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지난 15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병합 돼 온갖 고초와 온 국민의 질곡에서 해방된 조국광복 71주년을 맞는 날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는 일제에 의해 우리영토와 말과 글, 국기와 애국가, 신앙까지도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숭배케 하며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창씨개명까지 강제적으로 시행하는 철권통지로부터 조국의 광복을 한 날이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71년 전인 1875년 군함인 운요호로 강화도를 침범하고 무력을 앞세워 조선침략을 각본대로 진행했다. 70년 동안 말 할 수 없는 노략질을 하고 우리 애국지사를 살해하고 온 국민을 전쟁의 희생 제물로 몰고 갔다.
일본의 잔악무도한 행태는 1910년 강제합방 후 10년만 봐도 알 수 있다. 명성황후를 시해 후 강제합방을 한 일본은 전 농지의 50%에 해당하는 10만ha 이상을 약탈하고 그 결과 전 농민의 75%가 토지를 잃고 소작인42%가 되거니 아니면 토지관리인으로 전락하게 했다. 약탈한 토지는 일본인에게 귀속시키는 야만 행위를 자행했다.
농민에게는 무거운 혈세를 부과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수입이 50%를 이상이었고 합병 후 4년 간 5~6배(78.8%)나 증수하는 만행을 자행 했다. 이로 인한 우리국민의 삶은 비참 그대로 질곡의 나날이었다. 1910년~1919년 10년 간 쌀 18배, 면화(棉花) 28배 증수를 하는데 그 고통은 우리국민의 몫이었다.
이와 더불어 우수한 우리한민족의 민족성의 철저한 말살을 기하기 위해 우리나라 상고사는 물론 고대사까지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두고 통계만도 22만 수천 권을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러 우리 역사말살을 시도 했다. 불과 10년만의 일이었다.
이 만행으로 우리나라 상고사와 고대사의 맥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리 선각자의 꾸준한 연구와 저술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음은 참으로 고맙고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번 32회 ‘고조선역사 답사팀’은 이틀 째 되는 날 고조선의 중심활동 무대였던 조양(朝陽)으로 옮기었다. 가는 길목에서 바라보는 중국은 그전의 중국이 아니었다. 길도 2차선으로부터 8차선으로 잘 정비돼 있었다. 중국의 발전상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동북공정으로 우리역사침식 흉계는 성공할 수 없다.
오늘은 이미 다룬 고조선과 중복되는 점이 있겠으나 현지를 답사 후의 글임에서 양해를 구하며 붓을 옮긴다. 답사 이틀째는 조양(朝陽)과 이 일대에서 우리선조들의 활동 했던 옛 유적과 유물을 돌아보며 고조선 당시의 발전상을 살피려 답사에 나셨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왜곡에는 분노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현장이었다.
중국이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를 지우고 만주족을 띄우며 우리한민족의 만주연고(滿洲緣故)를 삭제하기위한 동북공정현장을 돌아보고 참으로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이곳은 고조선역사의 중심지인데 우리역사는 뒷전으로 옮기고, 우리한민족의 만주 연고를 애써 지우며 중국이 내세우는 요(遼), 금(金), 원(元), 청(淸)의 역사로 뒤바꿔놓은 것을 보며 우리역사를 우리자신들이 소중히 하지 못한 것을 탓하게도 했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만 중국이 상고사가 없고 고대사가 보잘 것 없는데서 56민족이 역사구심력 강화를 위한 일환으로 우리고대사를 ‘서북공정’을 통해 요(遼)와 금(金), 원(元)의 몽골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시키고 청(淸)역시 중국역사에 편입돼 있었다.
