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지배한 한민족…1천년간 대륙 정벌한 예맥

입력 2016-11-05 11: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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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우리나라 역사교과서(歷史敎科書)는 아직도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의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이는 선조(先祖)에 대한 모욕(侮辱)이요 있을 수 없는 만고(萬古)의 역적(逆賊)과 진배없다.
 
반도식민사관자(半島植民史觀者)들은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을 정복해 사군(四郡)을 설치했고 또 우리한민족을 정복했다고 가르치고 있으나 이는 모두 허구다.
 
한무제(漢武帝)는 우리민족을 다스리지 않았다. 이는 중국(中國)이 3대 역사서(歷史書)의 하나라고 내세우는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에도 분명하게 명기(銘記)돼있다. (三國志, 第三十 東夷傳).
 
이것은 한무제(漢武帝)가 사군(四郡)을 설치(設置)했을 때 이곳에 거주(居住)하던 우리한민족(韓民族)은 한무제(漢武帝)의 지배(支配)를 받는 중국민족(中國民族)과 분리(分離)돼 한무제(漢武帝)의 지배를 받지 아니했다는 것을 입증(立證)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반도식민사관자(半島植民史觀者)들이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그릇 해석한데 기인하는 것이다.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보다 강대한 예맥이 엄연히 존재한 사실을 제대로 알면 이 위조사는 해소(解消)된다.
 
당시 기자조선(箕子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 한사군(漢四郡), 한인(漢人) 집단(集團)들은 예맥(銳麥=濊貊)의 강대(强大)함에 우리영토를 엿볼 엄두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은 40여대(餘代) 계승됐다고 하나 그 실체가 없다. 40여대(餘代)에 관한 군주(君主)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기록된 자(者)가 한명도 없음은 이를 증명한다. 이것도 억지로 때려 맞추어 구성(構成)한다고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자조선 역사적(歷史的) 기록(記錄) 위서(僞書) 外 전무
 
올바른 역사는 기자(箕子)나 위만(衛滿), 한무제(漢武帝)가 우리한민족(韓民族)을 정복(征服)과 지배(支配)하지 못한 것은 세계(世界)가 다 아는 사실이다.
 
왜곡하고 지운다고해서 우리민족이 중국을 정벌하고 지배했으며 각종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전(傳)했다는 점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은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를 무지하게 왜곡하며 지우고 있으나 우리가 중국(中國)에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전하고 대륙(大陸)을 지배(支配)한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 기록과는 달리 기자조선(箕子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 한사군(漢四郡)은 도리어 우리가 지배했다. 중국이 예맥(銳麥=濊貊)을 철저하게 역사에서 지우려는 것은 예맥(銳麥=濊貊)역사를 말하게 되면 중국역사는 허구사실(虛構事實)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이나 위만조선은 우리 고조선(古朝鮮)의 작은 제후국에 불과 했다. 중국을 1천년 여 동안 정벌한 예맥(銳麥=濊貊)에 예속(隸屬)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예맥(銳麥=濊貊)은 동주시대(東周時代)부터 한무제시대(漢武帝時代)까지 중국을 정벌하고 지배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노(魯), 연(燕)시대도 중국 정벌(征伐)했다.(論語 卷十四, 憲文 第十四).梁啓超 國史硏究 6篇, 歷史上中國民族之觀察32面)
 
시전(詩傳 閟宮九章註)에는 신안호씨(新安胡氏)가 예맥(銳麥=濊貊)이 노(魯)를 정복했다고 하고, 사기(史記)에 태사공(太史公)은 연(燕)이 북으로 예맥의 압박을 받아 멸망(滅亡)에 직면(直面)한 때가 수차(數次)라고 했다.(史記三十四, 燕召公 世家第四)
 
또한 (史記)에 연(燕)은 예맥(銳麥=濊貊)의 경제적 지원(經濟的支援)도 받았다고 했다. 이는 예맥(銳麥=濊貊)이 경제적(經濟的)으로도 연(燕)보다 상위(上位)에 있었음을 증명(證明)하는 것이다.(史記 百二十九, 貨殖列傳, 第六十九, 烏氏倮),
 
이와 같이 예맥(銳麥=濊貊)은 1천여 년 간 중국(中國)을 정벌(征伐), 정복(征服)했는데 이중에는 중국천하(中國天下)를 처음으로 통일한 진(秦)도 예외(例外)가 아니었다.
 
