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막론하고 역사근간(根幹)이 뒤집힌 나라가 올바로 선 예가 없다. 우리역사는 고대부터 중국과 일본이 조작, 왜곡한 역사상태로는 민족정기의 재기갱생은 어렵다. 여기에 매국적인 반도식민사관자들의 몰지각한 행태는 더욱 가관의 경지(境地)다.
이런 상황으로 새 역사창조와 세계적인 국가발전의 정상적인 올바른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가 제대로 건전한 발전을 기(期)하기위해서는 민족정기(民族正氣)를 바로 해야 가능하다. 역사생명력이 잃고 있는 지금의 우리나라의 정신상황은 정상(正常)이라 할 수 없다.
더구나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는 학자도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고 이 사기(史記)를 높이평가하고 인용하며 ‘사서(史書)내용으로 중국을 내세움은 삼갈 일이다. 우리가 알 것은 이 사서(史書)도 의문투성이의 위서로 우리를 현혹하게하고 있기에서다.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역사바로세우는 의식사상운동(意識思想運動)을 전개(展開)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상황에 와있다. 허나 위정자(爲政者)나 온 국민(國民)도 너무나 무관심이다.
중국은 이 ‘사기(史記)’를 중국의 최상(最上)으로 치는 ‘정사(正史)’라고 일컬으며 ‘사기(史記)’를 기본으로 인용해서 역사를 쓰고들 있다. 더구나 이들은 고대 지금의 중국 땅과 그 주변을 망라해 찬습(纂習)한 통사(通史)로서 이 ‘사서(史書)’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하고 있다.
‘태사공서(太史公書)’라는 것이 후한(後漢)의 반고(班固)부터 [사기(史記)]라고 칭(稱)하고, 당대(唐代) 경용지(經鎔志)부터 전용(專用)으로 공식화(公式化)한 책(冊) 이름이 됐다. ‘사기(史記)’이전에도 춘추(春秋), 상서(尙書), 좌전(左傳)등 여러 가지 역사서(歷史書)가 있었지만 이전의 역사서들은 단지 한 국가와 시기(時期)만을 대상으로 했고 내용도 단조로웠다.
그런데 ‘사기’는 황제(黃帝)로부터 한무제까지 대륙의 정치와 군사적사건, 제왕(帝王)과 보좌한 재상의 사적(史蹟)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민족, 천문, 역법, 지리, 수리(水利)등을 망라한 방대한 역사서라 할 수도 있고, ‘사기(史記)’는 기전체(紀傳體)라는 서술 체제로 엮어 놓았다.
때문에 ‘사기(史記)’는 중국 역사뿐만 아니라 한문 문화권의 사학자들에게 고대부터 지금까지도 막대(莫大)한 영향(影響)을 끼치며 역사를 이해하는데 필수고전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이 ‘사기(史記)’는 우리 고조선(古朝鮮) 역사를 지울 뿐 아니라 아예 뭉개 없애며 중국만을 내세운 편엽적(片葉的)이고 제멋대로 허망(虛妄)의 중국상(中國像)을 실상(實像)같이 꾸민 우리조선역사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역사를 거꾸로 왜곡(歪曲)한 위서(僞書)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은 중국의 지난 수천 년간 역사에 있어서 어떻게 침략하고 약탈하고, 학살하고, 말살하고, 차별하고, 학대(虐待)를 반복하며 역사를 왜곡, 변조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사기(史記)’의 구성내용 정사(正史)로 볼 수 없다.
한국사(韓國史)와 동양사(東洋史)를 연구함에 있어서 사기(史記)의 광범한 내용의 개략을 보면 ‘사기(史記)’는 제왕(帝王)의 연대기(年代記)인 본기(本紀)12편, 제후(諸侯)를 중심으로 한 세가(世家)30편, 각 시대의 문물에 관한 것 8편, 연표(年表) 10편, 뛰어난 개인의 활동을 다룬 전기(傳記), 열전(列傳) 69편 등 총 130편으로 엮어져 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그의 역사인식(歷史認識)과 자신의 정신이 삽입된 마지막 편에 자기 견해를 압축해 끝마무리를 지우고 있다. 그런데 사마천이 쓴 열전(列傳)은 각계각층의 다양한 활약상을 망라한 사적(事蹟)으로 꾸며져 있다. 이 사서를 그대로 받아 들 일 수 없다.
