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넘지 못했던 수(隨), 결국은 패망했다

입력 2018-05-26 16: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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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280년 만에 중국의 통일국가(統一國家)를 재탄생(再誕生)시킨 양견(楊堅)(541~604)은 북주(北周)의 고위(高位) 무장(武將)이었다. 북주(北周)라는 국가는 원래는 척발부족(拓跋部族)이 세운 북위(北魏)의 후예(後裔)이며 양견(楊堅)은 한족 화(漢族化)한 척발족(拓跋族)이다.
 
한편 북에서 남쪽으로 도망(逃亡)와서 육조(六朝)를 연 한족(漢族)은 그 때까지 개발(開發)이 진행 되지 않은 양자강(揚子江) 주변(周邊)과 강남(江南)을 300년에 걸쳐서 철저하게 개발(開發)해 경제적(經濟的)으로는 북부(北部)보다 부유(富裕)한 사회(社會)를 만들어내었다.
 
이 부유한 재력으로 농촌에서는 대지주가 발흥(勃興)해 자작농(自作農)은 몰락하는 움직임이 급속히 진행되고 도시에서는 부호(富豪)나 귀족에 의해서 문예(文藝), 예술(藝術), 사상(思想), 종교(宗敎), 실학(實學)등의 분야가 크게 개화해 쇄신(刷新)의 기풍(氣風)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상의 요람기를 거치는 중에 북조(北朝)나 남조(南朝)도 문벌제도의 움직임이 막다른길의 타개와 보다 효율적인 남북 간에 교류 등이 쌍방에서 요구돼 통일의 기운이 높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때 양견(楊堅)이 등장한 것이었다. 양견(楊堅)은 우선 북방(北方)에서 세력을 증대(增大)해 가는 돌궐(突)厥)을 공격해서 이를 누르고 587년에는 호북(湖北)에서 겨우 명맥(命脈)을 유지하고 있던 후량(後粱)을 멸(滅)했다.
 
수(隨)의 염원의 중국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 남조(南朝)의 진(陳)토벌의 군세를 마련되자 이제야 문제(文帝)가 된 양견(楊堅)은 588년10월, 52만의 병력으로 진(陳)을 공격해 적의 10만을 간단히 격파해서 오호(五胡)의 난(亂)이래 280년 만에 다시 중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오늘은 지금까지 우리대륙역사를 주로 다뤄왔으나 고대중국역사는 어떻게 전개 됐는지에 대해 그들의 정치, 행정제도와 우리와의 전쟁, 그 후의 상황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수왕조(隨王朝)는 어떻게 이뤄 졌나
 
중국의 남북조(南北朝420~589)의 통일을 이룬 수왕조(隨王朝)는 문제(文帝), 양제(煬帝), 공제(恭帝) 3대로, 겨우 37년으로 막을 내린다. 수왕조(隨王朝)의 개부(開父)인 문제(文帝), 즉 양견(楊堅)의 부(父)인 양충(楊忠)은 북주(北周) 개국(開國)의 한사람으로서 그 처(妻)는 선비족(鮮卑族)의 귀족(貴族) 독고씨(獨孤氏)의 여자다.
 
북조(北朝)의 한족관료(漢族官僚)와 이민족(異民族)과의 혼혈아인 (楊堅)이 화북(華北)에 있어서 한족과 이족(異族)과의 융합결과 탄생한 통일왕조의 군주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남북을 통일한 수(隨)의 문제(文帝)는 이민족(異民族), 선비(鮮卑)가 세운 북주(北周)왕조의 관제(官制)를 폐지하고 한족(漢族)의 요망(要望)에 따라서 한(漢), 위(魏)의 관제(官制)를 복고(復古)함에 의해서 한족(漢族)의 정권(政權)인 것을 나타내려고 했다. 그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스스로 소박한 생활의 본을 보여주며 불법한 관리를 엄히 다스리며 율령(律令)이라는 법제(法制)를 기본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 즉 율령국가(律令國家)의 제도를 정비했다. 한(漢), 위(魏)의 법제에서는 확실하게 분화(分化)하지 않은 형법적인 율(律)과 관제적(官制的)인 영(令)과의 구별을 분명하게 해 율령(律令)을 기본법으로 하는 국가조직을 정한 것이다.
 
수(隨)는 거의 북주(北周)의 구 귀족(舊貴族)을 임용(任用)했으나 중원 한족의 전통을 받아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북제계(北齊系)의 산동(山東)의 귀족과 남조계(南朝系)의 강남귀족의 참가를 구하기 위해 과거(科擧)라는 몇 개의 과목별의 고급관리시험법을 채용(採用)했다.
 
그 중에서 다음의 양제(煬帝)가 창설한 진사(進士)라는 과목은 작시(作詩) 작문(作文)시험이기 때문에 문학(文學)에 교양(敎養)이 있는 산동과 강남 귀족에 대해서 진출(進出)의 길을 열었다.
 
