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대한제국 말기 우리나라 정정(政情)은 오늘날 우리 정당들이 정쟁(政爭)만을 하고 있는 상황과 유사했다. 국외의 돌아가는 정세는 외면하고 오직 정권다툼만 하고 있는 양상이 비슷한데서 염려되는 점이다. 일본은 1582년, 소년사절을 유럽에 파견하며 외부와 접촉을 하게하고 그 견식을 넓히며 국제 관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16세기부터 포르트갈, 스페인 등의 선박이 내일(來日)하는 등 외부와 접촉을 시작했다. 1641년에는 화란상관(商館)을 나가사키(長崎)에 짓게 하는 등 외국과의 교류를 하며 세계의 흐름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와서는 1853~4년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의 내일로 미·일화친조약이 맺어졌다. 이를 시작으로 영·일(英日), 러·일(露日) 화친조약이 이루어졌다. 이어 그 이듬해인 1855년에는 프랑스와 일본, 일본과 화란 간에 화친조약이 맺어진다. 1858년 일본은 화란, 영국, 러시아, 프랑스와 수호통상조약을 맺기까지 한다. 이러한 조약 체결을 통해 국제법과 국제정세를 읽게 된 일본은 1874년 대만에 출병하고 여기서 재미를 본 일본은 한국 침략을 노골화 한다.
우리보다 일찍 눈을 뜬 일본은 1875년, 우리가 해외물정에 어둡고 국제법을 모르던 당시 이것을 기회로 삼아 영국 상선을 군함으로 개조한 흑선이라는 군함(雲揚號)을 강화도에 보내게 된다. 그 목적은 조선이 어떤 대응을 할 것인가에 대한 시험이었다. 정쟁(政爭)만을 일삼아 온 당시 조선은 세계의 흐름을 외면하는 쇄국정책으로 척외(斥外)를 외치며 외국의 침범에 무방비상태였다. 이런 실정에 대해 밀정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일본은 자기들이 국제법을 모르고 당한 그대로 한강하류인 강화도 포진까지 와서 측량을 한다며 우리의 영역을 침범했다. 이에 당시 우리 조정은 우리영역을 나갈 것을 명하나 이에 불응해 경고 발포를 하게 된다. 일본은 신예 대포를 쏘며 조선영역을 침범하고서도 조선에 대해 국제법을 어겼다고 우길 때 국제법을 모르는 우리 대표는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 그 결과 그 이듬해인 1876년에 조약도 아닌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 조약. 병자수호조약)를 조인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조선침략의 발판을 삼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정은 무능하고 부패해 싸워야 할 군인들에게 주는 양곡에 모래를 섞어 제공했다. 이에 분개한 군인들이 1882년 임오군란을 일으켰고 이어 1884년에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즈음 1894년~5 청·일전쟁이 일어난다. 1895년에는 동학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 등 동학란에 연루된 자를 2만~5만명이나 처형한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키는 한편 ‘한·일 의정서’를 조인하게 한다. 1902년 영국과 동맹(1902년~21년)을 맺은 일본은 그 배경으로 러시아와 승부를 가른 것이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키며 독도에 망루(望樓)를 설치한다. 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특파대사로 내한, 제1차 ‘한일협약(한일 의정서)을 체결케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일본은 1905년 ’제2차한일 협약‘을 맺는다. 그 내용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한다’, ‘외교권을 박탈한다’는 것이었다. 또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島根縣) 고시 40호로 일본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조선을 강점하는데 노골적으로 나온다. 1905년 일본은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토록 해 초대 통감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앉힌다. 1907년에는 제3차 한일협약을 맺도록 해 조선 군데를 해산하게 하고, 내정도 통감부의 감독 하에 두도록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우리의 선각자이며 참 선비인 안중근 의병대장은 대한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하고 동양평화를 기원했다. 그러나 1910년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 正毅)가 한·일합병늑약을 체결하고 일본은 우리나라를 불법적으로 점령하게 된다. 일본이 대한민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후 5년 만에 일이다. 즉, 1910년 강압적으로 한·일합병조약이라는 것을 조작하고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로 삼았다. 초대 총독에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 正毅)가 임명돼 일본제국주의 대륙침략에의 군사거점이 되게 한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지상에서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위의 조약이라는 것들은 일본이 자작한 괴문서이지 조약의 형태를 갖추지 않아서 조약이 아닌 늑약(勒約)들인 것이다. 다시말해 조약이 아니고 전부 괴문서인 것이다. 이를 부인하는 학자는 이 지구상에 한 사람도 없다. 제67주년의 광복을 맞이하면서 아직도 우리는 일본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그들을 제대로 보고 갈 필요가 있다.