또한 129편의 취지와 자신의 가계(家系)와 생애를 소개한 마지막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는 서문(序文)에 해당하는 글과 같은 내용으로 그의 철두철미한 정신과 학문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일본의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 같은 양심적(良心的)인 학자는 ‘사기(史記)’는 고조선역사(古朝鮮歷史)를 뒤엎어 쓴 책이라 평가하고 있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은 전한(前漢) 하양(夏陽)인으로 경제(景帝)때 용문(龍門)에서 태어나 부친의 엄격한 교육과 동중서(董仲舒), 공안국(孔安國)등 이름난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0세가 됐을 때 고문(古文)을 읽었다고 하며 20세에 동족 회계(會稽)를 비롯, 북의 지역을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자(字)는 자장(子長)이며 서기전145년경에 출생했다. 그리고 그의 말년이 불분명하지만 학계에서는 서기전 86년에 무제가 죽은 후에 사망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마천은 주(周)나라 선왕(宣王)때 사관(史官)을 맡았고 이후 대대로 그 직책을 계승해 사마(司馬)라는 관직을 따 성을 바꾸었다고 전 한다.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 담(司馬 談)은 한나라 무제(武帝) 때 왕실문서를 관리하고 천문(天文)을 관측하는 태사령(太史令)을 맡아 보았다.
그가 늙어 죽기 전에 아들 사마천(司馬遷)에게 당부하길 천추에 빛날 통사(通史)를 집필 하도록 유훈(遺訓)을 남겼다. 그는 학문과 경험을 인정받아 처음으로 낭증의 벼슬에 오르게 되고 무제3년인 서기전 108년에 아버지의 자리를 3년 만에 승계하고 집필하기 시작 했다.
그런데 한 문제(漢 文帝) 때 이광(李廣)이 명궁(名弓)에다 군사를 애정(愛情)으로 이끌어 흉노(匈奴)정벌에서 용맹을 떨쳐 모두 두려워했다. 무제(武帝)도 선왕(先王)을 이어받아 흉노와 전쟁에서 여세를 몰아 여러 번 크게 이기던 중 이사(李斯)장군 3만의 기병이 크게 패(敗)했다.
이에 이광(李廣)의 손자 이능(李陵)에게 기병(騎兵) 5천을 이끌고 3만이 넘는 군사와 맞서 싸우게 하던 중 흉노가 다시 8만의 증원 군을 급파해 도착 즉시 이능(李陵)을 포위했다. 증과부적으로 패배함에 따라 기세 등등 했던 무제는 침통(沈痛)하게 사마천(司馬遷)에게 물었다.
사마천은 이능(李陵)을 충정(衷情)으로 변론했으나 패장(敗將)을 두둔했다는 이유로 사마천을 옥에 가두고 공손오의 모함이 겹쳐 역적의 몸이 돼 죽게 됐으나 쓰고 있던 사기(史記) 때문에 궁형(宮刑)을 자청, 사형(死刑)을 모면(謀免)하고 집필(執筆)을 끝냈다. (이상은 吳在城 編著,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高句麗史(고구리사)’,‘우리(右犂)의 歷史는? 리(犂:東夷)歷史 쇠集’ ‘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의 書冊을 參照 引用했다).
고대국가 강유역(江流域)에 건국한 이유!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은시대(殷時代) 와서 갑골문자(甲骨文字)에 의해서 역사시대에 들어서서 동이족을 비롯한 씨족(氏族)집단과 수십이 넘는 만족(蠻族)의 이름이 거론 되고 있다.
은(殷)의 세력권확대방향이나 그 후에 계속되는 서주(西周)의 진출방향을 보면 낙읍(洛邑 = 낙양(洛陽)이나 호경(鎬京-후에 장안(長安)-지금의 서안(西安)으로부터 동방에 확대한 것이 사실인 것을 볼 때, 한족(漢族)이 되는 한족집단(漢族集團)은 서쪽으로부터 사막을 넘어와서 황하(黃河)나 위수(渭水)에 와서 정착을 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단지 황하의 중류역(中流域)인 낙읍(洛邑)이나 위수(渭水) 부근에 있는 호경(鎬京)에 어찌해서 고대국가가 성립했는가를 보면, 농경지(農耕地)로서의 매력보다도 교역(交易)을 위한 거점(據點)으로서 발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시 말해서 강 유역에 나라를 세운 그 이유는, 대 황하(黃河)의 폭이 넓고 하류역(下流域)에서는 도하(渡河)하는 것이 곤란했으나 낙읍분지(洛邑盆地)나 호경(鎬京)부근은 비교적 쉽게 도하(渡河)가 가능하고 이 때문에 각지의 물산(物産)이 시장에 집적(集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중국(中國)의 고대국가(古代國家)의 왕(王)은 농산물(農産物)이나 어육류(魚肉類) 의 모이는 시장(市場)의 상권을 장악(掌握)함에 의해서 차제(次第)에 세력을 확장해 간 것으로 보고 있다.
