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처음부터 허구의 역사를 구성하며 기원전 1세기경 100여의 소국가가 분립해서 북 구주(九州)에 부락국가(部落國家)가 있었다. 또한 이때 낙랑군에 사자를 보내 조공을 했다고 하는가 하면, 구주(九州) 남쪽에 사마태국(邪馬台國)의 히미코(卑彌呼)가 239년에 위(魏)에 조공하고 위(魏)의 명제(明帝)로부터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하고 있다.
문헌상(文獻上) [왜(倭)]라는 글자(字)는 고대일본(古代日本)에 관해서 기록되고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반고(班固)가 쓴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의 (夫樂浪海 中有倭人, 分爲百餘女國, 以歲時來獻見)“;부락랑해 중유왜인. 분위백여국, 이세시래헌견)이라는 기록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왜(倭)는 전한(前漢)시대부터 중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진서왜인(晋書倭人), 송서왜(宋書倭), 남제서왜국(南齊書倭國), 양서왜(梁書倭), 수서왜국(隨書倭國), 남사왜국(南史倭國), 신구당서상의 왜국(新舊唐書上의 倭國),통전(通典)의 왜국(倭國)등이 있다.
일본은 1세기 초에 구주남쪽지방에 [쓰그지=ツチクモ土蜘蛛)=땅거미], 즉 키가작고 수족(手足)이 긴 소인족(小人族)이 살고 있었다고 쓰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조작(造作)된 허구(虛構)이다. 이 소인족(小人族)은 양자강 이남의 라오스 월남 등 남방계 사람들로 당시 일본열도와는 무관하고 대륙에 살던 시대이다. 그리고 [쓰지그족(ツチクモ);土蜘蛛族)에 관해 중국 지리지(地理志)인 산해경(山海經)에는 ‘이 소인족(小人族)은 특수의 인종이다.’라고 쓰고 있다고 한다.
이 소인족(小人(族)에 관해서 후한서의 왜인전(倭人傳)의 왜(倭)와 위서왜인전(魏書倭人傳)은 다 같이 [주유국(侏儒國)에 이르는 인장(人長)3,~4척(尺)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당시 일본열도에 광역(廣域)에 살고 있는 것 같이 말하나 이 해양족(海洋族)은 일본열도에는 없었다.
고대 10세기까지 풍파가 높은 동지나해를 횡단할 수 없었던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이 당시 배를 만드는 조선기술(造船技術)과 항해술이 일본열도에 건너갈 정도로 발달 하지 못했다.
이러한 기록은 일본의 가장 오랜 사서(史書)라고 하는 712년에 완성된 [고사기(古事記)]와 720년에 발간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처음부터 일본열도에 있었던 것 같이 쓰고 있는데 이 당시 왜(倭)는 일본열도에 없었다. 이는 사기(詐欺)요 기만(欺瞞)의 허구(虛構)의 죄악일 뿐이다.
이것은 이미 밝혀온 바와 같이 지진(地震)과 홍수(洪水)가 일본열도가 아니었고, 자연조건을 가진 일본열도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것은 어렵다. 일본서기의 일식기록집중 관측지(觀測地)도 일본열도가 아니고 양자강 이남의 대만(臺灣)을 주축으로 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분명히 다시 밝히고 가는 것은 고대부터 우리와 왜(倭)는 모두 대륙에 있었다. 지금 중국의 학자와 일본지성인들도 우리나라와 일본이 동이족으로 중국 남단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은 고대 왜(倭)의 역사가 대륙에서 생성하고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허구와 일본열도의 상황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열도내의 최초국가시조를 가야가 신라에 통합된 이후이기에 신라계신무왕(新羅系神武王)으로 했다. 이는 편자(編者)인 백제계 안만려(安萬侶)의 구상(構想)에 의한 통일계(統一系)에 관한 체제로 해서 고대일본의 40의 왕(王)도 모두 천황(天皇)으로 했다.
