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심덩어리 中”…잊혀진 우리조상의 제후국들

입력 2018-04-07 14:16:54

원문 링크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아시아에서 자국을 대국이라고 자부하는 나라가 둘 있다. 하나는 중국이고 또 하나는 인도(印度)다. 양국은 ‘좋아하는 나라’와 ‘싫은 나라’에 대한 설문조사를 장기간 실시해 왔는데 최근 전해진 그 결과가 매우 흥미롭다.
 
인도인은 중국에 대해서 그들은 매우 영악하고 깔볼 수 없는 국민으로서 ‘시기심덩어리 같은 민족’이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그 답의 원인은 중화사상(中華思想)의 유무에 있다고 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4000년의 역사에서 한족(漢族)만이 가장우수하고 주변민족은 늘 한족(漢族)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오는 자라는 의식이 골수(骨髓)까지 스며들고 있다고 인도인은 말하고 있다.
 
반면 인도인은 문명을 일구었으나 자민족만이 절대우수하다든가 책봉체제(冊封體制)라든가 조공제도(朝貢制度)라는 이상야릇한 습관(習慣)을 만들지 않았다고 중국과 대비(對比)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역시 상고시대와 고대부터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리고 이들을 지배한 역사를 볼 때 책봉체제(冊封體制)와 조공제도(朝貢制度)와 습관(習慣)을 우리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우리도 고대 제후국책봉과 조공을 받지 않았다고 장담하기에는 아닌 것 같아서다. 그런데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중국은 자기들은 무엇을 해도 제멋대로이나 상대가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결코 용서하지 않은 성벽(性癖)을 갖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은 국제상식과 국제법(國際法)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야 함에도 중국은 이 법마저도 무시하는 태도로 나온다.
 
오늘은 우리의 고대사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상황과 우리가 한족(漢族)사회에 가져다준 공헌이 모든 면에 크기에 그 시대상황 등을 일부나마 살펴보고 자 한다.
 
한족(漢族)에게 영향을 끼친 동이족의 공헌(貢獻)은 무엇이었나!
 
한족(漢族)이란 말은 유방(劉邦)이 한(漢)나라를 세운 후부터 말해지고 있다. 그런데 한족(漢族)은 어떻게 출현(出現)했는가? 한족(漢族)의 그 정의(定義)가 무엇인가? 그 정의(定義)가 애매모호(曖昧模糊)하다. 이는 필자만이 아니라 외국의 학자들도 의문을 갖고 있다. 그 정의에 명쾌(明快)한 정답을 얻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오늘날 중국에 ‘한족(漢族)은 없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왜냐하면 3세기 삼국시대말기(三國時代末期) 중국은 북방기마민족(騎馬民族)이 대륙을 정벌하고 장기간 지배(支配)하면서 모든 민족이 혼혈(混血)이 됐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기마민족의 공헌은 매우 컸다. 첫째의 공헌은 4~5세기 경 중국사에 나오는 5호(胡)인 흉노(匈奴), 갈(羯), 선비(鮮卑), 씨(氏), 강(羌)의 5민족은 5의 호(胡) 즉, 오호(五胡)로 총칭하는 오호(五胡)16개국시대를 현출(現出)시킴으로 새로운 한족(漢族)을 출현(出現)시킨 점이다.
 
둘째는 수(隨581~619)때부터 시작한 현재 중국인은 새로운 신종인 한민족(漢民族)인 것이다. 이 한민족(漢民族)은 거의가 우리 동이족으로 순수한 한민족(漢民族)은 없다. 중국은 환국(桓國)과 배달국(倍達國)시대부터 동이족이 선주(先住)해 있었기에 같은 조상이라 구분은 어렵다.
 
당시 우리민족은 대륙에서 많은 국가를 형성하고 문물제도며 농업과 축산은 물론 고대 문명을 일궈 냈고 문화를 낳게 했다. 한편 기마전술(騎馬戰術)을 한족(漢族)에게 전수(傳授)시켰다.
 
셋째는 중국의 춘추시대(春秋時代=서기전770~서기전403년)에 동이족(東夷族)이 전해준 철재농구(鐵材農具) 사용에 의해서 농업이 크게 진보하게 했다. 소위 농경민족(農耕民族)으로서의 기초가 확립돼 갔다. 군대는 전차(戰車)에다 보병(步兵)중심의 군대가 전장(戰場)을 누볐다.
 
그러나 흉노의 기마민족에게 괴로움을 당한 전국시대의 조(趙)의 무령왕(武靈王)은 북방민족의 의복인 호복(胡服)을 입혀 호복기사전술(胡服騎射戰術)을 수입해 그 수득(修得)에 노력했다.
 
이리해 이 기마전술(騎馬戰術)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널리 퍼져 전차전술(戰車戰術)을 무용(無用)하게 해 진왕(秦王=政(진시황)도 북방기마민족(騎馬民族)의 전술(戰術)을 구사해 포위 섬멸전으로 한민족사회(漢民族社會)를 통일했다. 이것은 모두 우리가 전해준 전술이었다.
 
