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지식(知識)에 대한 욕망(慾望), 문화(文化)에 대한 욕망은 물과 같이 보편(普遍)이다. 그런데 이 보편의 진리를 거슬려가는 나라가 이웃에 있고 이들은 진실을 왜곡하는 나라들이다.
중국은 4300여년의 역사에서 중국을 내세우나 우리는 고대부터 그들의 말하는 것 같이 중국의 지배를 받은 일이 없고 도리어 우리선조들이 한족을 정벌, 정복, 제압한 것이 중국역사에 판명되고 있는데도 마치중국이 우리를 지배한 것같이 말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무지의 소치다.
예맥이 1000년 동안이나 중국을 지배한 것도 왜곡하고 강대한 오호(五胡)가 중국에 침입해 300년 동안 남북조로 분열시켰다. 이를 통일한 것이 수(隨)이고, 이 수(隨), 당(唐)이 동양 패자(覇者)이나, 이 수(隨), 당(唐)을 재패자(再覇者)가 바로 고구리(高句麗)인 것 이미 기술했다.
지금 우리나라 역사교재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들이다. 고대 우리가 중국과의 전쟁도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수(隨)와 당(唐)과의 전쟁도 다 대륙에서 벌어졌다.
고려 때의 강감찬의 구주대첩도 대륙에서의 전쟁이었고 그 전승비도 대륙에 세워 졌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이 무대이며 왜도 대만과 대륙에서 있었다. 또한 이성계장군이 요동을 정벌하고 바로 요동도 우리의 영토인데 동북아역사재단에서도 간도가 우리땅이 아니라 해서 스카이데일 리가 이에 관한 특집을 낸바 있다.
또한 삼국사(三國史) 권46에 고구리(高句麗), 백제가 100만 군으로 오(吳), 월(越)을 정벌하고 북으로 유(幽),연(燕), 제(齊), 로(魯)를 점령해 중국의 장안조정(長安朝廷)의 근심거리였고 수(隨)나라의 멸망도 요(遼)의 동쪽에 있는 고구리를 정벌에 기인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고대 우리와 중국과의 전쟁은 한반도(韓半島)가 아니다. 대륙에서 이뤄 졌다. 고구리(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야(伽倻)는 물론 고려(高麗)도 조선도 다 대륙에 있었다. 반도식민사학의 사람들은 우리와 중국 간의 전쟁도 한반도에서 벌어진 것 같이 말을 하나 이는 역사무지(歷史無知)에서 하는 말이다.
다시 분명히 말하지만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왜(倭)까지도 대륙에 있는 것을 모르는 데서다. 그들이 아는 것은 유령의 역사를 알 뿐이다. 앞으로 반도식민사관(半島植民史觀)의 역사가 얼마나 한심한 허구의 무모한 국가와 민족을 팔아먹는 짓인가를 말할 것인가를 기술하겠다. 이들의 망국적인 사관피해가 너무 심하기에서다.
오늘은 중국이 허구의 역사왜곡으로 이민족(異民族)들을 동화(同化)시키기 위해 가진 거짓역사조작과 그들의 없는 상고사와, 고대사왜곡의 단면(斷面)을 하나하나 그들의 허구역사가 얼마나 부끄러운 죄악을 짓고 있는가를 조명하며 다시 붓을 옮겨가며 계속 살펴보고 자 한다.
황제묘(黃帝墓)에 쓰여 진 참예(參詣)글 왜곡 한심
중국은 인민의 시조(始祖)를 황제(黃帝)로 하고, 지금56민족13억 인민의 공통(共通)의 조선(祖先)이라며 3개의 단어가 많이 등장함을 본다. 그것은 황제(黃帝), 황하(黃河), 황토(黃土)다.
중국고전인 [서경(書經)]이나 [시경(詩經)등 문헌(文獻)에도 없는 황제(黃帝)를 등장시켜 제도를 정해서 중국인에 문화적 생활을 향수(享受)시키려 황제(黃帝)를 말하나 웃기는 허구 조작이다.
