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 중에는 유물유적이 있는데도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5세기이전의 중국 한족(漢族)의 정사(正史)는 숨기고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바른 부분은 부정하고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왜곡하여 말하는 사이비 학자가 많은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우리가 상고시대부터 지구의 땅 71%를 차지하는 유라시아의 주인이었고 배달국시대에 유라시아의 80%를 정벌하고 정복하여 지배해온 역사를 전혀 모르고 있는데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우리역사가 대륙의 역사임에도 왜곡하고 변조한 문헌을 가지고 우리나라역사를 사장(死藏)시키며 반도 안에 가두어 놓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이들이 정상적인 사람인가!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노라면 역사연구를 어떻게 연구했기에 이런가! 생각게 한다.
우리는 대륙에 뿌리를 둔 찬란한 역사를 가진 위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조상들을 두고 있으나 이를 부인하는 패륜아 같은 만행을 계속하는데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이 우리사서를 다 없애고 자기들 역사를 제멋대로 조작하고 왜곡하나 우리역사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들은 많은 우리사서(史書)들을 다 없앴다. 그래서 수양제의 130만의 군병과 그 수송부대를 합치면 300만이 넘는 대부대를 물리친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의 자료도 다 없애버려 장군의 자료를 수서(隨書)에서 따올 정도로 사료가 없으나 엄연히 그 전공(戰功)은 지워지지 않는다.
필자는 이미 우리역사를 깊이 연구 할수록 우리역사가 대륙 아세아의 역사임을 알게 된다. 반도식민사관자들은 우리역사가 한반도내에 있는 양 조작하고 이를 가르치고 있으나 이는 우리역사를 모르는 소치다. 이미 밝혀온 대로 고대 삼국의 수도가 한반도에 없다. 다 대륙에 있다.
또한 왜(倭)도 일본역사로 봐 왔으나 서기전 53~500년간 중국에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히미코(卑彌呼)의 사마대국도 우리역사다. 마한의 72개제후국의 하나였다. 사기에 5번이나 나온다.
식민사관자들은 우리역사가 반도 내에 있는 것 같이 조작하고 왜곡한 역사를 말하나 그들이 조국과 조상에 대한 죄과는 씻을 수 없는 것으로 후대에 가서도 그 죄과는 피할 수 없다. 식민사관자들은 틀린 역사를 바로 보지 못하고 일본이 조작한대로 가르치고 있음은 한심하다.
예컨대 김유신(金庾信)은 반도인이 아니다. 그 조상부터 그리고 그가 전투지역이 모두 대륙에 있고 반도에 없다. 그런데 그들은 김유신도 장보고(張保皐)도 모두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역사로 꾸미고 가르치고 있다. 다 잘못되고 틀렸다. 모두 다 우리대륙역사의 주인공들이다.
오늘은 중국과 일본이 우리자료를 다 없애고 나서 제멋대로 구성한 그들의 역사가 잘못되고 또한 이를 가르치는 국내 식민사관자(植民史觀者)들이 잘못 된 역사사실을 밝히고 자 한다.
삼국사, 권46과 남제서, 권58의 실체 알고가야
식민사관은 역사연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은데서 나온다. 중국과 일본은 왜(倭)를 일본열도로 가져가기 위해서 별 짓을 다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대륙에 있었던 왜를 일본열도로 가져 간 것은 송나라 때다. 이 때 히미코(卑彌呼)의 사마태국(邪馬台國=이도국(伊都國)등 구노국(狗奴國), 왜(倭)도 지금의 일본열도(日本列島)로 가져갔다.
또 지증왕(智證王) 위에 사로신라, 백제, 왜, 가야를 대륙에서 빼어서 없앤다. 그리고 중국의 소동파(蘇東坡)는 670년 이후 일본으로 불리던 대만을 우적도(禹跡圖)에서 아예 빼고 없앤다.
원래 일본열도는 1066년에도 대만에 있었다. 그리고 가락국(駕洛國)역사는 김유신(金庾信)을 반도로 가져오기 위해서 만들었다. 계백장군이 싸웠다는 황산(黃山)은 대륙의 황산(黃山)이다. 반도 황산이 아니다. 대륙의 태산(太山)서쪽 북으로 평원(平原), 남으로 동평(東)平) 사이에 있다.
