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겸비 대제국 고구리…고대사 체계 정립해야

입력 2018-06-17 17:57:23

원문 링크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상고사와 고대사의 체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을 통감한다. 중국과 일본의 우리고대사 사료를 거의 다 말살했기 때문에 연구에 어려움은 말이 아니다. 때문에 대륙을 지배한 우리역사를 입증하는데 중국, 일본의 사서(史書)를 보게 되는데 너무나 터무니없이 왜곡되고 변조한 사료일색이다.
 
일본은 우리역사를 기자조선부터라 하는가 하면 예맥과 부여 등 우리역사들을 아예 빼고 허구의 역사로 우리역사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다. 일본에서 유명한 삼성당편수소 편(三省堂編修所 編)으로 펴낸, 삼성당발행(三省堂發行), 각국별 [세계사의 정리] 各國別 [世界史の整理]에서는 우리나라역사가 아닌 허구의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첫머리에 조선사로 내 놓고 있다. 참으로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역사의 기록은 그 국가의 건국에서 패망까지의 사실을 기록한 역사와, 국가강역이 고대에서 현재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것들에 의해서 역사를 말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역사는 반도식민사관에 의해 한반도에 국한한 역사가 주로 왜곡돼있어서 제대로 된 역사는 쓰여 있지가 않다.
 
즉 우리의 강역이 고대에서 현재까지 기록한 것도 아니고 환국(桓國)과 배달국(倍達國) 고조선(古朝鮮)을 거쳐 예맥(銳麥;濊貊)과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 조선과 대한민국에 이르는 역사를 다 기록한 것도 아니기에 일률적으로 이것이 우리역사라고 말을 할 수 없다. 더구나 지금 교육부가 발간한 역사는 대한암흑기에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역사를 그대로 가르치는 우를 범하고 있어 이런 반도식민사관(半島植民史觀)의 역사는 우리역사가 아니다.
 
우리 역사는 대륙의 역사인데 지금 반도가 우리강역인양 헌법규정과 남북공조를 할 때마다 반도기(半島旗)를 들고 나와 흔드는 것은 중국과 일본이 바라는 우리영역표시를 각인시키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우리의 우매함에 그들이 비웃는 것을 왜 모르는지 한심하기까지 하다. 우리의 강역은 한반도가 아니다. 통일 후 저 북방 간도(間島)와 잃은 강토를 찾기 위해서도 중국과 일본이 깔아놓은 레일로 달려가는 무지에서 벗어나야 우리의 바른 역사를 찾을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강역도 간교한 계획 하에 반도에 가둬놓는 역사조작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해 왔는데 이제는 인류 최초의 시원국의 역사에서부터 대륙을 지배해온 우리역사를 더 이상 조작하고 왜곡(歪曲)을 용납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의 깊은 각성도 요구되고 있다.
 
앞으로 우리국민들은 더 이상 역사왜곡에 동조하는 일은 없이 현명해져야 한다. 지금 가르치는 역사교재는 우리역사라 할 수 없다. 이런 역사는 폐기해 바른 역사교재마련도 시급하다. 오늘은 고구리(高句麗)의 역사에 포함돼야 할 북부여(北夫餘)에 대해 살펴보고 자 한다.
 
북부여는 고구리사(高句麗史)에 포함이 맞다
 
우리는 북부여와 고구리(高句麗)에 관한 사료(史料)는 고리사(高麗史)이외에는 어떠한 고구리(高句麗)역사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역사를 연구하는데 어려움이 큼을 알 수 있다.
 
백제·고구려 패망으로 중국이 우리사서(史書)를 다 가져가거나 불태웠고 일본이 대한암흑기(大韓暗黑期)에 총독부가 발표한 것만도 22만권을 웃도는 사서(史書)를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가져가 우리역사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밖에 남기지 않았다.
 
