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광복 후에도 일본이 심어준 자학사관교육(自虐史觀敎育)이 계속되고 있다. 대학교수도 정치인·관료(官僚)는 물론 심지어 언론인까지 심층심리에 있어서 똑같은 양상이다. 개선되지 않고 있다. 참으로 기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역사연구를 하며 필자는 우리의 실상에 분노를 느끼며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다. 자학사관교육(自虐史觀敎育)하는 자의 심리를 이해 할 수 없다.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인지 한심하다.
최태영 선생은 생전에 노구(老軀)를 이끌고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歷史歪曲)을 개선(改善)하려고 몸소 대륙과 일본열도를 탐방하며 그 사실관계를 규명하려고 무척 애쓰시고 또 이들의 왜곡과 진실이 새 사료에 의해서 밝혀짐에 따라 이를 우리나라에서 소개하려고 했다.
그 중 하나가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神皇紀-天皇家七千年の歷史)다. 이 문서는 일본 궁궐에서도 알 수 없었던 책이다. 이 문서는 1200여 년간의 침묵을 깨고 1921년 ‘신황기(神皇紀)’로 출판됐다. 우리나라에도 김정섭(金正燮)선생과 필자도 소장하고 있다.
이 책은 일본이 내세우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뒤집는 진짜 역사서라 일본 신문도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대서특필(大書特筆)했으나 일제의 군부(軍部)에 의해 위서(僞書)로 몰렸다가 다시 1980년에 재간(再刊) 돼 일본에서도 우리역사를 잘 알게 됐다.
이 책은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보다 100년 이상 먼저 쓰여 졌고, 위지(魏志) 왜인(倭人傳)보다도 50년 일찍 쓰여 진 비신화적(非神話的)이고 비허구적(非虛構的)인 책으로 당시 일본의 신문(新聞)잡지(雜誌)가 일제히 절찬(絶讚)했다.
이 ‘신황기(神皇紀)’책이 나옴으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허구(虛構)라는 것이 밝혀진 책이다. 그러나 이 ‘신황기(神皇紀)’의 발간은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바이블(Bible)로 맹신하는 학노(學奴)들을 극도로 자극(刺戟)하는 것이 됐다.
이 신황기(神皇紀)의 발간은 양심적인 일본사학자에게 일본민족의 파멸은 위사(僞史)에 의해 생겼음으로 일본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짓역사를 버리고 진실을 교훈으로 미래를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생각해 일본학자들 중에는 바른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많아 졌다.
국내 사학자들 중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신황기(神皇紀)’의 존재조차 모르는 학자가 많음을 깨달은 최태영 선생은 1990년대 답사보고회를 갖기위해 YMCA에 예약까지 했는데 학노(學奴)들의 방해를 받아 무산되고 1999년 2월에서야 겨우 학술원통신지를 통해 첫 공식보고 했다. 이는 고인이 되신 최태영 선생이 살아계실 적 필자가 서울 중구 약수동 시니어하우스를 예방해 직접 들은 얘기다.
오늘은 21세기를 맞아서도 우리역사가 대륙을 지배한 대륙(大陸)역사이고, 또한 아시아역사임에도 아직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반도식민사관이 잘못됐음을 사서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고대사, 대륙의 역사지 반도사가 아니다
우리역사는 상고시대의 환국(桓)國)에서부터 배달국(倍達國) 고조선(古朝鮮) 숙신(肅愼) 예맥(銳麥;濊貊),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의 영역(領域)은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야(伽倻), 왜(倭)보다도 제일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고구려는 대륙과 반도에는 5세기이전까지 고구려의 칸(干;汗;韓)=거서칸(居西汗)과 마립칸(麻立干)이라는 칸(干)이 칭호를 가진 자가 통치하는 서라벌의 동신라가 고구려의 치하에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영역은 대륙과 반도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즉 반도(半島경주(慶州)에는 고구려의 칸(干)이 다스렸다.
서기 32~503년 사이에 반도는 왕이 아닌 고구려(高句麗) 칸(干), 거서간(居西干) 마립간麻立干)이 다스렸다. 최후 칸이 바로 지증마립칸(智證麻立干)이다. 왕이 다스린 것은 서기503년에 와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칸(干)이라 칭한 동신라(東新羅)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에 관해서 최치원(崔致遠)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도 있다.
대륙의 신라는 거칠부국사(居柒夫國史)와 당령호징신라국기(唐令狐澄新羅國記)의 원전명(原典名)의 기록과 중국한족(漢族)의 정사동이(正史東夷)기록에서도 신라(新羅)가 서화(西華)의 동쪽인 강회(江淮) 즉, 양자강과 회수(淮水)지역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이미 밝혔다.
