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2018년 7월 26일 조선일보 23면 기사를 보며 ‘언제까지 가야 우리나라 역사가 제자리를 바로 찾을 것인지!’라고 생각하니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움에서 기사 내용의 잘못을 지적하게 된다.
내용인즉 ‘풍납토성은 백제왕 31명 중 온조왕에서 개로왕까지 21명이 이 풍납토성에 살았다’고 하며, ‘서울600년사는 백제의 역사를 포함하여 2000년사로 바뀌어야 한다.’는 S대학 L석좌교수의 글을 보며 역사를 어떻게 연구해왔기에 이런 글을 기고하였는지 의문이 가기 때문이다.
백제는 건국도 대륙에서 하였고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까지도 대륙에 있었다. 한반도에 없고 대륙에 있었다.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이들은 ‘반도에 있었다’고 알고 있으나 백제는 처음부터 대륙에 있었고 후에 반도에 진출했음을 모르기에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특히 백제의 위치는 우리 역사를 바르게 조명(照明)하는데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 백제초기(百濟初期) 기원전 5년 이전에는 낙랑군지역(樂浪郡地域)의 서쪽에 있었고 대방(帶方)지역이기도 하다.
서기 32년 이전에는 고구리(고구려의 옛 명칭), 예(濊)의 동쪽에 옥저(沃沮)가 가까운 곳에 낙랑국(樂浪國)이 각각 다르게 있었다. 현재의 한강(漢江)은 한강이라고 확인할 수 없음에 비하여 백제지명(百濟地名)이 많이 있는 황하(黃河)는 한수(漢水), 한강(漢江), 하수(河水)로 불렀다.
백제의 웅진(熊津)은 태산의 서쪽에 있고, 한성(漢城)은 하북성(河北省)에 있었다. 우리는 웅진을 충청도 공주지역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다 역사왜곡(歷史歪曲)에 기인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백제는 한반도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의자왕이 건재했을 때 그 전쟁터의 명칭을 볼 수 있으며, 다 대륙에서 증명이 된다. 의자왕 2년의 하미후(下獼猴), 대야성(大耶城), 의자왕 3년의 항성(項城);唐項城-黨項城-常項城) 등 17년간 44개 전투지역의 지명이 중국에 있다.
이에 반하여 반도에는 황산(黃山)이 있을 뿐이고 공주(公州)의 백마강(白馬江)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백제가 망하기 전 의자왕(義慈王)의 지명이 부지기수로 중국에 수없이 많이 있다.
중국의 지명을 보면 하북성(河北省)에 평원(平原), 산동성(山東省)에 황산(黃山)․동명(東明), 태산(太山), 박산(博山;박성(博城)), 백마하(白馬河;백강(白江),백마(白馬)), 치청래(淄靑萊)가 있다.
강소성(江蘇省)에 해(海)가 있고, 하남성(河南省)에 항성(項城), 안휘성(安徽省)에 독산(獨山), 동성(桐城), 잠산(岑山), 강서성(江西省)에 덕안(德安)이 있는데 이 지명들은 대륙지명이지 반도지명이 아니다. 도대체 백제가 반도에 없었는데 중국인들은 백제의 지명이 좋아서 옮겼겠는가!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사람들은 백제가 반도에 있었다는데 백제는 대륙에서 건국하고 대륙에서 패망한 것임을 지면이 허락하는 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왜곡역사 못 잡아주는 기관과 연구자, 책임 느껴야
식민사관에 젖어있는 사가(詐家)들은 여전히 우리나라의 상고, 고대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우리가 한반도 내에서 국가가 형성되어 간 것같이 말하고 있으나 아니다. 이들은 우리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중국, 일본이 조작하고 왜곡한 것만을 앵무새같이 반복하는 것이 문제다.
이미 고구리(고구려의 옛 명칭), 백제, 신라, 가야. 왜가 대륙에 있음을 밝혔고 그 흥망성쇠가 국내의 내분(內紛)과 부패, 위기에 대처하지 못한 것에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이 당시 가장 미약했던 신라가 당(唐)을 등에 업고 백제, 고구리를 멸망시킨 것은 우리의 천추의 한(恨)이 되고 있다.