율령(律令)의 성문법(成文法)을 기초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국가는 국가시험인 과거(科擧)에 의해서 채용된 유교적 문학적인 교양을 몸에 지닌 고급관리의 손에 의해서 운영됐다. 이 조직은 당왕조(唐)王朝)에 의해서 계승돼 청조에 이르기까지 왕조국가정치체제로서 계속됐다.
 
문제(文帝)는 이 정비한 국가행정조직을 움직여서 남북조의 대란(大亂)때문 황폐한 경제부흥에 적용했다. 북조(北朝)가 취해온 국가적토지소유제인 균전제(均田制)를 전토에 확대하려고 했다.
 
특히 호적부(戶籍簿)를 총 점검해 호족(豪族)에게 지배받고 있는 농민(農民)을 공민(公民)으로서 등록 할 것을 강제했다. 이럼으로 천하를 통일 한 최초에는 360여만 호였으나 문제(文帝)의 말기에는 890만호로 인구는 4601만 명으로 급증해 후한시대의 인구로 돌아갔다.
 
문제는 간소한 생활을 보내며 사치에 의해서 인민에 무용(無用)의 부담을 주지 않았다. 황족(皇族), 귀족(貴族), 관료(官僚), 장군(將軍)에 대해서는 엄형(嚴刑)을 가지고 단속(團束)하고 인정(人情)을 베풀지 않으면서 수(隨)의 부(富)와 번영을 이끈 정치를 한 자가 문제(文帝)였다.
 
만년(晩年)에 문제(文帝)는 장자(長子) 용(勇)을 폐(廢)해서 차자(次子)인 광(廣)을 세웠으나 오히려 그 광(廣)의 손에 604년에 살해(殺害)돼서 문제(文帝)뒤를 계승한 자가 양제(煬帝)다.
 
수(隨)나라의 중앙관제와 지방제도 및 양제의 운하건설
 
수(隨)나라를 건국한 양견(楊堅)은 지금까지 중국의 중앙관제(中央官制)와 지방제도를 대폭으로 개혁함과 함께 새로운 영토가 된 남조(南朝)의 구령(舊領)에 많은 관리(官吏)를 파견하는 필요상, 과거제도를 실시, 중앙에서 관리등용시험을 행해 그 합격자를 지방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604년에 제2대 황제인 양제(煬帝;569~618년)는 등극(登極)하자 수(隨)는 내치(內治)와 외교(外交) 양면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먼저 선왕인 문제(文帝)의 국도(國都), 장안(長安)으로부터 황하(黃河)에 들어가기 위해 운하(運河), 광통거(廣通渠)를 만든다.
 
그런데 양제(煬帝)시대가 되자 중국대륙하천이 모두 다 서(西)로부터 동(東)으로 흘러서 바다로 향하기 위해 남북 간 교통이 불편하다고 해서 남북(南北)을 통하는 운하(運河)개척에 나선다.
 
이것은 그가 진(陳)왕조를 멸한 후 사령관으로서 양자강하류의 번화한 양주(揚州)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강남의 화미(華美)한 문화생활에 익숙해져 남조(南朝)의 우아한 궁전생활을 북방제도(帝都)에 재현하기 위해 장안을 버리고 동도(東都)로 해서 전국의 부호(富豪)를 이주 시킨다.
 
그는 부왕 문제와는 달리 200만의 인민을 징용해서 장려(壯麗)한 궁전과 정원을 조영(造營)했다. 강남의 기암진목(奇岩珍木)을 배로 운송하기 위해 또 100만의 인민을 징발해서 낙양(洛陽)으로부터 양주에 달하는 대운하를 열어 연로(沿路)에 가는 곳 마다 이궁(離宮)을 지었다.
 
즉 황하와 회수(淮水)와 양자강을 연결하는 통제거(通濟渠)를 완성해 양자강으로부터 항주(杭州)에 달(達)하는 강남하(江南河)를 610년 개삭(開削)했다. 이 대운하는 5개월 만에 완성하고 605년 완성한다.
 
이 대운하의 건설은 양제의 향락(享樂)을 구하는 개인적 동기로 보이나 강남의 곡창짇(穀倉地帶)를 중원(中原)에 결부시키는 남북교통, 식량수송의 간선(幹線)으로서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그 운하(運河)의 전장(全長)은 1800km에 미치고 폭(幅)은 30~50m가 되는 장대(壯大)한 규모로 지금까지 황하(黃河) 양자강유역(揚子江流域)에 나눠지고 있던 경제(經濟)가 일체(一體)가 돼서 교류(交流)하게 된 근본적(根本的)인 원인(原因)이 되는 것이었다.
 
