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식민사관 일고의 가치없는 허구역사 버려야

입력 2018-08-11 13:5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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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는 상고사와 고대사의 개념 정립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방치 상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를 잘못 가르치고 있는 모순이 낳은 결과로 우리 역사가 대륙의 역사임에도 잘못을 판단할 능력조차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역사를 연구하며 놀라운 것은 극소수의 사학자를 제외하곤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바로 세우지 못하는 이유가 이 연구를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지금 우리 역사를 잘못 가르치고 있는 잘못을 판단할 능력조차 없게 된 상태이다.
 
그것은 아직도 상고사와 고조선의 개념도 정리가 안 되고, 단군조선의 그림도 잘못 그리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살펴보면 조선500년 간 원서(原書)를 연구하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소홀이 했고, 일제강점기가 지난 후에도 왜곡 역사에만 매달려 왔다는 것이다.
 
백제는 마한의 땅에 세워진 국가이다.(梁書, 北史, 南史) 그런데 이 마한의  땅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반도에 있는 양 가르치고 있는 현실은 차마 볼 수 없는 비극이다. 이미 본 대로 백제와 고구려는 대륙에 있었고 패망한 후, 그 땅은 신라‧발해‧말갈이 차지한 것도 이미 다 밝혔다.
 
그리고 삼국지(三國志)30-(37), 후한서(後漢書)85-⑨⑩에는 마한(馬韓)에서 목화를 사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반도 역사에는 고려 때인 1367년 2월에 문익점(文益漸)에 의해서 씨앗이 들어오게 되었고 다니 반도에는 마한도 백제도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도 연구들은 뒷전이다.
 
더욱이 우리 역사를 알 수 있는 우리 역사서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서화(西華 )동쪽의 서신라(西新羅)(기원전 57~서기 896?)가 있었고 반만(半滿-반도와 만주)에 동신라(東新羅)(서기 503~서기 936)가 분명히 있었음에도 이를 모르는 것은 역사연구를 하지 않은 것으로 역사의 무지를 말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도 연구는 않고 왜곡만 하고 있는데 분명히 고구려, 백제가 유연제노오월(幽然齊魯吳越)지역을 정벌, 지배한 것을 왜곡만 하지 말고 바로 밝혀야 함에도 그전 그대로다. 분명한 사실은 서화(西華)에서 반도까지 하나의 동이(東夷)이였음을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도 입증하여 밝히고 있음에도 우리 역사를 그대로 뭉개는 역적 행위는 이제 그만둬야 한다.
 
기자(箕子)가 살던 대륙 하남성(河南省)의 서화(西華)가 조선의 서쪽 경계(境界)가 되고 서신라(西新羅)를 바로 인정할 때만이 동이(東夷)의 역사가 바르게 됨을 모르는 반도 식민사를 따르는 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언제까지 사가(詐家)의 너울을 쓰려고 하는 것인지 동정이 간다.
 
오늘은 대륙 서신라(西新羅)와 서라벌의 동신라(東新羅)와 조선낙랑국(朝鮮樂浪國)과 한낙랑군(漢樂浪郡)이 다름에도 이를 구분 못하고 삼국유사를 혼돈하고 있는 것에 대해 살펴보고자한다. 
 
낙랑국(樂浪國)과 낙랑군(樂浪郡)의 혼동은 역사 무지다
 
우리는 같은 이름이 등장하면 하나로 보는 성향 때문에 우리 민족사를 바르게 정립(鼎立) 못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낙랑(樂浪)이다. 왕의 낙랑국(樂浪國)과 태수(太守)의 낙랑군(樂浪郡)을 구별하지 않으려 한다. 옥저의 낙랑국과 대방(帶方)의 낙랑군을 구별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낙랑군은 하북성(河北省) 서부에 있었고 낙랑국은 반도와 만주에 있었음에도 구별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태수(太守)의 낙랑은 기우원전 108년부터 한(漢)에 의하여 쓰여 지고 위(魏)와 동이가 두루 사용하였다. 사기에서 당서까지의 기록과 동이의 삼국사기에 공통적으로 기록돼 있다.
 
