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고대부터 한족(韓族)은 일본을 지배했다
일본은 식민지사관에 입각해 민족적 긍지를 가질 수 없게 함과 동시에 독립과 자주의식이 없도록 역사를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새로 엮으며 식민지 정당화 이론을 전개했다. 예컨대,“한국은 외국을 침범 한 적이 없다”고 유약한 나라로 부각시키며 역사를 왜곡했다. 필자도 초등학교 때 그렇게 배웠다. 그러나 이것은 다 거짓이다. 우리는 중국과 유라시아를 지배했고 일본까지 지배한 민족이다. 우리가 왜를 친 기록도 없는 것 같이 일본은 왜곡했으나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도 우리가 왜를 친 기록들은 나온다. 예컨대, 3대 단군 가륵(嘉勒) 때인 BC 2173년 “반란을 일으킨 예읍의 추장 소시모리를 참하였는데 그 후손 선승노(陝野奴)라는 자가 해상으로 도망해 세 섬에 의거하면서 왕이라 칭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 35대 단군 사벌(沙伐) 조에는 BC 723년 “장수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 규수(九州)의 구마소(熊襲)를 평정했다”는 기록도 있다. 36대 단군 매륵(買勒) 조에는 BC 667년 “섬승노(陝野奴), 배폐명(裵幣命)이 병선을 몰고 가서 왜란의 반란을 진압하고 왜의 세 섬 왕을 칭했다”고 돼 있다. 일본 상고사 상기(上記)의 기록에는 “조선인이 선단 70척에 군대 1000명을 싣고 왜(구주)로 쳐들어 가 장수언으로 하여금 내란을 일으키게 하고 임금으로 내세웠다가 수십 년후 평정됐다”는 기록까지 나온다.
우리가 직접 싸운 것이 아니고 규슈(九州)에서 장수언 이라는 유력한 세력가를 일으켜 왜왕으로 삼고 수십 년간 다른 대치세력과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이때의 왜(倭)는 규슈(九州)에서 활동하는 집단이었으며, 지금의 일본 본토로 진출한 것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이후다. 후일 일본에서 진무(神武)라는 왜의 지도자가 장수언의 대치세력이었다. 진무 일왕(日王)의 아버지 대에 일어난 이 전쟁에 진무 집안 3대가 나서서 싸우다 두형이 죽고 진무대에 가서 가까스로 수습됐다. 진무에게는 후일 스진(崇神) 왜왕 대에 있었던 업적까지 덧붙여져 신격화되는데, 일본사의 믿을 수 없는 부분이 이런 것이다. 일본의 진무천노(神武天皇) 이야기는 필자가 초등학교 때 일본 역사책에서 보았다. 진무천노가 배를 타고 일본에 상륙해 원주민을 토벌하고 초대 천황이 일본 열도에 상륙하며 배에서 내리는 그림이 있는 일본어 책을 처음 접한 것이다. 지금도 어렸을 때 그 장면의 기억이 난다.
배폐명(裵幣命) 혹은 섬승노(陝野奴)라고 불린 존재의 왜 정벌은 매우 복잡한 역사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가서 왜를 정벌하고 임금을 내세웠던 것은 사실이다. 선단 규모가 70척, 500척인 것으로 미루어 국가적 정벌군으로 보인다. 우리가 규슈(九州)로 왜를 치러간 기록은 부여 때도 나온다. 일본 상고사 연구가들은 이 사실을 주목 한다. 진무(神武)의 가계는 상기(上記)에 의하면 일본에 온 단군 손의 73대가 됨으로 종래는 왜 땅의 통치권을 두고 우리나라 종족끼리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이를 두고 ‘대리전’이라고 한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 배폐명(裵幣命)의 사실을 접하면서 진척되지 못하던 연구가 일본 고대사서(古代史書), 상기(上記)와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신황기·神皇紀)등을 통해 분명해 졌다. 단군조선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것이며 일본은 완전히 한족(韓族)이 가서 건설 한 것이다. 왜를 정벌하고 임금을 내세웠던 것도 사실이다.
