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 역사필법…진시황 중원통일 주인공 아니다

입력 2018-04-21 19:2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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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진왕(秦王)의 통일은 엄밀히 말하면 진정한 의미의 통일은 아니다. 한(韓)을 위시해 위(魏)·초(楚)·연(燕)·조(趙)·제(齊)를 통일한 것에 불과하다. 전 중국을 통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서에는 진시황이 통일한 것처럼 서술된다. 이는 전형적인 중·일의 역사필법에서 나온 결과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는 서기전 770년부터 서기전 403년까지의 367년간을 말하는데 이 시대는 항쟁(抗爭)을 반복하면서 동시에 한족(漢族)의 거주지(居住地)는 일층 넓혀지고 있었고 문화는 동서남북에 신장(伸長)돼 가고 있었던 시대다.
 
그리고 진왕(秦王;政)은 유교(儒敎)정치철학과 연(緣)을 끊고 절대적인 전제군주(專制君主)로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인 관료국가(官僚國家)를 구상한 법가정치철학(法家政治哲學)의 입장에선 이사(李斯)를 재상(宰相)으로 임명해 그 정책을 구체화 시켰다.
 
서기전 246년, 13세에 즉위한 진왕(秦王政)은 성인이 되니 그 지원자로서 실권(實權)을 잡고 있던 재상(宰相) 여불위(呂不韋)를 처분해 이사(李斯)를 재상(宰相)으로 임명해서 강력히 동방(東方) 6국-한(韓)·위(魏)·초(楚)·연(燕)·조(趙)·제(齊)-에 교묘한 외교공작이 진행됐다.
 
교묘한 외교에 의해서 한(韓)을 위시해 6국을 차례로 격파하며 동방으로 진격을 진행시키어 나갔다. 이렇게 되자, 이웃나라 한(韓)과 위(魏)의 영토는 나날이 침략됐고, 7국 중 최대의 판도를 가진 초(楚)나라도 동진(東進)의 세력에 압도돼 수도를 무한(武漢)으로부터 회수(淮水)의 수주(壽州)로 옮길 정도였다고 중국은 기록하고 있다.
 
전국말기(戰國末期)에 무력으로 대항한 나라는 조(趙)나라 뿐이었다. 그러나 서기전 260년 산서성(山西省)의 황토대지(黃土臺地)의 가장자리로부터 화북평원(華北平原)에 이르는 요지(要地)의 장평(長平;山西省-高平縣)이 전국시대를 통해서 진(秦) 최대의 격전지(激戰地)가 됐다.
 
이 결전에 대승을 거든 진(秦)은 이 군세(軍勢)로 동침(東侵)해서 서기전 256년, 주(周)의 난왕(赧王)을 항복시켰다. 이는 동주(東周)의 평생(平生)이래 23대 514년, 세세(細細)히 이어온 주왕조(周王朝)가 여기서 멸망하게 됐다. 주무왕(周武王)으로부터 통산하면 35대가 된다고 하고 있다.
 
오늘은 진왕(秦王)이 사후 ‘시황제(始皇帝)’라는 추칭(追稱)으로 일컬어지는 진시황(秦始皇)에 대해 그가 중국에 남긴 공과(功過)는 무엇이고 그의 통치(統治)는 어떠했으며 이 진(秦)이 어떻게 해서 멸망됐는지에 대해 중국과 일본이 꾸며낸 내용을 토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6국을 통일한 진제국(秦帝國)과 진왕(秦王)의 공과(功過)
 
중국사에 거론되는 진왕(秦王=政)은 서기전 221년에 제(齊)를 멸하고 춘추(春秋)이래의 난세(亂世)의 6국을 통일을 하고나서 지금까지의 봉건제도(封建制度)를 폐해서 새로운 관료제도(官僚制度)를 채용해서 군현제(郡縣制)를 명(命)해 중앙으로부터 관리(官吏)를 임명해 파견했다.
 
