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명치유신은 구번체제(舊藩體制)를 깨고 새로운 국민국가를 건설하는데 그 본래의 의의가 있다. 이것이 당시의 서구화(西歐化)이고 근대화(近代化)로서 구체적으로는 지방적 분권체제가 중앙집권체제에 이동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한국의 유학자들의 공헌도 컸다.
이퇴계(李退溪)의 자성록(自省錄)을 읽은 일본의 학자들은 일본에 있어서 이퇴계는 도학중흥(道學中興)의 아버지였다. 필자가 유학을 갔을 때 확인한 것은 이퇴계와 이율곡은 일본인의 가장 존경하는 학문의 스승이라고 했다.
야마사키 안사이(山崎闇齊1818~1682)같은 학자는 초년에 이퇴계의 자성록(自省錄)을 읽고 감개흥기(感慨興起)해 참다운 학문이나 교육이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학문을 정학(正學)이라 일컬으며 막부(幕府)를 배경으로 한 임(林)의 학파와 다른 주자학을 주장했다.
야마사키(山崎闇齊)의 학파(學派)와 따로 오스카(大塚退野)가 퇴계의 자성록,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숙독하고 이를 신(神)처럼 부모처럼 존숭(尊崇)하는 일파(一派)를 일으켰다. 이 유파(流派)중에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의 영걸(英傑) 요코이(橫井小楠)외 많은 일본의 명치유신의 나타난 것은 주목 할 일이다. 요코이(橫井小楠)는 퇴계를 [고금절무(古今絶無)의 진유(眞儒)]라고 까지 한국에 왔을 때 평가했다.(한국일보 1972.8.2)
또한 이퇴계(李退溪)연구회 이사 구라다(倉田信靖)씨는 명치유신의 사상적 주류는 퇴계학退溪學)이었다. 이런 뜻에서 퇴계학은 일본근대화의 원동력이었다. 명치유신의 사상적 원동력인 사마사키(山崎闇齊)는 바로 대표적인 퇴계학파(退溪學派)의 사람이었다.
따라서 일본 근대화의정신적 상징인 교육칙어(敎育勅語)도 퇴계학(退溪學)을 대표하는 것이다.] 라고 말 했다. 이퇴계는 자주성이 없이 주자(朱子)의 대중화주의(大中華主義)를 신앙해 한국에서 망국적인 사대사상(事大思想)을 조장했다.
그러나 일본은 자주성을 견지 하면서 이퇴계의 사상을 신앙함으로 그 사상이 일본근대화에 공헌했다. 그런데 이퇴계의 사상이 일본근대화의 원동력이 된 것은 표면적 사실일 뿐이다.
실질적으로 일본이 근대화에 원동력이 된 것은 화랑도다. 오늘은 이 화랑도가 나온 배경과 당시 한국과 일본의 상황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世俗五戒)가 나온 배경
중국에 오래 유학해 지식을 넓히고 제사상을 충분히 연구하고 귀국한 원광법사(535~630)는 신라의 청년화랑들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가르쳤다. 이것이 원광법사의 五계라는 것이다.
즉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을 말한다. 이는 외래의 도교, 유교, 불교의 제사상을 당시 신라인의 현실생활논리로 토착화 시켜 국가통일에 이바지하기에 알맞게 섭취한 것으로서 실제로 후일 삼국통일에 크게 이바지한 전통사상이 됐다.
원광법사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와 유교의 사상을 충분히 섭취한 박학의 학승(學僧)이었다는 점을 주목 할 필요가 있다. 그 당시 신라의 실정은 호국불교(護國佛敎)를 필요로 했고, 배타성이 강한 도교(道敎)나 유교(儒敎)가 아직 성행하기 전이었고 불교(佛敎)는 포용성이 많았기 때문에 화랑정신을 신라에 토착화 시키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 백제보다 국력이 강하지 못해 거국적으로 국민의총단결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평화시대의 효(孝)보다 나라를 호위하기 위해서 충(忠)과 신의(信義)와 심신(心身)을 단련으로 유사시 전투력으로 대체도 요구 되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진흥왕 이래 신라의 삼국통일 까지 100년 가까운 전통을 가진 화랑도였다. 그러나 삼국통일에 당을 끌어들여 백제 고구려를 친 것은 단군 이래 조의선인의 정신을 짓밟은 것은 김춘추가 화랑도를 악용하고 국선도 정신에 대한 반역으로 용납 할 수 없는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이들을 중국 선교(仙敎)의 신선, 선인(仙人)과 구별해 화랑(花郞=국선, 선랑(仙郞), 풍류도(風流徒), 풍월도(風月徒)이라고 불렀는데 신라 말 고려 초에 그 선인(先人)화랑이 유도(儒徒)에게 잔멸 됐다고 했다.
그리고 송인(宋人)으로 고려에 귀화한 호종단(胡宗旦)등이 각지를 유람하면서 국선 화랑의 유적을 모조리 파쇄(破碎)했다는 것이다. 또한 신라의 화랑도가 길러낸 인재가 몇 백인데 국내 사료는 모두 말살 해 버렸다.