천인공노할 중국의 역사왜곡 도를 넘고 있다
최태영 선생은 단군(檀君)이 우리주변에 예사롭게 그 존재의 단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흩어져 있는 단군릉(檀君陵)과 단군사당(檀君祠堂) 같은 것에서 엿볼 수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동네 어린놈들이 단군릉(檀君陵)이라며 무덤꼭대기에 올라가 장난하는데 단군릉이라 하니 그런 짓말라”는 기록이 보인다. 적어도 여러 개의 단군릉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1990년대의 북한 단군릉 발굴은 어딘지 부자연스러운데, 정보교환이 없으니 알 수 없으나 만주, 환도 광개토대왕릉(廣開土大王陵) 근처에 가면 이름 없는 장군릉(將軍陵)이 많다. 이렇게 많은 능(陵) 가운데 단군릉(檀君陵)이 그 중에 있을 것이다. 발굴해 보면 많은 사실이 밝혀질 것이지만 중국 측이 절대 발굴을 금하고 있다. 설령 발굴을 한다고 해도 한국학자의 참여를 극구 막고 도둑같이 자기들만 발굴하면서 왜곡하고 있으니 후치무안의 도를 넘고 있다.
중국 산동 등지에는 단군사당이 많다. 환도근처에 아직도 자신이 고구려인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이 단군사당(檀君祠堂)에 제사를 지낸다. 최태영 선생이 1920~1930년대에 현지에서 직접 확인했던 사실이다. 평양 숭녕전(崇寧殿)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도 단군을 조상으로 섬겨 국가적 의례(儀禮)로서 제사지낸 곳이었다. 일제가 바로 이 숭령전과 삼성사를 헐어버렸다. 참성단 행사는 일제 이래 단군을 부정하면서 국가적 행사가 아닌 일개 단체행사로 축소됐다. 우리 조상은 조상을 위하고 하늘을 위하는 민족이며 보은사상(報恩思想)이 강했다. 그것이 전통이다. 그런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거기에 옷을 입혀 한구석에 변조되기 시작했다. “옛날에 환국(桓國)이 있었다”는 기록의 환국(桓國)이 불교적 존재인 환인(桓因), 이를테면 제석이라는 것으로 둔갑해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는 기록과 병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생겨나기 이전 사실인 환국(桓國)을 제대로 기록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기(古記)의 가치와 역사가의 입장을 지켰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있지도 않은 허구다
한국사의 큰 의문의 하나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 기자 또한 은(나殷)라 족인지 모르겠으나 조선의 지방 관리 정도였을 뿐 그가 조선에서 임금을 한 자취가 없다. 1천년 후 기준(箕準)을 뜬금없이 기자(箕子)의 후손이라고 내세운 것도 중국에 대해 사대주의(事大主義)가 발생해 갖다 붙인 것으로 보인다. 기자조선은 허구(虛構)다. 단군의 사적(史蹟)은 사기(史記)를 통해서만 전하는 것은 아니다. 글로 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 ‘세년가’(歲年歌)로도 단군의 존재는 오늘날 까지 전해져 왔다. 세년가 속에 기자조선은 없다. 그런데 일본은 삼성당(三省堂)이 간행한 ‘각국별’ 세계사의 정리(世界史の整理) 책자에 조선사는 “BC3세기경 조선에 이주한 중국인이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며 자기들의 한국침략을 정당화 하는데, 단군조선을 아예 빼버리고 기자조선을 갖다 놓고 있다.
우리의 고대사를 완전히 뭉개고 있다. “큰 거짓말은 통한다”는 그들의 방식대로 우리 역사를 날조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차고 못 말리는 일본임을 웅변하고 있는 부분이다. 엄연히 단군조선은 47대 2096년 간 실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환웅이 세운 배달국 33대 1565년간 엄연히 실재했던 것을 일본은 숨기고 있다. 날조의 천재인 일본의 속셈이 들여다보인다. 아울러 “인류의 문명은 요하 중원에서 시작하고 있다”고 하는 학자들의 말을 외면하고 있다. 역사는 가감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바로 전해야 올바른 역사가 되는 것이다. 날조, 왜곡은 역사가 아니다. 좀비족이나 이런 작태를 연출하는 것이지 정상인은 이런 짓을 해서는 아니 된다.