일본의 극우 정치인과 소수의 극우파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침략 중독에 걸린 이들은 우리가 아무리 독도문제나 정신대문제나 사할린 동포문제나 징용자의 보상 문제 등을 말해도 들을 자들이 아니다. 법과 정의와 정도(正道)로 한·일협정을 다시 해야 한다. 한·일협정 제2조의 과거 조약을 합법화 한 무지한 조항을 파기해야 한다. 도무지 국가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가야 일본이 수긍하고 들어온다. 근대에 와서 일본과 체결된 조약들은 조약이 성립되지 않음을 분명히 말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묻고 가야 한다. 일본이 성노예로 한국여성을 농락한 것에 대해 뉘우치지 않고 있음은 자신들의 침략이 합법적으로 된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한·일협정 당시 국제법을 모르는 자로 일본과 교섭을 하게 한 것부터 잘못됐다. 위에서 거론된 조약이라는 것들은 모두 조약의 구성요소를 갖추지 않았다. 단지 일본이 가져온 양면괘지에 자기들이 쓰고 우리황제의 서명이나 옥쇄가 날인되지 않은 괴문서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모두 조약으로 인정하니 일본은 우리를 깔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파기하고 새 협정을 맺도록 해야 한다. 1965년의 한·일협정은 굴욕이요 치욕이다.
여기에 일본은 여전히 우리를 우습게보면서 독도도 억지를 쓰면 통하겠다는 심증을 갖고 있는 듯하다. 말도 안 되는 억지로 우리의 심금을 불편하게 하는 것을 일소토록 해야 한다. 일본은 한·일협정 시 자기들이 곤란하면 사민련(社民聯)같은 사회주의단체까지 동원했다. 그런데 우리는 우국충정으로 63데모 하는 학생들을 일본인보다 더 미워하며 강제 진압을 했다. 이를 이용해서 우리가 쟁취할 문제의 항목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꼴이 되고 만 것을 크게 반성해야 한다. 역사왜곡을 비롯해서 강제 동원된 숫자도 한국정부는 103만명이라 하며 피의 대가를 3억6000만불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 중의원의 발표는 강제징용자가 151만명이라고 했다. 한국의 군사정부는 금, 은, 한국기업 유가증권(한은은 6.25때 유가증권을 모두 태웠다), 징용자의 임금, 미수금도 군인 군속만 해당하게 했다. 성노예로 끌려간 20만명의 정신대 여성이나 원폭 피해자, 사할린 동포 귀환문제는 다루지도 않았다. 우리 애국지사 강제연행자 72만5000명도 제외시켰다.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도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정부는 협정영주권 자에게 4가지(건강보험, 의무교육, 생활보조, 아파트 추점 권)만 제시했으나 필자가 1979년 집계한 것을 보면 일본이 재일한국인에 대한 행정차별은 316가지나 됐다. 얼마나 유치한 협정 내용인가를 알 수 있다. 유능한 대표라면 ‘협정영주권자는 내국민대우를 한다’라고 한마디만하면 그 많은 차별을 받지 않아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더 차별을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온 한·일협정은 아무런 유익을 찾아 볼 수 없다. 이제 광복 67주년을 맞으며 명실 공히 광복을 끝낼 수 있도록 정부에 바란다. 역사왜곡, 독도문제 등 진정한 선린(善隣)관계를 바라는 것이라면 일본은 잘못을 제대로 사죄토록 해야 한다. 전에 일왕이 통석(痛惜)이란 말로 사죄한 두 글자는 대자원(大字源)에 보면 위(魏)나라의 文帝가 한 말 가운데 ‘미지불수 양가통석(美志不遂 良可痛惜)’이 그 시초다. 그 뜻은 훌륭한 뜻(美志)을 이루지 못했으니 참으로(良可)애석하다는 것이 통석(痛惜)이다. 이것이 제국주의 만행에 대해 진정 사죄한 것인가.
이는 일본이 식민지의 뜻을 영구히 못 이뤘으니 애석하다로도 해석 할 수도 있다. 이 말을 쓰게 한 사람은 일본의 대표적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이나 이보다 앞서는 야스오카 마사히로(安岡正篤)에 자문했다. (일본은 왕이 시정문(施政文) 작성 시에는 반드시 학자에 자문을 한다) 우리는 이 통석(痛惜)을 일왕이 진지하게 사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이보다 수치스러운 일도 없다. 일본은 무엇이든지 철저히 마무리에 강해 실수가 없다. 철저함과 치밀함이나 실질존중, 국가의 이해관계에 대해 소홀함이 없다. 예컨대, 우리나라 사람으로 하버드대학 법학박사 학위(당시 하버드대 법학박사는 동양에 인도, 중국, 한국 3명이었다.)를 처음 취득한 필자의 초교대선배이신 고광림 박사의 ‘대륙붕에 관한 논문’이 일본에 불리하다고 본 일본정부는 고 박사의 이론을 꺾기 위해 7명이나 국비 유학생을 보냈다.
그 열의를 우리는 못 쫒아가고 있다. 우리도 이러한 열의를 가졌으면 한다. 아울러 세계적 국제법학자의 출현도 기대한다. 그래서 미완의 광복을 완성토록 온 국민이 뜻과 힘을 모아 찬란히 빛나는 광복에로 나아가야 한다. 광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동북3성인 간도와 독도와 역사 왜곡들을 이대로 두고 광복이 됐다고 말 할 수 없다. 명실 공히 광복을 완성해야 한다. 우리에게 광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온 국민이 완전한 광복을 위해 총력을 모으고 법과 정의가 통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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