중국은 1911년 일어난 신해혁명(辛亥革命)당초에도 연호를 황제기원(黃帝紀元) 4609년이라 칭했다. 이에 의하면 황제의 즉위는 기원전 2698년이라는데 물론 이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황제(黃帝)의 존재를 믿으며 역대 왕조의 황제(皇帝)는 새로 취임하면 반드시 황포(黃袍)를 입고 황제묘(黃帝墓)에 참예(參詣)해 왕조발전을 기원해 왔다.
이 습관은 모택동(毛澤東)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았고 강택민(江澤民) 국가주석의 때에도 답습하고 있었음을 본다. 이미 다 아는바와 같이 황제능(黃帝陵)은 서안시(西安市)로 부터 동북에로 약 180Km. 떨어진 협서성(陜西省) 황릉현성(黃陵縣城)을 벗어난 교산(橋山)에 있다.
이 황제묘(黃帝墓)는 교산(橋山)기슭에 수령(樹齡) 5천년이 넘는다고 말해지는 거목(巨木)에 둘러싸인 한적한 장소에 있고, 그 참예(參詣)의 심득(心得)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쓰여 져 있다.
즉 그 내용을 보면, [한민족(漢民族)의 시조인 황제는 중국56민족 12억(참예(參詣心得 碑-건립 당시기준) 인민의 공통의 조선(祖先)이다. 여진족(女眞族), 금조(金朝), 몽골족의 원조(元朝), 한족(漢族)의 명조(明朝), 만족(滿族)의 청조(淸朝) 어느 것도 이를 자랑으로 해서 연연(年年) 제전(祭典)을 집행하며 보호해 왔다. 이 전통을 계승해서 엄숙히 배례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중국정부는 이에 의해서 현재의 56민족은 모두 같은 선조(先祖)를 갖는 형제와 같은 것이라고 결속을 부르짖음과 동시에 소수민족압박의 구실로 하려고 하고 있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러나 한족(漢族)이외의 55민족 중 이런 기술(記述)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민족은 거의 없다. 이를 받아들이는 자는 자기조상도 모르는 천치(天痴)만이 받아들일 것이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없는 일들을 중국은 제 멋 대로 하고 있다.
여기서 화제를 바꿔서 중국인의 내면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그들 선호점도 살펴보려고 한다.
중국인들은 어찌해서 황자(黃字)를 좋아 하는 가!
중국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황(黃), 적색(赤色)인 주홍(朱紅)색을 좋아해서 건물(建物)의류(衣類) 등에도 많음을 볼 수 있고, 강(江)도 황하(黃河)라고 하고 있다. 이 황하(黃河)는 중국에 있어서는 고대 5대문명의 마지막발생지로 중국에 있어서는 어머니 같이 익숙한 강이다.
중국에서는 양자강 다음에 제2의 장류(長流)로서 전장 5464Km그 시원(始源)은 청해성(靑海省) 중부의 아납달택산(雅拉達澤山-5242m)록(麓)에 있는 약고종열분지(約古宗列盆地)의 적은 샘(泉)인 것이 1985년7월 국무원황하수리위원회(國務院黃河水利委員會)에 의해서 판명 됐다.
중국조사에 의하면 서기전602년의 주(周) 정왕(定王) 5년부터 현재까지 2600여 년 간에 황하는 크고 작은 것을 합쳐서 1590회의 범람을 일으키고 있으나 범람 시에 넓었던 하폭(下幅)에는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대량의 섞은 니토(泥土)가 침전(沈殿)해 퇴적(堆積)이 거듭됐다.