이같이 단군을 일제가 말살한 이후 역사학계에서는 단군역사를 회복 하지 못한 채 일본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민간단체들이 단군을 제 위치로 되돌리기 위해 단군을 되찾는 운동을 벌리고 있으나 여기에는 학구적 관점이 결여된 것이어서 문제점이 없지 않다고 최태영 선생은 염려했다. 무조건 단군을 높인다고 애국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최태영 선생은 단군을 억지로 높이는 것을 경계하며 “역사가라면 적어도 우리 민족이 수천 년간 단군을 국조(國祖)로 모셔 왔음을 인정해야 하고 일제 강점 이후 일본에 의해 단군이 부정되는 사태가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를 설명해야 한다”고 한탄하면서 “지금처럼 뚜렷한 해명없이 단군을 말하는 것은 일본의 주장을 쫓아 단군을 암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서 수 없이 벌어졌던 역사적 인물을 암살한 것과 다르지 않은 작태인 것이다. 최 선생은 “단군 연구는 문헌학과 고고학 학문의 연구를 통해서 진전될 것이다”면서 “단군은 우리의 위대한 조상이며 나는 진실로 그 조상을 존경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종교적 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미련하게 단군상만 많이 만들어 세우는 것과 몰지각한 기독교일부 사람들이 단군 상을 쫓아다니며 목을 베고 부수는 야만스런 작태 등을 한탄해 했다. 최 선생은 또 “이런 상황에서 단군이 끝내 학술적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일본은 한국역사를 분열시킨 획책이 맞아 들어갔음을 지극히 기뻐하며 속으로 크게 웃을 것이다”며 “조상은 조상이지 왜 아니라고 하는가”고 울분을 토했다.
신채호(申采浩)선생 독사신론(讀史新論)도 단군 실재 인정
최 선생은 민간단체가 상을 주고자 할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적어도 학교 교과서에 단군이 정식으로 조선을 개국한 임금인 조상으로 기록되고 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또한 우리민족이 일찍이 북경 근처 요동과 한반도에 최초로 선주했던 민족이라는 나의 학설을 절반 정도의 사람들만이라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그땐 죽었던 조상을 기어이 찾아서 받들었다는 공로로 상을 주는 데가 있다면 자축하는 의미에서라도 받겠다. 하지만 지금 단군 조상은 교과서에도 못 오르고 후손들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일본인들에게 더 밀려서 쫓겨난 상황이다. 단군 조상은 못난 후손들을 바라보며 지금 울고 있을 것이다” 선생은 이렇게 한탄하면서 연구를 열정적으로 계속했다. 최태영 선생보다 앞서 나온 신채호(申采浩) 선생의 저서 독사신론(讀史新論)도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로 이어진 역사를 정인보(鄭寅普) 선생과 같이 바로 인정하고 있다. 신채호 선생이 일제에 의해 희생된 것이나 정인보 선생 외 안재홍(安在鴻) 선생들이 납북으로 인해 역사 복원이 안 된 것은 우리 고대사복원을 위해 너무나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독사신론(讀史新論)은 최근 역사서 중에서 효시(嚆矢)로 간주되고 있는 서책이다. 좀 더 신채호(申采浩) 선생과 정인보(鄭寅普)선생 안재홍(安在鴻) 선생들이 살아 있었다면 최태영 선생이 노구를 이끌고 중국과 일본을 왕래할 일이 덜 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훌륭한 선각자들의 노고에도 아랑곳없이 우리 학노(學奴)들은 연구는 차치해 두고 현실 직책에만 만족하고 있는 어리석은 상황이다. 이런 사태는 바꿔져야 한다. 우리 역사 단군을 복원치 않고 우리나라의 올바른 존립은 있을 수 없다. 고대사 복원은 우리의 지상과제라는 것이다. 이럴 때 타계한 선생들의 손길이 아쉬운 것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우리의 세 선각자이며 대학자인 선생들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머리 숙여 기도한다. 너무나 애석하고 아쉬운 마음을 금 할 수 없다. 러시아의 학자로 ‘고조선’을 쓴 U.M 푸틴은 한국 학노(學奴)들의 이런 상황을 개탄하며 “동북아 고대사에서 단군 조선을 제외하면 아시아 역사는 이해 할 수가 없다”고 하고 있음에도 “한국은 어째서 그처럼 중요한 고대사를 부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충고를 제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
한국 학자들의 바람직하지 못한 양상을 보면서 “일본과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 내는데 당신들 한국인은 어째서 있는 역사도 없다고 그러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나라다”고 U.M 푸틴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참으로 통탄할 일이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중국과 일본은 우리 역사를 끊임없이 날조하고 왜곡하고 있다. 역사가 도둑맞고 있는데도 우리나라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 소수를 제외한 학노(學奴)들은 이를 바로 잡을 생각은 뒷전으로 한 채 아직도 ‘조선사편수회’의 왜곡 날조된 역사를 금과옥조로 여기며 방관만 하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하루속히 민족사관에 입각한 올바른 역사정립을 우리들이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들의 지상과제다. “역사를 무시하는 세대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로버트 하인라인의 말을 온 국민은 거듭 귀담아 들어야 한다. 또한 키엘케고르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역사에서 살 길을 배운다”는 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단군은 실재한 우리의 위대한 선조다. 잃어버린 역사와 조상인 우리의 단군을 되찾아야 한다. 이것이 후손인 우리가 할 일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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