구지산(龜旨山)을 구자산(九子山)으로 지금은 구화산(九華山)으로 고치고 모든 지명을 고치면서 역사를 왜곡하나 지금도 그 계백장군과 김유신의 전적지(戰迹地)의 지명이 반도에 는 없다. 계백장군과 김유신의 전적지(戰迹地)가 반도에서 찾는 것은 역사무지이다. 중국대륙에 있다.
또한 일본의 거짓역사 예를 보면 서기전219년 진왕(秦王=진시황(秦始皇)은 내륙(內陸)에서 자라 바다를 본적이 없는 그가 산동반도에 와서 지부산(芝罘山)과 랑사산(琅邪山)에 올라 바다를 내다보며 신비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때 선인술(仙人術)을 심득(心得)했다는 서복(徐福)이 불로장수(不老長壽)의 약이 봉래국(蓬萊國) 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진시황(秦始皇)에게 말한다.
봉래국(蓬萊國)은 신(神)이 사는 곳이라 세속(世俗)에 물들지 않은 동남동녀(童男童女)5000명과 배를 주면 반드시 약초를 가지고 오겠다고 했다. 서복(徐福)이 간곳이 일본 구주(九州), 사국(四國)의 각지에 도착했다며 지금도 전설이 남고 있다고 하나 서복이 일본에 간적이 없다.
그런데 일본은 서복의 무덤까지 와가야마겡(和歌山縣) 신구시(新宮市)와 미에겡 (三重縣), 구마노시(熊野市)에 서복(徐福)의 묘(墓)까지 만들어 놓고 매년 제사(祭祀)를 지내며 이를 믿게 하려 하나 서복(徐福)이 간곳은 대만(臺灣) 남쪽의 주산도(朱山島)이다. 웃기는 가소로운 일이다.
이것은 북한에도 단군과 기자무덤을 만들어 놓고 제사하는 것도 다 반도식민사관의 뿌린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우리는 이 식민사관의 뿌린 잘못을 이제 깨끗이 거둬 없애야 한다.
그리고 원서에 근거한 [삼국사(三國史) 권(卷)46)]과 남제서(南齊書) 권(卷)58의 원문에 나타난 우리역사(歷史)의 영역(領域)의 실체를 바로 알아야 반도사관을 없애는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그 원문은 (高句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라 하여 우리 고구리(高句麗), 백제(百濟)가 대륙에 건재했고, 신라(新羅), 가야(伽倻), 왜(倭)의 당시 영역(領域)이 반도가 아닌 대륙에 있었다는 그 실체(實體)를 잘 보여준다. 제대로 알고 말해야 한다. ‘고구리(高句麗) 백제(百濟)가 강성(强盛)한 때, 강한 병력(兵力) 백만(百萬)으로 남으로 오(吳)와 월(越)나라를 없앴고, 북으로는 유(幽), 연(燕), 제(齊), 노(魯)나라를 제거했다. 그 나라들을 지배했던 나라에게 크게 위협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 영역은 지금 중국의 동쪽의 영역이다. 이 [삼국사(三國史 권(卷)46)]와 남제서(南齊書) 권(卷)58의 원문(原文)에 있는 우리나라 고대영역을 한반도로 옮길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역사를 180도 거꾸로 기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역사서 제대로 기록해야 한다
우리 역사는 대륙의 역사이지 반도가 아니다. 지금의 우리역사교과서는 거의가 왜곡되어 있다. 예컨대 최치원(崔致遠)은 신라인이라 하나 아니다. 최치원은 고구리(高句麗)인이다. 당서(唐書)권60 ‘예문지(禮文志)에 나와 있고 우계원필경(又桂苑筆耕), 20권(券)과 461권(券)에도 분명히 고구리인(高句麗人)으로 나와 있다. 제대로 알고 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김유신(金庾信)과 장보고(張保皐);정(鄭)도 그 활동무대가 중국대륙이지 반도가 아니다. 장보고 유적(遺跡)이 산동성에 있고 반도에 없다. 적산원에 그의 동상유적이 있다. 그는 반도에 없었고, 진해장군으로 마지막을 지냈다. 완도는 산동성에도 있다. 중국동부가 청해진이다.