그가 채택한 정책 중에서도 특필(特筆)할만한 것은 지금까지 나라마다 달리했던 문자(文字)의 자체(字體), 차륜(車輪)의 폭(幅), 도량형(度量衡), 화폐(貨幣)등의 제 제도를 통일한 것이었다. 더욱이 나라마다 있던 성벽(城壁)을 헐고 병기(兵器)를 몰수함과 동시에 전국의 부호(富豪)들 12만호(萬戶)를 수도(首都)에 옮기고 장려(壯麗)한 궁전(宮殿) 및 기타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것 중에도 가장 곤란(困難)을 일으킨 사업은 문자(文字)의 통일이었다. 이미 전국시대(戰國時代)로부터 다른 서체(書體)가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국의 왕은 유교(儒敎)의 사람들을 고용해서 외교문서(外交文書)등을 작성시키고 사자(使者)로 세운다든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왕(秦王)은 서체(書體)나 읽는 방법을 통일하면 좋으리라 생각해서 한자(漢字)의 수를 3,300자로 정했다. 동시에 지금까지 제멋대로 만들어서 한자(漢字)를 사용하고 있던 각종의 서적(書籍)을 일거(一擧)에 파기(破棄)해 버렸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분서(焚書)다.
 
진왕(秦王)은 13세 때 즉위한 후 사후(死後)를 생각해 여산(驪山)의 산기슭에 자신을 위한 지하궁전(地下宮殿)과 같은 능묘(陵墓)의 조영(造營)을 시작해 전국으로부터 매년70만 명의 사람을 징용해서 노예같이 죽기까지 조영(造營)을 위한 노역(勞役)을 하도록 했다.
 
묘(墓)의 속에는 대단히 많은 양의 진귀한 재보(財寶)를 채워 능묘(陵墓) 내부에는 도굴(盜掘)방지를 위한 장치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공사가 끝나면 이 공사를 한 모든 공장(工匠)들은 비밀유지를 위해서 전원(全員)을 능묘(陵墓)내에 처넣어서 죽여 없앴다.
 
이 시황제능(始皇帝陵)은 저변(底邊)이 장방형(長方形)의 각추형(角錐型)으로 돼 있어서 동서의 저변(底邊)이 250m, 남북이 355m다. 또한 높이는 현재는 46m이나 원래의 기록은 115.5m라고 말해지고 있다. 또 수도(首都) 함양(咸陽)의 궁전(宮殿)도 장려(壯麗)하게 건설 했으나 그것도 좁다고 해 치세말기(治世末期)에는 위수(渭水)를 낀 함양(咸陽)의 대안(對岸)에 새 궁전인 아방궁(阿房宮)의 건설을 35만 인(人)으로 행해졌다.
 
이러한 토목공사(土木工事)에 종사하는 인원조달(人員調達)은 진왕(秦王)의 구축(構築)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中央集權體制)와 관료제(官僚制)의 엄격(嚴格)한 법치주의(法治主義)에서였다. 즉, 진왕(秦王) 지배하의 관료(官僚)는 예컨대 진왕(秦王)으로부터 70만인을 징발하라고 명령이 내리면 경미한 법률 위반자 70만인을 끌어오면 그만이었다.
 
이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임금을 줄 필요가 없고 병이나 사고로 죽어도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영증축(造營增築) 은 생각한 그대로 진행됐다. (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80面~82面 參照, 引用).
 
동이족 제압위한 대군(大軍)파견과 인간학살
 
진(秦)에 의해서 6국이 진압되자 주변의 이민족(異民族)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됐다. 그 중에도 위협이 된 것은 흉노(匈奴-예맥)라고 하는 유목민이었다. 이 때문에 진왕(秦王)은 서기전 214년 부하장군 몽념(蒙恬)에게 30만의 군세(軍勢)를 주어 흉노정벌(匈奴征伐)에 나서게 했다.
 
반거(蟠踞)하고 있던 흉노는 총력(總力)을 다해 몽념(蒙恬)을 격파했다. 그러나 압도적인 진군(秦軍) 앞에 할 수 없이 본거지(本據地)를 잠시 황하(黃河)의 대굴곡부(大屈曲部)의 서북에 있는 음산산맥(陰山山脈)으로 이주(移住)해 가서 훗날을 내다봤다. 진왕(秦王)은 몽념(蒙恬)이 흉노(匈奴)의 본거지를 점거하니 다시 흉노에게 탈회(奪回)되지 않게 그 곳을 포함한 황하(黃河)의 대굴곡부(大屈曲部) 외곽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구축 한다.
 
