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민족 야만·오랑캐로 여긴 中 한족의 왜곡사

입력 2018-01-13 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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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필자는 1978년 학위를 받고 몸이 쇠약해서 일본에서 1년간 쉬고 귀국하려는데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계셨던 최영희(崔泳禧)선생이 일본 헌정회관에서 연구 발표하는데 같이 참석하고 귀국 후에도 자주 선생과 만날 때 마다 역사이야기를 나눈 것을 잊을 수 없다.
 
선생은 역사편찬위원회에 독도자료를 수집을 하는데 필자가 수집해 드린 인연으로 귀국 후도 구가편찬위원회를 사임한 후도 선생을 만나면서 많은 역사에 이야기를 나눴다. 그 중 신라금관은 유목민족이 중앙아시아와 북방기마민족을 상징하는 사슴뿔에 대해도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오늘 신라왕관에 대해서 반도식민사관의 어떤 자는 이 왕관은 장례(葬禮)때 장식용이라고 하는 자가 있다. 장식용이 아니다. 일본이 ‘우리역사를 죽여야 일본이 산다’는 것에 종이 돼있는 영혼 없는 반도사관 자들에 의해 우리역사는 계속 망가지고 있음을 다시 본다.
 
우리 신라왕관은 세계 몇 되지 않은 왕관 중에도 시대적으로나 미적으로나 그 섬세하고 가공의 기술이나 모든 면에서 세계14의 왕관 중에 으뜸이고 최고(最古), 최고(최고)의 왕관인데 이를 장례할 때 의식용이라니 이는 엄연히 왕이 위엄을 보이게 쓴 것인데 딴소리를 하고 있다.
 
중국은 4300년 역사에서 한족(漢族)만이 가장우수하고 주변 다른 민족은 언제나 한족(漢族)에 머리를 숙여야 하는 족속이라는 의식이 뼈 골수(骨髓)에 까지 차고 있는 사람들이 중국인이다.
 
이것은 서구에서 말하는 종주국의식이나 예부터 지금까지 이적(夷狄)인 다른 나라 사람을 모두 야만인으로 표현하며 중국인을 타민족보다 못하다고 보는 것은 허용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대개 중국인들은 대국의식을 갖고 있음에서 자기들은 무엇을 하던지 제멋대로이고 상대가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결코 용서 할 수 없다는 기묘한 성벽(性癖)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필자는 재직 시 한국비교노동법학회 회원24명과 같이 중국의 5대명문대학중 인민대학과 북경대학에서 한중학술포럼을 가진바 있다. 그때 직접 중국학자들과 만나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은 노동법도 집단적노사관계법과 개별적노사관계법으로 구분도 아닌 상태로 조문만 173조 밖에 없는 데도 우리학회를 얕잡아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의치 않고 낙후된 중국의 법제를 구체적으로 지적 한 후에야 명함을 교환하자는 것 보고 이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은 이제는 많은 분야에서 낙후된 점을 보완하고 개선돼 많이 달라졌다. 오늘은 중국 고대역사가 거의 허구이고 중국인 중국인의 구성과 역사사실들이 그들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고 그들 역사는 자랑할 것 보다는 거짓 조작된 추한역사임을 말하고자 한다.
 
중국역사 우리역사 절반에도 못 미친 허구다.
 
중국은 우리가 대륙의 주인이었음을 숨기기 위해 제(齊)나라가 하남성(河南省)에 있어야함에도 이를 산동성(山東省)으로 옮겨 우리역사를 철저하게 왜곡하고 조작해온 역사범죄를 저질렀다.
 
북경대학의 총장이었다가 장개석(蔣介石) 총통이 대륙에서 대만(臺灣)으로 옮겨 가면서 국민정부와 같이 대만(臺灣)으로 간 대만대학(臺灣大學)의 총장을 역임한 부사 먼(傅斯年)은 양심적인 역사학자답게 중국역사가 터무니없이 왜곡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반도식민사관자들은 비굴하게도 연구는 뒷전으로 자신의 영달과 안위만을 생각하며 중국과 일본이 열등(劣等)한 역사를 대단한 역사인양 만들기 위해 지도(地圖)와 지명(地名)을 조작하고 멋대로 옮겨놓은 부끄러운 역사왜곡과 변조(變造)역사를 그대로 가르친다.
 
