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인류사회에 통예를 볼 수 없는 이물(異物)들이 너무 많은데 놀란다. 그것은 조선조시대부터 사대사가(事大史家)들이다. 그들은 우리민족이 천손(天孫)으로 천민(天民)으로 자처하며 세계를 변화시킨 위대한 역사의 영광을 백안시하고 수치에 혈안인 자들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 국민의 영광과 치욕을 기록해 영광은 그 국민의 자존심과 애국심을 북돋고 치욕은 그 국민의 비분심(悲憤心)을 일으켜 실패의 길에서 방황하지 않고 성공의 길로 가야 하는데 우리 사학계는 아직도 일제가 만든 자비적(自卑的) 위조역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지금 선진국들은 없는 역사도 조작하고 자국의 자존심을 북돋고 여기에서 용기와 인내력을 배양해 위대한 역사라, 역사를 창조하면서까지 선진국으로 가는데 우리는 위대한 역사를 가지고서도 민족의 진로, 활로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 모든 나라가 역사를 존중하는 목적은 그 민족의 활로를 개척(開拓)하는데 있다. 진정한 활로(活路)를 개척하자면 역사를 과학적(科學的)방법으로 그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중국과 일본의 사가(史家)들의 위조해 우리를 지배했다고 하며 우리가 승리한 역사도 패배와 수치의 식민지사(植民地史)를 장식하고 있다. 참으로 미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위조를 아무 거리낌 없이 조작하고 왜곡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중국과 일본이다.
우리가 고대(古代)부터 천자(天子), 황제(皇帝)의 국가로 등장(登場)한 것이 고고학(考古學)에 의해서 분명히 판명되고 있는데도 도리어 황제국가에 예속된 후왕(侯王)의 국가로 위조돼 자주독립의 민조사관이 패배예속(敗北隸屬)의 식민지사관으로 변모돼 있다. 기가 찰 일이다.
이렇게 된 것은 중국과 일본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의 잘못도 너무 크기에 반성하고 가야 한다. 잘못된 사관을 배제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다루는 뒤엎어진 역사를 바로 세워가야 함에도 역사를 다뤄 온 사람이 사대주의사관으로 국가민족을 팔아먹는 일을 예사로 하고 있기에서다.
세계5대문명을 주도한 우리들의 .인류발달사(人類發達史)‘에 편향(偏向)해 위서(僞書)를 배제하고 진서(眞書)에서 취재(取材)해야 함에도 그러지 못했으니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신채호 선생 같은 사가들이 잘못은 우리사서를 제대로 섭렵해서 밝혀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위서(僞書)인 오월춘추(吳越春秋), 해상잡록(海上雜錄), 갓쉰동전(傳)등 거짓 책(冊)에서 취재해 우리역사를 반도 안에 역사로 했기 때문에 신채호(申采浩)의 역사는 그릇된 것이 됐다.
예컨대, 오월춘추(吳越春秋)는 후한(後漢)의 조엽(趙曄)이 저술했는데 위항(委巷), 망탄(妄誕), 진허막측(眞虛莫測)의 잡서(雜書)라고 널리 알려진 책으로 참고(參考)인용할 책이 아닌 것이다.
오늘은 우리나라는 931회의 외침(外侵)에도 자주자존의 민족의식과 천민사상(天民思想)으로 저항한 민족으로 중국과 일본이 말도 아니 되는 왜곡에 대해 특히 ‘일본사(日本史)에 중점을 두고 그 중심에 있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편찬과정(編纂過程) 을 살펴보고자 한다.
중일고대사허구(中日古代史虛構)는 가관(可觀)
우리는 고대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감히 따라 올 수 없는 역사와 문화사상은 물론 경제적 조건은 추종을 불허했다. 중국은 2천년동안 우리의 고시(楛矢) 석족(石鏃)을 수입하며 보물이라 칭했고 산삼은 진물(珍物)이라 했다. 이 같은 경제적 조건에서 특수한 문화사상이 창조됐다.
특수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서 문화사상이 발생하는데 지구상에 타에 없는 특수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이른 우리는 대륙에서 사방원시민족을 정복하고 상고시대부터 대국(大國)으로 등장, 세계시원국(始源國)인 환국부터 자랑스러운 나라요 민족임을 세계석학도 인정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상고시대 그 존재조차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상고사도 없는 나라이기에 우리역사를 부러워하면서도 질시하고 사실을 왜곡 변조하며 조작해 왔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고대중국은 통일된 역사도 없었고 진왕(秦王)때 처음으로 통일을 한 것이 처음이다. 일본 역시 고대는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양자강 이남에 왜인(倭人)으로 호칭되는 가운데 우리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伽倻)의 지배를 받아왔기에 이런 역사를 숨기고 왜곡하기에 혈안이다.