그리고 백제(百濟)의 한수(漢水)는 하수(河水)이며 삼국사(三國史) 권(卷)46지역으로 대륙(大陸)동부(東部)의 광대한 지역에 있다. 그리고 한(漢)나라 수도(首都)로 나오는 강을 다 한수(漢水)라 했다. 하(夏)나라 때는 하수(夏水)로 하였고, 진(晉)나라 때는 진수(晉水), 면수(沔水)로도 불렀다. 이를 하수(河水)로 변화시켰다. 우리는 한강(漢江)을 한수(漢水)로 알고 있다. 아니다.
한편 왜(倭)도 서기전 53~500년간 대륙에 있었고 왜(倭)도 우리는 일본역사로만 보는데 따지고 보면 우리역사다.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군에 항복하고 663년 백제(百濟)와 왜(倭)의 연합군이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 강심(江深)을 몰라 얕은 강바닥에 함대가좌초로 참패당했다.
분명한 사실은 649년 이전의 장안중심(長安中心)의 한족(漢族)의 정사(正史)에서 왜(倭)가 서기전50년~670년까지 양자강 이남에 있었음을 숨길 수 없다. 백제가망한 후 670년, 대만(臺灣)으로 옮겨 광복운동을 전개했으나 여의치 않자 송(宋)나라 때 일본열도로 간 것을 감출 수 없다.
그런데 일본은 712년에 나온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처음부터 끝까지 대륙에 왜(倭)가 있었다고 역사를 숨기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이제는 더 이를 숨길 수 없다. 이미 기술한바 있는 박창범 교수의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2002년 11월 30일 발행)에서 밝힌바 대로 일식관측은 대만에서만 나온다. 이는 일본이 자기나라 역사를 숨기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당(唐) 영호징(令狐澄)이 쓴 신라국기(유연제노오월지역기록)의 50여 지명(地名)을 한반도로 다 옮겼다. 이 지명은 삼국시대 지명으로 한반도에는 없는 지명이다. 또 동황성(東黃城)이 있는 가까운 곳이 평양성이다. 광녕(廣寧)은 연변이다. 이 지명은 삼국시대 것으로 중원에만 있다.
중국25사 동이전과 삼국사기의 공통된 기록도 기자(箕)子)가 살던 중국남쪽의 하남성(河南省) 중심의 동쪽에 고구려, 백제, 가라, 서신라(西新羅), 왜가 있었음을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산물로는 나전칠기의의 생산지 섭라(涉羅);안휘성)를 고구려가504년 이전에 백제에게 빼앗겼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역사는 해모수 천제(解慕漱天帝)시대부터였다고 하고 있다.
한편 신라가 만주까지 통치했다고 청나라에서 편찬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卷)9 서지(西至) 광녕(廣寧)에서 동지(東至) 길림(吉林)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요사(遼史)> 권38에 광녕(廣寧)북쪽의 해주동북 120리에 신라이고 옛 평양성은 해주(海州) 서남쪽에 있다고 하고 있다. 이곳은 현재 돈황성이 존재한다. 이와 같이 우리역사의 영역(領域)은 반도가 아니다.
중국사, 삼국사에서 보는 삼국시대기록 재고(再考)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에서 고구려를 분리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선비(鮮卑), 오환(烏桓), 부여(夫餘), 읍루(挹婁), 고구리高句麗), 동옥저(東沃沮), 예(濊)가 각각 항목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에 병합(倂合)되었다고 기록 하고 있다.
중국25사는 고구려, 백제, 가라, 서신라, 왜(倭)는 서화(西華)남쪽 항성(項城) 동과 무강왕(武)康王)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백제, 서신라(西新羅), 가라(加羅), 왜(倭)는 항성(項城)의 동쪽에 있고, 고구려는 섭라(涉羅;서화(西華)남쪽), 태원(太原)에서 반도까지이며, 칸(干)에서 신라로 이름을 변경시킨 고구려에서 독립하는 또 하나의 신라가 있었다고 하고 있다.