수대(隨代)의 운하(運河)는 남북 간의 교류(交流)를 바로 촉진시켜서 경제발전(經濟發展)에 크게 기여했으나 양견(楊堅)이나 2대 양제(煬帝)의 목적은 중앙집권정치(中央集權政治)의 철저이며, 조세증수(租稅增收)를 위한 교통로(交通路)의 확보와 군대이동을 용이하게 하는데 있었다.
 
이로 인해서 위수(渭水) 중류역(中流域)에 있었던 제도(帝都), 대흥(大興)과 배도(陪都), 낙양(洛陽)에는 전국으로부터 정보(情報)와 물자(物資)가 모여들어 통일중국지배가 용이하게 됐다. 단, 고대의 토목공사이기 때문에 연간을 통해서 주항(舟航)은 곤란해서 비가 오는 계절에는 물 흐름이 급류가 됐다가 겨울과 봄의 갈수기(渴水期)에는 물이 부족하기도 해 때때로 주항(舟航)을 못하게 했다.
 
더욱이 황하(黃河)로부터는 진흙이 침적(沈積)하는 등의 단점이 있었다. 진흙이 침적 할 때 마다, 주변의 주민이 수복(修復)작업에 동원됐다. 양제(煬帝)의 대사업은 여기에 끝이지 않고 매월 200만인을 동원해서 낙양에 동도를 건설한 것 외에 각지에 이궁(離宮)을 조영(造營)해 갔다. 더욱이 수십만 인을 동원해서 돌궐의 침입을 막는 장성(長城)의 구축(構築)도 행했다.(以上은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132面~134 面 參照 引用하다.)
 
수(隨)는 왜 고구려를 두려워했는가
 
수(隨)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왕조(王朝)이나 당시 대륙에 건재한 동이국가(東夷國家)는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등이 있었는데 이중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압력에 고심(苦心)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교와 군사를 교묘히 구사(驅使)해서 점차 국력이 증대(增大)해 갔다.
 
이 때 중국을 통일한 왕조인 수(隨)가 출현하자 바로 조공(朝貢)을 행(行)해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압박을 제거(除去)해주기를 수(隨)의 문제(文帝)에게 간원(懇願)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일이 후에 수(隨)나라 붕괴의 한 원인이 된다. 수(隨)에서는 짧은 치세 중에 몇 번이고 고구려에 원정군(遠征軍)을 보내고 있었으나 번번이 패하고 돌아 왔다. 중국을 통일한 강군이었으나 고구려의 군대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두려워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다. 그것은 수(隨)를 건국(建國)한 양견(楊堅)의 출신(出身)인 척발부족(拓跋部族)도 고구려(高句麗族)도 1세기경에는 다 같이 요하(遼河)부근에 거주해서 유목생활(遊牧生活)과 수렵생활(狩獵生活)을 하고 있었던 이웃 간이었다.
 
즉, 수(隨)의 전에 북주(北周)는 고구려(高句麗)와 북동(北東)의 경계(境界)에 접하고 있던 것이 북주(北周)와 고구려의 관계였다. 고구려(高句麗)와 북주(北周)는 오랫동안 우호관계(友好關係)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북주(北周)를 양견(楊堅)이 찬탈(簒奪)한 일로서 고구려(高句麗)는 수(隨)에 강한 적대감정(敵對感情)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양견(楊堅)자신이 북방부족(北方部族)이 전투(戰鬪)에 강한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에 대해서는 항상 공포심(恐怖心)과 경계심(警戒心)을 갖고 있었다.
 
한편 고구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신라(新羅)는 중국에 통일국가 수(隨)가 건국되자 바로 조공(朝貢)하고 문제(文帝)에 고구려의 횡포(橫暴)를 호소한 것이었다. 이와 반대로 고구려는 북주(北周)에 멸망과 수(隨)가 영토로 하려는 요서지방(遼西地方)에 고구려는 군(軍)을 진출시켰다.
 
이 때문에 중국을 통일한 수(隨)는 체면이 서지 않아 수(隨)로서는 고구려를 징벌할 필요가 있었다. 이로 인해 문제(文帝)는 해륙(海陸) 30만대군(大軍)으로 원정(遠征)을 감행(敢行)한다.
 
그런데 당시 대륙의 맹주(盟主)인 고구려가 수(隨)에게 당할 나라가 아니었다. 고구려이전 예맥과 부여(夫餘)를 계승한 고구려는 용맹하기로 유명한 나라로 수군(隨軍)은 고구려군(高句麗軍)에게 대패(大敗)한다. 이후 수(隨)는 고구려 원정에 총력을 기우렸으나 모두 실패하고 만다.
 
고구려 원정(遠征)한 수(隨), 패망의 길로 가다.
 
