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런하지 못한 중국왕조…예맥史 복원 필요해

입력 2018-05-05 19:3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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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진(秦)이후 중국의 역사적 왕조(王朝) 중에서 전국을 확실히 지배한 왕조는 수(隨)·한(漢)·당(唐)·명(明)·송(宋)·서진(西晉) 등이 전부다. 이들 왕조(王朝)와 우리나라의 왕조(王朝)를 비교해보면 중국의 왕조(王朝)의 유지기간은 매우 짧았다.
 
수 백 년에서 수 천 년에 이른 우리 왕조와 달리 중국은 오래지속한 나라가 없다. 진(秦)은 서기전 221~서기전 206년까지 15년에 불과하다. 한(漢)은 서기전 397년~서기전 202년까지 195년간이며, 당(唐)왕조는 618년부터 907년까지 289년으로 300년 이상지속한 나라가 없다.
 
주원장(朱元璋)이 세운 명(明)은 서기1868년~1644년까지 276년간이고 북송(北宋)은 서기960년~1127년까지 167년간이며 남송(南宋)은 서기1127년~1279년부터 152년간 존속한 나라다. 그 외에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서기220년~589년)기간 369년이 있을 뿐이다. 이외에 원(元)나라와, 금(金), 요(遼), 청(淸)나라들은 중국역사보다 우리역사에 편입돼야 할 역사다.
 
중국 4300여년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시대가 진(秦), 수(隨), 당(唐)시대다. 이 시대에도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한족(漢族)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 도리어 한족(漢族)과 일승일패의 쟁달전(爭奪戰)을 전개하고 그 쟁탈전(爭奪戰)에서 우리민족이 승리한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진(秦)은 처음 중국을 통일하고 역사상(歷史上) 가장 강대(强大)한 나라이고 보기 드문 대제국(大帝國)으로 중국을 대표한 지나(支那)라고 부르는 나라이나 예맥이 이 진(秦)을 타도했다.
 
중국과 일본의 사서(史書)들은 춘추시대에 중국은 이민족(異民族)이 정벌(征伐)을 받아 거의 멸망에 직면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게 이 당시 중국을 정벌한 민족은 예맥(銳麥;濊貊)이었다.
 
고구려가 수(隨)를 격파하고 당(唐)을 격파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공지(共知)의 사실이다. 당시 오호(五胡)가 중국에 침입해 369년 동안 중국을 남북조(南北朝)로 분열시켰는데 이 남북조(南北朝)를 재통일한 것이 수(隨)다. 그리고 당(唐)은 중국역사상 특기할 강국이라 했다.
 
이러한 나라들도 고구려, 백제가 나당(羅唐)연합국에 의해 사라진 후 우리역사는 많은 사서(史書)와 유물유적이 적에 의해 파괴와 없애고 숨김으로 우리역사는 중일에 의해 뒤엎어져 있다.
 
오늘은 동이족(東夷族)이, 4300여 년 전에 고조선(古朝鮮)과 같은 시대에 숙신씨(肅愼氏)의 대국(大國)이 있었고 숙신씨(肅愼氏)를 계승해 중원대륙을 누비며 지배한 예맥(銳麥;濊貊)이 우리민족의 계보(系譜)에서 소홀히 다뤄지고 있어서 중국이 지우고 숨겨져 있는 예맥의 어떠했는지! 우리역사의 바른 계보(系譜)의 정립과 한중사의 오류(誤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예맥(銳麥;濊貊) 역사복원 아시아史 바로잡는 길
 
예맥조선은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 한사군보다 먼저 건설되고 천여 년 동안 중국에 진출해 강대한 활동을 전개한 것이 판명됐다. 한(漢)나라가 순수한 한족(漢族)의 집단인 기자조선을 탈취한 위만조선을 정복해 한사군을 설치했으나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정복하지 못했다.
 