서화(西華)의 동쪽에는 구리(九黎);치우시동이국명야(蚩尤時東夷國名也)시대부터 조선을 거쳐 신라(新羅)가 있음을 분명히 말했다. 구리군호치우야(九黎君號蚩尤也), 치우고천자蚩尤古天子), 치우총동평 산동성(蚩尤塚東平;山東省), 즉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기자(箕子)가 조선시대 살던 땅이 서화(西華)이고 조선을 계승한 백제가 패망한 지명(地名)이 서화(西華)의 남북에 있어도 조선(朝鮮)과 신라(新羅) 백제(百濟)를 반도(半島)에 옮기려고 서화(西華) 동쪽에 있었던 사실을 숨기고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서화 동쪽의 신라가 먼저 있었고 반도에는 503년에 고구려로부터 독립하는 신라가 있음을 ‘삼국사기’와 ‘광개토태왕비’, ‘진흥왕비’에 기록돼 있음에도 서신라 기록을 반도로 옮겨서 서화(西華)동쪽 역사는 숨기고 전체 우리역사를 왜곡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중국25사 동이(東夷)에 의한 신라는 동이국가체계상(東夷國家體系上)이나 지명상(地名上), 서화(西華)의 동쪽의 신라(新羅)이지 반도(半島)에서 진출한 신라방(新羅坊)이 될 수없는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중국25사(史) 동이(東夷)기록에서는 서화(西華)동쪽의 서신라(西新羅)만을 기록 하고 있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대륙의 서신라(西新羅)의 기록과 반도의 서라벌(徐羅伐)의 동신라(東新羅)를 함께 기록 하고 있다.
신라(新羅)는 “부여융(夫餘隆)으로 해금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대방군왕(帶方郡王)을 삼아 본국으로 보내어 남은 백성을 안돈(安頓)시키게 함과 동시에 그로 해금 통솔하게 했다. 그 때 신라가 강성함으로 융(隆)이 본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붙어 있다가 죽었다고 했다. 이 무덤과 묘비(墓碑)가 동명(東明) 서화(西華) 덕안(德安) 서쪽의 낙양(洛陽)에 있다.
중국사서가 말하는 우리 삼국사 위치는 어디인가
우리는 백제도 한반도에 있었다고 가르치고 있으나 역사교과서의 백제는 반도에 없었다. 그런데 중국의 사서들도 백제는 중국 대륙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백제는 마한의 땅에 세워진 국가다.(梁書·北史·南史). 그런데 마한에서는 목화를 사용했다고 했다.(三國志 30,-(37), 後漢書 85-⑼ ⑽)고, 기록 하고 있는데 반도에는 마한도 백제도 없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잘 아는 김유신(金庾信)도 반도에 그 기록은 없고 대륙의 서화(西華)동쪽의 신라의 장수로서 그의 많은 정치 활동상황을 말하고 있다. 신라의 특산물인 노(弩=쇠뇌)와 나침판 목화와 신라비단을 고구려에 수출하고 목화씨도 고구려에 전해준 것이 대륙이지 반도가 아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가 말 하듯이 서화(西華)동쪽의 서신라(西新羅;서기전 57~서기896?)가 있었고 동신라(東新羅;서기503~936)최종 칸이 지증마립칸(智證麻立干)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서신라(西新羅)가 서기전부터 대륙에 건재한 사실을 숨기는 것은 기만이요 역적행위다.
대륙 서화(西華)에서 반도까지 하나의 민족 동이(東夷)인 것을 광개토태왕비가 입증하고 있다. 서신라(西新羅)가 대륙에, 동신라(東新羅)가 반도(半島) 서라벌(徐羅伐)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장보고(張保皐본명;정년(鄭年)의 활동무대도 대륙이지 한반도가 아니다. 김유신전(金庾信傳), 당서(唐書)와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에 있는데 태화(太和)5년;서기831년에 105인과 함께 돌아온 장보고(張保皐)는 청해진대사(大使)가 되고 이 장보고;정년(鄭年)은 사지연수(泗之漣水)에 살았고 839년에 장보고는 진해장군이 됐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사(泗)는 안휘성에, 연수(漣水)는 강소성(江蘇省)에, 진해(鎭海)는 절강성에 무령(武寧)은 덕안(德安)의 서쪽에 있고, 덕안(德安) 남쪽에 무주(武州)가 있다. 여기가 반도인가 아니다.
반도식민사관자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우리역사를 잘못 되게 왜곡(歪曲)변조하는가 역사를 뒤집어놓는 매국매족 행위는 이제 그만 하고 제대로 역사연구 했으면 한다. 왜 중국 일본이 역사 변조한 그 주구(走狗)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고대사는 대륙 아시아의 역사이지 반도안의 역사가 아니다. 필자는 우리역사를 바로 세우려다 못 다한 최태영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연구에 돌입할수록 우리역사가 얼마나 찬란한 역사임을 알게 되는데 이럴 때 마다 뒤엎어진 우리역사의 현실을 보며 개탄을 금치 못한다.