이것은 그 때까지 조(趙)나라와 연(燕)나라가 조성(造成)하고 있던 장성(長城)을 연결(連結)시키고 더 연장(延長)한 것으로서 이 공사에도 매년 30만 명 이상의 인원이 동원됐다. 그리고 같은 해인 서기전 214년에는 남방정책(南方政策)을 펴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 남방(南方)에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인 서기전334년에 초(楚)를 위해 멸망시킨 월(越)이 있었는데 그 일부는 해안선을 따라서 남하해 절강(浙江) 남부로부터 복건(福建)에 걸쳐서 활거(割據)하고 있었다. 진왕(秦王)은 이 나라들을 서기전221년까지 완전히 멸망시켰다 했다.
 
진(秦)이 중국통일은 이뤄진 것인가
 
중국은 서기전 770년~서기전403년까지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가 367년간을 말하는데 이 기간에 사서(史書)에 나타난 유력한 민족은 산융(山戎), 북적(北狄), 적적(赤狄), 백적(白狄), 서융(西戎), 견융(犬戎), 활윤(猾允), 형만(荊蠻), 협이(莢夷), 회이(淮夷)등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이민족(異民族)이었는데 이들이 항쟁(抗爭)이 계속되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가 지나고 서기전403년~서기전221년까지 약 200년간을 전국시대(戰國時代)라 말하는데 이 때의 나라는 진(秦), 초(楚), 연(燕), 신흥(新興)의 제(齊), 한(韓), 위(魏), 조(趙)의 7개국이 병립(竝立)해 하극상(下剋上)의 시대에 들어감과 동시에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풍조가 점차 강해졌던 시대다.
 
때문에 각 제후(諸侯)들은 부국강병정책(富國强兵政策)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부국이란 적어도 많은 농경지(農耕地)를 넓히고 곡물의 생산을 높이는 것이며, 강병이란, 인구의 증대에 의한 병력증강과 우수한 지휘관의 획득이었다. 때문에 자국영토의 확대가 필요하게 됐다. 여기서 진(秦)은 제후난립(諸侯亂立)의 전국시대를 맞이해 이들을 제압(制壓)한 것은 진왕(秦王=政), 즉, 후에 시황제(始皇帝-서기전259~서기전210년)라 불러지는 진왕(秦王)때 다.
 
그런데 진(秦)은 어찌해서 다른 6국과는 달리 강한 것이었나? 그것은 전국시대(戰國時代) 7국 중 가장 인구가 많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위(魏)가 망한 후에 많은 인재가 진(秦)에 이주해온 것과, 둘째는 우수한 군마(軍馬)와 이를 활용한 유목민을 대량으로 포용한 것을 들 수 있다.
 
셋째는 현재의 사천성(四川省) 지방의 파촉(巴蜀) 땅을 얻은 것 등을 들고 있다. 이 파촉(巴蜀)의 땅은 지도에서 보면 알 수 있는바와 같이 분지(盆地)인데 물산이 풍부하기 때문에 중원(中原)이 전란이나 기근으로 살기 어려워지면 사람들은 물산이풍부한 사천(四川)으로 이주했다.
 
이곳의 물산(物産)이 풍부했기에 후대의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도 위(魏), 오(吳)가 평야에 의존한데 대해 촉한(蜀漢)의 군사(軍師)인 제갈공명(諸葛孔明=181~234)은 면적이 넓지 않으면서도 물산이 풍부한 사천(四川)을 선택해 20년간에 걸쳐서 국가를 경영한 것은 유명하다.
 