자치통감(資治統鑑)에 의하면, 예맥(銳麥=濊貊)은 중국을 통일(統一)한 진시황(秦始皇)이 영토(領土)를 확장(擴張)하려고 예맥과 남월(南越)을 공벌(攻伐)했으나 실패했다고 했다.(資治統鑑 卷十五, 漢紀七 太宗孝文皇帝下).
 
이것은 진시황(秦始皇)의 탐욕을 위한 것으로 민중을 돌보지 않아 병사(兵事)에 대한 형세를 알지 못해 싸우면 적에게 포로가 되고, 주둔하면 사병(士兵)이 전멸됐는데 이것은 예맥이 강대해 이기지 못함으로 진(秦)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됐다고 했다.
 
진(秦) 멸망, 가장 큰 원인은 징병제도
 
진(秦)-서기전221~202-의 멸망원인(滅亡原因)을 보면 진시황(秦始皇)의 급진적인 정책과 외정(外征)과 만리장성 보완(補完)을 위한 토목공사(土木工事)에 고통을 당하고 있던 구(舊)6개국 부장과 농민은 진시황이 죽자 반란을 일으켜서 멸망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진(秦)의 멸망원인(滅亡原因)의 근본적인 그 원인(遠因)은 징병제도에 있었다. 당시 전쟁의 참상(慘狀)은 진(秦)의 국민들이 출전(出戰)하는 것을 사형장(死刑場)에 가는 것 보다 더 두려워했다.
 
그래서 진시황(秦始皇)은 죄인(罪人)들을 많이 징발(徵發)해 출전(出戰)하게하니 이것이 소위적술(謫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적술(謫戌)은 귀양살이 군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적술(謫戌)을 징발(徵發)하는 순서는 먼저 관리(官吏) 중 죄 있는 자, 다음에 데릴사위(가난한 자), 그다음에 상인(商人), 그다음에 과거의 상인(商人), 다음에 상인의 아들과 손자, 다음에 마을 좌측(左側)에 사는 가난한 자를 징발했다고 했다.
 
그러나 징발이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아 출전(出戰)하는 자가 분원(憤怨)을 품어 만 번 죽는 해(害)가 있을 뿐, 이에 대한 보답이 없고 전사자에게도 한 푼의 보상이 없었다.
 
이에 국민이 극열(極熱)히 화(禍)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불평이 고도에 달했다. 이 때에 진승(陳勝)이 대택(大澤)에서 혁명군을 일으켜 진(秦)을 타도하자고 외치니 천하(天下)가 호응했다.
 
이는 진(秦)이 강권(强權)으로서 국민을 억압(抑壓)한 폐해(弊害)에서 기인(起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초(楚)의 항우(項羽)가 진군(秦軍)을 거록(鉅鹿)에서 서 이겨서 패왕(覇王)이 됐다.
 
한편 유방(劉邦)은 항우(項羽)보다 앞서 진(秦)의 수도(首都) 함양(咸陽)을 함락시키고 진왕자(秦王子) 영(嬰)을 넘어뜨리고 한(漢)나라를 장안(長安)에 건국(建國)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재래중국사가(在來中國史家)가 진(秦)을 타도(打倒)하자는 진승(陳勝)과 항우(項羽)라 선전한 것이고 사실은 진(秦)이 예맥(銳麥=濊貊)과 남월(南越)의 전란(戰亂)으로 혼란에 빠진 것을 계기(契機)로 진승(陳勝), 항우(項羽)가 궐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진(秦)을 타도(打倒)했다함은 그것은 표면상(表面上)으로 보는 선전(宣傳)일 뿐이고, 실제(實際)로 진(秦)을 타도(打倒)한 자(者)는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아니라 강대한 예맥(銳麥=濊貊)과 남월(南越)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이 강대한 예맥(銳麥=濊貊)을 역사에서 지우려 하나 예맥은 중국대륙에서 천하(天下)를 호령했음을 숨길 수 없다. 예맥은 중국에서 한(漢)도 정벌(征伐)했다.
 