가야(伽倻)와 왜(倭;일본)도 이미 기술(記述)한바와 같이 양자강 이남에 있었지 반도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한국인과 중국인과 일본인도 다 같은 우리조상의 자손인데 역사논쟁은 무의미하다. 이는 시간낭비라 보는 시각이 필자의 관점(觀點)이다. 역사를 직시(直視)해야 한다.
4세기 이전의 이전 기록이나 당태종(太宗) 이전까지 발행된 양서(梁書), 북사(北史), 남사(南史)까지도 다 같이 왜(倭)가 회계(會稽), 담이(儋耳;남월지(南越地)가 분명히 왜(倭);일본)라 했다.
이러한 역사를 왜곡하고 이를 따르는 자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볼 수 없다. 어떠한 왜곡으로도 진실의 역사를 외면 할 수 없고 우리의 1만년이 넘는 위대한 역사를 뒤집힐 수 없는 것이다.
조선사연구 제대로 안된 맹점어디에 있나
우리나라는 사학분야에 있어서도 미시적 연구만 있고 거시적인 세계사를 제대로 연구하고 있는지는 필자를 포함해서 되돌아보게 한다. ‘전공에 갇힌 한국학자들은 큰 흐름을 못 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각국의 역사와 우리역사관계의 진실을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더욱이 우리역사를 반도(半島)에 국한(局限)하려는 중국과 일본, 반도식민사관(半島植民史觀)의 사람들에 의해 우리역사가 뒤집혀있는 것 알면서도 그냥 따라가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는 1875년 봉천유수(奉天留守) 숭실(崇實)에 의해서 발견된 이후 연구가 활발하게 논했으나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것이 일례다. 우리역사가 마치 반도(半島)에 있었던 것 같이 논하고 있는 것이 역사연구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는 작금을 대변한다 할 수 있겠다.
5세기 이전의 우리역사를 규명하지 않은 채로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 연구는 무의미함을 절실히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동이민족의 역사를 반도에 국한시켜 정착화(定着化)한 이후의 비문(碑文)연구는 연구라 할 수 없을 만큼 그 연구는 배제돼 있다.
분명한 사실은 5세기이전 신라(新羅), 백제(百濟), 왜(倭)가, 반도기록은 중국사서 어느 곳에도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중국(中國) 학자들도 사기(史記), 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의 동이기록(東夷記錄)을 숨기고 어떻게 연구를 했다는 건지? 알 수 가없다.
우리는 환국시대나 배달국시대나 고조선시대 대륙에 거점을 두고 살았지 반도에 살지 않았다. 반도에는 고구려 칸(干)이 다스리는 위성국 동신라(東新羅)가 서라벌(徐羅伐)에 있었고, 낙랑국은 (?서기전195~서기32)이전에 반도와 반도 북쪽의 일부 대륙까지 있었을 뿐이다.
중국사서의 기록 들은 우리나라가 대륙에 있었다고 하는 것을 숨기고 반도에 있었다는 것은 논할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고대부터 서화(西華)동쪽에 신라(斯盧國;西新羅), 백제국(伯濟國), 왜(倭=卑彌國)와, 구로국(狗盧國;狗奴國)의 기록은 있어도 반도에 있다는 기록은 없음에서다.
일본학자들 역시 5세기이전 왜(倭)의 위치를 나타낼 수 있는 사기(史記), 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밖에 없는데 이를 숨기고 왜곡도 문제려니와 이에 대한 기록을 규명해줄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 비문(碑文) 날조와 해독은 용납할 수 없는 잘못 된 것이다.
일제가 조작한 것도 문제이거니와 학계가 조작의 의도도 알지 못한 채로 자구(字句)의 해석에만 매달려 갑론을박은 더 이상 논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또 학자의 집단에서 조작까지 한 것 연구는 더더욱 무의미하다. 도쿄대학(東京大學)이 조작(造作)한 글자 수 만도140을 넘는다.
5세기 이전 고구려의 위치를 보면 그 강역(江域)은 대륙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등과 반도에 왕(王)이 아닌 마립칸(麻立干)이 다스린 동신라(東新羅)가 고구려의 영역(領域)임을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이전부터임을 사서(史書)는 말하고 있어 알 수 있다.