3000년 전 스리랑카에 가서 살고 있는 우리후손들은 아직도 아버지를 ‘아포치이’, ‘엄마를 엄마’, ‘할아버지를 하아포치’, ‘할머니를 하아머니’,라하며 자기조상국인 코리아의 역사가 1만년 이상이라 하며 10대의 청소년들에게 선조들의 역사를 학교에서 배운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이 1만년역사에 대해 상세히 기술되고 있는 책자도 있고 절간의 스님도 우리역사를 배우고 있다고 하며, 석가의 사가족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 말하고 있다. 영국사학자 빈센트 스미스는 네팔지역에 이동한 사가족들이 있는데 이도 우리와 같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네 식민사학을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선조와 자기영혼을 팔며 중일의 왜곡 조작한 역사만을 앵무새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역사의 활동무대가 대륙인 것은 고대천문을 관측한 것을 봐도 한반도가 아닌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인간들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자 중에는 중국 이미지가 거의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비롯해서 삼국지, 십팔사략(十八史略), 등의 고대 역사서나 논어(論語)를 비롯한 사서오경(四書五經), 두보(杜甫)나 이백(李白)을 대표하는 한시(漢詩), 서유기(西遊記) 수호전(水滸傳)등의 소설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이들은 중국의 책이 문화적으로 세련 된 저자들의 미사여구(美辭麗句)와 과장된 아름다운 중국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지고 있는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제대로 연구하고 말을 해야 한다.
 
왜 이런 사람들이 나오는 가! 그것은 우리의 전통사상과 철학이 없음에서다. 이런 자들은 중국의 역사가 갖는 밝은 부분에 속한 것뿐만 보고 그들의 어두운 전체상(全體像)을 못보고 있다. 중국역사를 제대로 연구하면 중국역사가 얼마나 허구인 사실을 바로 인식하게 된다.
 
이들은 중국역사를 미화하고 제멋대로 조작 왜곡한 허망(虛妄)의 중국상(中國像)을 실상(實像)같이 잘못 보게 되는데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알지 못하고 잘못 가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조국과 선조에 관한 인식이 잘못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중국역사에 있어서 그리 내세울 것이 없음에서 역사를 왜곡하며 침략, 지배, 약탈, 학살, 말살, 차별, 학대를 거듭해 왔으나 이것들의 잘못 됨을 하나하나 밝혀 가며 바로 잡아야 함에도 이에는 관심 없고 목전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져 있는 노예 같은 형상은 안타까운 일이다.
 
대만의 역사가 백양(白楊)도 중국 4300년 역사와 문화에 관해서 “중국사는 정말로 박해의 역사이며 중국문화는 인간에 대한 존엄과 포용력이 전혀 결여(缺如)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역사는 대륙의 역사이지 반도의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의 활동무대가 대륙이지 이 한반도가 아님을 모르고 한반도 울타리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반도식민사관자들을 볼 때, 어느 나라사람인지 의문이 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들로 인해 우리역사이어야 할 고조선, 은(殷), 고구리(高句麗), 발해(渤海) 금(金), 요(遼), 원(元), 청(淸)의 역사가 중국역사로 빼앗기고 있다. 이는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역사이다.
 
허망(虛妄)의 중국상(中國像) 바로보고 말해야
 
우리는 중국 4300년의 역사에 있어서 이민족(異民族)에 어떻게 침략, 지배, 약탈, 학살, 말살, 차별, 학대를 반복해 온 그들의 역사를 바로 봐야 한다. 그들은 우리와 같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같은 게 없다. 힘을 내세운 억지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역사를 바로 봐야 한다.
 
한편 우리도 달라져야 한다. 광복 후 73년이 돼서도 자학사관(自虐史觀)의 반도식민사관에 젖어있어 학자, 정치인, 관료, 저널리스트(journalist)도 심층심리에 있어서 똑같은 양상(樣相)이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어느 정도 왜곡이 심한지를 거의 모르고 관심도 없는 상황이다.
 
이것은 조선조 500여년의 사대주의 사상이 이를 뒷받침되고 모화(慕華)사상이 굳혀 있기에서 굳어진 것이라 보나 이는 우리가 스승이고 앞선 문화와 역사를 가진 것을 모르는데서라 본다.
 