사천(四川)의 땅은 티베트로부터 루트를 통해서 인도(印度)와도 교역(交易)을 하기 때문에 교역상의 부(富)도 집적(集積)됐다. 이와는 반대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칠웅(七雄)중 가장 문화가 앞서고 있던 위(魏)가 가장 먼저 쇠(衰)하게 된 것은 위(魏)는 연(燕)을 제외한 다른 5강국과 국경을 접하고 늘 침략을 받아서 피폐(疲弊)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위(魏)의 무위무책(無爲無策)에 실망한 많은 사람들은 다른 고도(高度)의 문명국(文明國)에 가기보다는 이웃의 진(秦)에 망명했다. 당시 진(秦)은 문명이 가장 뒤진 국가가 돼있어서 망명(亡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안심(안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진(秦)에 있어서는 뒤진 문화를 돌이킬 수 있는 유능한 인재(人材)를 포용할 기회가 됐던 것이다. 진(秦)은 북(北), 서(西), 남(南)의 3방면에 다른 민족과 접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토의 확장과 함께 다른 민족의 병사(兵士)를 키워서 기마전술(騎馬戰術)의 습득(習得)과 군마(軍馬)의 수입증산에 노력해서 중원(中原)을 정벌(征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같은 북방유목민족으로부터 배운 군사대국의 조(趙)와는 라이벌적 존재였으나 진(秦)이 조(趙)를 격파하니 화북(華北)지방의 군사균형(軍事均衡)이 일거에 붕괴(崩壞)돼 진(秦)의 중국 통일했다하나 통일이 아니라 잠시제압 한 것뿐이다. 이들 나라 중에는 우리나라 삼국시대에까지도 엄연히 존재하고 존속했다.(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82面 ~84面 參照, 引用).
 
진(秦)이 멸망한 원인은 무엇이었나
 
진(秦)은 6국과 근접한 부족들을 제압해 진(秦)의 군세(軍勢)는 이들을 제압하거나 복속(服屬)시켜 진왕(秦王)은 북(北)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외의 중원대륙을 대부분을 차지하고 복건(福建), 광동(廣東), 광서(廣西), 인도지나의 하노이에 각각(各各) 군(郡)을 설치했다고 했다.
 
그런데 진(秦)이 멸망에 이른 것은 어디에 기인했는지? 그 의문(疑問)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진(秦)의 멸망은 대 노역(大 勞役)과 백성의 고통을 돌보지 않고 살육(殺戮)을 예사로 할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내분(內紛)에 의한 것도 간과 할 수 없다.
 
먼저 내분은 진왕(秦王)이 마음에 정하고 있던 장자(長子) 부소(扶穌)가 현명하고 그 부(父)인 진왕(秦王)과는 달라서 자애(慈愛)깊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북방(北方)의 기마민족(騎馬民族)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북변(北邊)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진왕의 사망도 몰랐다.
 
그런데 진왕(秦王)이 죽자 환관(宦官)들은 진왕(秦王)이 유조(遺詔)라 꾸며서 장자(長子)인 부소(扶穌)에게 사죄(謝罪)를 명(命)하고, 평범한 둘째아들 호해(胡亥)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진왕(秦王)이 죽은 것을 알게 된 백성들은 진왕(秦王)의 폭정(暴政)에 반기(反旗)를 들게 됐다.
 
외정(外征)과 토목공사를 위해 고향 떠나 먼 곳에서 부역(賦役)을 당한 사람들의 불만이 폭발해 서기전209년 회수(淮水)유역의 초(楚)의 구영내(舊領內)의 농민들이 대반란을 일으켰다.
 
그 수모자(首謀者)는 토목공사에 동원돼 상경하는 날을 기대하는 농민인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었다. 당시 진(秦)의 법은 가혹하리만큼 엄격해서 도착할 날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사형에 처해졌다. 큰비로 정한 날에 갈 수 없었던 그들은 이왕 죽을 바에는 반기를 든 것이다.
 
이난은 전국으로 파급돼 가는 곳마다 진(秦)의 지방관과 주둔병들을 죽이고 수십만의 대군(大軍)이 돼서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에 이르렀다. 무학으로 무조직의 농민군은 관군의 명장이 지휘하는 군대를 만나면 패배했다. 그러나 6국의 귀족들이 각지에서 병(兵)을 일으켰다.
 
가장 강력한 것은 전 초국(楚國)장군의 아들인 항우(項羽)와 농민출신의 유방(劉邦)이었다. 그런데 항우는 용장이었으나 정치외교에 무책이었다. 반면 유방은 교육도 받지 못 했으나 지식인을 참모로 해서 그 의견을 받아들여 구 군인을 장군으로 세우고 자유로 그 재능을 살렸다.
 
항우(項羽)는 진군(秦軍)을 정면으로 공격해 큰 성과를 거뒀으나 무모한 부하의 약탈(掠奪)을 통제하지 않아 진(秦)의 항복(降服)한 군사를 대량으로 학살(虐殺)해서 인망(人望)을 잃었다. 이에 반해 유방(劉邦)은 군사(軍師), 장량(張良)의 충고를 받아들여 부하를 잘 통제함에 의해서 서쪽의 샛길로 진국(秦國)의 궁궐에 들어가서 진(秦)의 3세(世)를 항복케 했다.
 