한족(漢族)은 북방기마민족을 두려워 장성(長城)을 쌓은 것도 북방 유목민족으로부터의 침입을 막으려는 데서 쌓은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열후(列侯)들이 쌓기 시작해 그 후 진시황(秦始皇=政)이 이어서 쌓고 명왕조(明王朝)까지 건설이 계속돼서 완성을 본 것이 만리장성이다.
 
동(東)은 산해관(山海關)부터 서(西)는 가욕곡(嘉峪關)까지로서 나눠진 부분을 포함해서 총연장6000Km가 되는 인류사상최장(最長)의 건축물(建築物)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 만리장성이다.
 
얼마나 북방유목민족이 중국 역대왕조에 있어서 위협(威脅)이 됐는가! 를 여실히 말해 주는 대목이다. 즉 장성(長城)은 북방유목민족(北方遊牧民族)과 한민족(漢民族)과의 명확한 국경선의 된 것 같이 됐던 것이다. (以上은 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42~46 參照 引用),
 
현재 장성(長城)을 넘어서 중국인이 동북지방(東北地方)인 만주(滿洲)에 중국한족(中國漢族)이 이주(移住)해온 것은 13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 만주는 찾아야 할 우리강역(疆域)인 것이다.
 
신라(新羅) 무열왕(武烈王)의 가져온 비극(悲劇)
 
대륙을 지배하며 호령하던 백제 고구려가 내부의 분열로 비운을 맞게 된다. 당(唐) 2대 태종은 고구려에 원정(遠征)을 왔다가 안시성성주 양만춘(楊萬春)의 쏜 화살이 눈에 박혀 그 후유증으로 귀국 후 649년 51세로 세상을 떠나며 “다시는 고구려를 침략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제3대 당(唐)고종은 660년 신라 김춘추(金春秋)의 요청에 따라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다. 그리고 663년 왜(倭)=日本)로부터 도착한 백재의 원군(援軍=水軍)을 백촌강(百村江) 전투에서 격파하고 최후의 강적인 고구려(高句麗)를 668년에 나당연합해서 멸망시킨다.
 
이로서 당(唐)에 적대(敵對)할 이민족(異民族)의 평정(平定)을 끝내었다. 이는 우리민족의 대륙에서의 세력을 축출하는 원인이 돼 진 것으로 참으로 우리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대목이다.
 
여기서 백재원군(援軍=水軍)을 백촌강(百村江) 전투에서 패한 원인도 백촌강(百村江) 주변의 바다가 간만(干滿)의 차가10m이상 되는 것을 모르고 원군배가 니토(泥土-진흙탕)에 박혀 움직일 수 없을 때 당군(唐軍)의 궁시(弓矢=화살)로 쏘았음으로 속수무책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민족(韓民族)의 세운 강대한 백제와 고구려를 당(唐)의 세력을 빌어서 일통(一統)한 신라의 무열왕은 우리민족에게서는 역적행위를 한 것과 진배없다. 더구나 그는 나당연합(羅唐聯合)을 하기 전부터 당(唐)의 문물(文物)을 들여오는데 앞장서서 우리의 미풍양속에 악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첫째로 우리의 이름을 2자 내지 3문자로 통일케 했다. 그 전에는 4~5문자 전후가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이를 백성(百姓)에 변경을 강제(强制)해 우리고유 전통을 버린 점이다.
 
둘째는 관료를 만들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과거제도를 채용했다. 여기서 과거제도는 무방하나 중국에서는 과거시험은 누구든지 응시 할 수 있게 했는데 신라에서는 문관귀족과 무관귀족 양자(兩者)에게만 수험자격이 주어 졌다. 문제는 우리 역사의 전통을 이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과거시험에 반드시 중국정사(中國正史)인 ‘사기(史記)’가 나왔다. 즉 무열왕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잃게 한 왕으로서 자랑스러운 백제 고구려의 역사를 감추어 버린 점이다.
 
같은 동족인 백제와 신라를 멸망케 한 신라의 무열왕(武烈王)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영웅시 돼있으나 우리의 고유의 이름을 강제적으로 당나라와 같이 고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우리역사를 부정하고 한자를 공용화한 인물이다. 역사적으로 환영 할 수 없는 인물로 평가된다.
 
김춘추는 같은 민족인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를 멸망하게 한 씻지 못할 죄인(罪人)으로 우리민족이 자랑스러운 강국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하게 한 비극(悲劇)을 가져다 준 인물이다. 이런 김춘추를 일제는 추켜세웠으나 그는 역사에서 평가(評價)할 수 없는 인물로 속물이다.
 
한편 그로 인해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은 갈 곳을 잃고 당나라에 끌려간 사람이 고구려(高句麗)만도 22만 명에 이르고 백제(百濟)역시 이와 비슷한 수치(數値)에 이르고 그렇지 않은 많은 백제인(百濟人)과 고구려인(高句麗人)이 학살(虐殺)을 당하게 했다.
 