그리고 겨우 중국당인(唐人)의 문헌에 남은 몇 명에 대해서만 그나마도 내용 설명은 빼버리고 마지못해서 몇 자 인용하고 있는 사대주의자로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金富軾)은 호종단(胡宗旦) 보다도 더 심한 자라고 신채호 선생은 혹평하고 있다.
고려 때 송(宋)의 사신으로 온 서궁에게 조의선인(皁衣仙人)은 머리를 깎고 일종의 자가화상 중인양 비췄다. 신채호 선생은 고려 이지백(李知白)화랑의 중흥을 꾀했고 예종(睿宗)과 의종(毅宗)도 국선(國仙)에 관심을 표명 한 바 있고 조선조 초기까지도 민간에 유지됐다고 한다.
이시영(李始榮)선생도 1930년대 중국지식인 황염배(黃炎培)의 몰상식한 한국역사관을 반박하며 국선, 선랑조의 화랑등이 깊고 굳은 뿌리가 상고 이래로 있는 줄을 알지 못하고 우리한족의 일체 진화(進化)가 한사군이후부터 발원된 것처럼 논단하고 있는 그 망언을 지적하고 있다.
화랑도는 신라수호의 간성(干城)이었다.
북애의 규원사화(閨怨史話)에 의하면 고대의 임금들은 즉위하면 먼저 하느님과 단군조선을 제천(祭天)해 섬겼다고 했다. 그러한 소도의식(蘇塗儀式)의 관직으로 국선(國仙), 조의(皁衣)라는 것이 있었다.
고조선의 개조(開祖)단군은 충효사상을 이어받은 위에 단군자신이 연원이 된 국선의 집단적 수련전통을 세웠다. 단군이 연원이 돼 한인고유의 도를 실천하는 집단의 선비, 혹은 선배, 선인(先人)을 역사왜곡을 밥 먹듯 하는 중국 도교(道敎)의 신선과 구별하기 위해 낭도(郎徒) 또는 국선(國仙)이라고 부른다.
조선고유의 현묘지도(玄妙之道)를 기반으로 몸을 버려 의를 온전히 해 국민을 위하는 국선의 사신전의(捨身全義)의 기풍은 부여의 구서(九誓) 효, 충, 신, 용, 인을 뜻하는 삼한의 오계(五戒), 고구려의 조의국선(皁衣國仙) 및 다물(多勿)이념과 신라 화랑 오계(五戒)로 이어 졌다.
구서(九誓)는 대체로 삼한(三韓)의 오계(五戒)와 화랑도의 오계를 종합한 것이었고 다물(多勿)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高朱蒙)의 연호(年號)로서 회복을 뜻하는 고구려의 정치이념을 말한다.
단군의 이름에도 다물(多勿)이 있었으며 고주몽과 동천임금과 명재상 을파소(乙巴素),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을밀 선인(仙人) 의 다물이념(多勿理念), 연개소문(淵蓋蘇文) 등도 모두 단군 이래 국선정신의 해설, 실천자였다.
고대 삼국이 국가사업으로 국사를 편찬한 것은 바른 전통과 자기의 정신을 분명히 전하고자 함이었다. 또 삼국이 모두 국가에서 대학을 설립하고 교육했거니와 고구려의 경당(扃堂)은 각지의 평민,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글과 활쏘기를 익혀 인재를 양성하며 국가 유사시에는 나라를 위해 나서게 했다.
고구려에는 단군임금에 연원한 선인(仙人)의 전통을 이은 무사훈련단체로 옷에 검은 띠를 둘은 조의국선(皁衣國仙)이 있었다. 신라 진흥왕이 일으킨 화랑은 단군제단과 삼한과 백제 소도(蘇塗)제단의 무사 곧 그 때의 선배를 이어받은 고구려의 조의선인에 연원을 둔 훈련단 이다.
따라서 신라의 화랑도(花郞道)는 외래의 사상도 섭취해 발전시킨 독특한 전통사상을 창작한 점이다. 위의 글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세속오계(世俗五戒)의 내용이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화랑도결사투쟁(決死鬪爭)을 모방한 일본
일본이 명치유신(明治維新)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승리한 것은 영국 등 서구열강의 도움과 국민정신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고무(鼓舞), 분발해 근대화에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쟁에 승리한 저력(底力이 바로 무사도(武士道)다. 이 무사도는 우리의 무사도가 일본의 근대화에 성공한 실질적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이 무사도는 어데서 나온 것인가? 이는 신라 화랑도(花郞道)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일본문화사에 [무사도(武士道)는 유불사상(儒彿思想)에서나온 것이오, 무사도의 정신은 의(義), 용(勇), 애(愛) 삼자(三者)라고 했다. (日本文化史 第三卷 第三十章 武家社會の 道德 參照).
