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전역이 고구리…中 역사말살 오래전부터

입력 2018-06-26 00: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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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우리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기록을 바로살피고 제대로 말을 해야 한다. 지금은 옛날과 달라서 중국과 일본이 왜곡(歪曲)하고 변조(變造)한 역사는 최신의 첨단과학의 발달로 그 허구(虛構)의 조작과 변조, 왜곡이 다 들어나고 있어 설자리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중국과 일본이 우리역사를 한반도안에 심어놓으려고 가진 수단방법을 동원해서 우리역사를 날조 했으나 지금은 그런 날조된 조작된 왜곡역사는 발을 붙일 수 없고 모두 살아지는 시대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날조해서 역사를 꾸며나 이런 허구(虛構)는 통하지 않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그 전모가 다 들어나는 국제사회이기에서다. 과연 우리나라가 반도안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은 현대 과학뿐만이 아니라 천체현상과 기후, 자연현상 등에서 다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일식 관측지(觀測地)는 어디이며, 행성(行星) 및 천체현상은 어찌해서 중국의 기록과 다른 것인지, 홍수 개시월(開始月)이 왜 다르며 황충(蝗蟲)의 출현이나 지각변동, 적조현상 등 자연현상이 왜 다른 지 등을 살펴보면 다 들통이 나고 있다.
 
반도식민사관을 주장하는 자들은 오늘날의 최첨단과학시대에 NASA천문기록을 보고 우리역사를 말을 하라, 박창범 교수는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2002년 1월30일 발행) 책에서 우리나라의 일식현상은 다 대륙에서 나오고 일본역시 대륙과 대만에서만 일식현상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 고구리, 백제, 신라가 대륙에 있었고, 김유신(金庾信)의 행적은 반도에는 없다. 모두 대륙에 있으며, 장보고(張保皐)와 최치원(崔致遠)역시 이들은 모두 반도인(半島人)이 아니라 대륙인(大陸人)으로 활동하고 그 무덤들이 모두 대륙에 있음에서도 다 밝혀지고 있다.
 
우리나라역사에서는 최치원(崔致遠)이 신라인으로 알고 있으나 최치원은 신라인이 아니고 고구려인(高句麗人)이며 장보고(張保皐)는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대륙에서 벼슬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들이 다 반도에서 지낸 것 같이 꾸미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런 사실을 모른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사대모화사상(事大慕華思想)으로 쓰여 진 사서(史書)라고 부정(否定)하게 되면서 수정(修正)해온 버릇이 계속되고 있다. 광복 후에도 한반도만 우리강역으로 보는 사관이 정약용(丁若鏞), 안정복(安鼎福), 신채호(申采浩)등에 의해서 후학들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오늘은 고구리(高句麗)의 건국과정과 명칭(名稱), 영역(領域), 반도에 고구려의 간(干)인 낙랑국(樂浪國)과 대륙을 정벌, 정복하고 왜(倭)를 지배해 일본의 중심에 고구려가 있었던 사실과 고구리(高句麗)가 대륙에서 어떠한 위상을 가진 나라였나! 좀 더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고구리(高句麗)의 명칭은 하나가 아니다.
 
먼저 고구리(高句麗)의 건국은 서기전 37년으로 기록했으나 [삼국사기]와 당서(唐書)는 고구리 역사가 900년이라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한무제(漢武帝)시대(서기전142~87)에 조선예맥(朝鮮濊貊), 구리(句驪;高句麗)가 있었다.[武帝時置朝鮮濊貊句驪蠻夷)]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건소이년(漢建昭二年;서기전 32년) 이전에 고구리(高句麗)가 대륙에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高句麗)의 명칭이 하나로 보고 있으나 그 명칭은 대단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에는 [고구리]로 하라고 했고, 옥편에서는 [고구리]로 발음 된다고 기록했다. 필자도 사서(史書)에 나온 것을 따라서 고구려(高句麗)를 [고구리]로 근래(近來)부터 쓰고 있다. 사기(史記, 卷6)에서는 려음리(麗音離)라 해 분명히 [리]로 발음(發音)하라고 하고 있다.
 