우리는 신라의 김춘추를 영웅으로 보나 당(唐)과 같이 같은 민족인 백제, 고구리(高句麗)를 멸망시켜 많은 백제인과 고구리 유민이 양자강 이남의 왜(倭)로 가서 대륙에서 부흥운동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668년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백강전투에서만 이겼어도 우리는 대륙에서 번영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우리의 역사를 잘못 가르치고 반도 안에 역사를 맞추려는 반도식민사관자들로 인해 백제 위례성이 풍납토성이라고 하니, 한심함을 금할 수 없다. 도대체 백제가 반도에서 건국했다는 그 자체가 어떻게 연구했기로서니 풍납토성인가? 이 풍납토성은 성(城)도 아니다.
고대성(城)은 거의가 돌로 쌓았다. 설령 토성으로 쌓은 백제의 성이고 유물이 많이 나왔다고 이곳을 백제의 도읍지로 보는 것은 백제의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너무 안이하게 백제의 건국 역사를 풍납토성으로 보고 있는 것은 백제 역사를 모르는 소치이다.
백제(百濟)는 처음부터 반도(半島)에 세워지지 않았다. 더구나 풍납토성이 위례성도 아닌 것은 고구리(高句麗)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소서노가 주몽(朱蒙)의 장자 유리(琉璃)를 태자(太子)로 책봉하자 이에 실망하여 남으로 간 곳은 한반도가 아니고 대륙이었다. 이후에 반도에 진출한 것이다.
초기 백제는 한반도에 터전을 잡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위례성은 군사가 3000명이 둘러쌀 수 있는 곳이 위례성’이라고 했다. 천명 미만의 군사가 둘러쌀 수 있는 이곳을 백제의 수도라하니 말이 되지 않으며 이곳이 위례성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선 당시 온조가 백제를 세우니 말갈족이 쳐들어 왔다. 위례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패퇴하고 간 역사를 모르고 있다. 이는 온조왕편(溫祚王編)에 나와 있는 사실이다.
조선일보 7월 26일 23면에 게재된, ‘토기를 보고’...‘백제(百濟)왕성(王城)이었다’고 하는 기사는 위례성을 둘러 싼 역사를 모르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것을 바로 잡아야 할 학자로 평생 학생을 가르쳐 온 분이 백제가 반도 안에 건국했다는 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우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연구소와 동북아재단은 무엇을 하고 있는 기관인지! 역사를 제대로 잡아주지 못하고 이런 기사와 영화(映畵)를 광복 70여년이 넘고 있는 오늘날 까지도 방치하는 것은 수치(羞恥)임을 왜 모르는 것인지!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묻고 싶어진다.
모든 기사(記事)와 화면에 나온 사극의 내용들을 봐도, 반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차분히 우리 역사를 제대로 연구해보라! 우리 역사가 대륙의 역사이지! 반도(半島)의 역사가 아니지 않은가!
너무나 부끄럽다. 자기나라 역사도 제대로 모르게 국민을 방치하는 것은 국사편찬위원회나, 한국학연구소,와 동북재단이 제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음이다. 역사를 바로 잡아줄 기관이 제 기능을 못한다면 문을 닫고 새 출발하는 것이 낳다. 제대로 된 연구가 없음에서다.