이로 인해 중류역(中流域)이나 하류역일대(下流域一帶)에는 황토층(黃土層)이 넓혀져 갔다. 이 황토층(黃土層)은 서(西)로 청해성, 감숙성, 남(南)은 협서성, 하남성, 북(北)으로 산서성, 내 몽골, 동(東)은 산동성, 하북성까지 미쳤다. 그 총 면적은 100만 평방Km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 황토의 토양(土壤)은 화학적으로는 알카리성(性)위에 철분(鐵分)을 다량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 토양은 건조(乾燥)시에는 단지 황색(黃色)의 흙이나 다시 물을 포함시키면 비옥(肥沃)한 토양이 되기 때문에 농경(農耕)에는 최적의 환경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역사적 건조물(建造物)은 물론, 일반건축물도 적색(赤色)인 주홍색(朱紅色)을 선호(選好)하는 것이 매우 많은데 그 비밀은 이 풍부한 황토(黃土)에 있다.
황토에는 다량의 산화철(酸化鐵)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이를 불태우면 홍색(紅色)이 된다. 더욱이 이 산화철은 착색제(着色劑), 회(繪)의 구(具), 연마재(硏磨材)등에도 이용 되고 있다.
또한 주(周)시대의 전차(戰車)는 적색의 칠(漆)을 칠했고, 춘추전국시대에는 서약서등에도 주색(朱色)을 사용했다. 그 의미는 태양이나 피의 색에 연결되는 신성(神聖), 힘(力), 권위, 악마구제(惡魔驅除)등에서 특히 건축상(建築上) 배색(配色)으로 주색과 록청(綠靑)을 대비(對比)해서 쓰고 있는 것도 주색(朱色)에 주술적(呪術的) 요소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 보고 있다.
중국은 건축물뿐만 아니라, 군기(軍旗), 예복(禮服)을 비롯해서 상점(商店)이나 식당, 일반생활용품 등에도 이 색들을 선호(選好)해서 주색(朱色)이 사용하게 된 것은 위의 이유에서다.
한편 중국한족이 어디에서 어떻게 출현(出現)했는가! 에 관해서 고고학서(考古學書)를 봐도 한족(漢族)의 정의(定義) 그 자체(自體)가 애매모호(曖昧模糊)하기 때문에 명해(明解)한 답을 얻기 힘들다. 더구나 저들의 지도층은 거의가 우리민족이 그들을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선조의 한자(漢字)의 발명과 우리가 고대부터 문화와 문물을 가지고 우리민족의 주 무대이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은 어린이나 국민에게 이러한 역사사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결코 역사의 진실을 외면해 가르치지 않으니 이에 대한 반성의 여지도 없다.
한족(漢族)의 중국본토에 언제부터 정착했나!
지금 중국에는 56민족이 산재하고 있다. 그런데 고대 이 대륙은 우리민족이 환국시대부터 정주하고 다스린 곳이다. 중국한족이 중국영역 내(內)에 본격적으로 변경지(邊境地)까지 확대해 나간 것은 20세기에 와서다. 예컨대 만주(滿洲)에 중국인이 온 것은 130년밖에 아니 된다.
정확히 바로 말한다면 20세기에 들어 와서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건국한 이후다. 일반적으로 중국 한족(漢族)이란 현재의 중국본토에 거주하는 황색인종(黃色人種)으로서 중국어를 말하고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민족이라 말할지 모르나 아니다.
중국의 한족은 원래 본토에서 발생하고 그 후 차제에 발전 확대해 간 것이라 하지만 그렇지 않다. 고인류학적(古人類學的) 고고학적(考古學的)으로 조사해서 가면 제대로 밝혀진다. 중국한족의 시조는 다 우리민족인 삼황오제를 모시고 있듯이 그들도 헷갈리며 정론(定論)이 없다.
중국한족(漢族)의 시조(始祖)는 단일이 아니라 먼 서북지방으로부터 황하(黃河)를 따라서 동진(東進)한 많은 유민(流民)이 비옥(肥沃)한 토양인 황하유역(黃河流域)에 정착해서 농경(農耕)을 시작한 과정에서 민족의 융합(融合)이 이뤄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서기전 4000년 전 앙소문화(仰韶文化)와 서기전 2300년 전 용산문화(龍山文化)가 황하의 상류와 중류에 출현해서 황하 중류와 하류에 넓혀졌다고 하는데 이 문화는 5개의 문명인 요하문명 과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인도 문명 이집트문명 후의 2000년 전(前) 황하문명전의 문화이었다.
