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단군 4천년 ‘우리 글’ 존재

입력 2012-11-10 16: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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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우리들이 역사를 배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입장에서부터 미래를 보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현재의 투영(投影)된 과거를 보는 것이다. 현재 자신의 입장이나 문제의식이 명확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즉, 한국사에 관한 정확한 지식습득과 역사사상 상호간의 관련성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기본적 사항이나 중요사항을 언제나 그 관련성과 발전과정과 함께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역사적으로 인과관계 문헌을 고찰하고 합리적으로, 그것도 논리적으로 이해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의 우리나라 역사교육은 우리역사의 정확한 지식습득은커녕 역사상 관련성과 발전과정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단군에 대한 고찰도 단군을 신화로, 실제 없었던 기자조선을 교과서에 집어넣는 ‘조선사편수회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단군에 대한 잘못을 규명하기 위해 세년가(歲年歌)에 나오는 단군에 대해 최태영 선생의 연구를 배경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세년가(歲年歌)에서 보는 우리 역사
 
최태영 선생은 이 세년가(歲年歌)를 연구하며 “어떤 역사가들은 우리 전래의 역사를 다음의 의문을 걸고 부인한다”고 했다. 그것은 “문헌상으로 보아 문자시대에 진입 할 수 없었을 텐데 어떻게 4천년 동안 단군과 조상들의 역사가 전해 올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최 선생은 확신을 갖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최 선생은 “세년가(歲年歌)라는 것이 있어 노래로 역대의 사적(史蹟)을 엮어가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 왔다. 우리 역사는 세년가(歲年歌)가가 전하는 그대로다. 한자가 보급되기 전, 일찍이 정음의 원본 가림토(加臨土)와 각종 이두(吏讀)가 있었다. 고구려 초기에 이두(吏讀)문자로서 사서(史書) 유기(留記) 100권을 지었음이 삼국사기에도 기록돼 있다. 삼한시대에 쓰던 붓과 먹도 많이 발굴됐다. 고구려 보다 앞선 삼한에 글이 있었다는 증거다. 소도(蘇塗)를 핵심으로 한 10월 상달 민족축제일에 노래를 불러 역사를 전했다는 기록은 곳곳에서 발견 된다. 이것은 세년가라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없을지 몰라도 일본과 중국에 그 흔적이 남아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를 확신한대로 찾아 낼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솟대백이 지명과 ‘세년가’
 
단군 이래 삼한과 삼국시대까지 매년 음력 10월 상달 무천(舞天), 영고(迎鼓), 동맹(東盟)같은 큰 축제가 있었다. 이때 신지(神誌)라는 제관(祭官)이 건국 이래 역사와 조상들의 공적 교훈을 노래로 불렀다. 중국의 역사서와 최치원(崔致遠)이 새긴 비문(碑文) 등에서 이런 사실이 증명된다. 위지(魏志) 고구려전(高句麗傳)과 삼한전(三韓傳)에 “여러 나라에 각각 별읍이 있어 솟대 소도목이라고 하는 나무를 세우고 제사 지냈다”는 것이다. 한국 측 기록은 환단고기(桓檀古記) 신시본기(神市本紀) 제3에 “신시(神市)를 세운 환웅천왕의 공덕은 소도(蘇塗) 제천의식을 통해 전송됐다”고 한다. 마한세가(馬韓世家) 상편에는 “이로부터는 소도(蘇塗)제단이 도처에 새워졌다”고 했다.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鸞郞碑序)에는 “백제에도 그런 행사가 있었다”고 쓰여져 있다. 경북문경에 있는 신라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寂照塔碑)에도 “동국이 정립(鼎立)했을 때 백제에 소도라는 민족축제 의식이 있었다”고 새겨져 있다.
 
고조선의 소도교(蘇塗敎)가 요(堯), 금(金), 지나(支那=중국을 말함) 등 각지에 널리 분포된 사실도 역사에 기록돼 있다. 그런 기록 말고도 광대(廣大)들이 긴 가극(歌劇)을 판소리로 전해 내리는 것을 보면 일본에서 역사(歷史)가 문자로 기록되기 전, 전문적으로 지나간 왕조 수백 년간의 사적(史蹟)을 외우는 인간사서(人間史書) 가타리베(語部)가 있었던 것을 보면 단군 이래 세년가(歲年歌)라는 노래를 불러 문자와는 별도로 역사를 전해왔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1910년대 구월산 단군사당인 삼성사에서 멀지 않은 잘련읍 서탑거리에 솟대백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최 선생은 “세년가(歲年歌)가 이곳에서 불렸을 것이다”고 세년가(歲年歌)연구를 통해 언급하고 있다.
 
‘세종실록의 세년가
 
1970년대 ‘조선왕조실록’ 영인본이 발행됐다. 그 중 ‘세종실록’ 제40권, 세종10년 6월 유관이 올린 상서와 세종 18년 12월 유관의 조카 유사눌의 상서에서 단군의 사적과 단군릉에 관한 사실이 ‘세년가’로 전해 내려온 것을 확인하고 있다. 유관이 올린 글은 다음과 같다.
 