한반도에 맞추려는 역사왜곡 끝내야 한다
필자는 최태영 선생님이 타계하신 후 김주현 선생님의 권유로 최태영 선생의 뒤를 이어 역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우리 역사가 뒤엎어진 것을 알고 너무나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은 역사를 연구할수록 우리 역사가 반도(半島)의 역사가 아니고 대륙(大陸)의 역사이며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역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아시아의 역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역사가 왜 이리 망가졌는가! 원인이 무엇인지를 추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의 역사 왜곡이 일본고사기(古事記)를 30년간 엮고 일본서기(日本書紀)를 8년간 엮은 후 반도에 맞추는 왜곡 역사임을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1403년 명(明)나라가 한국 왜인전(倭人傳)을 일본에 줘버린 데서 명치유신 이후 한국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일본의 의도대로 역사를 제멋대로 왜곡하게 된 배경도 알게 되었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오늘의 일이 아니라 고대, 특히 당(唐)나라 때부터 그 후 명(明), 송(宋), 청(淸)나라로 이어지면서 중국과 한속이 되어서 역사를 왜곡하여 왔지만 특히 일제강점기에 우리 역사의 뼈대를 만들며 반도 안에 정착시키려 한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학자들 대다수가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은 데 문제가 더 크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우리나라 역사의 대가(大家)라고 하는 저명한 역사학자(歷史學者)라는 분들까지도 아직도 반도식민사관(半島植民史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도사관에 절여 있는데 놀라움도 알게 되었다.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도 살펴봤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중국과 일본의 왜곡도 문제려니와 삼국유사를 쓴 김일연(金一然)과 고대사를 쓴 신채호(申采浩) 선생에 의해서 잘못되고 있음도 알게 되면서 큰 충격에 빠졌다.
신채호 선생은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고 그 공헌 또한 크다 하겠으나, 문제는 우리역사를 반도 안에 가둬 후학들이 이에 따르게 한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가 반도 역사인가! 반도 역사가 아니며 환국에서 배달국에 이어 내려오는 역사는 5천년도 아니기 때문이다.
1만년이 넘는 우리 역사와 역사의 주인공이 대륙에 있는데도 반도 안에서 가둬서 다루는 오늘의 사학계 현실은 실망 그 자체라 하겠다. 따라서 위대한 우리 역사의 기록을 그르치게 가르치고 있는 반도식민사관자들의 행태는 정상이 아니기에 외국학자들에게 힐난(詰難)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개인의 이기심과 영달을 위해 우리 역사를 그르치고 있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는 일로 최영희 선생도 생전에 ‘민족사관에 의한 역사의 정립(鼎立)이 요구되고 있다’고 한 말을 잊지 못한다.
우리 역사를 한반도에 맞추려는 그 중심에 신채호(1880~1936) 선생이 있다는 것은 선생은 ‘무조건 사서를 고쳐서라도 반도에 맞추려는 것’이 ‘신채호(申采浩)방식’이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자가 반도식민사관자들이다. 지금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모두 이 방식에 따르고 있어 반도식민사관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실에 경악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신채호(申采浩)방식’이 식민사관에 주류가 되어서 우리 역사를 망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역사를 연구해보면 대륙의 역사라는 것은 세계석학들도 입증하고 있는 오늘이다.
한편 이 반도식민사관은 중국과 일본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변조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어서 우리 역사를 반도로 옮기기 위해 지도(地圖)며 지명(地名)까지도 수차례 고치고 교재(敎材)도 고쳐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엄연한 우리 역사를 반도로 옮길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중국과 일본이 고대부터 우리의 사서들을 다 불태우고 없애고 가져갔으나 남은 사서에서도 우리나라 역사가 반도 역사가 아니고 대륙 역사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백제를 반도 역사라 하지마라, 대륙의 대제국이었다
백제는 기원전 18년~서기 660년까지 존속한 것인데 맥제(濟)로도 불러야 전통 계승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현재까지 백제(百濟)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에서 ‘(以來時百姓樂從改號百濟)’라 하여 국호(國號)를 백제(百濟)라고 발음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 시작이라 보고 있다.
