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제11대 동천왕은 고구려를 21년간 재위한 왕이었다. 기원전 245년 동천왕 18년이 되는 때 위(魏)의 관구검이 환도성에 들어와서 많은 고구려 책을 싣고 물러갔다고 했다.
이 훔쳐간 책을 저본(底本)으로 해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펴내고 거기에 ‘동이전(東夷傳)’이 들어가고 범엽(范曄)이 후한서(後漢書)가 진수(陳壽)가 엮은 삼국지를 바탕으로 동이열전(東夷列傳)을 후한서에 옮겼음을 말했다.
한 마디로 중국의 역사는 우리역사를 바탕으로 나왔다. 중국역사서에 기록된 일본에 관한 기록도 이미 앞에서 밝힌바 대로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후한서(後漢書)’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 나와 있을 정도로 나라다운 형태가 돼있지 않은 것이었다. 이를 중일의 기록대로 아래 옮기어 참고 하도록 그대로 옮겨본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의 기록을 보면 ‘낙랑(樂浪)부근의 바다 저쪽에 왜인(倭人)이 있다. 그것은 100여개의 나라로 나눠져 있다. 왜인(倭人)은 때때로 중국에 와서 황제의 알현을 원했다’고 했다. 여기서 나라라는 것은 부족의 소집단국을 의미하는 것 같다.
‘후한서(後漢書)’에는 서기57년 건무중원(建武中元 2년) 왜(倭)의 노국(奴國)이 사자(使者)를 보내서 공물(貢物)을 조공(朝貢)했다고 했다. 그 때 사자(使者)는 자기가 대왕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노국(奴國)은 왜국의 최남단에 있다고 했다. 한(漢)의 광무제(光武帝)는 노국(奴國) 왕에게 인수(印綬)를 주었다고도 했다. 이 인수는 후쿠오카 현(福岡縣) 시가섬(志賀島)에서 출토됐다고 하고 있는데 그 진위(眞僞)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안제(安帝)의 영초원년(永初元年)에 왜국왕 사승(師升)등이 노예160인을 헌상해서 황제의 접견을 바랐다는 기록도 보인다. 여기의 왜(倭)는 지금의 왜가 아닌 듯하다. 여기서 말하는 왜(倭)는 지금의 중국 남단의 왜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오늘은 중국역사서에 쓰여 진 당시 일본의 어떠했는가! 등에 관해 중일의 말한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후한서(後漢書)와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 비쳐진 왜국(倭國)
후한서(後漢書)는 후한의 왕 환제(桓帝)와 영제(靈帝)를 말하는 것으로 서기147~188년에 해당한다. 이 때 왜국(倭國)은 외국의 침략으로 크게 혼란한 주인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또한 왜인(倭人)은 조선 사람과 중국인이 부르고 있는 일본인(日本人)의 고칭(古稱)이다.
따라서 일본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7세기 후반 일본의 기록은 스이코(推古天皇)시대이후이고 중국 당(唐)의 시대 이후의 일이라 하고 있다. 즉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는 671년부터였다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쓰기 시작한 배경을 보면 일본에서 태어난 오진(應神) 진구황후의 아들이 일왕의 나라를 세워 왜(倭)라 하는데 그 첫 실존인물인 왜왕 1대부터 왜라 칭해 왔다.
일본(日本)이라는 국명(國名)을 쓰기 시작한 것은 백제가 멸망한 후의 일이다. 당시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장(扶餘豊璋)이 사이메이(齊明)의 뒤를 이어 덴지(天智) 일왕이 되고 난 후인 671년 당(唐)의 승인을 얻어 일본(日本)이라는 국호(國號)를 갖게 된 후 부터다.
한편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의 왜국(倭國)은 논쟁이 되고 있는 사료(史料)인데 여기에 나오는 사마대국(邪馬臺國)의 위치에 대해서는 중국 사자(使者)가 왜국(倭國)까지 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실제 사자(使者)가 움직인 행정(行程)만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견문(見聞)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으로 대체적인 일수(日數)를 기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 당시 사마대국(邪馬臺國)의 위치를 기록한 것인데 그들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다면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
‘왜인은 대방군(帶方郡) 동남의 넓은 바다 중에 살고 있어서 산과 섬에 의해서 나라와 마을을 만들고 있다.’ 약(略) 또 ‘대방군(帶方郡)으로부터 왜(倭)에 가는 것은 우선 해안을 따라서 한족(韓族)의 나라들을 거쳐서 때로는 남쪽에 때로는 동쪽으로 나가고 그 북안(北岸)의 구사한국(狗邪韓國)에 도착 한다’고 하고 있다.
‘이 간(間)의 거리는 7000여리(千余里). 여기서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간다. 1000여리(千余里)를 가면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한다. 또한 바다를 건너서 천여리(千余里)를 가면 말로국(末盧國)에 도착한다.‘ 고 하고 있다.
