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문명보다 2000년 앞서 문명 이룬 한민족

입력 2016-09-04 2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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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오늘 세계사는 새로 쓰여야한다. 서양사를 중심으로 구분된 시대구분으로 인해 한민족의 역사가 누락됐다. 세계 5대문명이 한민족에 의해서 이뤄졌으며 우리는 신석기시대 당시 철기시대 문명을 이뤄낸 민족이다.
 
지금까지 기원전 1만년~기원전 3000년까지가 ‘신석기시대’고 이후 2000년을 ‘금석기시대’로 구분돼 있다. 하지만 이미 이 시기 우리한민족은 철기가 아니면 조각할 수 없는 옥을 다뤘다. 이는 요하문명(홍산문화) 유적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연히 세계사적 구분이 달라져야 한다. 제대로 고쳐져야 한다. 이 잘 못 된 기록의 배경은 ‘요하문명=홍산문명(紅山文明)’이 일어나기 이전의 역사만을 중심으로 역사를 엮어놨기 때문이다.
 
세계역사학자들도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까지 고대 문명은 기원전 4000년~기원전 2500년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요하문명은 이보다 2000년이나 앞서 일어났다. 지금껏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황하 등만을 4대문명의 발상지로 구분지은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요하문명을 일으킨 이가 우리 한민족이다. 자연히 인류문명의 기원(起源)은 바로 우리 한국에서 발원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번 중국답사 중 조양시(朝陽市) 우하량(牛河梁) 국가고고유지공원(國家考古遺趾公園)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는 우리한민족이 인류문명역사의 주체로서 우리민족에 의해 세계 최초의 문명이 태동했음을 2년 전 본 칼럼을 통해 밝힌 바 있다. 우리 민족에 의해 탄생된 ‘요하문명’이 세계 4대문명보다 앞서 발원된 ‘세계 5대문명’ 중 하나이며 그 시원국이라는 것이다.
 
요하문명은 배달국시대의 산물이다. 우리는 그 시대에 이미 철기를 이용해 요하문명 일명(一名)‘홍산문화’시대에 에 나온 유물로서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오늘은 세계학자가 다 같이 찬사를 아끼지 않은 요하에서 일어난 ‘홍산문명’이라는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는, 기록과 유물 뿐 아니라, 문자가 없던 시대에도 구전(口傳)으로도 전해온 ‘세년가(世年歌)’를 통해서도 전해온 사실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의 상고시대 고대역사는 세계학자에 의해서도 인정되고 있다
 
답사팀은 지난달 4일 적봉시(赤峰市)에 있는 적봉박물관(赤峰博物館)-홍산공원(紅山公園)-유물(遺物)거리-옹우특기박물관(翁牛특特旗博物館)에서도 중국 당국의 역사외곡 현장을 마주할 수 있었다.
 
우리 역사를 지우고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의도가 너무 확연했다. 그것은 거란족 여진족, 만주족을 앞세워 고조선을 지우려는 것이었다. 원(元), 거란(契丹), 요(遼), 금(金), 명(明), 청(淸)의 역사는 중국에서 많이 앞세우나 우리역사의 흔적은 다 지워져 있어서 우리 역사자료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참으로 유감이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에 우리는 철을 다루며 요하문명을 일으킨 자부심은 마음에서 꺼지지 않고 오히려 요(遼)와 거란(契丹), 금(金)의 역사도 따지고 보면 우리의 역사다.
 
이 역사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된 자체가 잘못 돼 있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성리학이 가져다 준 사대주의가 낳은 산물이다. 편을 가르고 당파놀음은 우리 역사를 중국에 넘겨준 결과가 됐다.
 
우리는 선진문화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하는 메아리는 하루 속히 우리역사의 확립이 절실히 요구 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실감했다.
 
그래서 귀국해 우리고대사 바로세우기 위해 사료(史料)를 찾으나 당(唐), 명(明), 원(元), 청(淸)에 의해 우리고대사 사료가 다 사라진 것은 슬픈 일로 참으로 안타깝다.
 
그래도 자료의 이삭을 주어보면 삼국유사(三國遺事)보다 10년 뒤인 1287년에 편찬된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보면 다음과 같이 돼 있다.
 
