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제도는 상고시대에 출현했다. 그 시발점은 우리나라였다.
그럼에도 중국과 일본은 진왕(秦王·서기전247~서기전221)은 서기전221년 육국(六國)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 후 새로운 황제(皇帝)라 칭호를 제정한데서 시황제(始皇帝)라 했다고 왜곡하고 있다.
이는 황제제도를 어느 나라가 언제부터 황제제도가 나온 것을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소치(所致)다. 앞서 칼럼을 통해 다뤘던 것처럼 황제제도는 우리가 천손(天孫)으로서 천민(天民)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어디 이 뿐 만인가. 중국과 일본의 문화와 문물제도 중 상당수는 우리나라에서 넘어 갔음에도 여전히 이들은 조작된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상고시대부터 황제(黃帝)또는 황제(皇帝)라고 일컬어왔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은 이 황제도 마저 예외 없이 왜곡하고 있다.
역사는 유추(類推)의 과학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나 역사는 그 흐름을 제대로 잘 알지 못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잘못된 거짓으로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사의 속단은 절대 금물이다.
황제제도와 군사제도 등 모든 제도가 고대 우리의 것을 가져다가 그들의 제도로 했으며 예의(禮儀)며 역학(易學) 등도 우리의 것을 모방했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은 황제제도마저 도둑질 하고 있다. 오늘은 황제제도가 우리에게서 간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자 한다.
황제제도는 우리문물제도 배운 것이다
황제제도는 우리가 상고시대부터 시행해온 제도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진(秦)나라 이전의 황제이다. 그는 한·위·초·연·제나라 육국(六國)을 통일한 진왕(秦王)은 그 해 승상(丞相) 어사(御使)에 하명(下命)해 천하통일의 공업(功業)에 알 맞는 위호(位號)의 찬정(撰定)을 명(命)했다.
승상(丞相) 왕관(王관), 어사대부 빙겁(御史大夫 憑劫), 정위 이사(廷尉 李斯)등은 박사와 협의해서 태황(泰皇)이라는 칭호를 답신(答申)했다. 태황(泰皇)이라는 칭호는 당시의 관념에서는 지존(至尊)이 되는 신위(神位)로서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의 삼위(三位)가 있어 그 중 태황(泰皇)이 가장 높다고 한데서라 한다.
이를 받아들인 진왕(秦王)=시황제(始皇帝)은 태황(泰皇)으로부터 태자(泰字)를 거두고 상고(上古)의 제위(帝位)의 호(號)인 제자(帝字)를 넣어서 여기에 황제(皇帝)라 하는 칭호를 제정해 이와 함께 제(制), 조(詔), 짐(朕)등의 황제전용어를 정한 것이었다고 하고 있다.
이 때부터 진왕을 시황제로 칭했는데 시황제(始皇帝)라는 것은 진왕(秦王)의 사후 추칭(追稱)으로 생전에는 시황제(始皇帝)라 칭한 예가 없다. 여기서 황제라는 통상(通常)의 의미는 삼황오제(三皇五帝)를 겸한 칭호라 해석하는 자도 있으나 이 해석에는 근거가 없다.
황제의 황자(皇字)는 지상의 태양의 빛나는 것 같이 태양의 광휘(光輝)를 나타내는 왕성(王聲)의 문자로서 ‘빛이 휘황찬란하다,’ ‘아름답다.’ ‘위대한’, ‘큰’등의 의미이고 제자(帝字)는 그 자형(字形)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을 들고 있다.
그러나 원의(原義)는 상제(上帝) 즉, 천계(天界)에 있는 우주만물을 주제하는 최고가 되는 절대 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위에 황자(皇字)와 제자(帝字)가 결합해서 황제라는 성어(成語)가 되면 그 의미는 불빛이 휘황한 상제(上帝) 빛이 휘황찬란한 우주의 주재자(主宰者)가 된다.
그런데 이 황제제도는 중국과 일본은 우리상고시대부터 일컬어온 황제제도를 진왕(秦王)에 의해서 채용된 제도라 하나 이는 이제도가 언제부터 쓰여 진 것을 알지 못하는 역사무지이다.
황제의 어의(語義)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황제제도는 환국(桓國)·배달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고대 중국의 문화는 우리나라의 제도를 모방했다. 천자(天子)의 문물제도도 우리나라에서 배운 것이다.
종래의 군주(君主)의 위호(位號)인 왕(王), 혹은 천자(天子)의 의미는 그 어느 것도 현세(現世)의 의미이며 천자(天子)란 그 어느 것도 현세의 위호(位號)로 왕과 대개 뛰어난 자의 의미이다. 즉, 천자란 천명(天命)을 받은 자의 의미로 초월적 존재라는 의미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진왕(秦王)이 말하는 황제(皇帝)란, 우주만물을 주제(主宰)하는 초월적인 절대 신(神)이다. 이는 현세의 군주가 이러한 의미의 칭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를 지상에 출현한 상제(上帝)를 자인(自認)하는 것이라고 자인(自認) 것 밖에 아니 되는 것이다.