그러나 백(百)의 발음이 ‘백’과 함께 ‘맥’으로도 발음되고 있음으로 백제(百濟)의 발음에는 ‘백재’와 함께 ‘맥제’도 있을 수 있다. 백(百)을 ‘백’으로 발음 할 때는 ‘일백 백’하여 단순히 숫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맥‘이라고 할 때는 ’힘쓸 맥‘’길잡이 맥‘으로 전통 계승과 연계성이 있다. 즉 조선을 예맥(濊貊)으로, 고구리(高句麗)를 맥이(貊耳)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백(百)의 ’맥‘발음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백제(百濟)는 고구리(高句麗)에서 출발한 조선의 후예(後裔)로 ’맥제(貊濟)‘라고 발음해도 무방하다 하겠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이래시백성낙종개호백제(以來時百姓樂從改號百濟)’나, [북사(北史)]의 ‘백가제인호백제(百家齊因號百濟)’라고 하여 백제(百濟)라 하는데 이때 발음이 ‘백제’였는지 ‘맥제’였는지 분명히 밝힐 수 있는 자료가 없고 ‘맥가제인호백제(貊家齊因號百濟)’로 풀이 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고구려 백제가 유, 연, 제, 노, 오, 월(幽, 然, 齊, 魯 吳,越)을 통치(統治)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예(濊) 땅과 제(齊) 땅의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 ‘맥제(貊濟)’라는 발음인 것이다.
또한 [삼국지(三國志)]에 백제(伯濟) 임으로 ‘백’으로 불렀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위서(魏書)]에 비로소 백제(百濟)가 항목(項目)으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백제는 고구려의 일파(一派)이다.
광개토대왕비에는 백제를 ‘백잔(百殘)’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백제는 고구리에서 분리되었고, 고구리(高句麗)는 구리(九黎)와 조선(朝鮮)을 이어 간다는 뜻에서 국호를 제정한 것으로 본다.
[삼국사기]상으로도 그 지명이 대륙에 고구리, 가라(加羅), 왜(倭)와의 관계지명(關係地名)이 대륙에 있고 반도에 없었다. 특히 특산물, 조공소요일정, 일식, 홍수, 인구 등으로 분석한 결과 고구리(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야(伽倻)와 왜(倭)가 대륙에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특히 백제의 위치는 우리 역사를 바르게 조명하는데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데 기원전 5년 이전에는 낙랑군 지역의 서쪽에 서안평(西安平)과 석문(石門) 사이에 있는 대방(帶方) 지역에 있었다.
백제는 본래 고구리와 함께 모두 요동 동쪽 천 여리 되는 곳에 있었다. 그 뒤 고구리는 요(遼)의 동쪽을 정벌해서 소유했고 백제는 요의 서쪽을 정벌해서 소유했는데 진평군 진평현 이었다.
이 백제는 대륙의 유․연․제․노․오․월(幽․然․齊․魯․吳․越)지역에서 건국하고 패망하였다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반도사관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이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백제는 이 지역에서 건국하고 패망했으나 우리 역사이다.
백제는 유․연․제․노․오․월(幽․然․齊․魯․吳․越)지역을 정벌하고 지배할 만큼 고구리와 좌웅을 다투는 강국이고 대제국이었다. 이는 [삼국사기] 권(卷) 46에서 뿐 아니라 중국의 [남제서(南齊書)] 권(卷) 58에서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남제서]의 백제기록과 의자왕 때 백제 지명이 요(遼) 동쪽에 지금도 존재한다. 즉 반도에 삼국시대 지명이 존재하지 않으나 요(遼)의 동쪽에는 지금도 많다.
우리나라 국사에서는 백제가 한강 유역에서 건국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제왕운기(帝王韻紀)] 이후 불변의 법칙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중국의 [삼국지]와 [후한서] ‘동이열전’의 한(韓=삼한)은 이 땅에서 건국될 수도 없으며 바로 백제 수도 한성이 갖추어야할 조건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에 관하여 더 자세하게 백제가 대륙에 있었음과 의자왕이 당(唐)나라에 망한 곳이 반도가 아니고 대륙이고 백제 후기에 반도에 백제가 있었음과 백제와 고구려의 잃은 땅도 신라와 발해가 나눠 가지고 한성(漢城)도 대륙에 있었음을 다음에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려 한다.
(다음에 계속)
(이상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윤진영, 編集 ‘三國史.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文定昌, ’韓國史の延長-,‘古代日本史’.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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