오늘 살펴볼 북부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당서(唐書)의 고구리비기(高句麗秘記)에 가언충(賈言忠)이 시어사(侍御史)로서 말한 것 중에 고구리가 나라를 세워900년 된 것을 말하려 한다. 즉 “고구리(高句麗) [비기(秘記)]에는 ‘900년이 되기 전에 80대장이 있어 고구리(高句麗)를 멸망시킨다’는 말이 있는데 고씨(高氏)가 한(漢)나라 때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 됐고 이적의 나이 80입니다.”고 해 고구려가 900년이 넘는 것을 중국인도 말한 기록이 있다.
 
당서와 김부식(金富軾) 사기(史記)에서 [해모스의 부여(夫餘)]는 고구려 역사라 했다.(寶藏王27年(668年)高麗秘記日不及九百年). 즉, 북부여는 체계상으로도 고구려역사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연표(年表)에 의하면 서기전 37년, 동명성왕(東明聖王)때부터 보장왕(寶藏王) 27년(서기 668년 까지) 705년간으로 나와 있다. 이것은 900년에서 195년이 모자라다. 이것은 주몽(朱蒙)이전의 역사가 포함되지 않고 빠져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기록에서 보듯 북부여와 고구리는 하나의 같은 역사임으로 주몽(朱蒙)이전의 역사가 포함돼야 하는 것이다. 주몽의 선조, 북부여시대는 서기전239년~서기전 38년까지 201년간이다. 북부여의 해모스는 주몽(朱蒙)의 부친이다. 부자(父子)의 나라가 다른 역사로 말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달리 말 할 수는 있으나 부자간(夫子間)의 나라를 하나로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호태왕비 북부여]에는 (惟昔始祖 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라 했다. 즉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건국했는데 주몽(朱蒙)은 북부여(北夫餘)천제(天帝)의 아들이라고 했다. 이는 북부여(北夫餘)는 고구리(高句麗), 주몽의 나라임을 말하는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리(高句麗) 본기(本紀)에도 ‘주몽의 아버지는 북부여 해모스천제(天帝)이시다.’고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고구리(高句麗), 주몽(朱蒙)은 북부여(北夫餘)의 해모스를 아버지라 하고 있으니 해모스의 나라는 당연히 고구려역사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文)에도 분명하게 북부여(北夫餘)가 고구리(高句麗)의 역사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북부여기]에는 국호(國號)가 기록되지 않았으니 해모스가 제위(帝位)에 오르고도 국호(國號)를 기록하지 않았으나 당서(唐書)와 김부식의 사서에서 [해모스의 부여]는 고구려 역사라 했다.
 
처음부터 해모스는 나라를 건국하고도 북부여라 칭(稱)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광개토태왕비에 북부여(北夫餘)라 칭(稱)했고, 중국사서들도 위서(魏書), 북사(北史), 신구당서(新舊唐書)에는 부여(夫餘)라 하고 양서(梁書)에는 고리(櫜離)로 했다고 했다. 고구리(高句麗)는 바로 고리(櫜離)에서 연유한 것으로 봐야하고 당서(唐書)에서 같은 음(音) 고리(高麗)에서 표현(表現)한 것이 고리(櫜離)와 같은 것으로 우연이 일치일 수는 없다고 했다.
 
여기서 고(高)는 고(櫜), 또는 고리(槀), 고(藁)로 사용했으나 색(索) 또는 탁(槖)으로도 표기(標記)하기도 했고 북부여(北夫餘)는 고리(櫜離), 또는 고리(槀離), 고리(高麗)의 다른 표현이다. [태백일사]에 고리(櫜離),는 서안평에 있다고 했는데 북부여를 고리(櫜離)로 불렀다고 하니 부구여(北夫餘)와 고구리(高句麗)는 모두 고구리(高句麗) 역사인 것이다. (以上은 吳在成, ‘九犂系 高句麗史’)] 7면~10면, 高句麗本紀’ ‘九犂系史’ ‘우리역사’와 ‘高句麗史 參照 引用하다.)
 