고구려를 침범한 수(隨)나라의 30만은 수서(隨書)에 의하면 10명중 8~9명이 전사했다고 할 정도로 수(隨)의 손해는 말이 아니게 엄청난 것이었다. 30만군을 보내고도 이길 수 없었던 최대의 이유는 고구려군(高句麗軍)이 기마전법(騎馬戰法)인데 반해 수군(隨軍)은 보병전법이었다.
 
당시의 기마(騎馬)는 현재의 전차에 필적하는 위력이 있었다. 예맥이 천 년 간 대륙을 지배한 것도 기마전법의 위력에서였다. 이에 양제(煬帝)는 부(父)인 문제(文帝)가 고구려 침공에 실패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 양제(煬帝)는 612년에 즉위 후 대군으로 고구려에 원정군을 보낸다.
 
이 때의 원정군(遠征軍)의 진용(陣容)은 해륙(海陸)으로부터 113만인과 수송부대(輸送部隊)와 200만 명이 되는 대부대(部隊)였으나 고구려군(高句麗軍)도 필사적으로 이들을 맞아 격퇴(擊退)시킨다. 10명중 8~9명이 죽는 참담(慘憺)한 지경으로 수군(隨軍)은 철퇴(撤退)했다.
 
패전(敗戰)을 거듭해온 수(隨)나라는 그 이듬해에도 3차 원정군(遠征軍)을 보냈으나 중신(重臣)인 양현감(楊玄感)에 의한 반란(反亂)이 발생했기 때문에 일부의 수군(隨軍)이 도착 할 수밖에 없어 사기(士氣)가 높은 고구려군(高句麗軍)에게 패퇴(敗退)하고 철수(撤收)한다.
 
한편 양현감(楊玄感)의 반란(反亂)은 3개월 만에 진압(鎭壓)이 됐으나 이 사건은 양제(煬帝)에게 큰 타격을 주어 반란(反亂)이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양제(煬帝)는 고구려를 침공해서 수차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 이듬해인 614년 네 번째 고구려원정을 강행한다.
 
이 원정(遠征)도 실패해 돌아오자 지금까지 수(隨)와 화의(和議)하고 있었던 동돌궐(東突厥)이 화의(和議)를 파(破)하고 반기(反旗)를 들어 침입해 왔다. 이 동돌궐(東突厥)은 585년에 동서로 분열한 돌궐의 하나로 수(隨)가 건국할 당시 돌궐과의 간에 화의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양제(煬帝)는 바로 대군(大軍)을 이끌고 동돌궐군(東突厥軍)을 맞아 결전에 임했으나 역(逆)으로 동돌궐군(東突厥軍)에 포위돼 부하 이세민(李世民)에 의해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에 위기(危機)를 느낀 양제(煬帝)는 616년 장안(長安)을 떠나 남쪽강도(江都) 양주(楊州)로 향했다.
 
그러나 양현감(楊玄感)의 반란(反亂)이래, 반란(反亂)은 전국적(全國的)으로 계속 일어나고 그 수(數)는 200이 넘는 심각한 결과(結果)를 가져 왔다. 이러한 군웅(群雄)중에 한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이연(李淵565~635)으로서 그는 식자(息子) 이세민(李世民)과 함께 617년 진양(晋陽)에서 거병(擧兵)해 장안(長安)에 입성(入城)한다. 그래서 이곳을 그의 근거지(根據地)로 했다.
 
그런데 이 이연(李淵)부자(父子)가 618년에 당(唐)을 건국(建國)하기까지의 10년과 건국 후 10년간은 각지에서 전란(戰亂)이 끝이지 않아 기근(饑饉)도 연속하는 상태(狀態)에 놓여 있었다. 난세(亂世)가 되고 치안이 어려운 상황에서 새로운 신흥세력이 발흥(勃興)하니 양제(煬帝)는 616년 수도장안(長安)을 떠나 양주(楊州)로 갔으나 흉흉한 민심은 그를 떠나 있었다.
 
양제(煬帝)는 618년 그 비(妃)와 자식들과 함께 호위병사(護衛兵士)에 의해서 살해(殺害)된다. 수(隨)가 건국한지 겨우 37년 만에 패망(敗亡)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그가 고구려 원정(遠征)이 원인으로 중국역사상 강대한 진(秦)에 이어 수(隨)가 망하고 당(唐)이 건국하게 됐다.
 
수왕조(隨王朝)는 문제(文帝), 양제(煬帝), 공제(恭帝)3대 37년인데 고구려원정(高句麗(遠征) 30년간에 온 힘을 경주(傾注)했으나 많은 인명(人命)과 양제(煬帝)의 호사(豪奢)한 생활은 농민(農民)의 전국적(全國的)인 반란(反亂)으로 붕괴(崩壞)된 것이다. (以上은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中, 48面~55面. 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 61面, 138面~141面을 參照 引用하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했음을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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