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터키에서 밀농사를 바탕으로 정착생활을 했던 당시 우리나라는 환국시대였다. 환국과 배달국에 이어 세워진 고조선은 중국 요순시대에 중국본토의 일부 지역과 만주, 한반도등 전역에서 많은 제후국을 거느리고 국가를 형성했다. 요순(堯舜)시대에는 우리한족(韓族)과 중국의 한족(漢族)이 지금과는 달리 서로 친하게 지냈다.
갈등은 주(周)나라 때부터였다. 조선의 주류가 된 우리 한족(韓族)과 주(周)가 주류가 된 중국 한족(漢族)간 충돌이 백여 년 가까이 이어졌다. 은(殷)나라가 주(周)나라에게 망한 것은 우리민족 동이(東夷)가 중국에 말려 들어간 시초가 된 셈이다.
주(周)가 패권을 잡으면서 중국천하를 통일 했던 동이족(東夷族)의 나라 은(殷)나라의 역사를 한족(漢族)위주로 뒤집어야 되는데 중국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이 일을 공자(孔子)가 맡아 그 역할을 담당 했다.
주(周)나라말기에 공자(孔子)가 쓴 역사서 ‘춘추(春秋)’는 은(殷)나라와 동이족(東夷族)을 밀어내고 중국의 전통이 동이(東夷)아닌 한족(漢族)이 주(周)나라임을 알리려고 날조(捏造)한 것이다.
고조선족은 타 족속과는 달라서 무기와 치수(治水)등에 선진 족임이 명백한데 공자는 주(周)가 가장 중요한 주력(主力)이라고 역설해 휘치필법(筆法)으로 역사를 조작했으나 중국통일이 안되고 자기의 도(道)가 중국에서 행해지지 않으니까 “구이(九夷:조선)으로 갈까 보다”고 했다.
제자들이 “고루(固陋)하면 어쩌겠느냐”고 하니 “조선은 군자지국(君子之國)”이라고 받아 조선을 고루한 곳이라고 하는 말에 반대했다. 그래도 공자는 중국위주로 한 역사를 위조했다. 즉 중국을 천(天)으로 받드는 사대사상은 민족의식을 완전히 말살해 이민족(異民族)의 노예가 되기를 자원하는 망국론을 조선조에서도 감히 의정단상(議政壇上)에서 주장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중국역사라고 공자가 쓴[춘추(春秋)]부터 모든 사서가 다 왜곡됐음을 말하려고자 한다.
중국의 역사조작, 공자의 춘추(春秋)부터
공자는 역사왜곡의 시조다. 그는 우리 역사를 뒤집기위해 중국은 세계의 중심을 한족(漢族)에 있다하고 우리까지 오랑캐라고 하면서도 당시중국대륙을 정벌, 정복하며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예맥을 무시 할 수 없어서 “예맥(조선족)떼거리가 많아서 걱정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공자는 춘추에서 역사를 중국본위로 뒤집은 것이다. 우리역사는 이 때부터 수난을 당하게 된다. 여기에 사대주의에 빠진 한문(漢文)에 유식한 사람들이 공자 말을 추종해 당연하게 알아야 할 것으로 여기게 됐다. 그래서 중국역사에서 우리예맥은 찾아보기 힘들다.
예맥은 일찍부터 중국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하며 대륙을 지배했다. 그런데 중국사서에 예맥에 대한 것은 거의 지워져있어서 찾기 힘든 것은 바로 역사왜곡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대륙이 우리선조들의 활동무대였던 자부심이 우리의 근원이 돼 중국인을 되놈, 오랑캐 ‘호(胡)’라 부르고 호떡, 호콩, 호복이란 말을 써서 되돌려주며 자부심을 지켰다.
일본에 대해서도 ‘왜놈’ ‘왜국(倭國)’, ‘왜구(倭寇)’, ‘왜떡’, 그렇게 불렀다. 세계에서 일본을 깔보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일본에 건너가 일본국건설에 큰 몫을 하고 그들을 깨우쳤다.
고대 서기전 2세기 야요이(彌生)시대부터 일본에 선진문화를 전해준 그 공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한국인은 미개했던 일본인들에게 문명을 깨우쳐준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력이 쇠한 때, 어려운 환경에서도 되놈, 왜놈, 하면서 우리조상은 조선민족의 공통된 말과 글, 민족성을 지켜왔을 뿐만 아니라 조선족의 문화를 살려왔다. 그런데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유생들이 중국을 천자(天子)고 우리는 소 중화라 하며 자작오랑캐라고 사대하고 살았다.
더욱이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중국을 거슬리는 일이 두려워 상고사나 고대사 즉, 단군역사를 아예 지워 버렸다. [삼국사기]에 단군에 관한 기록도 전무(全無)한 것은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단군에 관한 것은 일본인들도 자기들 조상이라고 하며 최근까지도 제사를 봉행해 왔다. 단군의 신상(神像)도 임진왜란의 조일전쟁 때 자기조상의 신상(神像)이라며 가져가서 최근 까지 제사지내며 일본굑산신궁(玉山神宮) 미다마진자(美玉神社)에 봉안(奉安)돼 있다.