이 후, ‘서남공정’을 통해 티베트족의 역사를 침식하고 이를 마치자 1990년대 중반부터 ‘동북공정’으로 우리역사를 초토화 하는데 온 심혈을 기우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참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분노와 안타까운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국가의 철저한 국가프로젝트에 의해 중국을 지배해온 우리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고려 영역이 현재 중국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의 역사라는 것인데, 이는 패권주의적 역사인식의 산물로 용납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논리라면, 이스라엘 민족이 2000년간 영역(領域)이 없이 헤맬 때 이스라엘역사가 없었느냐! 중국은 남북한이 분열된 것을 기화로 학교교과서의 지도도 대동강까지 중국으로 표기하고 대동강에 단동(丹東)이라 표기하고 있음을 보며 기가 참을 느꼈다.
이것은 북한이 붕괴될 경우에 과거 고구려영역에 대한 연고권을 내세워 북한을 장악하려는 중국의 음모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것이 표출한 것이 지도가 말해준다.
중국의 역사왜곡은 지금 시작한 것이 아니고 고대부터 역사왜곡을 해왔지만 이렇게 까지 무자비한 억지주장은 우리를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곳은 우리민족의 가장 오랜 기간 이곳을 지배하며 중국대륙에 많은 영향을 끼쳐온 곳이다. 아무리 억지를 해도 당시 중국 화하족(華夏族)은 이곳에 살고 있지도 않았다.
중국화하족(華夏族)이 동북으로 옮겨와 살게 된 것은 최근이다. 최근에야 이곳으로 이주해 왔는데 130여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의 억지가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아래사진은 요녕성(遼寧省)에 있는 단군제단(檀君祭壇)이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단으로 거대한 통 돌로 돼있다. 안벽에는 글자가 가득히 쓰여 져 있는데, 중국은 벽에 새겨져 있는 글자를 다 기계로 밀어서 지워 없앴다.
고조선의 도읍(都邑)이 이곳에 있고 고조선의 황동무대였다.
이곳이 상고시대부터 고대에 우리영역임은 고조선의 도읍이 이곳에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 ‘고조선조(古朝鮮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나간 2000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는 사람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세워 이름을‘조선(朝鮮)’이라하니 요(堯)와 같은 시대였다.”고 말하고 있다.
위서(魏書와 다른 고기(古記)에는 고조선의 도읍의 명칭에 관해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고기(古記)에는 평양성,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 장당경(藏唐京), 아사달(阿斯達)등 4곳의 명칭이 등장하는데 이곳을 고조선의 도읍으로 삼았다고 말하고 있다.
고조선의 도읍지도 이곳에서 명칭은 바뀌면서도 광활한 영역을 넓히며 주 도읍지는 아사달로서 이 지역을 지배했던 것이다. 신시대 말기 단군 초에 이미 농경사회로 발전했고, 청동기 문화에 들어 와서는 광대한 영역의 강대한 국가를 이루었다.
그런데 국가 민족을 팔아먹는 ‘좀비족’들은 근거 없이 ‘대동강 유역설’을 고집해 이를 부인하는 것은 연구부족과 일본식민사관의 입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번 답사에서 이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봤지만 이 요하(遼河)지역에서 한반도와 동일계통의 비파형 동검 등 청동유물과 토기가 이곳 요녕성(遼寧省)에서 접하며 이곳이 고조선의 활동무대였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우리단군선조(檀君先祖)께서는 나라이름을 처음에는 ‘아사달’이라 하고 배달임금이라 부르던 데서 후일 조선(朝鮮),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는 한자(漢字)칭호로 바뀌었다.
종교가 중요한 지배원리였던 이 시대의 단군(檀君)은 제천(祭天)을 주관한 제주(祭主), 천군(天君)의 칭호이고, 왕검(王儉)이란?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의 임금을 이두(吏讀)로 왕검(王儉)이라 했던 것이다.
이로써 단군이전의 환국(桓國), 신시시대 배달국과 단군조선(고조선)시대는 분명히 구분해서 보아야하는 것이다. 단군의 고조선은 2000년 넘게 존속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47대의 단군이 지금 전하는데 이는 고조선의 임금님들 중 그 업적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진 단군임금만을 추려47대로 압축한 것이다.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란 말은 단군이 개국한 나라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광활한 지역에 수많은 한민족(韓民族)들이 혈통 상, 다 단군의 피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단군할아버지’처럼 조상을 친근히 부르는 말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군을 신화(神話)로 둔갑하는 것은 한민족조상에 대한 모욕(侮辱)이고 자손의 도리가 아니다.