“동에 별 천지가 있으니 중국과는 아주 구분되며 3면은 바다이고 북 쪽은 대륙과 이어진 중방(中方) 천리 땅이 조선이다. 천하의 명승(名勝)이고 평화로운 고장, 예의 바른 집으로서 중국인이 다른 미개국들과는 다른 문화국이라고 일컫는 나라이다. 단군이 개국해 조선의 국토를 차지하고 임금이 됐다”
 
상당히 빈약한 자료다. 그나마 제왕운기(帝王韻紀)에 계속되는 글귀는 단군의 후예국(後裔國)들을 지적해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시라(尸羅), 고례(高禮), 예와 맥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 열국이모이고 헤어지며 강성하고 쇠퇴해 삼한이 이루어졌다. 주(洲)와 현(縣)이 산곡간(山谷間)에 흩어져 각각 나라라 일컬으며 서로 침략했다”
 
“그 중의 대국은 부여(夫餘)와 비류국(沸流國)이었고, 다음은 삼국과 남북 옥저(沃沮)와 예맥이었다. 그들의 왕의 조상은 모두 단군의 계통이었음은 물론이다”
 
필자는 이번 현지답사를 통해 우리선조들이 나라를 세우고 빛냈던 현장을 돌아보며 그 실체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상고시대부터 고대 일상생활에 쓰던 토기며 넓은 주거지를 확인해 답사할 때 그 흔적은 우리 선조들이 고대에 이렇게 대륙에서 대 집단을 이루고 살면서 고대문명을 일으킨 발상지를 밟는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편찬자 김부식(金富軾)은 사대주의적 입장에서 단군(檀君)의 고조선사(古朝鮮史)를 의식적으로 피해 단군과 상고사를 잘라내고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부터의 역사를 저술했는데 그 매국적인 역사기술에 어떻게 그렇게 기술했는지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고구려 본기(本紀)에 와서 “평양은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옛 도성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위치에 대한 논란에 앞서 왕검이 고조선 건국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그가 평양을 기자(箕子)의 근거지로 보지 않았음은 주목된다.
 
한편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지난 계축년(癸丑年) 4월 구삼국사(舊三國史)를 구해 동명왕(東明王) 본기(本紀)를 읽었다. 그런데 김부식이 중찬(重撰)한 국사에는 이 부분이 매우 약술돼 있다. (越癸丑四月 得三國史, 見東明王本紀, 金公富軾 重撰國史 頗略其事)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김부식은 당시 건재했던 고대역사책들을 통해 단군의 고조선개국을 당연히 알았음에도 중국과 충돌해가며 우리상고사의 정확한 연대와 지역을 피하고 우리가 중국보다 앞섰음을 말하고 요동 옛 땅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많은 고서(古書)를 쌓아 두고서도 단군의 세운 고조선을 외면하고 단군(檀君)이라는 단어가 정사(正史)에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삼국사기]에 단군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백성이 진정한 글에서만 단군을 비추었을 뿐이다.
 
그러면서 우리고대사를 “고대기록이 거칠다”는 등의 변명을 늘어놓고 발해지역까지도 줄여 고대사를 얼버무린 매국행위는 용납 할 수 없는 만고의 역적행위를 했다.
 
단군개국 세년가(世年歌)로도 전해졌고 국조로 모시고 사당지어 제사
 
김부식(金富軾)은 중국에 잘 보이려고 고조선개국을 외면했으나 환국, 배달국은 말할 것도 없고 단군의 고조선건국은 역사기록과는 별도로 백성의 노래를 통해서도 단군의 개국과 그 역사가 구전(口傳)돼 내려 왔다. ‘세년가(世年)歌)’가 바로 그것이다.
 
10월 수릿달이면 하늘과 조상에 제사하는 제천(祭天)이 소도(蘇塗)에서 행해지고 여기서 신지(臣智)라는 관명의 제관(祭官)이 조상의 건국과 통치업적, 후인들에게 가르칠 일들을 노래로 전했다.
 
소도제천의식(蘇塗祭天儀式)은 대개 삼한시대(三韓時代) 혹은 삼국시대(三國時代)까지 계속 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삼한(三韓)과 백제(百濟) 등 여러 나라에 각각 별읍(別邑)이 있어 솟대를 세우고 제천(祭天)을 행 했다.
 
최태영 선생은 어렸을 때 자란 구월산 장련읍(長連邑)에도 ‘솟대백이’라는 넓은 벌이 있었고, 아사나루와 아사신당도 있었다고 어렸을 때의 일을 기억하고 말하고 계셨다. 이 지명은 다른 여러 지방에도 있었다고 하시며, 고조선의 수두교는 요(遼), 금(金)등 중국각지에 널리 분포 됐다고 보고 들은 이야기를 확인하고 계셨다.
 
우리민족이 많은 국난(國難)을 겪으면서도 단군조상에게 제사하며 ‘세년가(世年)歌)’를 불러온 사실은 세종실록(世宗實錄)과 유희령의 ‘표제음주 동국사략’ 등에도 나와 있다.
 
‘세년가(世年歌)’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도공들이 일본가고시마의 미야마(美山)에서도 단군사당을 건축하고 일제강점기간까지 해마다 단군제사를 받들며 ‘세년가(世年歌)’를 불렀음이 확인됐다.
 