이 5대문명은 모두 강을 낀 문명이 주종(主從)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 이들 문명은 도구의 발달과 농업의 발전에 따라 원시사회의 생존이 강(江)과 바다 주변에서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중국역사에서 실재(實在)가 확인되는 중국 최고(最古)의 왕조(王朝)는 우리 동이족인 은(殷)으로, 서기전 1600년 전 경부터 서기전 1100년 전 후까지 황하유역에 번영했다.
한편 한자(漢子)의 조형(祖型)이라고 할 수 있는 갑골문자(甲骨文字)는 적어도 서기전 1500년경에 발생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이것은 은(殷)의 성립과 거의 같은 시기가 된다.
더욱이 2004년 7월에 은(殷)보다 앞의 왕조(王朝)인 하(夏)의 궁전적(宮殿跡)이 발굴 됐다고 중국사회과학원이 발표했으나 문자(文字)는 은(殷)시대 갑골문자도 이미 등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역(西域)방면으로부터 황하와 위수(渭水)연안을 따라서 동진해온 한족조선(漢族祖先)들 중에 어떠한 민족이나 부족이 있었는가는 은(殷)시대가 되기까지도 전혀 알 수가 없다.
세계학자들의 말하는 학설은 여러 종종이 있어 흥미가 깊으나 은(殷)시대가 되기까지 모두 불명(不明)하다. 영국의 학자는 한족(漢族)의 조선(祖先)은 다림분지의 사람이라고 하고 프랑스 학자는 바빌로니아로부터 온 샘족(族)의 일파(一派)로 보고 있다.
또한 독일의 학자는 백인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란이 동시에 한족(漢族)의 발생지가 아닌가! 추측(推測)하고 있다. 이제 중국, 일본, 반도식민사관 자들은 있지도 않은 거짓역사는 이제 그만 두고 진실을 말해야 한다. (以上은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P14~37 參照引用).
중국한족이 정권 잡은 것은 고작 1000년
중국 한족(漢族)이 우리를 다스린 적이 없다. 그들은 잠시 고구리와 백제를 다스렸다고 하겠으나 고구리(高句麗)리 멸망에서 30년간 아주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그동안도 우리의 예맥, 발해(渤海) 등 건재했었다. 명맥을 잃지 않고 이어 갔다.
분명한 사실은 중국(中國) 한족(漢族)이 정권(政權)을 잡았다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잘 봐 줘서 1천년 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이방민족(異邦民族)이 잡은 것을 부인 할 수 없다.
예컨대 청(淸)과 만주국(滿洲國)은 가야인(伽倻人)이었고, 명(明)은 고리인(高麗人)이고 몽골과 금(金)은 신라후예(新羅後裔)다. 거란(契丹)은 고구리후예(高句麗後裔)이다. 또한 말갈(靺鞨)과, 여진(女眞), 요(遼)가 중국의 한족(漢族)이 아니다. 이들 역사는 우리역사에 편입이 옳다.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중국대륙의 주역(主役)들은 삼황오제(三皇五帝)를 비롯해서 거의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지 중국의 한족(漢族)이 아니다. 그래서 한족(漢族)은 우리조상들까지도 자기들 조상(祖上)이라 도둑질한다. 이는 필자가 작년중국에 답사(踏査) 후(後) 확인한 사실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황순종,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반재원, ‘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권진규 ‘조선사’. 오재성,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고구리사)’, ‘우리(右犂)의 歷史는? 犂(리:東夷)歷史 쇠集’ ‘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 ‘山海經’. 大連出版社, ‘行走 大黑山’.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 劉泳,海燕,‘赤蜂博物館’.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石井進, 笠原一男, 兒玉幸多, 笹山晴生, ‘詳說日本史’. 稻垣泰彦, 川村二郞, 村井益男, 甘粕 健 共著 ‘日本史’. 西東社出版部編 ‘日本の古墳, 古代遺跡’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 編著, ‘世界歷史の基礎知識’.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했음을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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