또한 평성(平城), 차아양제(嵯峨兩帝)의 뜻을 받아서 편찬된 [신찬성시록(新撰姓氏錄)]은 신무왕(神武王)을 신라국왕조령(新羅國王朝令)의 후예(後裔)라고 쓰고 있으나 일본서기의 자료인 [고사기(古事記)]는 그 40의 일본의 왕을 실왕(悉王)에도 미치지 못하는 궁(宮)으로 했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은 신무왕(神武王)이 신라국왕조령(新羅國王朝令)의 자손이라고 하고 있을 뿐, 그 신라가 대륙과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양 신라국(新羅國)중의 어느 신라인가는 확실히 하고 있지 않다. 이 당시 속칭 사라(斯羅)라는 신라(新羅)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 당시 반도에 고구리(高句麗)의 후왕(侯王);칸(干)이 다스리는 서라벌(徐羅伐)의 신라(新羅)와 대륙에 속칭 사라(斯羅)라는 사로신라(斯盧新羅)가 부여(夫餘), 고구리(高句麗), 백제(百濟), 남쪽에 있어 두 신라(新羅)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은 일본서기에 신무왕(神武王)의 기년(紀年)을 서기전(660년~585년)으로 했는데, 이 는 가공(架空)의 인물(人物)로서 일본이 얼마나 역사를 왜곡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존 카터 코벨 박사는 1978년~1986년 한국서 지내며 1400여편의 글을 남기고 있는데 그의 저서 [부여기마족(夫餘騎馬族)과 왜(倭)]에서 일본의 시조(始祖)는 서기전 660년이 아니라 서기369년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이 시대의 천황(天皇)은 가당치 않다.
중국의 모든 사서(史書)가 말하는 것과 같이 7세기까지의 일본은 부족국가(部族國家)~지방정권적단계(地方政權國家段階)에 끝이고 있었다. 고구리(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라(加羅);가야(伽倻)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던 왜(倭)인데 이러한 왜국(倭國)에 높은 단계의 중앙집권국가(中央集權國家)의 원수(元首)의 상징적인 명칭인 천황(天皇)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왜(倭)가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 한 것은 당(唐)시대부터이나, 이 당시 왜는 대만에 있었다. 정권의 변혁으로 백제 고구려가 망한 후 왜로 간 동이족 간에 패권다툼에서 670년 이주(夷洲)인 대만(臺灣)으로 쫓겨난 후, 일본(日本)이라는 국호(國號)를 사용하기시작 했다.
그런데 이 대만에 있던 일본(日本)이 언제 패망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분명치가 않다. 당시, 이 일본열도(日本列島)에는 반이(虫+反)夷)라는 아이누(アイヌ)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시베리아 계(系) 고아시아족(古亞細亞族)으로 일본서기는 이들을 동이(東夷)라 하는데 이들이 일본사서상(史書上)에 등장은 서기110년에 처음 등장하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아이누(アイヌ)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들은 성질이 강폭해서 상(上)을 범하고, 마을에 장(長)이 없고, 읍(邑)에 수장(首長)이 없다. 동이(東夷)중에서 이들이 더 강하다. 이들은 남녀가 잡거(雜居)하고 부자(父子)의 분별이 없다고 했다.
겨울이 되면 굴속에서 자고 여름이 되면, 나무위에 소(巢)를 만들어서 산다. 모피(毛皮)로 옷을하고 생피(生血)을 마시며, 산에 오를 때는 날짐승같이 뛰는 것 같이 날래고, 들에 갈 때는 짐승과 같이 빠르게 뛴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열도 내에 반이(虫+反)夷);아이누(アイヌ)와 같은 생태(生態)는 후한서 읍루전(挹婁傳)상의 어로혈거족(漁撈穴居族) 그자체이다. 이들은 지금부터 약1만 년 전부터 일본열도에 살고 있다는 것이 일본학계의 통설이다.
그런데 일본열도(日本列島)가 왜인(倭人)과 패망한 백제, 고구리, 신라, 가야인(伽倻人)과 낙랑국(樂浪國)의 유민(流民)들이 진출한 것은 대만의 일본이 원(元)나라로부터 타이완;대만이 공격을 받게 되자 있을 곳을 잃은 많은 왜인(倭人)들이 일본열도로 가게 된데서 일본의 신개척지(新開拓地)가 됐던 것이다. (이상은 文定昌,’韓國史の延長-,‘古代日本史’.15면~51면 참조).