중국 한서(漢書)에 예맥(銳麥=濊貊)이 한(漢)나라 문제(文帝), 경제(景帝)시대에 한(漢)을 정벌(征伐)해 많은 해(害)를 끼쳤다고 했다.(漢書二十四 下, 食貨志 第四 下).
 
예맥(銳麥=濊貊)은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복해 한사군을 설치한 후에 진번, 임둔, 현토 3군을 예맥에게 뺐긴 사실도 예맥이 한(漢)나라를 제압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민족(韓民族)은 한족(漢族)과 쟁패전(爭覇戰)에서도 승리했다.
 
우리한민족(韓民族)은 중국(中國)과 일본(日本), 그리고 반도식민사관자(半島植民史觀者)들이 말하는 약소국(弱小國)도 소국(小國)도 아니고, 대륙(大陸)을 호령한 제국(帝國)으로서 세계역사상(世界歷史上)에서도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민족(民族)이다.
 
따라서 우리한민족(韓民族)은 기자조선(箕子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 한사군(漢四郡)등 한족(漢族)의 지배를 받은 일이 없고 도리어 한족(漢族)과 일승일패의 쟁탈전(爭奪戰)을 전개(展開)하고 그 쟁패전(爭覇戰)에서 우리한민족(韓民族)이 승리(勝利)했다.
 
진(秦)은 서기전 221년 중국(中國)을 처음으로 통일(統一)하고 국위(國威)를 떨치고 지나(支那)라고 부루는 중국(中國)을 대표하는 가장 강대(强大)한 나라요 세계사상(世界史上) 보기 드문 대제국(大帝國)이었다.
 
강대(强大)한 오호(五胡)가 중국(中國)에 침입(侵入)해 300년 동안 남북조(南北朝)로 분열(分裂)시켰는데 이 남북조(南北朝)를 서기89년 재통일(再統一)한 나라가 (隨)이다.
 
이 (隨)가 백만(百萬)이 넘는 대군(大軍)으로 고구려(高句麗)를 침범(侵犯)했다가 을지문덕장군(乙支文德將軍)이 이끄는 고구려군(高句麗軍)에게 대패(大敗)해 수(隨)나라가 멸망(滅亡)하게 됐다. 이 수(隨)를 이은 나라가 서기18년 세운 당(唐)나라이다.
 
중국역대제왕(歷代帝王)중 제일인자(第一人者)라는 당태종(唐太宗)은 북으로 돌궐(突厥), 고창(高昌), 토곡혼(吐谷渾), 설연타(薛延陀)를 정복하고 철륵(鐵勒), 회흘(回紇)을 예속시킨 후 고구려(高句麗)를 침범했다가 당(唐)역시 고구려에게 격파(擊破)됐다.
 
고구려(高句麗)가 수(隨)를 격멸(擊滅)하고 당(唐)을 격파(擊破)한 것은 세계전쟁사상(世界戰爭史上)으로도 빛나는 역사(歷史)이다. 이는 천하(天下)가 다 아는 사실이다.
 
중국(中國)의 4000여년(餘年)역사상(歷史上) 가장 강대(强大)한 시대(時代)를 말한다면 그것은 진(秦), 수(隨), 당(唐)시대(時代)이다. 그런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예맥(銳麥=濊貊)이 진(秦)을 타도하고 고구려(高句麗)가, 수(隨), 당(唐)을 패배(敗北)하게 했다.
 
이와 같이 우리한민족(韓民族)은 세계전쟁사적(世界戰爭史的)으로나 문화사적(文化史的)적으로도 빛나는 역사(歷史)를 가진 세계역사(世界歷史)에 지울 수없는 나라이다.
 