5세기 한족(漢族)의 정사(正史)는 숨기고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우리역사가 대륙에 건재한 부분은 부정(否定)하고,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왜곡하고, 유물(遺物) 유적(遺跡)은 있어도 제대로 해석하지 않고 있으면서 어떻게 광개토태왕비문(廣開土太王碑文)을 해석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도 광개토태왕비문(廣開土太王碑文)을 제대로 바른 해석을 하고 있지 않은 우리사학계는 일제가 변조한 자구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자. 영락제(永樂帝)인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시대의 고구려가 대륙을 어떻게 정벌하고 정복하며 지배한 것, 한중의 사서연구 부족에서다.
5세기이전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전부터 대륙과 반도가 고구려 땅인 것을 말하고 있다. 산서성(山西省)의 광령(廣靈;廣寧), 대동(大同)등 대륙과 반도가 모두 고구려 땅임을 말해주고 있다. 5세기 이전에 편찬된 사기, 한서, 삼국지, 삼국사기 등 제대로 연구하면 다 밝혀진다.
중국사서(史書)도 우리고대국가 위치 밝혀준다
5세기이전 배달국(倍達國), 단군조선(檀君朝鮮)은 거론 할 것 없고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 백제(百濟), 가라(加羅;가야(伽倻), 예(濊), 왜(倭)등 우리 동이(東夷)가 세운 나라들의 위치를 중국의 사서(史書)인 삼국지(三國志)나 후한서(後漢書)에 의해서도 밝혀주고 있다.
제일북쪽에 부여(夫餘), 그 남으로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야(伽倻;加羅), 고구려 남쪽에 예(濊), 그 남(南)으로 한(韓), 그 남(南)에 왜(倭)가 있음은 다 밝혀진 사실이다. 그리고 부여(夫餘)의 동쪽에 읍루(挹婁), 고구려 동쪽에 옥저(沃沮), 부여의 서쪽에 선비(鮮卑)가 있고 예(濊)의 서쪽에 낙랑군(樂浪郡)이 있음은 역사를 연구한 자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삼국지에 고구려지명(地名)으로 신안(新安), 거향(居鄕), 서안평(西安平)이 있고, 후한서의 기록으로는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광양(廣陽), 탁(涿), 요대(遼隊), 신창(新昌), 요동서안평(遼東西安平)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후한서(後漢書)는 예(濊)의 지명(地名) 예군남려(濊君南閭), 반우거(畔右渠), 기지위창해군(基地爲 蒼海郡)으로서 여기서 창해(蒼海)는 산서성(山西省)과 제(齊;산동성(山東省)의 사이에 있다. 이에 대해서는 사기(史記 69와 30, 한서(漢書 6과 24에 분명히 말하고 있다.
왜(倭)의 지명(地名)은 삼국지의 기록은 대방(帶方)남쪽 담이(儋耳), 주애(朱崖), 회계(會稽), 이주(夷洲), 단주(澶州), 회계동야현(會稽東冶縣)으로 기록 돼 있다. 한서(漢書7)에는 담이(儋耳)는 남월지(南越地)라고 했다. 이 지역은 다 양자강 이남에 있는 지역이 왜(倭) 땅이었다.
따라서 5세기 이전 고구려는 탁(涿), 태원(太原), 북평(北平;阜平)등 하북성(河北省)을 중심으로 한 대륙과 고구려의 칸(干;汗;韓)이 통치한 반도 서라벌(徐羅伐)의 신라(東新羅)도 다 고구려의 영역임에도 이를 숨기고 왜곡했기 때문에 나라들 영역(領域) 혼선을 야기(惹起)시키고 있다.
학노(學奴)들이 삼국사기나 중국정사(中國正史)를 부정한다해도 광개토태왕비문(廣開土太王碑文)만으로도 중국의 서화(西華)의 동쪽과 반도가 하나임을 입증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비문(廣開土太王碑文)은 서화(西華)에서 반도까지 하나의 동이족이 지배한 것을 입증하고 있다.
웃기는 일은 대륙의 서화(西華)동쪽의 기록인 대산(大山)을 몇 번이고 변조한 대산(大山;垈山;太山;泰山), 역성(力城;歷城), 임성(林城;臨城), 양성(梁城;兩城), 대방(帶方;石門)등으로 그 자구와 지역을 조작하며 숨기려하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가 대륙에 있었음을 숨길 수 없다.
반도에 있는 비리성(碑利城;창녕(昌寧)의 진흥왕비(眞興王碑)에 기록과 광개토태왕비문(廣開土太王碑)는 우리영역이 서화(西華)에서 반도(半島)까지 우리영역임을 입증하고 삼국사기를 입증하는 기록이다. 이 비문(碑文)들에서는 우리나라가 반도에 있었다는 자구를 찾아볼 수 없다.
반도식민사관은 얼마나 허구임을 연구를 통해서 알 수 있고, 역사왜곡도 없앨 수 있다. 이제 학자나 관리나 온 국민모두가 뒤엎어진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너나 없는 참여 요구되고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했음을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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