1988년 이병도(李丙燾)박사도 말년에 단군의 실체를 재확인하는 글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예부터 단군을 국조로서 사당(祠堂)을 세우고 최고의 조상으로 받들어 왔는데, 그것이 끊어진 것은 일제강점 때 부터였다. 지금까지도 여러 곳에 그 제단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 그제단의 진설도와‘세년가(世年歌)’가 세전(世傳)돼 오고 있다”
 
“신화(神話)나 전설(傳說)에 지나지 아니한다면 이처럼 역대왕조에서 조정의논(朝廷議論)에 의해 받들지는 아니 했을 것이다. 아무튼 실존 인간 단군과 영구한 역사를 이어온 고조선에 관해는 더 연구할지언정 신화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이병도 박사의 글도 그 제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은 무지와 무례를 서슴지 않은 우리 사학계일부의 식민사관론 자는 도대체 어느 나라 백성인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의 환국과 배달국의 실체와 그 선조들이 남긴 요하문명까지 부인할 수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고대부터 우리는 천민(天民)으로 하늘에 제사는 유명하지 않은가!
 
부여, 고구려, 동예, 신라, 고려의 제천도 같은 국가적 대 제전(祭奠)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열두 부족이 가을 추수 한 후 한데모여 하늘에 제사지내온 것은 천손(天孫)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축제로서 떡과 술이며 음식을 나누어 온 전통이다.
 
고대 단군 이래 소도행사(蘇塗行祀)나, 부여(夫餘)의 영고(迎鼓), 고구려(高句麗)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신라, 고려이래의 연등회(燃燈會)같은 국가적 대제전(大祭典)은 모두 같은 의미의 행사인 것이다.
 
구한말(舊韓末) 이후 민족정신이 고취되면서 10월에 행해지던 민족의 오래 전해온 풍습을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과 함께 10월3일을 개천절(開天節)로 살려 냈다.
 
일제시대에는 ‘조선사편수회’ 식민사관자라고 일컬어지던 이병도(李丙燾)박사도 규원사화(閨怨史話)등 한국사의 고증(考證)을 통해 우리역사를 바로 알게 된 후 “개천은 바로 단군의 고조선 개국을 의미하는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정인보 선생의 지은 ‘개천절노래’는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 아버님은 단군이시니…”로 시작된다. ‘제헌절노래’는 “비구름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적 삼백예슨 남은 일(餘事)이 하늘 뜻 그대로였다…”는 내용이다. 삼국유사의 단군 고조선 개국을 노랫말로 옮긴 것이다.
 
국어 학자이신 이희승(李熙昇)선생도 단기4319년(1986년) ‘개천절에 부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우리는 단군어른이 나라를 세워주신 은덕에 감사하며 그 자손으로서 국조단군에 대한 숭모의 정은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도의적의무감과 인간적 정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단군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우리겨레 사이에 뿌리박혀 온 것이다. 단군에 대한 진실은 ‘3.1독립선언’에서도 조선개국 4252년이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우리 건국정신 기원(紀元)이 단군의 개국에 있다는 것을 말 하는 것이다”
 
한 평생 단군역사를 연구해온 최태영 선생은 “먼 옛날부터 우리조상이 단군이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것도 우리민족의 확신과 신성한 합의에 의한 것입니다”고 말했다.(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19면 이하 참조 인용)
 
그러나 필자는 우리나라 건국의 기원은 우리역사를 바로정립한 후, ‘상고시대’ 환국과 배달국 시대로 올라가서 ‘개천절’을 바로정하는 일 까지 염두에 둬야 함을 느꼈다.
 
그것은 우리선조의 옛 영토를 밟으며 하루도 뇌리에서 벗어나지 아니했다. 중국이 역사왜곡은 우리역사뿐 아니라 우리조상들까지 자기들 조상으로 둔갑하는 마당에 용납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건국기원은 상고시대로 가야함을 문제제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을 자기들의 조상으로 가져가는 것을 막고, 우리나라역사를 바로잡기위해서도 우리나라 개국기원은 상고시대 환국(桓國)과 배달국(倍達國)으로 올라가야 함이 옳은 것이다. 역사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쓰는 것이 역사의 올바른 것이기에 서다.
 
이는 아직도 유구한 우리상고사와 고대사의 연구가부진 함에서 기인하고 있음에서인데, 이번 ‘32회고대사답사’를 통해 가는 곳 내내 내마음속깊이에서 잊어지지 않았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古記, 符都誌의 실상-’.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 ’山海經‘. 大連出版社, ‘行走 大黑山’.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石井進外, ‘詳說日本史,‘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劉泳,海燕,‘赤蜂博物館’. 黃斌, 劉厚生, ‘箕氏朝鮮史話’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石井進, 笠原一男, 兒玉幸多, 笹山晴生, ‘詳說日本史’. 西東社출出版部編, ‘日本の古墳,古代遺跡’.외 다수서책을 참조, 본문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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