중국사서(史書), 진서지리지卷(晉書地理誌), 삼국지(三國志, 卷30) 및 위서(魏書, 卷100), 북사(北史, 卷94), 남사(南史, 卷9)와, 삼국사기도 고구리(高句麗)로 하고 있다. [삼국지(三國志, 卷30(三國志槀離郞高句麗)]과, 김부식(金富軾)의 사기(史記, 雜記6)은 구리(句麗)로 말하고 있다.
 
후한서(後漢書, 卷85), 송서(宋書 97), 양서(粱書 54)는 고구리(高句驪)로 하고, 후한서(後漢書), 한서(漢書 26)은 구리(句驪)로 하며, 한서(漢書 99), 양서(粱書 54)에서 하구리(下句驪)로 했다. 위서(魏書, 卷100), 북사(北史, 卷94), 남사(南史, 卷79), 김부식(金富軾)의 사기(史記雜誌6)은 고구리(高句麗)로 하고 있는 것이다.
 
구당서(舊唐書)와 당서(唐書)는 고리(高麗)로도 하고 송서(宋書)는 고리(高驪), 삼국지(三國志)는 고리(槀驪)로, 양서(粱書)는 고리(櫜離), 또한 사기(史記)는 구여(句餘)라고도 하고 있다. 또 북사(北史)는 색리(索離), 후한서(後漢書)는 맥이(貊耳), 삼국지(三國志)는 구루(溝漊), 진서지리지(晉書地理誌)는 요동국(遼東國), 양서(粱書54)는 평주목(平州牧)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이 여러 가지 문자로 기록 하고 있는데 문자가 다르다 해 다른 나라로 본다면 주몽도 그 만큼 많아야 하는 것이다. 문자는 달라도 하나의 국가였음을 염두(念頭)에 두어야 한다. 장안(長安) 중심의 두 번째 사서(史書)인 ‘한서(漢書, 卷26)’에 [무제시치조선예맥구려만이(武帝時置朝鮮濊貊句驪蠻夷)]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구려(句驪)는 해모스의 부여(夫餘)를 이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고구리 명칭은 20여의 명칭으로 불러지고 있다.
 
이를 소리로 정리하면 [고구리]는→ 고구려(高句麗),→ 고구려(高句驪), [구리]는→ 구리(句驪),→구려(句麗), [고리]는→ 고려(高麗)→고려(高驪), 고리(槀離), 고리(櫜離), [고리],→O離), [색리]는→(索離), [구루]는→(溝漊)로, [맥이]는→(貊耳), [구여]는→(句餘)로 하고 있다.
 
[부여]는 부여(夫餘) 부여(扶餘)로하고, [북부여]는→북부여(北夫餘), 북부여(北扶餘), [요동국]은→요동국(遼東國), 평주자사(平州刺史), 요동대방(遼東帶方) 2왕국(王國)]등으로 불러지고 있다. 어떠한 발음(發音)과 기록(記錄)으로 됐든 간에 고구리역사(高句麗歷史)는 서기전 239년~서기668년 내에 있었다면 하나의 고구리(高句麗)로 정립(鼎立)돼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북부여를 고리(櫜離)로 불렀다고 하니 북부여와 고구리(高句麗;고리(高麗) 는 모두 고구리 역사인 것이다. (以上은 吳在成,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226面~227面, 參照, 引用했다.)
 
고구리 영역은 대륙 동부와 동북아시아 전역이었다.
 
필자가 초등하교시절 배운 고구리(高句麗)의 영역(領域)은, 만주(滿洲)와 한반도 북부에 국한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고구리의 최대(最大)영역은 안휘성(安徽省), 산서(山西省), 산동성(山東省)은 물론 하남성(河南省)의 서화(西華)동쪽의 대륙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동북아시아 전역(全域)이 고구리영역(高句麗領域)이었다.
 
이는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史書)에서도 위서(魏書), 북사(北史), 삼국지(三國志), 신구당서(新舊唐書), 송서(宋書), 양서(梁書), 주(周), 진(秦), 한(漢)의 전통을 이은 장안(長安)중심의 한족(漢族)의 기록에서도 나와 있어 모두 입증(立證) 할 수 있어 변(變)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화(西華) 중심의 남쪽 월(越)에서부터 섭(涉), 태원(太)原), 광영(廣甯)으로 이어지는 선과 선비(鮮卑)의 영역을 포함했고 동으로는 반도경주(慶州)까지 아시아의 요지가 고구리(高句麗)의 영역으로 기록돼 있다. 지금도 이 곳에서 고구리의 후예임을 나타내는 말들이 남아있다.
 