예맥조선을 계승한 것이 부여이고 이를 이은나라가 고구려다. 중국 고대지리지(地理誌)인 산해경(山海經)에 부여국(夫餘國)이 예맥의 고지(故地)라하고 진서부여전(晉書夫餘傳)에 그 왕의 인문(印文)에 예맥왕(銳麥王)의 인(印)이 있고 국중(國中)에 예맥(銳麥)의 성(城)이 있는데 본래 예맥(銳麥;匈奴)의 땅이라 하고 삼국지부여전(三國志夫餘傳)에 선대(先代)로부터 전해 온 옥벽규찬(玉璧珪瓚)에 예맥왕의 인(印)이 찍혀있다고 했다. (山海經 第十一, 海內西經 參照).
 
회남자(淮南子)에 흉노(匈奴)와 예맥이 종발(縱髮), 즉 피발(被髮)이라 했다. 그런데 서기전 770년~서기전 403년까지를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 하는데 이 때 흉노가 중국을 정벌한 사실을 기입한 것을 보면 이는 흉노가 아니라 예맥(銳麥)임이 분명하다. (淮南子 卷 十一).
 
이 예맥(銳麥;匈奴)은 기마군단(騎馬軍團)으로 동호(東胡), 월씨(月氏), 정영(丁零), 견곤(堅昆)등을 모두 격파한 세(勢)로 중원(中原)을 정벌정복(征伐征服)하고 지배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한고조(漢高祖)는 건국2년 후인 서기전 200년,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 32만의 대군을 화북(華北)에 집결, 운강(雲崗)의 석굴(石窟)근처의 평성(平城;山西省 大同縣)까지 진군했다.
 
그 때 돌연 예맥(銳麥)의 돈단우(冒頓單于)가 이끄는 40만의 기마군단(騎馬軍團)에 포위돼 한(漢)의 32만 대군을 격파했다. 이에 한고조는 일족(一族)의 낭자(娘子)를 단우(單于)에 시집보내고 많은 선물을 보낸 후 형제약속을 맺음에 의해서 예맥(銳麥;匈奴)과 화의를 맺는다.
 
화의(和議)내용은 [양국(兩國)은 서로영토를 침입하지 않을 것, 한실(漢室)의 여자를 단우(單于)에게 시집보낼 것, 관시(關市;交易場)를 설치할 것, 한(漢)으로부터 선물을 보낼 것] 등이었다.
 
이 화의는 한무제(漢武帝)가 취임하는 서기전 141년까지 60년간 계속됐다. 여기서 보듯 예맥을 중원에서 거리낌 없는 정벌과 지배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예맥(銳麥;匈奴)은 중원에서 후환이 없어지자 강력한 기마군단을 가지고 고비사막을 넘어 서역(西域)의 유라시아까지 원정(遠征)했다. (崔仁 ‘韓國學講義’80~81面. 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86~96面.參照).
 
서역(西域)에는 당시 루란(樓蘭)과 우전(于闐)등 당시 36개오아시스국가(國家)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국가들이 예맥(銳麥;匈奴)의 수중에 들어와 예속(隸屬)됐다. 이에 예맥(銳麥;濊貊)의 영역(領域)은 만주로부터 북으로 바이칼호와 그 상류역(上流域)까지 넓은 영역(領域)이 됐다.
 
서(西)로는 서부의 사막을 포함해 파밀고원(高原)까지, 남(南)은 곤륜(崑崙)산맥으로부터 사이담 분지(盆地)를 거쳐 난주(蘭州)로부터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에 까지 미치는 광역(廣域)이었다. 이 예맥(銳麥;濊貊)이 우리 한국사(韓國史)에서 거론조차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사 계보(系譜)에 숙신씨(肅愼氏)와 예맥 넣어야
 
우리나라역사의 계보(系譜)를 환국,→배달국→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발해 →고려→조선으로 하고 있으나 여기에 숙신씨(肅愼氏)와 예맥이 빠져 있어서 이를 고조선(古朝鮮) 다음에 숙신씨(肅愼氏)와 예맥(銳麥;濊貊)을 넣어야 한다.
 