북부여는 왕검조선의 전통을 계승한 나라다
 
해모스는 조선 마지막 천제(天帝)고열가57년에 웅심산에서 내려와 군대를 일으키고 제위(帝位)에 올랐다. 다음해 고열가는 오가들에게 정치를 맡기고 입산하시니 조선은 패망하게 됐다. 북부여 해모스는 조선시대 단군이 행하던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것과 번조선과 낙랑국(樂浪國)의 조공을 받는 천제의 지위에 있었다.
 
즉 기비의 번조선왕이나 최승의 낙랑왕은 단군이라는 호칭을 받지 못했고 오직 북부여 통치자만이 단군(檀君)이라는 호칭(呼稱)을 사용했다. 이것은 조선의 전통을 계승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북부여는 즉 고리 바로 고구리(高句麗)는환국, 배달국, 예맥조선과 부여를 계승한 조선의 전통을 계승한 강대한 나라임에 이이가 없다.
 
신라는 고구리(高句麗)로 부터 독립했으나 고리(高麗)는 고구리(高句麗)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말하고 있다. 한조선(韓朝鮮)은 왕검조선(王儉朝鮮)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으로 했으나 Corea는 고리(高麗)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우리가 유의할 것은 전통을 계승한다고 다 계승 되는 것이 아니라 족보(族譜)와 같은 계승방식으로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가 아니고 기준(基準)을 기본(基本)으로 해 모두가 아우르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것이 정통(正統)을 바로 이어가는 것으로 반복해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북부여는 고구리다. 우리는 지금까지 북부여와 고구리를 다른 나라로 인식해 왔다. 물론 문자적으로는 다르나 왕통은 같고 고구리가 북부여역사를 포함했음을 중국 ‘당서(唐書)’와 ‘삼국사기’에 기록 돼 있고 광개토태왕비에도 그렇게 돼 있다.
 
여기서 대륙에 있었던 사로신라(斯盧新羅)도 경주의 계림에서 박(朴), 석(昔), 김씨(金氏)가 이어진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북부여를 고구리(高句麗)역사로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연표(年表) 및 삼국유사(三國遺事) 연표(年表)에 기인한다고 보아진다.
 
즉 신라역사(新羅歷史)를 중심에 두고 신라가 고구리 보다 오랜 역사로 내세우려고 북부여역사를 밝히지도 않고 주몽 이후의 역사로 고구려역사를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가! 본다. 그러나 호태왕비문(好太王碑文)에서 '고구리는 북부여로부터 시작됐다고 했고, 삼국사기에도 주몽의 선대가 북부여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와 [당서(唐書)]는 고구리(高句麗)역사는 900년이라 해 해모스(서기전239~서기668)로부터 보장왕까지 906년 역사다.
 
북부여의 시조는 해모수이고 2대 모수리 3대가 고해사, 4대가 고우루 이고 주몽(朱蒙)은 5대가 되고 6대 유리왕(瑠璃王)이다. 7대가 대무신, 8대가 민중왕 9대가 모본왕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 할 점은 주몽은 하나인데 기록이 다르다. ‘호태왕비’와 ‘삼국사기’의 차이는 북부여 세대차이로 보인다. 주몽은 해모스의 아들이 아니고 황손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북부여 3대인 고두막한은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했고, 동명성왕(東明聖王)은 붕어(崩御) 이후 붙여진 시호(諡號)다. 고구려는 북부여시대 여섯 분의 천제(天帝)와 고구려시대 28의 열제(列帝), 서른 네 분이 다스린 대제국(大帝國)이 북부여와 고구리(高句麗)로 이어진 것이었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북부여 역사는 중국 ‘당서(唐書)’와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고 광개토태왕비에도 나와 있는 왕통(王統)으로 봐서도 고구려 역사에 포함돼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대제국 고구리(高句麗)는 문무를 겸비한 나라였다
 
중국문헌에 문화(文化), 사상, 물질문명에 대해 중국은 우리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수서(隨書, 卷67, 列傳 第32, 裵矩)의 기록을 보면 고구리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라 했다. 고죽국은 문화(文化)가 고도로 발전해 백이숙제(伯夷叔齊)같은 군자(君子)가 배출한 나라다.
 