이러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인데 러시아의 UM, 푸틴박사가 말 하듯, ‘중국은 남의 역사(歷史)마저 송두리째 가로채 자기(自己)들 역사라고 하는 나라’라고 하는데도 우리나라 반도식민사관자(半島植民史觀者)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중국은 문물제도(文物制度)가 없는 야만족이었다
 
중국은 역사뿐만 아니라 문물제도(文物制度)도 다 중국의 것이라 하나, 다 거짓의 허구(虛構)이다. 중국(中國)은 우리의 문물(文物)을 받아들이고 자기들의 것이라 한다.
 
천자(天子), 천황(天皇), 황제(黃帝), 문물제도를 비롯해서 창조(創造)한 자는 중국(中國)의 한족(漢族)이 아니라 우리한민족(韓民族)이 다 창조했다. 이는 숨길 수가 없다.
 
천민사상(天民思想)을 비롯해서 군주(君主) 예(禮) 관제(官制) 군사학(軍事學) 주역철학(周易哲學) 홍범구주(洪範九疇) 물질문명(物質文明) 철활자(鐵活字)도 모두가 우리한민족(韓民族)에 의해 창조(創造)되고 전파(傳播)됐음을 숨길 수없는 사실(事實)이다.
 
예컨대 논어(論語)에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無也]라 했다. 즉 이적(夷狄)은 군주(君主)가 있고 중국은 군주(君主)가 없다. 그러므로 이적(夷狄)의 풍속(風俗)과 중국(中國)의 풍속(風俗)은 갖지 아니 했다고 한 것이다.(論語 卷之三, 八佾第三).
 
공자(孔子)당시에 군주(君主)가 있었다. 그런데 군주(君主)가 없다고 한 것은 군주(君主)를 섬기는 문물제도(文物制度)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이적(夷狄)은 북방민족(北方民族)인 우리한민족(韓民族)을 말한 것이다.
 
통감(通鑑 唐紀 太宗皇帝下)에 고구려(高句麗)를 동이(東夷)라 칭(稱)한다하고,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예맥(銳麥=濊貊)을 북적(北狄)이라 칭(稱)했다. (太平寰宇記 卷一百七十二, 四夷一, 東夷一).
 
고대(古代)당시 동서남북 사방민족(四方民族)중 높은 문화를 가진 자는 오직한민족(韓民族)뿐이요 기타민족은 문물제도(文物制度)가 없는 야만민족(野蠻民族)이었다. 군주(君主)를 섬기는 문물제도(文物制度)가 중국보다 발전한 민족은 바로 우리한민족이었다.
 
삼국지(三國志)에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등 한민족(韓民族)을 소개하는 전문(前文)에 [雖夷狄之那 而俎豆象在 中國失禮求之四夷]라 했다. 즉,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등 이적(夷狄)의 국(國)에 조두(俎豆)의 문화가 있어 중국이 예(禮)를 잃으면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이적(夷狄)의 국(國)에서 배운다고 한 것이다.
 
공자가 중국의 무도(無道)를 개탄(慨嘆)하고 한국을 군자국(君子國)이라 찬양하며 한국에 와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공자가 이적(夷狄)은 군주를 섬기는 문물제도가 있고 중국은 없는 것을 개탄하며 한국에 와서 살고 싶다고 한 것이다.(三國志 魏志卷三十)
 
천자(天子)와 군사학(軍事學)도 한민족(韓民族)에게 배웠다
춘추좌전(春秋左前)에는 공자가 28세의 청년으로 동이족(東夷族)인 담자(郯子)선생을 찾아가 천자(天子)의 관제(官制)를 배우고 천자(天子)가 관제(官制)를 잃으면 사리(四夷)에게서 배운다고 했다.
 
이것은 한민족(韓民族)이 천자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창조하고 중국은 우리가 창조(創造)한 그 문물제도를 수입한 것을 가리킨 것이다. (春秋左前 卷之三十九, 昭公六)
 
중국고서(中國古書) 산해경(山海經(海內經)에 조선천독(朝鮮天毒)이라 하고 석문(釋文)에 독(毒)은 육(育)이라 해석 했다. 천독(天毒)은 천(天)이 양육(養育)한다는 뜻이다.
 
조선민족(朝鮮民族)은 천신(天神)의 양육(養育)을 받는 자식(子息)이라 한 것이다. 즉, 천자(天子)의 명칭(名稱)이 한민족(韓民族)에 의해 창조(創造)됐다고 한 것이다.
 
