馬보다 못한 소년들…목숨 건 나라, 보답은 ‘외면’

입력 2017-06-04 21: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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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국어사전에서 ‘현충일(顯忠日)’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병, 군에 협조한 사람 또는 애국단체원 등의 충성을 기념하는 날이라 설명돼 있다. 다시 말해 현충일(顯忠日)의 의미는 두드러진 충절과 충열(忠烈)을 현양(顯揚)하는 날이다.
 
여느 나라나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한 자들, 특히 목숨을 바친 이들을 소중히 여긴다. 이들을 최우선으로 존중하는 태도는 문명국가가 강국이 되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국민들, 소속원들의 애국심도 고취시켰다.
 
근래 독일이 그랬다. 일본·미국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충일은 다소 퇴색됐다. 일부에 대한 존중과 예가 다하지 못함에서다. 대표적인 것이 6·25전쟁 때 목숨을 바쳐 국가수호에 솔선해서 목숨을 바친 소년·소녀에게 대한 예우다. 사실 우리는 이들을 방치하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소년병이란 병역의무가 없고 국가와 사회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할 17세 이하 학생들이 전시 중 계급과 군번을 받고 현역군으로 입대해 참전한 이들을 일컫는다. 한국전쟁 참전 소년병은 2014년 2월 국회 국방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만9622명이다. 이 중 생존자는 6000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확인된 전사자만 2573명이다.
 
1950년 7월 정부는 병력충원을 위해 ‘국가비상동원령’을 선포했다. 18세 이상 30세 이하 청장년에 소집령을 내렸다. ‘입대는 곧 죽음’이란 인식 속에 청장년들도 병역을 기피하는 가운데 우국충정에 불타는 소년·소녀들의 입대는 많은 귀감이 됐다.
 
특히 이들이 합류한 시점은 우리 군이 극도로 고전할 때였다. 전쟁 발발 후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됐고 한 달여 만에 92%의 영토가 적에 점령됐던 낙동강방어전투와 1951년 1월 4일 소위 ‘1·4후퇴’를 전후로 소년·소녀들이 모여들었다.
 
목숨을 잃었거나 목숨을 걸고 싸우고 돌아온 소년지원병들의 충정은 현재까지 사실 상 국가로부터 외면 받는 현실이다. 오늘은 이들에 대한 응당의 조치를 촉구하고자 글을 쓴다.
 
6.25참전 소년 소녀 지원병의 전투공적
 
소년지원병들은 당시 국가비상동원령 소집 미대상이었다. 더욱이 아동복지법 제2조에 따라 권리보장과 복지증진 등을 위해 보호받을 나이었음에도 애국심 하나로 참천해 임무를 완수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 없인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이들 중에는 나이도 속여 가며 청장년 틈에 낀 이들도 상당수였다. 보병·포병·통신병 등 다양한 분야에 배치돼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 분대장과 소대장을 역임하는 사례도 있었다. 긴급하게 충원된 병력들 중 23% 상당이 이들 소년병이었다. 국토방위에 도움이 됐고 또한 많은 국민들의 귀감을 샀다.
 
특히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대구함락여부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치렀던 다부동전투와 서울탈환작전 등에서도 이들의 공은 빛났다. 무려 2573명이 이 같은 전투 속에서 희생됐다. 이들을 위한 제는 사실 상 전무하다. 후사조차 남겨놓지 못했을 어린나이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숭고한 이들의 애국정신은 영원히 기억돼야 한다. 하지만 이들을 위한 위령비 또는 전적비는 전무한 실정이다. 꽃다운 나이에 오직 나라를 지킨다는 그들의 순국정신은 온 국민이 높이 받들고 학교교과서에도 실렸을 법 했으나 이 나라는 이 나라를 지킨 이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6·25참전소년병 수도권 본부 심상은 회장은 당시 소년병들을 삼국시대 관창의 용기와 프랑스 잔다르크의 전례에 빗대 소개했다. 나이가 어리고 심지어 여성들도 있었음에도 국가수호를 위한 한 마음에서 용기를 냈고 괄목할만한 성과가 있었음을 비유한 셈이었다.
 
관창은 5만의 신라군이 계백을 필두로 똘똘뭉친 5000명의 백제군에 네 번이나 참패한 상황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홀로 뛰어들었다. 흰 갑옷을 입고 영국군을 몰아낸 잔다르크는 수호신으로 추앙됐다.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이들과 달리 불과 수십 년 전 이 땅위에서 희생한 소년·소녀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은 극히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도 이 소년병들의 장한 애국심과 그 희생에 우리도 이들의 그 뜻을 기리고 소년병으로 희생된 2,573명의 명복과 29,622명에 대한 숭고한 정신을 길이 기억하고 생존해 계시는 소년병들에 대한 지원과 이들 모두의 장한 전적비도 세워져야 한다.
 
미국은 공적을 세운 군마도 잊지 않는다
 
미국은 어떨까.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서울경마장 소속 경주마 ‘아침해’가 단돈 250달러에 미 해병대로 팔려간 바 있었다. ‘렉레스(Reckless)’라는 이름의 군마가 된 것이다. 미 해병 1사단 5연대 화기소대에 배치됐다.
 
전쟁 중 렉레스는 연천지구 등 다양한 전투에서 무려 386차례나 탄약을 지고 철조망을 뚫고 포화 속으로 돌진했다. 특히 1953년 3월 중공군과 미 해병대가 5일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을 때 홀로 탄약을 지고 51차례나 전선을 오르내렸다.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미국 정부는 렉레스에 5개의 훈장을 서사(敍賜)했다. 또 전쟁이 끝난 후 렉레스의 무공을 기려 본국으로 데려가 1959년 하사관 계급을 부여했다. 이후 1968년 렉레스가 천수(天壽)를 다하고 사망하자 장엄한 장례식으로 그 공로를 예우했다.
 
미국시사지 ‘라이프’는 1997년 렉레스를 세계10대 영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 군마를 ‘잊을 수 없는 6.25참전 영웅’으로 선정했다. 이에 대해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하지 않았다. 공로여부를 떠나 하물며 전쟁을 위해 뛰어 든 한 필의 말에게도 극진한 미국과 우리의 현실 비교과 됨은 당연하다.
 
우리네 소년병들은 국가존망이 위기에 처한 낙동강전투와 1.4후퇴를 전후한 시기에 자진해 모든 전투에 참전하고 희생됐다. 그리고 당시 문맹 율이 높은 때라 연락병, 통신병, 사무원, 행정요원으로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실체도 인정을 못 받고 있었던 것은 우리보훈처의 수치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소년병에게는 아무런 되울림이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6.25때 소년병들의 장한 모습은 국가장래를 위해서도 귀감(龜鑑)이 되는 일이다. 참으로 장한 이들에 대한 아무런 보훈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있을 수없는 일이다.
 
다행히 2010년1월8일 소년병의 실체가 국방부장관의 통보에 의해 실체가 정의(定義)됐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에 상응한 보훈, 보상관계 법제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가 장래를 위해서도 하루속히 ‘6.25참전 소년병에 지원에 관한 법’제정과 그에 걸 맞는 예우를 제62회 현충일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이을형 필진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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