5세기이전 신라, 백제, 왜(倭)는 반도에 없었다
중국사서인 사기(史記), 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그 어느 곳에도 5세기 이전 신라, 백제, 왜가 반도에 있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상고시대 환국(桓國), 배달국(倍達國), 고조선 이후부터 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해 지배한 사실을 숨길 수 없다.
또한 예맥(銳麥;濊貊), 부여, 백제, 신라, 가야가 반도에 있었다는 것, 중국의 어느 사서(史書)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하남성 서화(西華)의 동쪽에 신라(新羅;(駟盧國), 백제국(伯濟國), 왜(倭;卑彌國), 구로국(狗盧國;狗奴國)이 있다는 기록은 있어도 한반도에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함에도 사서(史書)를 숨기고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를 해독한다는 논쟁도 논할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5세기 이전 왜의 위치를 나타 낼 수 있는 기록은 사기(史記), 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밖에 없음에도 일본학자들이 이것을 숨기고 왜곡해 뒤집혀진 조작된 사료를 가지고 비문을 해석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5세기 이전 기록에서 왜(倭;위(衛)는, 삼국지(三國志)에서는 회계(會稽), 주애(朱崖), 담이(儋耳)에 있다고 했고, 후한서(後漢書)에는 회계동야현(會稽東冶縣), 단주(澶洲), 이주(夷洲), 주애(朱崖), 담이(儋耳)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이들의 공통인 담이(儋耳)를 한서(漢書)에서는 남월지(南越地)라고 했으며 진번군이라고 했다. 진번군(眞番郡)이 남월지에 있다.
고구려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이 반도에 있는가! 없다. (濊)는 연제지간(燕齊之間)의 창해(滄海;滄과新海)에 있고 왜(倭)는 회계(會稽), 주애(朱崖), 담이(儋耳);남월(南越)에 있다고 했는데 이곳이 양자강 이남이 아닌가! 이게 반도에 있는가! 반도는 없다.
또한, 회계(會稽), 회계동야현(會稽東冶縣), 이주(夷洲), 담이(儋耳;南越)가 양자강 이남에 있지, 일본열도에는 찾아 볼 수 없다. 더욱이 무위자연설(無爲自然說)을 주창한 노자(老子)가 살던 곳이 담이(儋耳)인데 노자(老子)가 일본에 있었다는 기록은 일본 그 어디에도 없다.
한편 5세기이전 왜(倭)가 양자장 이남에 왜(倭)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광개토태왕비문(廣開土太王碑文)의 왜(倭)를 현 일본열도라면서 연구하는 것이 가치가 있겠는가! 일고의 가치 없다.
우리 사학계는 언제까지 왜곡된 역사만을 추종 할 것인가! 광개토태왕비문(廣開土太王碑文)의 연구역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초기 기록을 부정하면서 어떻게 해석 할 수 있단 말인가!?
광개토태왕비문(廣開土太王碑文)연구는 5세기 이전 사서(史書)에 의해 동이(東夷) 각국의 위치가 다 대륙에 있는데 어찌 한반도내(韓半島內)로 끌어들이는가! 도대체 어찌해서 변조되고 왜곡된 역사를 철칙같이 믿고 이리도 조국과 조상을 욕되게 하는지!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다.
송(宋)때 쓰여진 후한서, 양(梁)때 쓰여진 남제서(南齊書), 당(唐)때 쓰여진 양서(梁書)와 남사(南史) 그 어느 것도 3세기~649년 사이의 왜(倭)의 위치가 양자강 이남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670년~9세기의 고일본(古日本)과 1403년~2018년, 오늘의 일본은 분명히 다르다. 옛 일본은 양자강 이남에 있었으며. 왜(倭)가 670년 국호를 일본으로 했다고 그 일본이 오늘의 일본이 될 수 있겠는가! 대륙의 왜와 일본은 오늘의 일본과 다르다. 왜 이 사실을 숨기려는가!
일본은 왜노국(倭奴國)의 후속국(後續國)이다
옛 일본(舊日本)은 양자강 이남에 있었으며 고조선의 일부이고 한때 진번군으로 부르던 지역이었다. 히미코(卑彌呼)의 사마태국(邪馬台國)등도 마한의 72개의 후국중의 하나였다. 서기전50~서기670년 까지 왜노국(倭奴國), 또는 왜(倭;衛)로 됐다가 서기670~9세기 까지 일본의 국호(國號)를 대만;타이완 에서 사용했다.