은(殷)을 세운 동이족이 황하 중유역(黃河 中流域)으로부터 하류역(下流域)에 걸쳐서 씨족연합체를 형성하기 시작 한 때로부터 중국각지에도 각기 살고, 주민이 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현대 중국인의 조형(祖型)은 몽골인을 주류로 하는 퉁구스계, 몽골족 티베트계, 터키계로서 이란계 등이 유목수렵인(遊牧狩獵人)이 융합(融合)해서 형성(形成)돼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조선족은 선진 족으로 이미 선주(先住)해 있었기에 이곳에 고대국가 은(殷)을 세울 수 있었다.
중국한족의 형성(形成)에 서방유목민족(西方遊牧民族)이 크게 영향을 주고 있는 사실로서는 연(蓮)꽃을 피우는 연(蓮)인 가자(茄子)와 호과(胡瓜-오이)가 다 인도산(印度産)이 들어왔고 아프리카 산(産)인 수박(西瓜)도 이때부터 대륙(大陸)에서 생산된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고고학적(考古學的), 인류학적, 자료가 적은 서방(西方)인 이란(페루시아)으로부터의 민족과 페루시아 원산포도(葡萄)와 석류(石榴)등의 함께 중국대륙에 이입(移入)되고 있음을 본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하고, 이후 강우량이 평소의 10분의1로 바다수면이140m나 낮아지고 먹을 것이 없어지자 생존을 위해 먹을 곳이 있는 북동방향의 대륙으로 이동하게 됐다.
당시 기후가 알맞은 바이칼 호수(湖水)지경d까지 갔다가 다시 서남방(西南方)으로 남하(南下)해 지금의 중국대륙에 먼저 우리선조들이 선주(先住)하고 상고시대부터 환국(桓國)과 배달국(倍達國)이라는 나라를 건국(建國)하고 대륙에 제국(帝國)을 세워 다스려 왔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스리랑카에서도 한국의 역사는 1만년이 넘는다고 3천 년 전 우리나라사람들이 일부가 정착해 살며 지금도 1만년역사에 대한 상세히 기술돼 있는 책자가 나오고 있는데 우리 식민사관자들은 아직도 허구(虛構)의 역사만을 고집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역사시대 대륙의 은 제국(殷帝國)의 성립배경
헌데 중국은 상고시대역사가 없다. 사마천(司馬遷)의‘사서(史書)’에 의하면 은(殷)의 시조(始祖) 인 계(契)는 전설의 왕조 하(夏)의 우왕(禹王)에 의한 황하(黃河)의 치수사업(治水事業)을 도운 업적(業績)에 의해 제순(帝舜)의 시대에 하남(河南)의 상[商]의 땅에 봉(封)해졌다고 전해진다.
은(殷)이라는 이름(名)전에 상[商]왕조 유렵지(遊獵地)로부터 취했다고 말해지는 국호(國號)다. 상[商]이라는 자(字)는 실은 여성이 애를 낳을 때 양다리사이의 혈(穴)즉, 여음(女陰)을 나타내는 문자(文字)로, 여성이 태아(胎兒)를 태내에서 숨기는 은(隱=가리다) 의미의 문자다.
즉, 은(殷)이나 상[商]이라는 문자는 원시시대의 회임(懷妊)의 기쁨과 부족발전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은(殷)은 서기전1600년경 부족국가의 연합체로서 화북일대(華北一帶)를 지배했다. 이 제국의 출자(出自)가 유목민이었던 것을 유추(類推)하는 귀중한 증거자료가 있다.
그 하나는 수도가 시조(始祖)로부터 11대 탕왕(湯王)에 이르기까지에 8회나 수도(首都)를 천도(遷都)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탕왕(湯王)으로부터 19대에 해당하는 반경(盤庚)의 대(代)까지에 5회의 천도(遷都)를 행했다고 하고 있다.
또 하나는 은제국(殷帝國)에서는 각종의 축제에 반드시 제단 앞에 희생의 공물(供物)로서 바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당초는 양(羊), 소(牛), 돼지(豚)이었다가 시대가 내려오면서 적(敵)이 돼 있는 강족(羌族)의 인간(人間)을 잡아다가 희생의 재물로 하고 있었던 것도 알게 됐다.