코리아(高麗), 몽고(蒙古;蒙古麗), 위구루(爲溝漊), 리(犂)등은 고구리의 후예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서기49년 한(漢)과 전투지명인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비롯해서 수많은 전투지명이 탁(涿), 요대(遼隊), 신창(新昌), 거향(居鄕), 궁구서안평(宮寇西安平)등의 기록이 수십에 이르는 나라들을 병합해 고구리의 영역을 넓힌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서기전30년 행인국(行人國)을 비롯해 서기전28년에 북옥저(北沃沮), 서기전9년부터 선비(鮮卑)는 고구리민(高句麗民)이 된다. 서기14년에는 양맥(梁貊)을 병합하고 한고구려현(漢高句麗縣)을 병합하고, 서기22년에 부여(夫餘;동부여)를 병합한다. 서기26년에 개마국(蓋馬國)과 구차국(句茶國)을 병합하고, 32년에 낙랑국(樂浪國), 37년에 낙랑군(樂浪郡)을 병합한다,
 
49년에는 북평(平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을 평정하고 56년에 동옥저(東沃沮)병합(倂合)해 동으로 창해(滄海), 남으로 살수(薩水=하북성(河北省)의 중부지역을 확장하고 72년에 조나(藻那), 74년에 주나(朱那)를 병합한다. 475년에는 요(遼)의 동쪽에 있는 백제의 한성(漢城)을 함락한다. 이상은 [삼국사기]에 의한 고구려의 영역확장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중국 신구당서(新舊唐書)에는 고구리(高句麗)에 가한신(可汗神)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황하(黃河)북쪽의 지도자는 모두 한(땀)으로 표기하고 있다. 당시 간(干=汗,韓)은 고구리(高句麗)만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고 후에 계민가한(啓民可汗), 징키스칸(成吉思汗)은 후에 쓴 것이다.
 
이 간;칸(干=汗,韓)제도를 통해서도 강역을 가늠 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 때의 한(韓)이, 신구당서(新舊唐書)에는 간(땀)으로 삼국사기에는 간(干)으로 쓰여 지고 있는데 간(干=汗, 韓)은 왕(王)이 지배를 받는 지방지도자로 왕과 동격으로 볼 수 없는 왕의 지배를 받는 지도자이다.
 
반도에 서라벌(徐羅伐;경주(慶州)의 동신라(東新羅) 마립간(麻立干)이 고구리간(高句麗干)이다. 간(干)은 고구리대왕(高句麗大王=상왕(上王), 열제(列帝)와 동격(同格)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당시에 나오는 모든 간(干=汗,韓;칸)들은 모두 지방지도자로 왕의 지배를 받았다. 양원왕(陽原王) 13년에 환도성간(丸都省干)인 주리(朱理)가 모반을 하다가 발각됐다고도 했다.
 
고구리(高句麗)의 간제도(干制度)는 기자(箕子)가 살던 조선(朝鮮)의 땅 하남성(河南省)의 서화(西華) 동쪽과 한반도(韓半島)가 하나의 민족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고구려간 제도(干=汗,韓 制度)가 광개토태왕 비와 진흥왕비가 있고 삼국유사가 보충할 뿐이다.
 
[중국25사]는 우리의 영역을 관측(觀測)되는 곳만 기록했고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내외를 모두 기록 했다는 것이 다른데 이를 증명 할 수 있는 것이 고구려 간(干=汗,韓)제도인 것이다.
 