유불사상에서 나왔다 함은 무사도(武士道)가 일본사상이 아니고 외래사상을 수입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무사도가 유불(儒彿)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신라의 화랑도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유불사상은 무사(武士)를 무시해 무사에게 도자(道字)를 붙이지 아니 한다.
도자(道字)는 문사(文士)에게만 붙이는 것이다 무사에 도자(道字)를 붙이는 것은 화랑도의 특색이다. 유불사상에는 결사 투쟁하는 용기가 없다. 오직화랑도특색이 결사 투쟁하는 것이다.
화랑도의 의(義), 용(勇), 애(愛) 삼자(三者)는 유불사상(儒彿思想)의 본질이 아니다. 유교의 본질은 인(仁)이요 불교의 본질은 자비(慈悲)다. 오직 화랑도의 본질이 의(義), 용(勇), 애(愛) 삼자(三者)다. (이상은 崔仁, 韓國學講義 104面, 139面 以下 參照 引用).
앞의 일본문화사에 무사도(武士道)는 적을 사랑한다고 했다. 즉, 1000년 전 주작(朱雀)천황이 947년에 전사한 적군의 명복(冥福)을 불전(佛前)에 빈 일이 있고, 1184년에 뇌조(賴朝)가 포로 된 중형(重衡)을 우대함으로 중형(重衡)이 크게 기뻐해 연회를 열고 즐기었다고 했다.
그러나 불교의 요청에 의해 부득이 중형(重衡)을 사형에 처했다고 했다. 이같이 불교사상은 적을 사랑하지 아니 했다. 불교는 이직보원(以直報怨)의 원리에 의해 적을 사랑치 아니하고 불교는 인과설에 의해 적을 만난 것은 인연이라 할 뿐이요 적을 사랑치 아니한다.
이칭(異稱) 일본전(日本傳)에 [일본은 흉악해 살생을 좋아 한다.]고 했다. 그럼으로 적을 사랑하는 것은 일본인의 전통적 사상이 아니다. 적을 사랑하는 사상은 오직 화랑도에만 있다. 신라 화랑단장 사다함(斯多含)이 가라국(加羅國)에서 잡아온 적(敵) 300명을 석방해 양민을 만들었다. 이는 적을 사랑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崔仁, 前계書104~105面 以下 參照 引用).
일본은 화랑도를 왜 받아들인 것인가
한편 일본은 신라 화랑군의 정벌을 저항하지 못해 전국 신사 및 불전(佛前))에 기도하고 풍성학루(風聲鶴淚)의 공포에 떨었다. 즉 바람소리와 학의 소리를 들어도 신라병마(兵馬)의 소리라 해 도주했다고 한다.
이같이 신라화랑 군을 두려워 한 일본이 신라를 방위할 방법은 오직 화랑도를 배우는 것뿐이다. 당시의 일본은 화랑도를 배우지 아니 할 수 없었다. 이는 자국의 방어를 위한 것이었다.
왜 신라를 두려워했는가!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木+差)錄)에 서기291년[오진(應神)천황22년에 신라가 일본을 정벌해 오사카(大阪)근처 명석포(明石浦)까지 들어가니 일본이 항복해 백마를 잡아 맹세했다.]고 했다. (東史綱目 第二卷上, 儒禮王十二年 [註] 參照.)
이와 같이 신라가 일본을 크게 정벌 한 적이 있음으로 일본이 신라를 그렇게 두려워했다. 일본이 신라를 크게 두려워 한 원인이 어데 있는가! 신라가 일본을 크게 정벌한 까닭이었다.
또한 무사도의 애(愛)가 1000년 전 주작(朱雀)시대부터 있었다. 신라가 일본을 정벌 할 때 이 화랑도를 배웠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이 중세기부터 이름에 랑자(郞)字)를 많이 볼 수 있다.
랑자(郞)字)는 화랑도가 창조한 것이다. 즉 화랑은 그 자체가 랑자(郞)字)를 붙이고 화랑도는 죽지랑(竹旨郞), 처용랑(處容郞), 미이랑(未履郞), 장춘랑(長春郞)등 랑자(郞)字)를 이름에 붙이었다. 일본인들이 랑자(郞)字)를 많이 붙인 것은 화랑을 선망(先望)해 본 뜬 것이다.
일본의 역사는 고대사 근대사가 다 같이 파렴치한 위조를 감행한 것은 누차 말했다. 파렴치한 위조사에 일본이 임나(任那)를 근거로 백제 신라를 예속시키고 동양의 패자(覇者) 고구려까지 지배했다는 대담한 위조를 감행하는데 언어도단의 지나가는 개가 웃을 기가 찰 일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황순종,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 ‘山海經’. 大連出版社, ‘行走 大黑山’.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 劉泳,海燕,‘赤蜂博物館’.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石井進, 笠原一男, 兒玉幸多, 笹山晴生, ‘詳說日本史’. 稻垣泰彦, 川村二郞, 村井益男, 甘粕 健 共著 ‘日本史’. 西東社出版部編 ‘日本の古墳, 古代遺跡’.외 다수의 서책(書冊)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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