일본열도의 일본은 1403년 명(明)이 국호를 인정했고 그 이전은 백제와 고구려가 패망한 후 당(唐)에 일본이라는 국호를 쓰겠다고 해 인정받고 일본열도에 가기 전 부터 쓰기시작 했다. 그들은 대륙의 왜사(倭史)를 1404년 이후 일본열도(日本列島)의 역사로 바꿔 재구성(再構成)했기 때문에 현재 왜사(倭史)인 동이전(東夷傳)을 바로 볼 수 없게 편성(編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왜구(倭寇)라 하면 일본열도(日本列島)에서 온 해적(海賊)으로 보아왔으나 왜구(倭寇)는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서 조선과 명(明)의 해안을 침범했다. 이들은 해적이 아니라 군대이다. 배 수십 척에서 100~500척으로 이동하는 집단이니 군대로 보는 것이 옳다.
백제가 660년 패망할 때 왜군(倭軍)1000여척의 군대로 백제부흥군(百濟復興軍)을 도왔으나 백강전투에서 수심이 얕은 곳에 배들이 좌초돼 움직일 수 없어서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패한 이 군대도 나라를 잃은 백제인과 왜인(倭人)의 연합군대로 대만에서 보낸 것으로 보인다.
670년 왜국은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하게 된 것은 사로신라와 당에 의해서 대륙의 본토에서 축출돼 왜이주(倭夷洲)였던 타이완=대만(臺灣)으로 가서 새로이 정부를 세우고 일본(日本)으로 국호(國號)를 새로 정 하고 본토회복(本土回復)을 목표로 활동 한 것이 이들로 보고 있다
그 후 장보고(張保皐) 같은 사로신라군(斯盧新羅軍) 때문에 본토회복의 꿈을 잠시 접어두었다. 그런데 왜이주(倭夷洲)였던 타이완의 일본이 1279년에 원(元)의 침입으로 그 땅마저 잃었다. 그 잃어버린 본토를 회복하려고 군대를 일으켜 명나라 동해안을 침범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자 조선해안도 침범했으나 성공하지 못해 그 무리가 일본열도로 건너가서 일본열도를 개척해 새로운 일본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이 성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르코폴로의 여행기에서 원나라가 지판구를 평정한 것이 1279년인데 타이완에 있던 일본인이 일본열도 평정은 1281년이다.
왜가 대륙에서 쫓겨나 타이완=대만으로 가서 국호를 일본이라고 하고 본토회복을 준비해 왔는데 원(元)나라로 부터 공격을 받게 되자 많은 왜인(倭人)들이 진출한 것을 왜구침입(倭寇侵入)이라고 보고 있다.
이 왜구는 원명(元明)뿐만 아니라 고리, 한조선도 침입했는데 100척~500척의 대규모 군단으로 침입했다. 이는 해적집단이 아니라 원나라의 평정에 대항하고 당과 원으로부터 본토회복을 위한 전쟁의 한 방편이었다. 그래도 본토회복을 못하니 고리와 조선도 침범했던 것이다.
1223~1265년의 13세기의 왜구는 우리나라를 병참기지로 하고, 수없이 침범했고 1350~1391년 경인년(庚寅年)의 왜구는 40년간 591회나 침입했다. 1392~1555년 조선시대의 왜구는 울릉도(鬱陵島) 도민(島民)을 이주(移住)시키기까지 하는 극심한 피해를 가져다주었다.
그래도 정착하지 못하자 일본열도로 눈을 돌려 일본열도에 간 것으로 보고 있다. 끝내 본토회복을 못하고 개척지 일본열도에 가서 신일본을 건설하고 그곳에서 터전을 잡게 된 것이다.(이상은 吳在成,‘百濟는 中國에 있었다.’.‘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高句麗史’,‘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九犂系, 倭-日本史’. 文定昌,’韓國史の延長-,‘古代日本史’.17~57面參照引用)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 인용(引用)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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