역사의 열등의식을 불식(拂拭)못하는 중국과 일본은 우리역사를 숨기고 자기들 역사를 말하는데 내세울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하기에 우리역사를 숨기고 지우며 그들 역사를 구성해 왔다.
중국과 일본이 우리역사를 조작하기 위해 우리역사를 폄하(貶下)하고, 역사를 조작하고 변조하며 제 멋대로 왜곡했는데 일본은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이 삼서(三書)를 일본의 역사기본서(基本書)로 자리매김을 하며 역사를 꾸며갔다.
그러나 이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는 둘 다 백제계(百濟系) 겐메이여왕(元明女王 711~720)때이고, 속일본기(續日本記)는 707~715년)때 안만려(安萬侶)에 의해서 편찬된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신무왕(神武王)을 종주(宗주(主)로 해서 40의 왕의 교체(交替)를 모두 전자(傳子制)에 의한 계위(繼位)인 것 같이 장식하나 그 배후에 숨겨진 정권교체에 관한 실상을 알 수가 없다. 이는 삼한계(三韓系)의 제세력(諸勢力)의 연속적교승(連續的交承)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만려(安萬侶)의 구상(構想)에 의한 일본왕체제(日本王體制)로 해서 나온 이 책들은 역사사실(歷史事實)이 아닌 위서(僞書)로 믿을 수 없는 책일 뿐이다. 그리고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도 대륙에서의 지배계급(支配階級)이 돼 있는 사람들의 기록(記錄)이 주이다.
여기서 왜(倭)라는 칭호는 필자가 어렸을 때 부친으로부터 들을 것은 키가 작아서 왜(倭)라고 들었으나 이 왜자(倭字)는 사전류(辭典類)에 의하면 ‘유순한 분, 돌아서 먼 모양, 노(魯)나라의 국선공(國宣公)의 이름, 국명(國名), 일본의 구명(舊名)등이라 하나 옳은 표현이 아니다.
문헌상 왜(倭)라는 자(字)로서 고대 ‘왜(倭);일본’에 관해서 가장 오래 된 것은 반고(班固)가 쓴 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이다. 이 때 왜(倭)는 대륙 양자강 이남에 있었고 일본열도에 없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온 왜국(倭國)
양자강 이남에 있는 왜(倭)가 중국과 접촉한 것을 구체적으로 말한 최초의 기록은 후한서(後漢書), 왜전상(倭傳上)의 광무건무중원이(光武建武中元二)(57년)이 처음이고 그 다음이 후한안제영초원년(後漢安帝永初元(107년)의 [倭國王帥升等). 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문건이 있다.
이 당시 양자강 남쪽에는 몸체가 적고 손과 팔이 긴 소인족(小人族)에 관해서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전(東夷傳)과 위서왜인전(魏書倭人傳)에 다같이 [주유국(侏儒國)에 이르는 신장(身長)3~ 4척]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양자강 남쪽에는 왜소(矮小)한 족속(族屬)이 널리 살고 있었던 것인데 이들이 왜족(倭族)이다.
이 왜(倭)는 고구리(高句麗), 백제, 신라, 가야(伽倻)의 지배를 받았는데 백제 고구리가 멸망 후 그 유민(流民)이 왜(倭)로 넘어가 계열별(系列別) 세력이 모국(母國)을 배경으로 패권(覇權)을 다투게 됐다. 그 백중지세(伯仲之勢)를 이루는 것은 신라계(新羅系)와 백제(百濟系)였다.
처음은 신라계 세력(天武), 문무(文武)의 정권이 30년간 계속했으나 백제계 겐메이여왕(元明女王의 즉위(708년)하고 그 이듬해 히에다 아례(稗田阿禮)와 안만려(安萬呂)에게 명(命)해서 최초에 [고사(古事記)]를 30년 만에 편찬하게 하고 다음에 이[고사(古事記)]를 자료로 해서 안만려(安萬呂)에게 일본국(日本國), 정사(正史)인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하게 했다.
이 일본서기]의 편찬사업은 11년간이나 걸릴 정도로, 안만려(安萬呂)의 일본사편찬(日本史編纂)은 난사(難事)중의 난사(難事)였다. 신라와 백제가 전개하는 쟁패전은 300년, 양자 간에 사권(史權)의 다툼과 그 때문에 사서(史書)의 개작(改作)은 회를 거듭해서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일본에 있어서 사기의 편찬은 응신(應神)15년(284년), 백제의 사가(史家) 아직기(阿直岐) 응신조(應神朝)의 사관(史官)에 취임하는 것에 의해서 시작 됐다고 보나 그 후 신라 백제 양계의 정권이 교체(交替)할 때마다 서로 전조(前朝)의 사기(史記)를 불태우기가 일수였다.
