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역사 알려고 하면 먼저 왜(倭·와)라는 일본의 국호(國號)와 그 시대 역사를 알아야 한다. 왜사(倭史;와사)는 일본열도의 역사가 아니다. 왜(倭)는 고구리, 백제, 사로신라, 가라(加羅=가야(伽倻)와 함께 대륙에 있을 때의 역사기록이다. 당시 왜는 양자강 이남에 있었다.
왜인들은 소강(小康)의 후예이고,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후예이며 조선의 후예들이다. 왜(倭)는 서기363년~394) 단군의 73대손인 오진(應神) 이곳에서 태어나 나라를 세워 나라이름을 왜(倭)라하고 비로소 뚜렷한 실존인물 왜왕(倭王)1대가 됐을 대부터 부르던 국호로 보고 있다.
왜(倭)라는 발음은 ‘위’ ‘와’ ‘왜’로 발음하는데 양(梁)나라 옥편(玉篇)에는 국호(國號)로 할 때는 ‘왜(倭)’의 발음을 오화절(烏禾節)이라해 ‘와’로 발음하라고 돼 있고, 1920년 간행한 조선어사전은 왜(倭)를 ‘와’로 발음했다. 1592년 임진왜란 전도 왜(倭)를‘와(倭)’로 발음했다.
중국 사서인 후한서(後漢書) 왜(倭)항목에는 “왜음일곱반(倭音一戈反)이라 해 ‘와’로 하도록 규정했고, 왜(倭)의 국호는 670년 사라져 일본으로 했는데 지금까지 왜(倭)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왜(倭)가 망하고 773년이 지난 1443년 훈민정음발포 이후 [동국전운]에서 왜(倭)국호에 대한 발음은 왜(倭)를 ‘와’로 발음하고 있다.
또한 왜(倭)는 ‘종인위성(人+人)人委聲)’이라 ‘위’라 발음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국호(國號)는 옥편, 후한서, 동국전운, 훈몽자회서 ‘와’로 발음한다고 정의를 내림으로 ‘와’로 부름으로 왜인(倭人)도 ‘와인’으로 함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동국신속상강행실도](1617년 발행)에서 왜구(倭寇)는 ‘왜구’로 발음하고 왜란은 ‘왜란’으로 왜적(倭賊)은 ‘왜적’ 왜(倭)를 ‘왜’로 발음하고 있다.
이 같이 왜(倭)에 대한 발음은 ‘왜’ ‘와’ ‘위’로 발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왜(倭)는 670년, 대만으로 가면서 이 왜(倭)는 일본열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륙과 대만에 있었다. 그 지명도 담이(儋耳), 주애(朱崖), 대만(臺灣-타이완)은 이주(夷洲)였고 671년에 일본이었다.
서기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패해 망한 후 의자왕(義慈王)의 아들 부여풍장(夫餘豊璋)이 왕이 되고 671년당(唐)의 승인을 얻어 이 때부터 일본(日本)이라는 국호(國號)를 갖게 됐다.
당시 왜(倭)가 당(唐)나라에 ‘나라이름을 일본(日本)으로 하련다’는 요청을 들은 중국인들은 “난쟁이 같은 것들이 나라이름을 일본으로 하겠단다”고 기록했다고 한다. 일본의 국호(國號)를 보면, 야마토(大和)는 신라(新羅)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연호 태화(太和)에서 따온 것이고 메이지(明治)는 고구려 문자왕(文咨王)의 연호(年號)인데 이 연호들을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우리와 같은 동이족 일본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 함께 대륙에 있었다. 당시 일본열도에 동이 왜는 없었다. 일본열도의 일본은 1404년에 명에게 인정받은 것을 다루려 한다.
동이 왜(東夷倭)는 대륙에 있었다. 일본열도에 없었다.
고대 왜(倭)는 대륙과 대만에 있었고 일본열도(日本列島)에 없었다. 일본이라는 국호(國號)는 서기670년 양자강 이남의 대륙서 대만으로 이동한 후 671년당(唐)의 승인을 얻어 이 때부터 일본(日本)이라는 국호(國號)를 갖게 됐다. 따라서 670년~1279년은 일본은 대만에 있었다.