육상의 동남으로 500리를 나아가면 이도국(伊都國)에 도착한다. 대대로 왕이 있어 두 여왕이 통치한다. 여기는 대방군의 사자(使者)가 왜倭)와 왕래할 때 늘 주류(駐留)하는 곳이다. ‘거기서부터 동남으로 백 여리 가면 불미국(不弥國)에 도착한다. 남쪽을 수행(水行)으로 20일을 가면 투마국(投馬國)에 도착한다. 남쪽으로 나가면 사마대국(邪馬臺國)에 도착한다’고 하고 있다.
‘여기는 여왕의 도읍이 있는 곳이며 수행(水行)10일 육행(陸行)1개월로 도착할 수 있다. (略) 대방군(帶方郡)으로부터 여왕국(女王國)까지의 거리는 일만 이천여리(1萬2千 余里)이다’ 이 사마대국(邪馬臺國)의 나라(倭國)는 원래는 남자를 왕으로 하고 있었었으나 7~80년 전에 왜국이 혼란에 빠져 나라들이 장년(長年)에 걸쳐서 싸웠다. 거기서 사람들이 상담해서 한사람의 여자를 세워서 왕으로 했다는 것이다.
이름은 히미고(卑弥呼)라 하며 귀도(鬼道=주술(呪術)을 하고 사람을 현혹하고 있다고 했다. 이 여왕은 이미 나이가 많은 터라 부군(夫君)이 없고 그녀의 동생이 보좌했다는 것이 중국의 역사서에 쓰여 있는 3세기경의 사마대국(邪馬臺國)에 관한 기술(記述)이다.
중국, 일본역사서 기술(記述)·조작 알고 말을 해야
일본에 관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서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후한서(後漢書)’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이다. 한서지리지는 서기전 1세기경에 한(漢)에서 만들어진 역사서인데 이 당시 일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한서는 중국 후한시대의 역사서로서 1세기경의 일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은 삼국지(三國志)속에 사마대국(邪馬臺國)의 위치와 3세기경의 정세(情勢)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삼국지는 후한말기에 나눠져 있었던 위(魏), 오(吳), 촉(蜀)의 3개국시대가 기재되고 있는 중국의 정사(正史)를 말하는 것이다. 즉 위서(魏書), 오서(吳書), 촉서(蜀書)를 일컫는다.
그런데 이 역사기술은 중국과 일본의 허구의 역사를 조작한 것들이 많이 있기에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다. 한(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노국(奴國)왕에게 인수(印綬)를 주었다는 이 인수는 후쿠오카 현(福岡縣) 시가섬(志賀島)에서 출토됐다 하고 있으나 조작가능성이 높다.
일본은 평양에 낙랑의 유물유적을 조작해 묻었다가 발굴발견 했다는 것과 같은 일이 비일 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역도 우리는 지금 일본으로만 알고 있으나 석연치 않다. 필자는 지난 14일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동창회에 참석했는데 그 때 대만에서 온 명치대학 동창회 종0빈(鐘0彬)간사장과의 역사이야기도 나누며 대만이 오랜 옛날에는 왜국(倭國)이었는데 대만역사에 왜구의 피해가 있었느냐 질문에 왜구피해가 없다고 했다.
이는 대만(臺灣)이 그 옛날 왜국(倭國)이었기에 대만에는 왜구(倭寇)의 노략질을 당한 피해가 없다. 아세아는 물론 유럽까지 노략질을 한 왜구가 대만에 없음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당시의 왜는 지금의 일본열도가 아니라 지금 중국남부와 대만(臺灣)이 바로 왜(倭)이었다. 때문에 왜곡된 역사서를 기조로 한 역사는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위의 글도 석연치 않은 기술(記述)임을 알 수 있다.
일본대표적인 사서에 ‘고사기’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있는데 이 두 사서(史書)는 학자들이 고대사의 세계에서 때때로 인용하고 있는데 그 기술내용도 거의 기본적으로는 일치하고 있다. 일본에서 기기(記紀)라 하는 경우에는 이 두 역사서를 지칭하는 것이다. 단 두 역사서 간에는 다음의 다름이 있다. 그것은 기재대상이 된 시기가 다르고 문체가 다르고 편집의도가 다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지토우덴노(持統天皇687~697)대의 끝인 697년까지로 하고 있는데 대해 ‘고사기(古事記)’는 스이코 덴노(推古天皇 593~628)의 628년까지 밖에 없다. 또 두 역사서의 문체(文體)가 다른 것은 ‘일본서기’는 한문체로 쓰여 지고 있고 중국역사서등으로부터 인용이 많이 보인다. 이에 대해서 ‘고사기’는 음독(音讀)과 훈독(訓讀)이 혼재(混在)한 문장이 돼 있다.