그 중에도 가장 특기한 것은 백제계 코우쿄쿠여왕(皇極女王 서기642~645)이 신라계 코우토쿠왕(孝德王 서기645~654)에 정권을 탈취될 때에 그 때까지 백제계 역대와조(歷代王朝)가 편찬 보관해온 [제기(帝記)]와 [국어(國語)]를 소각(燒却)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 다행히도 선사혜척(선(船史惠尺)이 타고남은 것 모울 수 있었다. 백제계 안만려(安萬呂)는 이 타고남은 사기(史記)와 당사자등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토대로 편찬한 것이다.
일본의 역사를 편찬하는 안만려(安萬呂)의 앞에 각종의 난제가 있었으나 그 중에도 심각한 것은 왜(倭;일본)가 서기전53년~500년간 왜(倭)가 대륙에 있었다가 서기670년에 대만(臺灣)으로 건너간 사실과 백제와 고구려가 망한 후 이주해온 고조선인의 정착과정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쟁패전(爭覇戰)을 가지고 비춰진 각왕조의 연결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또 왕조(王朝)가 교대할 때마다 피투성이가 전개된 왕위쟁탈전을 어떻게 취급하며, 때때로 행해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伽倻)의 일본으로 진출과 그 작용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가 큰 문제로 다뤘다.
안만려(安萬呂)의 [일본서기] 편찬방법
안만려(安萬呂)는 [일본서기] 편찬의 난제(難題)를 대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처리해서 편찬했다. 그것은 첫째, 쟁탈전에 의해서 교대된 혈통이 다른 각 왕자(王者)들을 신라계 진무왕(神武王)을 국조(國祖)로 해서 거기에 전가제(傳家制)에 의해서 계승된 것 같이 계통을 세웠다.
둘째는, 일본국내에 있어서 왕위쟁탈전과 고구리(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야(伽倻)가 고대일본에 대해서 가(加)한 정벌(征伐), 정복(征服)과 지배(支配), 기타 작용(作用)을 은어(隱語)와, 비유사(比喩詞), 또는 노래로서 전(傳)했다.
셋째는 고대에 고구리(高句麗), 백제, 신라. 가야(伽倻)의 일본진출의 시작을 대륙이 아닌 일본열도와 관련하게 해 회남자천문훈상(淮南子天文訓上)과 같은 필법(筆法)으로 장식(裝飾)했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일본의 국가형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와 부여(夫餘)에서 나온 선비족의 일부가 세운 가야(伽倻), 사계(四系) 사람들의 혼성(混成)에 의한 것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우리민족은 신장6~8척(尺)의 날랜 무인(武人)들이 철기(鐵騎)로 신장3~4척(尺)의 왜인(倭人)들이 살고 있는 지방에 침입해서 각 한 개의 지구(地區)를 점령해서 [여기는 백제(百濟)다.] [여기는 신라(新羅)다.]등 말하는 100여개의 무리가 출현했을 것이라 보고 있다.
이리해 서기전부터 고구리, 백제, 신라, 가야, 4계열별세력(系列別勢力)이 각기 그 나라 모국(母國)을 배경으로 서로 패권(覇權)을 다투게 됐는데 그 기간이 3세기 간 계속됐다한다.
이러한 일본의 국가형성과정은 실로 복잡다기(複雜多岐)이었다. 여기서 안만려(安萬呂)는 국상립(國常立), 국협퇴(國狹槌), 풍각정(豊斠渟)등 이상한 삼대삼신(三代三神)을 벽(劈)으로 등장시키고 또 칠대(七代), 팔신(八神)을 등장시켜서 이를 신세칠대(神世七代)라 이름을 붙이었다.
이 칠대(七代)의 남녀로 해서 일본의 국토창시(國土創始)를 담당시키고 있으나 이것을 또 팔주기원(八州起元)이라 이름을 붙여 신출생(神出生), 서주맹약(瑞珠盟約), 보경개시(寶鏡開始), 천손강림(天孫降臨), 해궁유행(海宮游幸), 신황승운(神皇承運)등 팔단계(八段階)를 거친 후 신무왕(神武王)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 신무왕(神武王)은 신무천황(神武天皇)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편자(編者)인 안만려(安萬呂)는 자신(自身)의 풍부한 학식(學識)을 앞세워서 ‘일본사(日本史)’의 시작을 신화적(神話的)으로 장식(裝飾)해서 수록(收錄)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역사의 공백을 메우려는 것으로 이러한 분식(粉飾)된 문장(文章)과 그 문장을 취급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일본의 사가(史家)와 식자(識者)중에는 이를 더 신화적으로 발전시키기도 하는가 하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등 제 각각이다.