“황해도 문화에서 부로(父老)들의 말을 들으니 구월산(궐산)은 문화 고을의 주산인데 그 산허리에 단군사당인 삼성사가 있고, 그 밑에 성당리(聖堂里)라는 마을이 있으며, 단군이 박달나무가에 내려와 후대에 문화의 동쪽에 장장(藏壯)이란 곳(혹은 당장평, 왕검성이라는 곳)에 도읍을 정했으며, 단군은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해에 건국했고, 건국한지 1천여 년 만에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으로 화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으로 화했다 함은 별세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8년 뒤에는 유관의 조카 한성부사 유사눌이 상서를 올렸다. 상서에는 “세년가를 보니 단군이 조선의 시조이며 그 나라가 누린 역사는 매우 깁니다. 전에 그 사당을 지우라고 유사에게 명하실 때는 유사가 잘 몰라서 평양에 세우고자 했으나 신의 숙부인 관(寬)이 그것이 잘못임을 논하여 살업을 아직 시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년가에 의하면 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가 뒤에 백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은나라 무정 8년에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됐다고 합니다. 나라를 누리기 1천여 년이고 지금도 그 사당이 아사달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고려가 구월산 밑에 사당을 세웠는데, 그 집과 위판이 지금도 있어서 세년가(歲年歌)와 서로 합치됩니다. 그러니 이를 버리고 다른 곳에 세운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단군사당을 다시 세우려고 조사하던 세종이 “이를 재가하고 예조에 명을 내렸다”고 한 이 부분의 세종실록을 읽으면 황해도가 고향인 최태영 선생은 11살 때 구월산 삼성사 터와 성당리 마을, 그리고 오래된 문화 유씨 묘들을 바라 본 기억을 떠 올리고 있다. 문화 출신인 유관과 유사눌은 고향의 구월산에서 삼성사를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이 조선조 세종대왕까지도 세년가(歲年歌)가 남아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단군신화를 믿던 이병도 박사도 단군을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예부터 단군을 국조(國祖)로서 사당을 세우고 최고의 조상으로 제사를 받들어 왔는데 그것이 끊어진 것은 일제강점 때 부터였다. 지금까지도 여러 곳에 그 제단의 유적이 남아 있고, 또 그 제상의 진설도(陳設圖)와 세년가(歲年歌)가 세전(世傳)돼 오고 있다. 신화나 전설에 지나지 아니한다면 이처럼 역대왕조에서 조의(朝議)에 의해 받들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아무튼 실존 인간 단군과 영구한 역사를 이어온 고조선에 관해서는 더 연구 할지언정 신화로 단정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동북공정 논리를 따르는 자는 학노(學奴)이다
 
중국은 당나라 때부터 일본과 손잡고 적극적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해 왔는데, 이것도 부족해서 1905년 청·일 간에 맺은 ‘간도조약’ 후에는 중국과 일본이 우리 역사의 말살을 기도했다. 이제 더 이상 역사왜곡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역사왜곡에 대한 경계를 더욱 높여 그 대책을 내 놓아야 한다. 필자는 2년 전 우리나라 젊은 학자로 미국과 중국에 유학을 다녀온 유망한 학자로 지목되는 서울D대학의 Y교수와 고대사에 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너무 반가워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생각을 물어봤다. 그런데 그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은 너무나 의외였고 분노를 느낀 일이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역사의 정체성(正體性)은 찾아 볼 수 없고 중국의 동북공정의 이론을 그대로 따라 말을 하는데 놀랐다.
 
그의 논리는 “고구려, 발해는 중국 땅에 세워졌으니 중국역사로 봐도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었다. 중국이 1980년대 중반에 극비밀리에 발해만 인근에서 발굴한 대규모 유적과 유물은 바로 고조선의 것이었다. 이 훙산문화(紅山文化)가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1000~2000년 빠르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이에 당황한 중국은 ‘중원(中原) 중심론’에 타격을 받을까 우려한 나머지 중국은 이 훙산문화(紅山文化)를 포함해서 ‘자신의 국경 내에 존재하는 문물은 모두 자국의 역사’라는 논리로 동북공정을 추진해 왔다. 이런 논리와 같은 맥락으로 말을 하는데 유구무언이었다. 고대사를 연구해 온 교수이기에 기대를 했는데, 너무 실망이 커서 그를 공박 한 적이 있다. 이 논리라면 이스라엘은 국가의 영토없이 2000년 동안 유리 방랑의 역정을 거쳐 왔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없고 사라진 것인가. 이스라엘 역사가 팔레스타인의 역사로 둔갑할 수 있느냐고 되묻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 고대사 대학교수의 입에서 나온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중국에서 동북공정의 논리만 배우고 온 것 같아 지극히 실망했다.
 
이런 논리에 젖은 학자 아닌 학자가 우리 학계에 한 둘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 필자는 오랜 기간 법학을 연구해온 법학도의 시각에서 봐도 이것은 아니다. 물론 법조계나 법학계가 19세기 법 논리에 안주한 자가 더 많음도 부인 안하지만 역사학을 연구하는 사학계는 더 심각한 것 같아 한마디 하게 된다. 우리나라 법학계도 재판에 있어서 조약이나 국제적 법 원리를 무시하는 판결과 변론이 없는바 아니지만 사학계는 소수의 깊이 연구하는 정예학자를 빼고는 더 심한 것 같아 보여 이에 대한 수술이 요구되고 있다.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동북아 역사재단’에서도 “간도는 우리 땅이 된 적이 없다”든가, “단군은 신화가 맞다”는 식의 연구가 부족한 학자 아닌 학자는 솎아내야 한다고 사료된다. 국가의 예산만 축내는 이런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국가도 자주성과 책임성을 잃으면 그 국가는 국가라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국의 역사를 바로 연구하지 않고 남의 왜곡한 역사만을 따르는 무리는 조국에 대한 정체성이나 애착도 책임도 느끼지 못하는 무익한 사람이다. 이를 바로잡고 정비하고 가야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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