또한 일본 민족의 조상을 모셨다는 미애갱(三重縣) 미애시(三重市)에 있는 이세궁(伊勢宮)의 신위(神位) 36위(位)도 모두 한국에서 건너간 유민(流民)들로 우리의 조상들을 모신 곳이다.
우리역사 왜곡시킨 원흉 쓰다소우키치(津田左右5吉)와 그 제자들
이러한 우리나라 역사를 망가트린 일등공신은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의 쓰다소우키치(津田左右吉)교수부터라 사료 된다. 이병도(李丙燾)와 손진태(孫晉泰)등도 이 쓰다소우키치(津田左右吉)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한민족의 상, 고대역사를 송두리 체 망가트린 장본인들이다.
쓰다소우키치(津田左右吉)는 1919년 ‘신라본기(新羅本紀)’와 1921년 ‘백제본기(百濟本紀)’를 차례로 비판했다. 삼국사기마저 그 기록이 허구라는 주장을 펴 제국주의 일본역사학을 체계화한 장본인이다. 이 쓰다(津田)의 제자가 이병도(李丙燾)와 손진태(孫晉泰)다.
쓰다소우키치(津田左右吉)는 황국사관(皇國史觀)에 입각한 왜곡 조작된 역사를 쓰다(津田)에게 배운 이병도(李丙燾)와 손진태(孫晉泰)는 철저하게 일본역사방법을 따랐기 때문에 우리역사가 반도내(半島內)의 역사로 잘못된 출발을 하게 됐다. 이 시발(始發)이 문제였다.
여기에 보조를 맞춘 일제(日帝)는 조선총독부로 해금 역사말살정책으로 22만권이 넘는 사서(史書)를 불태우고 이것도 모자라 사대부(士大夫)들이 갖고 있는 사서(史書)도 잠시 빌려 달라고 해 다 거둬들인 후에 10여만 권이상의 사서(史書)가 없애버린 것으로 추산 되고 있다.
그 사서(史書)들 중에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인용 된 [구삼국사(舊三國史)]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인용된 [고기(古記)]와 [단군기(檀君記)], 현존의 [위서(魏書)]와는 다른 [위서(魏書)],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국사(國史)] [본기(本紀)] [수이전(殊異傳)] [단군본기(檀君本紀)]를 없앨 뿐 아니라 삼국시대의 역사에 관한 것이면 다 없앴다.
[동명기(東明紀)] [구삼국사(舊三國史)]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인용된 고구려의 사서 [유기(留記)]백 권 및 7세기에 편수한 [신집(新集)]5권, 최치원의 지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 인용된 [선사(仙史)], 북애(北崖)의 [규원사화(閨怨史話)]에 인용된[진역유기(震域遺記)]들도 없애버렸다.
이시영(李始榮)선생은 저서 [감시만어]에서 [신지비사(神誌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동천록(動天錄)] [지혁록(地革錄)] [서운관비기(書雲觀秘記)] 삼성기(三聖記)] 등 다수의 고전도 자취를 감추었다 회고하고 있음을 본다(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41면 참조).
여기에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우리역사를 제 멋대로 조작 왜곡했다. 이 왜곡에 앞장 선 자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의 쓰다소우키치(津田左右吉)와 그의 제자인 이병도(李丙燾)를 비롯해 손진태(孫晉泰)등이 자기조상의 영혼을 파는 반도식민사관에 동조한 것이다.
이후 이들 제자들에 의해 왜곡 조작된 한국사는 이들에 의해 뒤집혀놓았던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 의해서 조작 왜곡된 우리역사는 마치 우리역사가 한반도(韓半島)에서만 있는 양 조작하고 있는데 역사연구를 하면할수록 그 어마어마한 역사조작 음모(陰謀)상황을 파악 하게 된다.
상고사는 아예 없는 것으로 하고 고대사도 전설화해 우리역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단군은 물론 단군조선보다 먼저 된 숙신씨와 예맥도 그 자취를 찾기 힘들게 지웠다.
예컨대 고대 숙신씨(肅愼氏)와 읍루도 같은 시대에 같은 역사인양 말하고 있는데 숙신씨(肅愼氏)와 읍루(挹婁)는 같은 시대의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 숙신(肅愼)은 고조선시대의 대국이고 읍루(挹婁)는 후한시대에 적은나라일 뿐인데 같다고 하고 있다. 이들 역사는 전혀 다르다.
숙신씨(肅愼氏)와 읍루(挹婁)는 시대, 역사배경도 다르다
중국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 卷三十,東夷)에 보면 숙신씨(肅愼氏)의 일명(一名)이 읍루(挹婁)이고 백두산에 거주 한다 했다. 그러나 숙신씨(肅愼氏)는 중국의 하(夏), 은(殷), 주(周) 이전에 중국과 동떨어진 동북지대에 건설해 지금 길림성동쪽 모든 지방을 차지한 나라였다.