가소로운 것은 중고교의 역사교과서에 한족(漢族)이 우리민족을 정복하고 사군을 설치했다는 중국사의 위조를 그대로 번역 한무제가 우리민족을 지배했다고 했다. 이는 허구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고조(漢高祖)가 건국2년(서기전 200년)에 32만의 대군(大軍)을 화북(華北)에 집결, 운강(雲崗)의 석굴(石窟) 근처의 평성(平城;山西省 大同縣)까지 진군(進軍)했으나 대패(大敗)해 이 후 한(漢)은 60년간 예맥(銳麥;濊貊)의 제후국(諸侯國)같은 지위에 있었다.
 
그래서 한(漢)나라가 어려워질 때는 상국(上國)인 예맥(銳麥;濊貊)이 도와준 것은 중국사(中國史)에도 명기(明記)돼 있다. 한서 권지 일, 고제기 제일 [(漢書 卷紙一, 高帝紀 第一上)]에 보면 한고조(漢高祖)4년에 ‘북맥연인내치효기조한(北貉戀人來致梟騎助漢)이라 했다. 즉 한고조(漢高祖)4년에 예맥(銳麥;濊貊)이 용감한 기병(騎兵)을 보내어 한(漢)을 도와주었다’ 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한고조(漢高祖)에게 경멸당하고 빈손으로 조선에 망명해 유명무실(有名無實)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기만(欺瞞)으로 빼앗은 위만이 한고조(漢高祖)보다 국력이 강대(强大)한 예맥(銳麥;濊貊)을 정복하고 우리민족을 지배(支配)했다함은 웃기는 허위조작이다.
 
위만(衛萬)이 조선에 망명(亡命) 할 때에 사기꾼답게 한복(韓服)을 입고 상투를 곡 지었다. 이는 우리민족인 예맥(銳麥;濊貊)을 배경으로 반란(反亂)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위만(衛萬)이 우리민족의 보호(保護)를 받기 위해 우리민족을 가장(假裝)한 것이었다.
 
우리민족을 가장하고 우리민족의 보호를 받기위해 겨우 명맥(命脈)을 유지하는 미약한 존재인 위만(衛萬)이 한고조(漢高祖)까지 굴복시킨 강대한 국가인 예맥(銳麥;濊貊)을 정복하고 우리민족을 지배(支配)할 수 없는데도 중국과 일본, 식민사관자들은 상식적으로도 생각 할 수 없는 역사조작과 왜곡을 예사(例事)로 하고 있다. 참으로 기가 차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우리는 허위조작으로 유명한 중국역사를 고찰 할 때에 문면(文面)그대로 믿지 말고 이면에 숨어 있는 사실을 입체적으로 발견하는 새로운 검토가 있어야 한다. 조작과 왜곡의 중국역사를 새로 검토하면 위만이 우리민족을 지배는커녕 예맥(銳麥)의 보호 하에 그 명맥을 이어갔다.
 
이 미약한 한족(漢族) 위만을 기점으로 한국사를 엮은 것을 믿는 것은 정상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은 식민사관을 탈피하지 못한 구태를 벗지 못한 자임에 틀림없다.
 
분명한 사실은 한고조(漢高祖)나 한무제(漢武帝)가 우리민족을 정복하고 지배한 일이 없으며 우리를 정복하지 못한 것이 판명이 되고 있음에도 마치 우리를 지배한 양 조작왜곡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中國)과 일본(日本), 반도식민사관자(半島植民史觀者)일지라도 당시중국대륙에 천하(天下)를 호령(號令)하는 강대한 예맥(銳麥;濊貊)이 엄연히 존재한 사실을 제대로 연구고찰을 하면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은 물론 한(漢)의 집단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崔仁 ‘(韓國學講義)’,76~81面, 三國志 第三十 東夷傳, 史記 三十四, 燕召公 世家 第四 參照).
 