이는 일본열도에 오기 전7세기부터 쓰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전은 일본은 670년 까지 왜(倭), ‘와’, ‘위’라 부르고 그 사람들을 왜인(倭人)이라 불렀으며 서기전50~670년 까지 [왜(倭);위(衛)]는 양자강 이남에 있었고 일본열도에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국호(日本國號)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당서(唐書)]에 있을 뿐으로 알고 있다. 당서(唐書)동이전에 나오는 일본을 보면, ‘옛날 일본은 왜노(倭奴)라 했고 당나라 장안(長安)에서 만4천리나 되는데 신라의 동남쪽으로서 바다 속, 섬에 있다’고 했다.
이 ‘나라’에는 성곽(城郭)이 없고 나무를 엮어서 책락을 만들고 풀로 집을 해 인다고 했다. 이 땅은 동서쪽으로는 5개월 일정이 되고 남북(南北) 쪽으로는 3개월 일정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나라 좌우에는 섬들이 50여개나 되는데 각기 모두 나라 이름이 있어 일본에 부속돼 있다.
그 나라는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고 글자가 있어서 불법(佛法)을 숭상한다고 했다. 이 왜(倭)가 글자를 알게 된 것은 4세기 오진왕(應神王363~394)의 대륙시대에 왕인(王仁)박사가 천자문(千字文) 논어(論語)등 12개의 문물을 가지고 왜(倭)에 가서 미개(未開)한 그들을 깨우쳐 개화(改化)시켰기에 문자도 익히게 됐었다.
이는 당시 왜(倭)도 우리와 같은 동이족이기에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왜(倭)는 우리의 한(韓)의 일부였다. [왜(倭);위(衛)]가 동북 회계(會稽), 대현(臺縣) 이주(夷洲), 단주(澶洲), 주작(朱雀), 담이(儋耳)가 있는 곳이 왜(倭)이다. 이 땅들은 다 양자강 이남의 지명(地名)이다.
회계(會稽)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있었던 지역이고 회계(會稽) 회계(會稽) 서북으로 사(泗)와 노(盧)가 있고, 서북으로 석문(石門)이 있다. 담이(儋耳)는 남월(南越)과 근접하고 있는데 남월과 진번(眞番)은 현재 중국의 귀주성(貴州省)이다. (後漢書, 85, 11 參照).
담이본남월지(儋耳本南越地)라 했으니 담이(儋耳)와 진번(眞番)은 붙어 있으니 같은 지역으로 볼 수 있다. 타이완(臺灣)이 그려지지 않은 송나라 때 지도에서 남월(南越)과 진번은 이웃해 있다고 했다. 지금 남월(南越)의 흔적은 월성령이 있고 진번의 흔적은 예파(예波)이다.
대만(臺灣=타이완)은 왜(倭)의 이주(夷洲)였고 대만(台灣)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이 이주(夷洲)의 이(夷)를 대(臺)로 태(台)는 대(大)로 표기하고, 대(大)는 대(臺)로 표기(表記)하게 된 것이다.
후한서 왜전에 관계된 지명으로 회계(會稽), 주애, 담이(儋耳), 이주(夷洲), 단주(澶洲)가 있는데 회계(會稽)는 절강성(浙江省), 담이(儋耳)는 귀주성(貴州省), 주애는 해남도(海南島), 단주(澶洲)는 항주입구 이다, 그리고 이주(夷洲)는 바로 대만(臺灣=타이완)을 나타내고 있다.
대만(臺灣=타이완)은 왜(倭)의 이주(夷洲)였다.