읍루(挹婁)는 한(漢)나라시대에 숙신씨의 영토에 진출했으나 읍루의 본부는 숙신씨의 서쪽에 있었다. 또한 읍루라는 말은 고구려가 망한 후에 대조영(大祚榮)이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 옥루하(玉婁河)를 점거한 후에 옥루하(玉婁河)가 읍루(挹婁)로 전음(轉音)된 것이다.
즉, 읍루(挹婁)라는 명칭은 옥루하(玉婁河)라는 명칭의 변화이다. 그런데 숙신씨(肅愼氏)의 일명(一名)이 읍루(挹婁)라 함은 말도 아니 되는 그릇 된 잘못인 것이다. 즉, 중국은 중국의 하(夏), 은(殷), 주(周) 이전에 건국한 숙신(肅愼)을 읍루(挹婁)라고 조작했다.
읍루(挹婁)는 숙신씨의 영역에 속한 한 부족이요 국가의 제도를 갖추지 못했다. 숙신씨는 순(舜) 하후(夏后)시대부터 저명한 국가다. 읍루(挹婁)의 명칭은 ‘후한서(後漢書)’에 비로소 보이고 문화가 발달되지 못해 군주의 제도가 없고 부락마다 추장이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읍루(挹婁)를 중국은 후한서(後漢書)에 “읍루(挹婁)는 옛 숙신국(肅愼國)이다. 부여 동쪽에 있고 동쪽은 대해다.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고 그 북쪽 끝은 모른다. 산이 많고 험해 사람들의 모습은 부여인과 비슷하다.”고 그럴 듯하게 조작한다.
유우찬 선생은 “읍루(挹婁)는 감숙성 동부 요동 땅과 섬서성 위수에서 북쪽 장백산까지”라고 그의 저서 [한국사의 쟁점, 67면]에서 말씀하고 계신데, 이는 숙신국의 영역을 말한 것 같다.
읍루(挹婁)는 숙신씨(肅愼氏)의 영역에 속한 한 부족이고 제도를 갖추지 못한 미개한 족이다. 그래서 읍루라 하면 동이족으로 보고 있다. 읍루의 본부는 숙신씨의 서쪽에 있는 부족이었다.
그런데 읍루가 인구가 번식해 각지에 분포되고 숙신씨(肅愼氏)는 점차 쇠퇴해 읍루(挹婁)를 견제치 못 함으로 읍루가 숙신씨의 영토에 진출했다. 이와 같은 오류를 모르고 숙신씨(肅愼氏)의 일명이 읍루(挹婁)라 함은 큰 오류(誤謬)이다.
중국의 오사감(吳士鑑)과 유승간(劉承幹)은 진서(晉書)에 주해(注解)를 더해, 숙신씨(肅愼氏)의 일명(一名)을 읍루(挹婁)라 함은 큰 오류(誤謬)라고 비판한 것이다. (晉書 卷九十七, 四夷).
숙신씨(肅愼氏)는 4300년 전에 저명한 문화국이요 읍루(挹婁)는 후한(後漢)시대에 비로소 나타나고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민족이었음이 다 밝혀졌다. 중국학자 양계초(梁啓超), 사부아(謝扶雅)등도 이 역사변조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이러한 중국의 역사위조를 긍정하고 있다.
주(周)나라가 은(殷)을 멸망시키면서 중국천하를 통일했던 은(殷)의 역사를 주(周)나라 말기에 쓴 공자의 [춘추(春秋)]는 이와 같이 공자에 걸맞지 않게 쓰여 진 것으로 위서(僞書)일 뿐이다.
제아무리 역사 왜곡을 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중국정사(正史)와 중국경전(經傳)에 ‘한민족(韓民族)의 특징이 인(仁)하고 한민족이 최초에 인간을 사랑하는 인(仁)을 발견하고 중국문화의 개척자 순(舜)과 중국문화의 대종사(大宗師)가 한민족이고 한국을 군자국이라 찬양했다.
또한 예맥이 장기간중국을 정벌한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중국병가(中國兵家)의 대종사(大宗師) 강태공(姜太公)이 한민족(韓民族)이라 기록하며 대국(大國), 구국(舊國)이라 예찬했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궁시(弓矢)등만 수입한 것뿐이 아니라 문화까지 수입해야 한다는 결론까지 부치던 중국이다.
그러던 중국이 자민족만이 사람이요 타민족은 짐승이라 하는 대중화주의(大中華主義)를 선전하는 중국의 정사(正史)와 경전(經傳)에 명기(明記), 찬양, 결론까지 내린 사실을 지금은 우리나라역사위조에 혈안이 돼 동북공정으로 역사와 유적 유물도 다 중국 것으로 조작 왜곡하고 있는 것이 오늘 중국의 현실이다. (이상은 崔仁, 韓國學講義 18面 38~43面, 參照).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 ‘山海經’. 大連出版社, ‘行走 大黑山’.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 ‘詳說日本史,‘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劉泳,海燕,‘赤蜂博物館’.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石井進, 笠原一男, 兒玉幸多, 笹山晴生, ‘詳說日本史’. 稻垣泰彦, 川村二郞, 村井益男, 甘粕 健 共著 ‘日本史’. 西東社出版部編 ‘日本の古墳, 古代遺跡’.외 다수의 서책(書冊)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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