단군은 설화(說話)에 나온 곰의 아들도, 신(神)도, 하느님도, 아니며, 고조선을 개국한 우리 실존(實存) 조상(祖上)이다. 이를 역사 첫 머리에 찍어낸 것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선생이었다. 선생은 우리 고조선역사의 출발점을 정확히 본 것이다.
단군조선의 고증은 제대로 해야, 위서로 장식은 허구(虛構)이다.
조선조는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을 폈지만 백 년 전의 세대까지도 단군을 변함없이 국조(國祖)로 받들어 당시 조선의 아이들이 [천자문] 다음으로 배우는 교과서 [동몽선습(童蒙先習)]에서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때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가르쳤다.
이는 의문이 여지가 없이 우리조선족 대대로 수천 년간 전해지던 시대 상식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의 신식군대에서 부르던 군가도 “단기 내려 고 강산에 우리나라 새롭도다.”하는 노래를 최태영 선생의 어릴 때만 해도 동요처럼 불렀다고 했다.
그런데 일연은 [삼국유사]에 [고기(古記)]를 인용해 단군이 고조선의 환웅 족, 곰 토템 족, 호랑이 토템 족의 3부족 연맹에 의해 성립된 개국과정을 설명하면서 매우 신화적 설명을 첨가해 한 덩어리로 혼합해 뒤섞어 놓았다.
이것이 [위서]의 고조선개국기사보다 더 자세하고 긴 설명이기 때문에 단군의 고조선 개국전체가 마치 신화인 것처럼 외양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고기]의 기록이 신화적이라고 해서 [위서]의 역사적 기록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고 신용하교수도 말한다.
문제의 신화나 전설은 국가 창건이전 신시시대(神市時代)의 사상과 제도를 고조선이 이어 받은 전통일 따름이다. 이를 왜곡하는 것은 역사연구부족에서 제대로 역사를 보지 못하는 역사무지일 뿐이다.
일연이 단군조선의 개국을 [삼국유사]에 기록하면서 [고기(古記)]와 함께 인용한 ‘위서(魏書)’는 중국의 사서(史書)임에는 틀림없으나 오늘날 전하는 ‘위서(魏書)’는 아니다.
정인보 선생은 [조선사연구]에서 “그것은 탁발(拓拔)의 위(魏)시대 ‘위서(魏書)’가 아니고 지금은 전해지고 있지 않은 왕침(王枕)의 ‘위서(魏書)’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듯하다”고 했다.
일연이 인용 했던 ‘위서(魏書)’에는 고대 조선을 예찬하는 기록이 상세했기에 송대(宋代)에 이르러 중국에 유리하도록 내용을 윤색(潤色)할 즈음 조선에 관한 기록도 삭제 변작(變作)한 결과라고 했다.
최남선 선생은 [삼국유사] 해제(解題)에서 “그 위서(魏書)를 오늘날의 ‘위서(魏書)’로만 보는 것은 정견(正見)이 아니다”라고 했다. 역사를 제대로 보아야 잘못된 역사를 볼 수 있고 잘못 왜곡된 역사를 가지고서는 영원히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없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智勝, ’上古史‘-桓檀古記古記, 符都誌의 실상-.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 ’山海經‘. 大連出版社, ‘行走 大黑山’.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石井進外, ‘詳說日本史,‘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劉泳,海燕,‘赤蜂博物館’. 黃斌, 劉厚生, ‘箕氏朝鮮史話’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石井進, 笠原一男, 兒玉幸多, 笹山晴生, ‘詳說日本史’. 西東社출出版部編, ‘日本の古墳,古代遺跡’.외 다수서책을 참조, 본문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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