필자는 대만(臺灣=타이완) 역사에 대해 알기위해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대만(臺灣)동창에게 대만역사를 물어봤다. 그런데 대만(臺灣)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놀랐다. 지금까지 대만(臺灣=타이완)역사에 대해 아는 자를 찾지 못했다. 중국과 일본의 사서에서도 찾기 힘들다. 대만(臺灣=타이완)에 대해 1600년 이전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만에 대한 기록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서 중세기 일본을 가리키는 명칭인 지판구(Zipangu)라고 소개된 부분이 대만(臺灣)에 있던 일본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진다. 이것은 대륙의 양자강남쪽에 있었던 왜인(倭人)들의 역사이지 일본열도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대륙의 왜역사와 일본 열도의 동 일본역사와는 구별해 연구를 해야 함이 요구되고 있다.
한(漢)나라 때부터 왜를 알고 있다하나 명나라 주영(周嬰;1426~1522)의 동번기(東蕃記)에 태원(台員)으로 나온 것이 최초라고 하며 이것이 이주민에 의해서 타이완으로 불리고 1544년 이 해협을 지나는 포르투칼의 일야 포르모사라고 해 유럽인들이 타이완을 ‘포르모사’라 했다.
그런데 북경대학교(北京大學校)의 역사자료집에 의하면 대만(臺灣)은 이주(夷洲)라 명기하고 있다. 이주(夷洲)는 후한서부터 왜(倭)의 이주(夷洲)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일본열도에서 대만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왜(倭)가 양자강 이남에 있으면서 대만을 다스렸다는 기록인 것이다.
왜(倭)가 백제와 고구리가 망하고 당(唐)과 사로신라(斯盧新羅)에 의해 본거지에서 축출돼 대만(臺灣)으로 서기670년 이주(移住)하게 되고 대만(臺灣;타이완), 즉, 이주(夷洲)에서 일본을 재건하고 본국탈환(本國奪還)의 꿈을 키우며 옛 본거지인 대륙진출을 시도(試圖)했다.
그러나 사로신라(斯盧新羅)의 장보고(張保皐)에 의해 봉쇄를 받으며 일본을 건국한 왜인들은 국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것은 해군력을 키워 1279년 원(元)나라 정벌 때부터 명(明)나라 때 까지 대륙의 본토회복(本土回復)을 반복시도(反復試圖)하며 사로신라(斯盧新羅)와 원(元), 명(明)의 동해안에 출몰하며 고리(高麗)땅에도 침범하기도 했다. 이것이 왜구(倭寇)인 것이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본거지인 ‘대만(臺灣;타이완’인 이주(夷洲)도 잃어버리게 되자 대륙을 떠나 개척지인 류구열도(琉球列島)를 거쳐 일본열도(日本列島)까지 진출하게 되는데 일본열도에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없던 때였기에 이곳에 와서 야마토조정(大和朝廷)이 성립한 것이다.
대만(臺灣)은 네델란드가 1624년 남서안(南西岸)에 침입해 안평(대남)에 젤렌디아스(Zeelandia)성을 구축하고 대남시에 프로바덴시아 성을, 북부 기륭에 트리니다드 성과 상토도밍고 성을 구축해있던 스페인을 공격해 1642년 네델란드 통치가 시작 됐던 것이다.
이 후 19년이 지나 명(明)나라 유신 정성공이 1661년 건너와 대륙(大陸)회복(回復)을 꿈꾸었으나 그 이듬해 1662년 사망(死亡)하고 3대 32년 만에 청(淸)나라에 굴복(屈服)했다고 했다.
왜(倭)의 역사와 이를 이은 역사가 일본역사(日本歷史)로 잘못 인식돼 대만역사(臺灣歷史)가 1600년 이전에는 없었던 것 같이 비치게 됐다. 발해(渤海) 역사처럼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발해(渤海)는 고구리(高句麗)가 망하자 당나라에 뺏긴 고구리(高句麗)의 옛 영토를 힘으로 수복(收復)하고 고구리 옛 영토를, 당을 축출한 신라(新羅)의 점령을 막고 나눠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발해(渤海)가 얼마나 강국(强國)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발해는 고구리(高句麗)가 멸망 후 발해를 건국 한 후 당과 신라에 대항정책(對抗政策)을 쓰며 서기727년~920년까지 34회나 일본과 교류(交流)하며 고구려의 고토(故土)를 찾기 위한 시도(試圖)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왜(倭)는 630년부터 당(唐)에 조공(朝貢)을 바치며 일본국호를 당으로부터 인정받은 후 894년까지 260년간 당(唐)과 왕래하며 일본국호를 인정받은 배경은 외교임도 알 수 있었다.