또한 포박자(抱朴拍子)에서는 중국민족의 시조(始祖)라 하는 신화적(神話的) 제왕(帝王)인 황제(黃帝)가 청구(靑丘)에서 와서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얻었다고 했다. 청구(靑丘)는 한국(韓國)이요 삼황(三皇)은 천황(天皇),지황(地皇), 인황(人皇)을 가리킨 것이다.
 
중국역사 첫머리에 천황(天皇氏), 지황(地皇氏), 인황(人皇氏)라 기록한 것은 한국(韓國)에서 수입한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벳긴 것이다. 한민족은 천자(天子), 천황(天皇), 황제(黃帝)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최초에 창조한 자가 우리한민족(韓民族)인 것이다.
 
중국문헌에 인류의 대표라 칭하는 천자의 문물제도가 한국에서 창조 됐다고 증언하고 천신(天神)의 피를 받았다고 칭하는 천자(天子)의 문물제도가 한국에서 창조됐다고 증언한 것은 단군신화(檀君神話)이다. 이 신화(神話)가 위조 없는 정확한 기록이다.
 
중국은 이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수입한 것이라 가리킨 것이다. 위에서 본 문헌은 이러한 문물제도를 창조한 자가 한민족(韓民族)이라는 주장을 입증(立證)하는 것이다.
 
후대(後代)에 거란(契丹)과 일본이 천황(天皇)을 칭하는데 이는 중국의 천자(天子)를 흉내 낸 것이고, 그 본원(本源)을 따지면 한국사상(韓國思想)을 모방(模倣)한 것이다.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을 말한 일본(日本)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교수는 임나(任那)는 일본민족(日本民族)의 발상지(發祥地)라고 주장(主張)한 학자이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가 말한바와 같이 일본은 임나(任那)가 먼저 가서 일본을 개화(改化)시켰다. 천황제도(天皇)도 임나(任那)가 일본에 전파(傳播)시킨 것이다. 한국역사상(韓國歷史上) 독특히 천황사상(天皇思想)을 제창(提唱)한 임나(任那)였다.
 
임나(任那)가 천황(天皇)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일본(日本)에 전(傳)시켰다. 일본(日本)역시 임나(任那)를 통해 한국사상(韓國思想)을 직수입(直輸入)한 것이다. (三國遺事卷二 駕洛國記) 가락에 황천(皇天),상제(上帝),황후(皇后),삼황(三皇)의 문구가 많다.
 
한편 중국은 군사학(軍事學)도 우리에게서 배워갔다. 중국(中國) 4천여 년의 역사에 중국병가(中國兵家)의 시조(始祖)는 강태공(姜太公)이고 강태공(姜太公)의 군사철학(軍事哲學)이 후세(後世)에 전파됐다고 했다.(中華五千年史 第二冊, 西周史, 第四章).
 
사기(史記)에 강태공(姜太公)은 동이(東夷)의 사(士)라 했다. 이것은 강태공(姜太公)이 동이족(東夷族)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국(中國)의 군사학(軍事學)도 한국(韓國)에서 수입(輸入)됐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의(異議)를 제기(提起) 할 수 없는 것이다.(史記三十二, 齊 太空 世家 第二).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 ’山海經‘. 大連出版社, ‘行走 大黑山’.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 사람과 북방주민들’.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심백강, 이덕일, 박정학외9인 공저 ‘미래로 가는 바른 고대사’.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石井進外, ‘詳說日本史,‘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ヨセフ アイデルバ_グ 中川一夫 譯, ‘大和=ヤマト)民族は ユダヤ人だった’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大和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劉泳,海燕,‘赤蜂博物館’. 黃斌, 劉厚生, ‘箕氏朝鮮史話’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石井進, 笠原一男, 兒玉幸多, 笹山晴生, ‘詳說日本史’. 西東社출出版部編, ‘日本の古墳,古代遺跡’. 黃娬, 劉厚生), ‘箕氏朝鮮史話)’.외 다수의 서책(書冊)을 참조하고, 본문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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