또한 편집의도가 틀린 것은 일본서기는 칙찬(勅撰)역사서임에도 불구하고 이설(異說)이 자주 등장하나 ‘고사기’에는 비교적 그러한 이설(異說)이 일체 없고 일관(一貫)하게 쓰여 지고 있다. 이상의 것을 생각하면 정사로서의 ‘일본서기’에 대해서 ‘고사기는 발주자 즉 천황가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 말 할 수 있는 것 같다.
스이코 덴노(推古天皇)까지만 기재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스이코 덴노(推古天皇)로서 일체 끊어있어 히다스 덴노(敏達天皇)이후는 천황의 계통이기 때문에 “고사” 기(記)로서는 생략한 것이라 본다. 더욱이 기기(記紀)의 기술(記述)에는 다소 작위적인 부분이 없다고 말 할 수 없다. 때문에 유적이나 유물이라는 고고학적 사료와 병행해서 검증하는 것이 불가결하다고 돼 있다.
일본 최고(最古)의 고사기(古事記)는 어떻게 만들었나!
‘고사기(古事記)’는 서기681년 텐무 덴노(天武天皇673~686)는 제가(諸家)에 전해지는 역사가 진실과 다르게 돼 있는 것으로 당시 히에다노 아레(稗田阿禮)에게 명해 그것을 바로 전하기 위해서 문자가 없었던 사람들이 후세에 전하는 중대한 일이 일어난 일들을 입으로부터 입으로 전하는 구전(口傳)을 계속할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
이일을 전문직으로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후에 ‘가다리 배(語部)’라 불리었다. 이러한 가다리 배(語部)들이 대대로 계승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최초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는 가다리 배(語部)들이 계속해서 이어온 역사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가다리 배(語部)는 텐무 덴노(天武天皇)의 사후 이 사업은 겐메이 덴노(元明天皇707~715)가 계속해서 히에다노 아레(稗田阿禮)가 말하는 역사를 백제 후손인 안만려(安萬侶)에게 기록하도록 명했고 ‘고사기(古事記)’는 이렇게 착수해서 30년 후 겨우 일본최고(最古)의 역사서라는 사서(史書)가 완성한 것이다.
히에다노 아레(稗田阿禮)는 28세부터 58세 까지의 30년간을 ‘고사기(古事記)’를 완성하는데 봉사한 셈이 된다.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살펴보면 고사기는 일본(日本)의 최고(最古) 역사서로 제가(諸家)에 전해지는 바른 황통(皇統)을 명백하게 한다는 정치적 의도에 의해서 작성됐다.
이에 반해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 최고(最古)의 칙찬(勅撰)에 의한 역사서이고 후세에 조작이 많은 역사서이다. 기재(記載)하고 있는 시기는 신대(神代)부터 628년까지의 스이코 덴노(推古天皇)까지의 역사서이고 일본서기는 신대(神代)부터 7세기 697년 까지 이다.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이외에도 일본의 고대 역사서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서기697~791년까지의 ‘속일본기(續日本紀)’와 792~833년까지의 ‘일본후기(日本後紀)’. 및 833~850년까지의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일본문덕천황실록(日本文德天皇實錄)’과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6개를 합쳐서 일본은 이를 육국사(六國史)라 하는데 이외에도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전기(傳記)등이 있다.
이 책들은 대부분 왜곡된 내용이 많아서 일본이 얼마나 역사를 조작 변조하며 왜곡한 것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필자는 ‘일본서기(日本書紀)’가 히에다노 아레(稗田阿禮)가 말하는 것을 안만려(安萬侶)가 쓴 것이라 말해 왔다.
그런데 일본은 안만려(安萬侶)가 아니라 사인친왕(舍人親王)이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편자(編者)로 하고 있다. 그리고 안만려(安萬侶)의 이름도 벼슬을 붙인 오오노야스 마로(太安萬侶)로 하고 ‘고사기(古事記)’만 쓴 것으로 하고 있는데 진위는 알 수 없다.
문제는 이 히에다노 아레(稗田阿禮)가 구술(口述)에 의한 것을 일본역사라고 하나 이것은 역사라 할 수 없다. 이것은 일본사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허구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일본은 의도적으로 역사를 위조했다. 그 위조는 학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분명히 말 할 수 있는 사실은 한 개인의 구전(口傳)은 한 개의 전설이지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황순종,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 ‘山海經’. 大連出版社, ‘行走 大黑山’.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 劉泳,海燕,‘赤蜂博物館’.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石井進, 笠原一男, 兒玉幸多, 笹山晴生, ‘詳說日本史’. 稻垣泰彦, 川村二郞, 村井益男, 甘粕 健 共著 ‘日本史’. 西東社出版部編 ‘日本の古墳, 古代遺跡’.외 다수의 서책(書冊)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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