왕(王)의 낙랑은 한족의 기록에는 없고, 오직 우리 기록에만 있다. 기원전 196년의 최숭(崔崇)과 서기 32년의 최리(崔理)가 있을 뿐이다. 기원전 196년은 고리(高黎)의 해모스, 마한 강탈 후의 위만, 변한의 마한 강탈 후분(後分)의 기준(箕準), 낙랑국의 최숭(崔崇)등으로 4분되어 있었다.
 
이 낙랑국은 한의 낙랑군을 설치하기 90년 이전에 이미 조선민의 국호(國號)로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왕은 국가의 통치자(統治者)인 것이다. 이 낙랑국은 위치에서도 분명히 다르다.
 
이외에 예(濊)의 서쪽에 있었던 낙랑군이 있는데 (後漢書) 85). 이 낙랑군(樂浪郡)은 석문(石門), 대방(帶方), 청하(淸河), 수성(遂城)이 있어야 군(郡)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옥저(沃沮)와 같이 있었던 해주(海州)의 주위에 있었던 낙랑국(樂浪國)은 낙랑군(樂浪郡)과 다르다.
 
낙랑국(樂浪國)과 낙랑군(樂浪郡)은 분명히 다른데 이것은 김일연(金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대륙에 있는 낙랑군(樂浪郡)과 반도(半島) 남만(南滿洲)에 낙랑국(樂浪國)이 있었음을 모르고 혼돈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이 대륙에 있었고, 한반도(韓半島)는 없었다. 한반도에는 반만(半滿-반도와 만주(滿洲)의 낙랑국(樂浪國)이 서기 503년까지 있었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낙랑국(樂浪國)이 망하게 된 것으로 유명한 이야기가 고구려(高句麗)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사랑에 관한 것이다. 서기 32년 4월 고구려왕자(高句麗王子) 호동(好童)이 옥저지방(沃沮地方)을 구경 다니던 차에 낙랑왕 최리(崔理)가 마침 순행(巡行)하다가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사람이 아니오”하고 함께 돌아와 사위를 삼았다.
 
그런데 고구려(高句麗) 왕은 호동에게 자명고각(自鳴鼓角)을 부셔야 낙랑공주를 맞이하겠다고 하니 공주는 자명고각(自鳴鼓角)을 부셨는데 이로 인하여 고구려군의 침입을 모르게 되어 낙랑왕 최리(崔理)는 딸을 죽이고 고구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왕의 기록은 정사(正史)에 이곳 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낙랑왕 최리(崔理)의 영역이 옥저(沃沮)까지 통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한(漢)이 세웠다는 낙랑군(樂浪郡)은 기원전 108년부터 예(濊);滄海之郡)의 서쪽에 있었는데 서기 300년에 낙랑대방(樂浪帶方)이 서신라(西新羅)에 항복했다. 조선의 낙랑국(朝鮮樂浪國)은 기원전 196년부터 옥저(沃沮;해주(海州)-고구려 동쪽)에 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낙랑왕 최리(崔理)가 옥저를 순행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옥저는 낙랑왕국의 땅이어야 한다. 이 최리(崔理)의 낙랑국(樂浪國)은 서기 32년 4월에 고구려에 병합(倂合)되었다.
 
최리(崔理)의 반만(半滿-반도와 만주)의 낙랑국(樂浪國)과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사이에는 고구려와 옥저(沃沮)가 있었다. 이 후 낙랑군(樂浪郡)이 서신라(西新羅)에 병합되고, 낙랑국(樂浪國)은 503년 이후는 동신라(東新羅)의 땅이 되었는데 이 사실을 모르는 데서 혼돈하고 있다.
 