황제의 어의(語義)를 위와 같은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왕(秦王)이 시황제(始皇帝)라는 칭호제정에 관해서 시행한 수도건설사업(首都建設事業)등으로 백성들이 고달픈 삶의 결과를 가져 온다.
진왕(秦王)은 시황제(始皇帝)라는 칭호제정 익년(翌年), 신궁(信宮)을 그 수도(首都) 함양(咸陽)남쪽의 위수남안(渭水南岸)에 만들어 그 이름을 바꿔서 극묘(極廟)라 해서 이를 하늘의 중심인 천극(天極)을 상징하는 것으로 했다.
또한 그 8년 후에는 그 아방궁(阿房宮)의 건설에 착수해 여기서부터 위수(渭水)를 넘어서 북방의 함양(咸陽)에 미치는 상하 이중(二重)의 복도(複道)를 만들어 이를 천극(天極)의 각도(閣道), 한(漢)을 건너서 영실(營室)에 이르게 했다.
즉 아방궁을 위수(渭水) 한(漢) 즉, 천한(天漢)-은하(銀河를 말함) 정해서 함양을 이십팔숙(二十八宿)의 [영실(營室=페가수스(Pegasus)희랍신화에 나오는 날개 돋친 말 천마(天馬)]의 두 별에 비정(比定)하고 있다. 이 경우 아방궁은 천제의 거소(居所)인 천극(天極)에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상제의 거소(居所)를 지상에 출현 시키려는 것으로서 지상에 출현한 휘황찬 상제(上帝)인 황제의 거소(居所)를 그 성격에 알맞게 한 것이다. 시황제의 중국통일과 함께 봉건제(封建制)가 폐지됐기 때문에 진대(秦代)에는 왕(王)이라는 칭호는 사용되지 않았다.
또 황제(皇帝)라는 칭호는 천자(天子)라는 칭호와도 모순되기 때문인지 시황제(始皇帝)시대에는 천자라는 칭호가 사용했다는 명확한 흔적은 없다. 황제(皇帝)는 상제(上帝) 그 것이나, 천자는 상제에 종속(從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황제(始皇帝)와 중일의 유가사상(儒家思想)
조선왕조에서 보듯 유교의 주지(主旨)는 인(仁)이고 행동강령(行動綱領)은 충효(忠孝)이다. 그런데 효보다 충(忠)을 내세웠다. 그것은 충(忠)은 왕을 높이고 받드는 것으로 유교는 제왕(帝王)을 옹호하는 군주주의(君主主義)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유교문화(儒敎文化)는 천자(天子)를 존중하는 문물제도에 집약되리만큼 천자(天子)라는 명칭과 그 제도는 우리민족의 천민사상(天民思想)을 모방한 것이다. 백호통(白虎通-(爵)에 [天子者 爵稱也 王子 父天母地 爲天之子也)라 했다.
즉, 천신지신(天神地神)을 부모로 해 천신의 자(子)가 됨으로 천자(天子)라 칭한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천자(天子)는 천신(天神)의 피를 받은 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는 천신(天神)의 피를 받았다는 천민사상(天民思想)이 없다.
인류역사상 천신의 피를 받았다는 천민사상(天民思想)을 먼저 제창한 자는 오직 우리민족이다. 따라서 이 사상을 계승한 유교는 우리의 천민(天民)사상을 모방해 천자의 명칭과 제도를 제정했다. 이 사실은 중국의 문헌에 의해서도 다 실증된다. 이는 전에 기술했음으로 생략한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은 황제와 유가(儒家)사상에 대해서 중국의 고대사상은 법가(法家) 내지는 도가(道家)이다. 군주의 명령을 절대적 법령으로서 보는 법가사상(法家思想)에서는 군주(君主) 그 자체가 초월적인 지고(至高)의 존재가 아니면 아니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군주(君主)는 의도(意圖)나 작위(作爲)에 의해서 출현(出現)하는 것이 아니라 무위(無爲)로 해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성격은 도가사상(道家思想)과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유가(儒家)사상은 왕도(王道)를 찬미하는 것으로서 그 사상체계 중에는 왕이나 천자는 존재하고 있어도 황제의 출현을 합리화하는 논거가 없다고 비하한다. 그들은 황제의 출현은 도가와 법가의 사상이 있다고 이해하며 진대(秦代)에서 탄압된 배경을 내세우기도 한다.
어떻든 중국도 황제라는 칭호가 채용된 당시의 황제관(皇帝觀)이 2천여 년 동안 계승된 것이 아니다. 황제의 성격은 한대(漢代)가 돼서는 빠르게 변화한다. 한대(漢代)에서는 최고의 군주의 정식칭호는 황제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천자(天子)라고도 불리어 그대로 황제라는 국내 통치자(統治者)로서의 칭호이며 천자(天子)란, 외국에 대한 경우와 귀신(鬼神)에게 제사하는 경우에 사용된 칭호가 됐다.