지금의 우리나라 역사교육상황은 자학사관(自虐史觀)의 교육에만 매진하는 우리의 현실이 혐오스러운 상태다. 지금 우리나라역사를 가르치는 반도식민사관자들은 이대로 하지 않으면 직업을 잃고 먹고살 수 없으니 할 수 없다는 소리도 듣는다. 참으로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은 제멋대로 만든 허망의 중국상(中國像)을 실상(實像)과 같이 잘못 하면 주변 이민족(異民族)에 대한 침략과 말살, 국내에 있어서 왕조 교체될 때 마다 수천만 단위로 대 학살의 전율(戰慄)의 중국 4300년 사라고 일본의 역사를 연구하는 자도 말하고 있다.
 
중국 고대국가군의 학문과 사상 상황
 
필자는 근래 중국, 일본역사의 흐름을 시간을 할애하고 그들의 나라건국, 학문과 사상, 문물제도를 살펴보며 그들 역사는 우리나라유민(流民)의 학문과 사상을 많이 습득하고 있음을 본다.
 
한(漢)나라는 유자(儒者)가 말하는 문화적 예락(禮樂) 생활에 끌려서 유자(儒者)의 세력은 점점 장안(長安)의 조정(朝廷)과, 지방제왕(地方諸王)의 사랑방에 들려서 같이 학문을 논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한(漢)나라의 유자(儒者)는 이런 자를 박사(博士)라 불렀다.
 
16세에 왕위에 오른 한무제(漢武帝)는 박사로부터 유학적인 훈도(薰陶)를 받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무제의 조모인 도 태후는 유학(儒學)을 좋아하지 않고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쓴 책들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태후의 아들 경제(景帝)에게도 노자(老子)의 책을 읽게 했다.
 
여기서 황제(黃帝)는 왜곡한 중국 최초의 황제(皇帝)로서 전해지는 제왕(帝王)이다. 이 제왕의 주인공은 우리가 쓰던 황제를 마치 자기들 것이라 왜곡해 말하고 있으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모두가 거짓일 뿐임은 이미 밝힌바 대로 우리의 문물제도를 쓰고 있는 것일 뿐이다.
 
한나라의 경우 한고조(漢高祖)당시도 고조의 참모인 진평(陳平)등도 황제 노자(老子)의 술수(術數)를 좋아 했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의 일족(一族)에게도 노자(老子)를 읽게 했다. 그리고 한고조(漢高祖) 태후(太后)도 아들 경제(景帝)에게 노자(老子)의 책을 읽게 한 것이다.
 
따라서 한(漢)나라의 제3대 경제(景帝)의 조정에도 이미 유자(儒者)는 있었다. 그는 시경(詩經)인 학자로 원고생(轅固生)이라는 자가 박사로서 출사(出仕)하고 있었다. 박사는 황태후의 어전(御殿)에 불러가게 되고 거기서 노자(老子)의 책에 대해서 하문(下問)을 받았다.
 
그것은 노자(老子)에 관한 것이었다. 원고생(轅固生)박사는 바로 대답했다. “노자(老子)를 말씀하십니까. 노자가 펴낸 것은 노예가 읽는 책입니다.”고 답했다. 태후는 격노해서 그를 멧돼지 우리에 넣어졌다.
 
박사는 멧돼지 우리에 들어가면서 살기 위해 몰래 창을 빌려서 일격으로 멧돼지의 심장을 찌르고 목숨을 살렸다고 한다. 그러나 황태후는 그 이상의 형벌을 가하지 않은 일이 있다. 왜 이런 일화를 쓰는 것은 현대의 우리도 유학(儒學)이라는 말은 진부(陳腐)한 답답함을 예상(豫想) 할 것이다. 그러나 고대의 유학(儒學)은 가장 높은 문화적(文化的)인 사상(思想)이었다.
 
그것은 우선 인간의 생활에는 이상적인 법칙이 없는 것을 주장하는 점에서는 이상주의(理想主義)였다. 그러나 실제(實際) 무엇을 내 놓을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일도 주문을 할 때가 있다.
 
원래 유자(儒者)라는 자(者)는 완고(頑固)해 하나밖에 모르는 자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고조(高祖)의 뒤를 이은 두 번째의 문제(文帝)는 유자(儒者)를 그리 반기지 않으면서도 경청(傾聽)은 했다. 그러나 경청하고서도 정책에 반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학(儒學)과 유자(儒者)를 경시한 한왕(漢王)들
 
그러나 유자(儒者)는 과거의 사례(事例)로부터 인출(引出)되는 것을 주장 즉, 독서를 존중하는 점에서 지식주의였다. 또한 그러한 이상적인 생활에는 균제(均齊)가 취해진 아름다운형식이 없으면 아니 된다고 해서 예락(禮樂)의 필요를 주장하는 점에서는 문화주의이고 예술주의이었다.
 