동서신라(東西新羅)와 우리의 역사 바로 알아야
 
우리나라는 우리가 연구해서 역사를 정립한 것이 다 사라지고, 고대사의 개념 정리도 못하고 상고사 이후 그림도 제대로 못 그리고 있다. 그러나 남은 사료로도 우리가 대륙의 역사임을 밝힐 수 있다. 그것은 상고시대 이후 위대한 조상의 살던 곳을 찾으면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가 대륙의 역사임을 알려고 하면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전쟁의 신(神)이라고 일컬어지는 치우천황(蚩尤天黃), 즉 배달국(倍達國)의 제14대 자오지천황(慈烏支天黃)이 살던 대륙 동해안의 기름진 땅이 바로 우리 고구려․백제․신라․가야가 있었던 곳임을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상고시대부터 대륙에 선주(先住)해서 대륙을 지배한 대륙의 역사이지, 반도의 역사가 아님은 이미 밝혔다. 지구 육지 면적의 71%가 유라시아다. 배달국(倍達國)은 유라시아의 80%가 우리의 광역이었음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를 뒤엎으려 해도 엎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는 원서(原書)를 깊이 살펴보면 사서(史書)에 우리 역사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기록은 중국 18사(史) 동이전(東夷傳)에서도 찾지 못하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동북아시아(東北亞細亞) 기록임에도 반도(半島)만의 기록으로 왜곡(歪曲)한 과오(過誤)는 지울 수 없다.
 
무지(無知)한 사가(史家)는 이 삼국유사를 위대한 반도만의 기록으로 부각시키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소설로 전락하고 말았을 정도의 가치밖에 없음을 깨닫지 못하고 삼국사기를 부정하고 삼국유사를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실체를 바로 알아야 한다. 
 
필자 역시 한 때 이런 길에 섰었다. 그런데 우리역사연구원에서 고대사를 같이 연구하면서 우리나라 삼국사(三國史)권 46과 중국 남제서(南齊書)권 58에는 우리가 대륙의 주인으로 유연제노오월(幽然齊魯吳越)을 정벌, 정복하고 지배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새 출발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깊이 연구하지 않고 왜곡한 사람들로 인하여 우리 역사는 잘못 전하여진 결과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은데서 빚어지는 현상이다. 따라서 아직도 우리가 반도 역사라는 것은 역사의 무지에서 나온 것임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이미 신라(新羅)도 두 개가 있음을 밝혀서 조심스러우나 우리는 김유신(金庾信) 시대(595~673)의 역사를 봐도 대륙에 삼국은 물론 가야(伽倻)와 왜(倭)도 양자강 이남에 있었음은 자타가 다 인정하고 다 아는 사실인데 유독 식민사관의 사가(史家)도 아닌 사가(詐家)들이 문제이다.
 
오늘의 세계는 인공지능이 발달로 역사도 과학적으로 추구해 나가지 않으면 아니 되는 세상이다. 언제까지 구닥다리 사관으로 선량한 국민을 우롱하려드는가! 필자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역사서가 아니라 3류 소설로 비유하는 것은 일본의 천체 기록과 자연현상 등이 없음에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모든 기록이 다 틀려 있다. 엄연히 사서(史書)들도 일본이 왜(倭)시대부터 양자강 이남에 있었음에도 이를 숨기고 670년 일본 국호를 쓰기 시작한 것이 대만 시대부터인데, 이런 내용의 대륙 역사를 철저히 숨기려고 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진시황 때 서복(徐福)이 불로초를 구하러 간곳이 오늘의 일본 열도가 아닌 대륙의 주산열도(舟山列島)가 아니던가! 거제도의 1.4배 되는 이 섬에 간 것을 마치 일본 열도에 간 양 꾸미는 것도 모자라 서복의 사당을 짓고 제사까지 하는 것은 선진국인 일본 같지가 않기에서다.
 
역사는 진실만이 역사 가치가 있다. 제 아무리 중국과 일본, 반도 식민사관자들이 역사를 왜곡하나, 중국 25사가 존재하는 한 5세기 이전의 동이국가를 한반도나 일본 열도로 옮기려 해도 사서(史書)에 의한 동이국가의 위치는 변경될 수 없다. 거짓 역사는 언제나 밝혀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한사군(漢四郡)을 한반도 설치했다는 건 코미디, 어디에도 없다
 
우리나라 역사 교재는 한사군(漢四郡)이 한반도에 진출한 것으로 가르쳐 왔다. 그러나 한무제(武帝)가 요(遼)의 동쪽을 넘어오지 못했다. 넘어오지도 못하는 곳에 한사군(漢四郡)을 두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것으로 이도 모두 식민사관자가 왜곡 역사만을 따르는 식민근성이다. 
 