일본열도에 동이전(東夷傳)의 왜(倭)는 존재하지 않았다.
동이전에 있는 왜(倭)는 일본열도와는 무관한 나라이다. 이는 동이전의 백제, 사로신라, 가라(加羅)가 한반도 땅과 무관(無關)한 것과 같다. 동이전 기록은 산서성(山西省), 요(遼)를 중심으로 동서를 가르는 [중국25사] 동이전과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공통부분을 기록 한 것뿐이다.
따라서 [일본서기]도 일본열도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것은 자연현상이 기록돼 있지 않다. 즉, [일본서기]의 일식기록(日蝕記錄)의 집중관측지가 양자강 이남이라는 점이다.
일본열도의 기록으로 보려고 해도 [중국25사], ‘동이전(東夷傳)’을 아시아 전지역에 대입했을 때, 일본열도가 아닌, 양자강 이남의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일본열도는, 왜(倭;와)가 서기670년 대륙에서 대만으로 가서 변경한 국호의 일본인이 현재 대만(臺灣);타이완과 같은 상황이 돼 본토회복을 못하고 새로이 진출한 신개척지로 보고 있다. 일본열도에 진출하기 전 왜인들은 본토회복을 위해 중국 동해안으로 침투했으나 이 또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열도로 진출한 왜인들이 후예는 동일본(東日本)을 건국했다.
한편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진출한 낙랑국인(樂浪國人)과 고구리(高句麗), 신라(新羅), 백제(百濟), 가야(伽倻人)들 후예(後裔)가 왜인(倭人)들과 함께 일본을 건국한 사실도 숨길 수 없다. 이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의 유민(流民)들은 본토회복을 위해 국력을 키워갔다.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 기록된 1279년 원(元)나라 원정(遠征) 이후 왜구(倭寇)의 활동이 극대화 한 것은 조직화된 대륙에서 밀려난 유민(流民)들의 고토회복을 위한 해군(海軍)으로 보고도 있다.
이 왜구(倭寇)들은 명(明)나라 동해안과 고려해안을 넘나들었으나 본토회복을 하지 못하고 왜구의 본거지인 대만도 네델란드에 평정하는바가 됐다. 이로 인해 왜구활동무대는 새로운 개척지를 필요하게 됐고 이는 일본열도를 개척해 선주해 있던 부족들을 통합하게 됐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서기670년 이전, 왜(倭)의 위치는 대륙의 동이위치(東夷位置)에서 벗어 날수가 없었다. 즉, 왜(倭)는 고구리(高句麗), 예(濊), 한(韓), 백제(百濟), 사로신라(斯盧新羅), [가라(加羅);가야(伽倻)]의 남쪽인 양자강 이남에 같이 있었기에 이를 변경 할 수 없었다.
당시 중국의 사서(史書)인 당서(唐書), 동이(東夷)와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에도 동이(東夷)의 국가들의 배열(配列)을 당서(唐書)는 맨 위의 대륙북쪽에 말갈(靺鞨)이 있었고, 그 아래 고구리(高句麗), 백제, 신라, 가야(伽倻), [왜(倭);왜노국(倭奴國)]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에도 맨 북쪽에 선비(鮮卑). 부여(夫餘), 고구리(高句麗), 동옥저(東沃沮), 예(濊), 한(韓) 밑에 왜(倭)가 회계(會稽), 담이(儋耳), 이주(夷洲), 단주(澶洲), 주작(朱雀)의 지명(地名)에 있었음을 기록 하고 있다. 이를 옮기거나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以上은 吳在成, 九犂系, 倭-日本史’17面~64面, 九犂系, ‘百濟史’17面~89面 參照引用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 인용(引用)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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