대 유목민족국가세운 예맥(동이족)과 한족(漢族)
 
중국대륙을 2000년이상 정벌하고 정복하며 지배해온 대 기마민족(大騎馬民族國家)는 누가 세웠는지 너무나 사료(史料)가 없음에서 컴퓨터의 검색을 해봐도 없는 것을 이해 할 수 없다. 중국과 일본의 고대사는 다 같이 파렴치(破廉恥)한 위조를 감행한 것이 드러나고 있음이다.
 
북방기마민족(騎馬民族)은 현 중국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해 지배한 것을 숨길 수 없다. 예컨대 서기전 3세기부터 9세기까지의 1200년간의 역사를 살펴봐도 그 진위(眞僞)를 알 수 있다. 주요한 것만을 추려보면 중국이 말하는 흉노(匈奴);銳麥;濊貊), 선비(鮮卑), 유연(柔然), 돌궐(突厥), 회골(回鶻), 토번(土蕃)등의 유목민이 강대한 왕국을 건설해 한족(漢族)의 왕조(王朝)에 위협(威脅)을 계속해서 주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숨길 수 없다.
 
10세기~20세기에 이르는 1000년간에는 북 아시아와 중국과 유라시아까지도 정복왕조(征服王朝)에 요(遼;거란족(契丹族), 금(金;여진족(女眞族), 원(元);몽골족(族), 그리고 청(淸;만주족(滿洲族)이 대륙에서 흥망을 반복했다. 이들은 우리역사에 편입해야 함에도 중국에 뺏기었다.
 
이 기간(期間), 이 북방(北方)의 기마민족은 중국의 농업문화권(農業文化圈)과는 다른 유목(遊牧), 수렵문화권(狩獵文化圈)을 형성해 북아시아문화(北亞細亞文化)라고 할 수 있는 이동(移動)과 이주문화권(移住文化圈)을 구축해서 중국문화(中國文化)에 큰 자극(刺戟)을 주었다.
 
이 북아시아문화권(北亞細亞文化圈)을 형성한 기마민족이 중국을 정벌하고 정복한 이유를 제대로 보면 중국문헌에서는 언제나 북방민족이 살벌하다는 기풍을 가지고 호전용무(好戰勇武)의 민족이라고 이유를 말하나 실은 그게 아니다.
 
농경민 한족(漢族)의 침략이 그 원인이었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기존의 경작지만으로는 부족하게 돼 새로운 경작지를 구하기 위해 주변에로 확대해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한족(漢族)주변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게 됐다.
 
유목민족의 목초지에 침략해 그 가축을 뺏는다든가, 목초지(木草地)를 빼앗아 경작지로 바꿔 가려고 한다. 이에 대해 유목민은 처음에는 그대로 참고 있었으나 특히 진(秦)으로부터 한(漢)시대에 걸쳐서 북변(北邊)에 거주하고 있던 예맥(銳麥;濊貊)은 달랐다. 이들을 정벌정복 했다.
 
유목민족이 한족(漢族)으로부터 침략과 정복을 받아 그 존재를 말살되는 사실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게 됐다. 이에 유목민족인 예맥(銳麥;濊貊)은 이에 대항해서 한족왕조(漢族王朝)와의 상극(相剋)이 2000년 이상 지속(持續)하게 된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한족간(漢族間)에 도작(稻作)이 보급되기 시작 한 것도, 화북지방(華北地方)이 북방민족에 의해 쫒기어서 남쪽으로 도피한 한족(漢族)이 서기전(212~606년)의 육조(六朝)시대다. 한족(漢族)이 쌀을 주식(主食)의 지위(地位)를 차지한 것은 수(隨)나라가 남북간(南北間)을 연결(連結)하는 운하(運河)를 개척한 후(後)로 보고 있다.(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53~57面.參照 引用).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했음을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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