동이역사말살(東夷歷史抹殺) 기도(企圖)한, 소설, 전기들
 
중국은 우리가 지배한 하남성(河南省)의 서화(西華), 항성(項城)동쪽에 있었던 대륙의 역사를 밀어내기 위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수호전(水滸傳), 열국지(列國志)등 모든 것을 동원해 우리역사의 말살정책(抹殺政策)을 시도(試圖)하고 이를 자행(恣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호전(水滸傳)은 시내암(施耐庵)이 쓰고, 나관중(羅貫中)이 집성(集成)한 것이다. 열국지(列國志), 또한 명대(明代)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명(明)은 1368년~1662년 까지 존재했는데 이 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명(明)은 당(唐)과 이후의 송(宋)등의 역사왜곡에 적극적이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상상력이 풍부한 나관중(羅貫中)으로 해금 6천여 명의 사람을 동원해 위(魏) 46년, 촉(蜀) 43년, 오(吳)가 58년의 역사밖에 아니 되는 역사를 중국대륙전체사건(中國大陸全體事件)으로 볼 수 있게 소설화(小說化)한 것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이다.
 
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14세기 말에 나관중(羅貫中)이 창작품(創作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너무 허구의 만화와 같은 책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9세기 이전 서기전11세기까지 한족(漢族)의 어느 국가도 중국전체를 통일한 역사는 하나도 없다.
 
만약 있었다면 ‘중국25사’는 모두 거짓이 되고 말 것이다. 중국25사를 인정하는 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우리 동이역사를 대륙에서 삭제시키려는 명(明)조정의 의도에 의해 지원되고 창작됐다고 보고 있는데, 역사무지의 우리네 사람들은 이 소설을 극구칭찬만 하고 있다.
 
이는 마치 배달국14대 치우천황이 철두가면(鐵頭假面)과 갑옷을 입고 동이족이면서 화하족(華夏族)의 우두머리로 나온 헌원(軒轅)과 73회의 싸움을 다 이기며 통일국가를 매진한 가면을 철면피(鐵面皮) 뜻으로 사용하면서도 그 본래의 뜻을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과 같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서기전2세기~서기9세기사이에 동이의 일부인 고구리(高句麗), 백제(百濟), 서신라(西新羅), 왜(倭)가 서화(西華), 항성(項城)동쪽에 있을 때, 위(魏;220~265년), 촉(蜀;221~263년), 오(吳;222~280년), 삼국(三國)을 토대로 만든 소설(小說)인데 마치 서화(西華), 항성(項城)의 동서(東西)와 대륙전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볼 수 있게 쓰여 졌다.
 
광개토태왕비문(廣開土太王碑文)도 대륙 하남성(河南省), 서화(西華), 항성(項城)에서 반도까지 우리영역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지연의’에 심취한 독자들은 서화(西華), 항성(項城) 동쪽의 대륙의 우리역사를 망각하고 아직도 우리역사가 반도 안에 갇혀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참으로 한심하고 웃지 못 할 우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환국(桓國)시대부터 배달국(倍達國),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리(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왜(倭)시대를 이어온 서화(西華)동쪽의 우리역사인 동이역사(東夷歷史)를 바로 알 필요가 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중국25사’ 동이(東夷)기록을 구분하고 ‘삼국지연의’와 ‘삼국지(三國志)’도 소설과 역사서(歷史書)를 분명히 해 소설(小說)을 통해서 역사를 오도(誤導)하는 것에 현혹돼서는 아니 된다. 분명히 구분하려 제대로 알고 말을 해야 한다.
 
‘중국25사동이’,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광개토태왕비’ 등에서 서화(西華)에서 반도까지는 우리민족의 영역(領域)이었고 역사기록도 상고시대부터 9세기까지로 돼 있는데 수호전(水滸傳)에서 중심이 돼 있는 양산박주위는 우리민족의 중심부분 중의 하나였다.
 
중국의 사학자 임해상(林海祥)박사도 배달국시대(倍達國時代) 대륙의 80%가 우리영역이었다고 했다. 현재 배달국제14대 치우천황(蚩尤天黃)의 능(陵)이 산동성(山東省) 동평군 수장현(東平壽長縣)에 있고, 그 황후(黃后) 견비(肩髀)의 묘가 동평(東平)의 남쪽 거야(鉅野)에 있다.
 
우리역사는 대륙의 역사이지 반도의 역사가 아니다. 이제는 무모한 왜곡역사들을 더 이상 용납해서도 아니 된다. 우리역사를 올바르게 바로 세워서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 자랑스러운 우리역사를 이어가야 할 때이다.(이상은 崔仁 ‘韓國學講義’,44面 以下,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222面~253面, 參照, 引用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 인용(引用)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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