이 변화를 받아서 유가(儒家)의 왕도(王道)사상이 여기에 접근해 소위 유가의 국교화(國敎化)가 시작 됐다고 보고 있다. (이상은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 編著, ‘世界歷史の基礎知識’ P132~133參照 引用했다.)
천자의 관제(官制)도 우리 관제를 배웠다
고대 동서남북 사방민족(四方民族)중 높은 문화를 가진 자는 오직 우리민족임을 논어(論語)에도 말하고 있다. 논어(論語)에[夷狄之有君不如諸夏之無也)]라 했다. (論語卷之三, 八佾第三),
즉 이적(夷狄)은 군주(君主)가 있고 중국(中國)은 군주가 없다고 했다. 공자(孔子)당시에 군주가 있었다. 그런데 군주가 없다고 말한 것은 군주를 섬기는 문물제도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卷之三十九, 昭公)에 보면 소공(昭公)17년 추(秋)에 담자(담子)가 내조(來朝)하니 소공(昭公)이 소호(少호)가 관직에 조명(鳥名)을 부친 유래를 물었다. 이에 담자가 내 할아버지 소호가 즉위하니 봉황이 나타났다고 했다.
이로 인해 관직(官職)에 조명(조(鳥名)을 붙이었다고 해설 했다. 이 말을 들은 공자(孔子)가 28세의 청년으로 담자를 방견(訪見)해 천자(天子)의 관제(官制)를 배우고 옛날부터 천자가 관제(官制)를 잃으면 사이(四夷)에서 배운다는 말이 있었는데 과연 그러하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민족이 천자의 문물제도를 창조하고 중국은 우리가 창조한 그 문물제도를 수입한 것을 가리킨 것이다. 진시황이 황제제도를 처음 그 제도를 시행했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위에서 사이(四夷)는 본래 사방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 사방민족 중 우리민족이 대표적이었다. 그리해 우리민족을 사이(四夷)라 칭한 예가 많이 있다. 삼국지(三國志)에 부여(夫餘) 고구리(高句麗)를 사이(四夷)라 칭했다.
공자가 옛날부터 중국이 사이(四夷)에서 천자의 관제를 배웠다고 말한 것은 우리조선에서 배운 것이라 주장한다. 5세기 초 후한서를 쓴 중국사가(史家) 범엽(范曄)이 공자의 말을 후한서 동이전에 기입하고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도 위의 공자의 말을 조선(朝鮮條)에 기입했다.
이는 공자(孔子)를 가르친 담자가 우리민족이요 공자가 말한 사이(四夷)가 우리민족이라 입증 한 것이다. 그럼으로 이글은 우리가 천자(天子)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창조하고 중국은 옛 부터 우리가 창조한 그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수입한 것이라 확정한 것이다.
한편 봉황(鳳凰)은 천자(天子)에 전용하는 문구(文句)이다. 즉, 천자(天子)가 좌석을 봉탑(鳳榻)이라 칭하고 천자의 궁전(宮殿)은 봉지(鳳지)라 칭하며 천자의 서(書)를 봉소(鳳昭)라 칭한다.
그럼으로 당시 소호가 봉황(鳳凰)을 보고 관명(官名)을 지었다 함은 천자(天子)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설정한 것을 가르키는 것이다. 고대 중국인이 봉황(鳳凰)은 우리에게서 출생했다고 했다. 이 또한 천자(天子)의 문물제도가 우리민족이 창조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같이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중국과 일본이 고대황제(古代皇帝)라 하는 칭호를 제정하고 이와 동시에 제(制), 소(昭), 짐(朕)등의 황제 전용어(專用語)를 제정하고 징왕(秦王=진시황) 이후 청조최후(淸朝最後)의 선통제(宣統帝)가 퇴위하기까지 2000여년을 계속했다고 하나 황제제도는 우리에게서 배우고 사용한 것뿐이다. 중국과 일본은 황제제도 까지도 조작하고 왜곡하고 있는가 여기서도 여실히 말해 주고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황순종,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반재원, ‘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권진규 ‘조선사’.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 ‘山海經’. 大連出版社, ‘行走 大黑山’.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 劉泳,海燕,‘赤蜂博物館’.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石井進, 笠原一男, 兒玉幸多, 笹山晴生, ‘詳說日本史’. 稻垣泰彦, 川村二郞, 村井益男, 甘粕 健 共著 ‘日本史’. 西東社出版部編 ‘日本の古墳, 古代遺跡’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 編著, ‘世界歷史の基礎知識’.외 다수의 서책(書冊)을 참조하고, 본문을인용했음을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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