쓰는 것이 앞으로 양국의 평화번영을 위하는 길이라 여긴다.
근세에 와서 일본이 가장 심혈을 기울려 역사왜곡을 한 것은 호태왕릉비에 대해서다. 우리는 너무 역사를 소홀히 하는 것 같은 것이 문제이다.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역사를 도둑맞아 잊어버렸다.
일본은 ‘고사기’ ‘일본서기’ 등에서도 일본위주로 역사왜곡을 해 왔는데 근세에 와서 호태왕릉비가 고대사를 밝히는데 결정적인 유물이기에 일본은 이 비를 훼손하고 글자를 빼고 넣고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조작·변조·왜곡을 하며 침략야욕을 채워 갔다.
그런데 우리는 도둑맞은 역사를 바로 찾겠다는 의욕이 희박하다. 1875년 일본은 구로다(黑田淸隆)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이 군함 8척에 육군 800여명을 태우고 강화도에 상륙해 조선정권을 협박해서 그 이듬해 불평등조약을 맺음으로 침략이 가속화됐다.
조약의 주된 내용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너무 치욕적이다.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은 20개월 이내에 부산이외의 2항(港)을 개항할 것’, ‘일본상인의 무역 거주에 필요한 토지임차, 가옥(家屋) 조영(造營) 및 임차(賃借) 등의 편의를 도모 할 것’, ‘일본은 조선의 연해, 도서(島嶼), 암초 등을 자유로 측량하고, 도지(圖誌)를 작성할 수 있게 할 것’, ‘일본은 조선이 지정한 항구에 영사를 파견해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상인의 범죄는 일본국 관원이 심단(審斷)할 것’ 등이다.
각 조항이 자주성을 상실한 불평등조약이다. 더욱이 동년 8월에는 ‘일본외교관이 조선상주, 수원(隨員) 가족의 동반 및 조선국내 여행의 자유, 일본국화(國貨)의 조선국내 유통의 허가’ 등을 정했다. 부록으로서 ‘선박이외는 수출입관세의 무세를 정한 ‘통상장정(通商章程)’이 강요됐다. 말이 아니되는 내용이다.
한편 역사왜곡을 동시에 자행하며 호태왕릉비에 군부(軍部)가 전면에 서서 집요하게 호태왕릉비마저 일본에 가져가기위한 획책까지 한다. 오늘은 이에 대해서 살펴본다.
호태왕릉비 역사사실 왜곡한 일본학자 등 비 반출필수 호소
일본의 구 참모본부는 호태왕릉비를 변조·조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비 그 자체를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했다. 동양사의 대가라는 학습원(學習院) 대학 시라도리 구라기치(白鳥庫吉) 교수는 1905년 8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비문이 유명한 것은 조선 남부에 신라, 백제 임나(任那)의 3국이 일본의 신민(臣民)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쓰여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상 매우 가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3국이 일본에 조공한 것이 혹은 속국이 됐던 일이 있으나 일본의 역사 등에는 소위 전설이어서 역사상 가치가 적은 것이다. 따라서 이 비문은 당시에 있어서 가장 신용할만한 역사상의 유물이다” 그는 허구의 역사를 진실인양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비는 일본의 역사에 중요한 재료를 제공한 것이다. 나는 이 비를 일본에 가져와서 박물관이라든가, 공원에 세우는 것은 실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비문은 일본에 없는 것을 쓰고 있다…일본이 지난날 고구려에 패해서 조선에 세력을 얻을 수 없었다”
“이제 지나(支那)와 싸우고 지금 노국(露)國)과 싸우는 것과 같이 정치상 관계보다 고구려와 싸움을 개시한 것과 흡사하다고 하며 일본이 대륙전쟁에 패하면 다시 대륙에 나가는 것은 용이 한 것이 아니다. 이번 전쟁에 어떻든 이기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것은 고대 고구려에 패해서 일본세력이 대륙에 나갈 수 없었기에 일본이 대륙에 전쟁에 패한다면 다시 대륙에 나가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지금 이번 전쟁에서도 시비가 어떻든 러시아에 이기지 않으면 아니 된다”(白鳥庫吉全集, 第五卷).
여기서 회여록(會餘錄) 제5집은 사가와쌍구본(酒匂雙鉤本)이 메이지천황(明治天皇)에게 헌상한 그 이듬해(1889년 6월)에 쓰여 졌다.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대청작전(對淸作戰)의 구상(構想)이 일본 참모본부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되고 있을 때 출판됐다.
어용학자인 시라도리(白鳥) 교수는 러일전쟁 시기에 일본침략전쟁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는데서 호태왕릉비가 얼마나 중요시됐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白鳥庫吉全集, 第五卷).
시라도리(白鳥) 교수는 1905년부터 비 반출을 열심히 말했다. 그러나 러일전쟁 중이라 이를 실행 못하고 러일전쟁이 끝난 1906년에는 이 계획이 구체화로 현지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1906년경 압록강 한 지류(支流)인 동가강(冬佳江) 상류지방에 있는 호태왕릉비의 사적의 석비를 운반하려고 군정서(軍政署)의 승탁(承託)도 얻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인(友人)인 오하라(大原)도 같이 갔다고 말하고 있다.