이 고죽국(孤竹國)은 3천 년 전에 문화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또 2천 년 전에 부여(夫餘)가 고죽국(孤竹國)의 문화를 수입했다. 즉, 부여가 고죽국의 문화를 계승하고 고죽국이 숙신씨(肅愼氏)씨의 문화를 계승한 것이다. 고구려는 동이족 가운데에서도 문화가 발전한 국가였다.
 
그런데 위에서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라 함’은 고구려가 숙신씨(肅愼氏)의 문화를 계승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문화적으로도 고죽국, 부여(夫餘), 고구려가 고대문화국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3천 년 전의 예맥(濊貊)과 2천 년 전의 부여국(夫餘國)을 계승한 아시아의 패권국(覇權國)으로 수(隨)와 당(唐)의 침략도 물리친 대륙의 패자(覇者)로 군림했다.
 
이 같이 강성(强盛)한 우리의 백제, 고구리가 패망에 이른 것은 같은 동이(東夷)이면서 당(唐)의 앞잡이가 된 신라(新羅)의 김춘추(金春秋)로 인해 백제(百濟)와 고구리(高句麗)가 패망에 이르렀으나 고대 대륙(大陸)을 지배한 것은 우리의 동이족(東夷族)이 세운나라들이었다.
 
4300여 년 전의 숙신씨(肅愼氏)와 고조선(古朝鮮), 3천 년 전의 예맥(濊貊), 2천 년 전의 부여(夫餘)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해 지배(支配)한 것 지울 수 없다.
 
백제와 고구려가 살아졌으나 그 후 그 유민들이 세운 발해(渤海), 고려(高麗), 조선(朝鮮)으로 계승 발전한 우리민족은 중단 없는 발전을 거듭해 왔다. 우리민족이 고대부터 중국한족에게 지배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가는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고 그 실사(實史)를 말해야 한다.
 
중국의 역사조작, 예를 보면 진(秦)나라를 패망하게 한 것도 진승(陳勝)과 항우(項羽)라 하나 진(秦)을 타도한 것은 예맥(濊貊)과 남월(南)越)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역사를 제대로 쓰지 않는다. 그들 나름대로 제 멋대로 쓰고 왔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이 당시 그들은 우리 동이족을 두려워했고 역사의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쓰지 않았다. 사실을 변조하고 왜곡해서 거꾸로 역사를 꾸미고 있었다. 우리는 중국 한족이 우리민족을 침범하고 지배 한 것 같이 조작해 말하지만 그들이 우리민족을 지배치 못한 것이 판명되고 있다.
 
한 예로 고구려 모본왕(慕本王)시대에 고구리군(高句麗軍)이 한나라 요지인 태원(太原)을 점령하니 요동태수 채동(蔡彤)이 항복하고 배상금을 바치었다. 그런데 후한서(後漢書)에 채동(蔡彤)이 은신(恩信)으로 불러 항복받았다 기록했다.(後漢書, 八十五, 東夷列傳, 七十五, 高句麗).
 
즉 배상금을 은신(恩信)으로 기록했다. 이것이 중국의 휘치필법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일방적으로 인류의 종주국이라 자처하는 중국인은 패한 것을 승리했다 기록하고 배상금을 은신(恩信)으로 기록하는 상습(常習)이 있다. 이는 중국사를 연구하는 학도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 인용(引用)했음을밝힙니다.
이을형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3
감동이에요
0
화나요
0
슬퍼요
0
댓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