한발 늦게 입궐한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의 군(軍)을 압도해 홍문(鴻門)의 모임에서 그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자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으로서 일시 주도권을 잡고 진(秦)의 3세를 죽이고 반란에 참여한 열국(列國)의 말손(末孫)등을 각국 왕(王)으로 세우는 가운데 유방(劉邦)을 서남(西南)의 사천성(四川省)가까운 분지(盆地)의 국왕(國王)으로 봉(封)해 부임하게 했다.
 
유방(劉邦)은 여기서 5년간 자복(雌伏)하는 중에 항우의 논공행상에 불복한 제국(諸國)과 뜻을 모아 동진해 진(秦)의 구영토를 손에 넣어 항우와 동서로 대립해서 대격전을 전개 했다.
 
그는 장량((張良)의 지모(智謀)와 한신(韓信)의 용병(用兵), 소하(蕭何)의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에 의해서 한군(漢軍)의 사기가 올라가는데 반해 병참(兵站)유지에 어려운 초군(楚軍)은 각지에 전전(轉戰)해 가는 곳마다 승전했으나 결국 해하(垓河)의 결전에 패하자 항우는 자살하고 서기전202년 유방은 한고조(漢高祖)로서 진국(秦國)의 강역을 받아서 한(漢)을 세운다.
 
이 한(漢)도 우리 동이족이 세운 나라들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미 밝힌 진(秦)의 패망도 진(秦)이 예맥과 남월(南越)을 공벌(攻伐)해 영토를 넓히려다가 예맥과 남월(南越)의 군사에게 밀리어 연패(連敗)와 국민을 억압한 폐해에 원성(怨聲)이 극도에 달한 결과였다.
 
당시 중국대륙은 진(秦)이 천하통일 한 것 같이 말하나 그러지 않다. 진(秦)은 병사(兵)事)에 대한 형세(形勢)를 알지 못해 싸우면 적에게 포로(捕虜)가 되고 주둔(駐屯)하면 사병(士兵)이 전멸돼 진(秦)의 백성이 출전(出戰)하는 것을 사형장에 가는 것 보다 더 두려워했다.
 
그리고 출전하는 자와 전사자(戰死者)에게 아무런 보답(報答)이나 한 푼의 보상(補償)조차 없었기에 출전하는 자는 분원(忿怨)을 품어 만 번의 해(害)만이 있을 뿐이기에 이에 백성들이 극열(極烈)의 화(禍)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잘 알고 그 불평(不平)이 고도에 달하고 있었다.
 
이 때 진승(陳勝)이 대택(大澤)에서 ‘혁명군을 타도하자’고 외치니 천하가 유수(流水)같이 호응했다. 이는 진(秦)이 강권(强權)으로서 백성을 억압한 폐해(弊害)에서 궐기(蹶起)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의 사가(史家)들은 진(秦)을 타도한 자는 진승(陳勝)과 항우(項羽)라고 선전한다. 그러나 진(秦)이 예맥銳麥=濊貊)과 남월(南越)의 전란(戰亂)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것을 계기로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궐기했던 것이다.
 
여기서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진(秦)을 타도(打倒)했다 함은 표면(表面)을 보는 선전이요 진(秦)을 타도(打倒) 한 자는 예맥(銳麥=濊貊)과 남월(南越)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중국을 정벌(征伐)해 거의 멸망하게 한 민족은 예맥(銳麥=濊貊)임이 분명하다. 공자(孔子)는 ‘중국을 거의 멸망케 한 민족은 피발(被髮)민족이다.’ 고 했다.
또한 회남자(淮南子)에 예맥이 종발(縱髮)했다고 했다. 종발(縱髮)은 피발(被髮)이다.
 
회남자(淮南子 卷十一)에 흉노(匈奴)와 예맥(銳麥=濊貊)이 종발(縱髮) 즉 피발(被髮) 한다고 했다. 춘추시대에 중국을 정벌한 사실을 동이전에 기입한 것을 보면 진(秦)이 전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을 알 수 있다.(漢書 卷之 一, 高帝紀 第一 上. 崔仁, ‘韓國學講義’74面~76面 參照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했음을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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