살아난 백제 고구려의 사람들은 양자강 이남의 왜(倭=일본)로도 많이 건너갔다. 그런데 666년10월 고구려에 원군(援軍)을 의뢰(依賴)하기 위해 왜(倭=일본)에 간, 고구려(高句麗)의 정사(正史) 을상암0(乙相庵0)과, 부사(副使) 현무약광(玄武若光)과 달상0(達相廴+盾)이 있었다.
 
특히 현무약광(玄武若光)은 고구려의 왕족으로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로 침범해 오자 고구려의 사신(使臣) 3명 중 부사(副使)로 왔는데 그는 고구려의 왕족(王族)이었다. 그가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하자 일본에 귀화해 왜(倭=일본)의 발전에 크게 기여 했다.
 
이에 일본 조정(朝廷)은 현무약광(玄武若光)에게 종오위하(從五位下)를 내리고 예우(禮遇)한 것을 알 수 있다. (以上은 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 144面~146面 參照 引用하다) 왜(倭)는 서기전53년 이후500년 간 대륙에 있었다. 사기(史記)에 5번 나온다. 1066년의 대만(臺灣)도 일본열도다. 중국은 이 왜(倭=일본)를 일본열도로 가져가기 위해 별짓을 다한다.
 
중국은 이민족(異民族)에 왜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하게 했나
 
원래 중국의 역대 제국(帝國)은 한민족(漢民族)을 직접 지배 했으나 동시에 주변의 민족에 대해서도 복종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서 강대한 북방의 기마민족(騎馬民族)은 이를 거부하고 중국을 정벌(征)伐)하고 정복(征服)해 지배(支配)한 역사가 우리의 대륙역사다.
 
그런데 중국의 역대 제국(帝國)은 대군을 보내어 이를 굴복, 복종시키는 정책을 썼으나 때로는 번번이 대패해서 굴욕적인 화의를 체결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경우도 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강대한 주변 동이(東夷)에 대해서는 그들은 이적(夷狄)이라하면서도 회유책(懷柔策)을 썼다.
 
즉, 부족(部族)의 장(長)이나 수장(首長)등에 중국의 관위(官位) 작위(爵位)를 주어서 그 민족의 풍습에 따라서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는 간접통치의 방법을 취했다. 이것을 ‘기미정책(覊縻政策)’이라 한다. 이는 자기나라와 다른 이민족(異民族)이 세운나라와의 얽어매는 정책인 것이다.
 
이 기미정책(覊縻政策)을 교묘하게 많이 쓴 나라는 당(唐)으로서 서역(西域)기타 복속지(服屬地)에는 도호부(都護府)를 두어서 그 배하(配下)의 장관(長官) 등은 그 지역의 유력한 자를 임명해 당(唐)의 지배감(支配感)을 느끼지 않게해 통치(統治)하는데 성공했다. 이 주(州)를 기미주(覊州)라고 한다. 이 기미주(覊縻州)가 최성시(最盛時)에는 800가까이 존재했다고 한다.
 
중국으로 봐서는 주변이민족(異民族)을 손에 넣음에 있어서 황제의 위광(威光)을 이민족(異民族)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자국백성에게 알리는 것이 최대목적이기 때문에 이민족(異民族)이 중국왕조로부터 이반을 하지 않으면 그로서 만족했다. 이 정책을 가장 많이 쓴 것은 당(唐)이다.
 
어찌해서 이런 정책을 썼는가! 이를 말한다면 그것은 중국황제가 최고의 권력자이고 자기들이 사는 지역(地域)이 중화(中華), 즉 ‘우주유일의 문명지(文明地)’이다. 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대망상(誇大妄想)이다. 한민족(漢民族)은 이 생각을 4000년간에 걸쳐서 이어온 특이한민족이다 고 말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떻게 하든 적어도 명목상(名目上)으로 보기에는 모든 주변(周邊)의 다른 민족(民族)을 지배(支配)하고 있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이려는 것이다.
 
또한 주변나라들도 중국과 대등한 외교관계(外交關係)가 존재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주(州)를 기미주(覊州)라고 했는데 당(唐)은 조공(朝貢)이나 책봉(冊封)이라는 형태로서의 중국에 복속시켜서 조공(朝貢)을 원하는 부족이나 책봉(冊封)을 받으러 오는 국가는 모두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를 하게 했다.(上揭書,眞實の中國四千年史’46面~48面 參照)
 
이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란 3번을 무릎을 끌어서 절하고 9번 머리를 땅에 붙이어 조아리는 사의(辭儀)인데 이것을 당(唐)나라 때부터 요구한 것으로 중국인들은 자기들이 최고라 여긴다. 치욕적인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가 병자호란 때 있었는데 청태종(淸太宗)이 우리나라에 침입한 때 당시 인조(仁祖)대왕이 남한산성 삼전도의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를 했다. 이는 너무 수치스럽고 참담한 일로 국가대계를 세우지 않은 조정(朝廷)의 무능(無能)의 낳은 결과이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외 다수(多數)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했음을 밝힙니다.
 
이을형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0
감동이에요
0
화나요
0
슬퍼요
0
댓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