소(牛)와 돼지(豚)는 식용으로 이용되나 양(羊)은 털을 생산하기위해서 유목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천도(遷都)를 반복하고 있었던 사실과 신(神)에게 제사(祭祀)할 때 양을 희생으로 하고 있었던 것으로부터 은(殷)은 원래 유목민(遊牧民)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은(殷)은 서기전 1300년경에는 이미 정교한 청동기(靑銅器)를 제작하고, 또한 한자(漢字)의 조형(祖型)인 갑골문자(甲骨文字)를 발명하고 있었다. 갑골문지는 하남성(河南省) 안양(安陽縣) 소둔촌(小屯村) 은허(殷墟)라고 전해지고 있는 지(地)로서 1899년에 발견 됐다.
이 갑골문자(甲骨文字)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범주(範疇)에 속하는 용산문화시대의 순수한 회화(繪畵)문자보다는 상당히 진보한 것으로서 이 문자가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출토한 문자 3000자 중 800자 정도는 해독(解讀)됐으나 이 일로 의해서 은(殷)시대의 제사, 사회, 정치, 경제 등이 해명되기 시작해 지금까지는 전설(傳說)에서 벗어나지 못 했던 은제국(殷帝國)의 존재가 역사시대(歷史時代)로서 인식(認識)되게 됐다.
이후도 계속해서 문자의 조작(造作)은 계속해서 증가해 나가서 송나라시대(宋時代)인 990년~1053년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편찬(編纂)한 자서(字書)는 5만 3525 자(字)에 달했다.
은(殷)시대 천도(遷都), 머리 없는 유체(遺體)가 나온 이유
한편 말이 달라지지만 필자는 중국역사의 서책(書冊)을 보면서 머리 없는 유체(遺體)에 관한 그 내막을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관한 수수거기가 티베트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강족(羌族)의 침입에 의한 압박에서 은(殷)나라가13회나 천도(遷都)를 한 것을 알게 됐다.
강족(羌族)은 은나라시대에 대륙에 이주한 티베트계의 민족으로 양을 치면서 티베트고원(高原)에서 동으로 이동하고 일부는 위수(渭水)를 거쳐서 동점(東漸)하고 일부는 황하를 건너서산서(山西省)방면으로 향하고 기타는 양자강중류부터하류까지 진출한 강족(羌族)의 침공에 있었다.
때문에 당시 선주(先住)해 있던 부족들이 강족(羌族)에 대한 원한(怨恨)이 얼마나 컸음을 알 수 있다. 원래 강족(羌族)은 자연환경 상 평지가 없고 고원에서 산악지대의 유목민인 것과 이에 더해서 티베트계의 족속으로 당시 살기 좋은 평야지대로 이동은 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강족(羌族)은 이동과정에서 평화로운 평야지대에서 살던 은(殷)의 주민은 이들의 침공에 수도를 천도(遷都)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강족(羌族)의 압박이 너무 강열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은(殷)은 수도를 몇 번이고 천도를 거듭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강족(羌族)에 의한 천도(遷都) 때문에 은(殷)나라는 강족(羌族)에 대한 원한(怨恨)이 하늘에 닿아 있었다.
이러한 원한은 깊어져서 지금까지 제단(祭壇)에 희생용 공물(供物)로서 양(羊)이나 소(牛)대신에 이 강족(羌族)의 머리를 제공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명한 은허(殷墟)나 구수도(舊首都)를 발굴하면 반드시 강족(羌族)머리내지 유체(遺體)가 나타나는 것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즉, 은허(殷墟)의 서북부에 [제사갱(祭祀坑)]이라고 불러지는 묘(墓)가 250개정도 발견 됐으나 하나의 갱(坑)에 8~10의 유체(遺體)의 인골(人骨)이 거듭나오는 위에 대부분은 머리가 절단돼 있어서 아직 발굴되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그 총수는 2000도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모두가 강족(羌族)의 이동(移動) 중에 인간답지 않은 그 압박(壓迫)이 너무 심했기에 심은 대로 그 응보가 강족(羌族)이 제사(祭祀)때, 제단(祭壇)에 공물(供物)로서 바쳐 졌던 것이다.
역사(歷史)는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眞理)를 인간에게 여기서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상은 ‘眞實の中國四千年史’ P34이하와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황순종,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반재원, ‘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권진규 ‘조선사’. 오재성,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고구리사)’, ‘우리(右犂)의 歷史는? 리(犂:東夷)歷史 쇠集’ ‘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 ‘山海經’. 大連出版社, ‘行走 大黑山’.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 劉泳,海燕,‘赤蜂博物館’.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石井進, 笠原一男, 兒玉幸多, 笹山晴生, ‘詳說日本史’. 稻垣泰彦, 川村二郞, 村井益男, 甘粕 健 共著 ‘日本史’. 西東社出版部編 ‘日本の古墳, 古代遺跡’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 編著, ‘世界歷史の基礎知識’.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했음을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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