이 오하라(大原)라는 참모본부편찬과장을 하며 봉화현(奉化縣)의 지현(知縣=知事)이었던 영희(榮禧)가 의문의 영희본(榮禧本)을 만들었다는 그것을 수집했다는 참모본부 오하라리겐(大原里賢)소좌(少佐)로 보고 있다.
시라도리(白鳥)는 호태왕릉비를 일본으로 가져가기위해 해군이 압록강 하구까지 군함을 돌릴 것을 다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연구자들에 의해 널리 알려지고 있다.
그 때 당사자의 한 사람인 퇴역 중장 오시가미 모리소(押上森藏)는 1918년 10월, 일본역사지리학회의 예회(例會)석상에서 비를 운반 할 계획이 있었던 것을 발표했다.
그런데 오시가미 모리소(押上森藏)는 비를 운반하지 못한 이유를 “비가 커서 운반이 곤란해서 또 자면(字面) 손상의 위험이 있어 중단했다”고 하고, 시라도리(白鳥)는 “한국의 것을 가져와서 물의를 자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거짓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진실을 왜곡한 것이다. 집안(輯安縣) 향토지(鄕土誌, 1915년)에 집안현지사(輯安縣知事)의 오광국(吳光國)이 봉천(奉川) 제학사(提學使)에 보낸 1907년 5월부(付)의 주목할 문서가 있기 때문이다.
침략전쟁위해서 비 일본반출 시도한 참모본부
그 문서를 보면, 오광국(吳)光國)은 일본군 제50연대장 오사와 도크헤이(小澤德平) 대좌(大佐)가 와서 비를 일본박물원(日本博物院-지금의 도쿄박물관)에 진열하고 싶으니 팔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집안현지사(輯安縣知事)의 오광국(吳光國)은 그것은 민간의 것이고 거기의 비석은 무겁기 때문에 운반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호태왕릉비의 무게는 37t에 달한다.
여기서 오사와 도크헤이(小澤德平) 대좌는 대포 등을 운반하는 병륜(兵輪)의 무게는 비의 중량과 비슷하다 병륜(兵輪)이 바다에 떨어지면 그것을 인양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데 비의 운반은 이러한 병력수송의 방법으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오국광(吳光國)은 일본군이 다시 호태왕릉비를 운반하려고 올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해 비를 매입해 거기에 정자를 지어서 이를 보호했다고 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 오사와 도크헤이(小澤德平)대좌가 호태왕릉비를 운반하기 위해 용의주도(用意周到)한 준비까지 해서 간 것은 사실이다. 당시 오사와 대좌는 제57연대가 평안북도 정주(定州)에 주둔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어떠한 자인가는 잘 말해준다.
오사와(小澤德平)는 육군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1885년 5월에 참모본부에 들어간 이래, 전후18년 간 참모본부부원으로서 청국(淸國)각지를 정탐한 인물로서 ‘회여록(會餘錄)’이 출판되는 1889년 6월에는 참모본부 제2국에 있었던 인물이다.
여기서 호태왕릉비의 발굴과 운반을 어디에서 계획하고 누가 그것을 오사와 도크헤이(小澤德平)에게 명령한 것인가의 자료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비와 관계되는 군인 모두가 참모본부 부원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답은 쉽게 나온다.
이 호태왕릉비의 운반계획은 집안현지사(輯安縣知事)가 예견한 바와 같이 간단히 포기하지 않았다. 1917년에 다게우치 에이기(竹內榮喜)중좌(中佐)가 “친히 현지를 방문해 능비(陵碑)를 검토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歷史公論, 第2卷 第5號,1933年).
이 다게우치 에이기(竹內榮喜)도 참모본부에 근무한 일이 있는 인물로서, “능비(陵碑)를 검토”한 1917년에는 조선주답사령부(朝鮮駐剳司令部)의 부관(副官)이었다.
앞의 ‘역사공론(歷史公論)’에 게재한 논문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비문을 갖고간 7년 후의 1891년에 사망해 이름과 경력도 바로 전하고 있지 않은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참모본부 부원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가와쌍구본(酒匂雙鉤本)의 정확한 자수(字數)를 처음으로 비문연구 상의 적은 문제점까지 정통하고 있었다. 더욱이 1917년이라고 하면, 일본에 있어서 호태왕릉비의 연구는 거의 결과가 나와 있는 때이다.
이러한 시기에 고급장교가 무엇 때문에 ‘능비(陵碑)를 검토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인가’ 이는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 조선 침략의 합리화를 위한 집요한 책략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심에 일본 참모본부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130面~139面 參照, 引用했음을 밝힌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石井進外, ‘詳說日本史,‘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 ‘明治維新から現代へ’.외 다수서책을 참조, 본문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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