즉, 고구려에서 광복한 신라와 독립한 신라가 각각두개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 차이의 큰 특징이다. 식민사관자(植民史觀者)들은 이것을 은폐하기 위해 대륙에 신라방(新羅坊)을 두었다고 하나 무지가 하늘에 닿아 있다. 이는 사로신라와 서라벌의 신라가 각기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밝혔기에 재론하지 않는다. 한편 중국25사 중에서는 예(濊)와 마한(馬韓)에서 목화(木花)를 사용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위만의 지역과 백제의 본거지를 밝히는 중요한 문명의 흐름일 것이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고구려가 668년 망한 후 고구려 부흥운동을 하는 안승(安勝)에게 670년에 신라가 목화를 보냈다고 하고 있다.
또한 중국25사와 삼국유사의 공통점과 비공통점을 보면 기자가 살던 조선 땅 서화(西華)에서 배달국 제14대 치우환웅(蚩尤桓雄), 고조선의 왕검천제(王儉天帝)로부터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가라, 신라, 왜로 계승되고 있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에는 기자와 위만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왜곡을 유도하는 것으로 본다. 이들 조선은 고조선제후의 하나일 뿐이다.
단군에 관한 기록이 위서(魏書)에서도 같은 내용이 밝혀져 있다. 여기서 우리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도 보면, 서화(西華)의 동쪽에 신라(新羅)가 있다는 것이 공통으로 말하고 있고, 마립간(麻立干)을 동신라(東新羅)에서 사용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비 공통부분은 북부여 통치자를 삼국사기는 천제(天帝)로 기록 하고 있는데, 왕(王)의 신라와 칸(干)에서 왕(王)으로 칭(稱)한 신라가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신라(新羅)의 국호(國號) 사용은 서화동쪽 동신라는 307년이고 칸(干)에서 왕이라 칭한 503년의 동 신라를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특산물을 기록하여 그 생산지에 의한 신라, 백제를 밝힐 수 있게 하였다. [나전칠기(螺鈿漆器)의 섭라(涉羅)와 나금채장(羅錦彩章)], [669년의 자석(磁石)과 672년의 침(針)과 내주사마(箂州司馬)], [쇠뇌(弩)]등이 우리가 만들고 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백제의 서울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가장 정확하게 기록 하고 있다. 즉, 한성(漢城)에는 지명(地名)으로 석문(石門), 대방(帶方), 아차성(阿且城), 사성(蛇城), 숭산(崇山), 하수(河水)가 있고, 하수를 따라 제방(堤防)이 있어야 하고 벽돌의 성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돌로 쌓은 개로왕(蓋鹵王)의 아버지 묘(墓)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반도에 없다. 사기史記)에는 황하(黃河)가 한수(漢水),또는 한강(漢江)이라 하였다. 이는 반도의 한강이 아니다.
그리고 웅진(熊津)에 관한 기록도 삼국사기가 으뜸이나 신구당서(新舊唐書)도 입증한다. 웅진(熊津)은 태산(太山)의 서쪽에 있다. 삼국시기와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웅진(熊津)의 동쪽에 지라성(支羅城), 윤성(尹城), 대산(大山), 사정(沙井)등과 박성(薄城)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가 망한 그 땅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 등 도독부를 두었다. 이곳이 한반도인가! 아니다. 한반도가 아니고 대륙이다. 상고시대부터 우리터전이다.
고구려 서울에 관한 기록도, 삼국사기가 가장 정확하다. 고구려장성의 기록-東北自夫餘城東南至海有里, 지명으로 용도(甬道), 고대인성(古代人城), 은산(銀山), 신성(新城)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중국25사와 삼국유사, 삼국사기에서 공통점은 서화(西華)남쪽 항성(項城)의 동쪽에 고구려, 백제, 서신라, 가라, 왜(倭)가 있다고 하였고 비공통점은 칸(干)에서 왕(王)이라 칭(稱)한 신라(新羅)의 기록과 낙랑국(樂浪國)이 한반도(韓半島)와 만주(滿洲)에 걸쳐서 있었음이다.
여기서 보면 오직 삼국사기(三國史記)만이 우리민족전체의 기록인 것은 서화(西華)동쪽에서 한반도(韓半島)까지 하나의 민족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에 반도식민사관은 있을 수가 없다.
(이상은 .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및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76면~79면 참조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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