이러한 이상주의적(理想主義的)인 생활이 가능한 원인을 인간의 ‘선의(善意)’에 구하고 초자연적인 것에서 신앙(信仰)에 반발 한 점은 인간중심주의(人間中心主義)이고 합리주의(合理主義)이었다. 이것은 공자(孔子)에 의해서 집성(集成)된 학설이다.
 
그런데 이 유학(儒學)의 전통을 중단하고 억압을 가한 것은 무제(武帝) 앞의 100여 년 전 진시황의 팟쇼이었다. 강도(强度)의 통재정책을 강행한 진(秦)의 시황제국(帝國)에 있어서 유학(儒學)의 이상주의는 우활(迂闊)로 해서 유해한 것으로 봐서 무잔(無殘)한 압박을 받았다.
 
서책을 불 태워지고 유자(儒者)는 생매장되고 예(禮)는 찢어지며 낙(樂)은 깨어 졌다. 진시황의 대제국이 멸망하게 되고 그 광대한 판도(版圖)를 상속한 것이 무제의 증조부(曾祖父) 한고조(漢高祖)제국이다. 그러나 한(漢)의 제국에 있어서도 유자(儒者)는 오래 동안 무용한 것이었다.
 
한(漢)의 창업은 오로지 무력(武力)에 의한 것이며 존중되는 것은 현실적인 무력(武力)이었다. 고조(高祖)자신이 농부의 아들로부터 태어난 왕일 뿐 아니라 고조(高祖)를 둘러싼 공신(功臣)들도 푸주간의 소승(小僧)이든가 노역장(勞役場)의 서기(書記)로 올라온 자들이었다.
 
지식에 대한 존경의 염(念)은 빈약하고 유자(儒者)가 고조(高祖)를 알현(謁見)하러 오면 고조(高祖)는 그 머리에 쓴 관(冠)을 벗기고 그 관안에 소변을 볼 정도로 유자(儒者)를 경시(輕視)했다. 이러던 한(漢)나라도 3대의 경제(景帝)때부터는 지식에 대한 욕망은 점차 높아 갔다.
 
그래서 한나라 3대 경제(景帝)가 등극해서 제일 먼저 한 것은 유자(儒者)들을 따뜻하게 대우로 조정에 초빙하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초청한 자가 매승(枚乘)이었으나 오는 도중 병사(病死)하고 노(魯)의 지방의 시경(詩經) 박사인 신공(申公)과 비상한 수재(秀才) 가의(賈誼)이라는 젊은 남자가 비상한 수재(秀才)라고 해 초빙은 하나 그들의 말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주관에 따랐다.
 
문제(文帝)는 선선대(先先代)와 선대(先代)가 유자(儒者)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들의 말에 따르지 않고 왕(王)자신의 정책(政策)을 그 나름대로 생각하고 국사(國事)를 이끌어 나갔다.
 
‘저 사람들은 고상한 정책을 말하나 나는 그리 하지 않겠다. 한(漢)에는 한(漢)의 방식이 있다. 분별없이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대단히 큰일이다.’ 하면서 유자(儒者)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상(思想)과 철학(哲學)이 바로 깊이서지 않고 시세의 흐름에 따른 것이라 사료 된다. 이와 같이 한(漢)나라의 왕들은 유학(儒學)과 유자(儒者)를 경시하며 그들의 말들을 경시했다.
 
이상은 ‘眞實の中國四千年史’ P34이하와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황순종,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반재원, ‘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권진규 ‘조선사’. 오재성,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고구리사)’, ‘우리(右犂)의 歷史는? 리(犂:東夷)歷史 쇠集’ ‘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 ‘山海經’. 大連出版社, ‘行走 大黑山’.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 劉泳,海燕,‘赤蜂博物館’.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石井進, 笠原一男, 兒玉幸多, 笹山晴生, ‘詳說日本史’. 稻垣泰彦, 川村二郞, 村井益男, 甘粕 健 共著 ‘日本史’. 西東社出版部編 ‘日本の古墳, 古代遺跡’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 編著, ‘世界歷史の基礎知識’.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했음을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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