이러한 일본의 신대상하(神代上下)에 나타난 많은 인물의 후예(後裔)가 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도 당시 일본의 계급자로서 활약한 것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신대상하(神代上下)는 편자 안만려(安萬呂)의 독특한 기술형식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
왜(倭)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이다
우리는 왜(倭)를 일본역사로만 봐왔으나 왜(倭)는 일본의 역사가 아니다. 우리역사다. 왜(倭)는 72개의 제후국중의 하나였고 사기(史記)에 5번 나오는 히미코(卑弥呼)역사부터 일본에 뺏겼다. 일본은 ‘일본서기상(日本書紀上)’의 주권자를 다 왕으로 했으나 7세기말까지의 일본은 부족국가, 지방정권적단계에 끝이고 우리 고구리, 백제, 신라, 가야의 지배로 강한 영향력을 받았다.
이러한 왜국(倭國)에 높은 단계의 중앙집권국가원수(中央集權國家元首)의 상징적 명칭인 천황(天皇)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위서(魏書)는 히미코(卑弥呼)의 사마대국(邪馬臺國)이 29~30여개의 부족으로 조성됐는데 이 때는 대륙에 있었던 우리의 72제후국의 한 소국(小國)이었다.
‘일본서기’는 일본열도(日本列島)내에 있어서 최초의 국가를 가야 신라계(新羅系) 신무왕(神武王)의 허공견일본국(虛空見日本國)으로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神武31年記). 또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신무왕(神武王)을 신라국왕조령(新羅國王祖令)의 후예(後裔)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왕계(王系)가 우리의 자손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자료인 ‘고사기(古事記)’는 그 40대의 왕을 왕에 미치지 못한 [궁(宮)]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왕이 아니기에 1863년 명치정부(明治政府)가 조선(朝鮮)에 제시(提示)한 [왕정복고통고서(王政復古通告書)]를 조선조정은 접수하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의 왕정(王政)이 아니었기에 서다.
구당서 왜국전(舊唐書 倭國傳)도 [모왕성아매씨(某王姓阿每氏)]라고 쓰고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상(日本書紀上)의 주권자(主權者)를 모두 왕(王)으로 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허구역사다. 신무왕(神武王)은 일본의 학자들은 신무왕(神武王)의 건국연차(建國年次)를 서기전 660년으로 하고 있으나 이것은 실제보다도 천년을 올려서 조작한 것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 일본연차다.
일본은 역사를 늘리기 위해 가공의 왕들을 만들어 고무줄 같이 역사를 꾸미고 있는데 이를 믿는 양심적인 학자는 없고 믿지 않는다. 이미 수차 밝힌바와 같이 일본의 첫 왕은 상기(上記)에 쓰여 있는 대로 단군의 73대손인 오진(應神;서기363년~394년)이 일본의 첫 왕이라 하고 있다.
이 오진(應神)이 세운 왜(倭)위치는 지금의 일본열도가 아니고 양자강 이남에 있는 대륙이었고 우리 또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도 대륙에 있었다. 반도에는 낙랑국이 망한 후 고구려의 제후국(諸侯國)인 마립간(麻立干)이 다스린 서라벌(徐羅伐)의 동신라가 있었음은 이미 밝혔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일제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의 쓰다 소우키치(진(津田左右吉)교수의 제자(弟子)인 이병도(李丙燾), 손진태(孫晉泰)등의 일본의 왜곡(歪曲)한 역사방법(歷史方法)을 그대로 따라 옮기는 잘못된 시발(始發)이 문제였다.
여기에 또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쓴 김일연(金一然)과, 신채호(申采浩)등이 우리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반도 안에 가둬놓은 사서(史書)가 아닌 사서의 피해는 우리가 거둬들이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과학적으로 역사를 제대로 연구해 뒤엎어진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만이 남아 있다. 이 역사를 바로 세우지 않은 한, 우리의 미래는 없고 혼란만 있을 뿐, 우리역사를 바로세우는 것은 우리 모두의 지상명령이요 사명임을 자각하고 역사를 바로 세워야 사는 길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 인용(引用)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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