한무제가 우리 민족을 정복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는 중국사의 위조(僞造)를 그대로 번역하여 한무제(漢武帝)가 우리 민족을 지배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무제(漢武帝)가 우리 민족을 정복하고 지배(支配)한 일이 없다. 한반도에 온 적도 없다. 
 
그런데 한무제(漢武帝)가 우리 민족을 정복하고 지배한 일이 없음은 중국 역사에 명기(明記)되어 있다. 삼국지(三國志)에 (漢武帝伐滅朝鮮 分其他 爲四郡 自是之後 胡漢稍別) 이라 하였다. 즉 한무제가 위만 조선을 정복하여 사군(四郡)을 설치하니 한민족(韓民族)과 한민족(漢民族)이 분리되었다고 한 것이다. (三國志 第三十 東夷傳).
 
중국 민족은 사군(四郡)에 예속(隸屬)되어 한무제(漢武帝)의 지배를 받고 위만조선에 거류(居留)하던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한무제(漢武帝)의 지배를 받는 중국 민족(中國民族)과 분리되어 한무제(漢武帝)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였다고 한 것이다. 한무제(漢武帝)가 우리 민족을 정복치 못한 것이 판명되었다.  
 
이에 관해 그 내용을 보면 기원전 108년(元封三年)에 조선(朝鮮), 우거(右渠) 지역을 멸하고, 나누어 낙랑(樂浪), 현토(玄菟), 진번(眞番), 임둔(臨屯)의 군(郡)을 두었다 했다.(後漢書 85 參照).
 
그런데 사기(史記) 115에 조선 우거(右渠)와의 패전으로 인한 책임을 물어 좌장군 순채는 기시(棄市)의 형으로 처하고 누선(樓船)장군 양복(楊僕)을 서인(庶人)으로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漢書95, 漢書90), 이것은 한무제(漢武帝)가 우거(右渠)에게도 패전함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패전(敗戰)하고서도 어떻게 정벌하였는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전쟁으로 인하여 조선(朝鮮) 우거右渠)조정이 내분이 일어나서 반란에 의하여 우거(右渠)가 패망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거(右渠)지역만 문제가 발생한 것이지 다른 조선지역은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이다. 우거(右渠)가 있을 당시 조선족은 크게 4분(分)되어 있었다.
 
진장성(秦長城);임북(臨北)에서 음산(陰山까지)의 북쪽에 해모수의 고리(高黎);부여(夫餘)가 건국되어 있었고(서기전 239~), 반도와 만주에는 최숭(崔崇)의 낙랑국(樂浪國);(서기전 196~서기32년)이 있었으며 회수(淮水) 이남은 변한(弁韓)이 있었다.
 
그런데 창해(滄海)가 있는 하북성(河北省)유역에서 우거(右渠)를 배반하는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이 혼란이 있을 때 한사군을 두었다고 했다. 후한서 85에서 예(濊)의 서쪽에 낙랑(樂浪)이 있다고 했는데 예(濊)가 창해(滄海) 중심에 있었으니 그 서쪽에 낙랑(樂浪)이 있는 것이다.
 
낙랑군(樂浪郡)에 조선(朝鮮) 수성(遂城), 대방(帶方)등이 있다고 했는데 수성(遂城)이 탁(涿)의 서남쪽 용성(容城) 서쪽에 있다. 대방(帶方)은 석문(石門)에 접하여 있다고 했는데, 석문역시 탁(涿)의 서남쪽에 있다. 여하 간에 한사군은 반도에 없었다. 이는 3류 소설이다. 
 
현토군(玄菟土郡)은 고구려현 서개마(西蓋馬), 요산요수(遼山遼水)가 흐르는 고구려현과 서안평(西安平)으로 해서 바다로 가는 물이 있다고 했다. 석문(石門)의 남쪽에 요산(堯山)이 있고 석문(石門), 요산(堯山)지역이 서안평(西安平)지역이니 이 지역이 현토군(菟土郡)으로 볼 수 있다. 
 
임둔군(臨屯郡)에 대한 기록은 정확한 연혁이 없고 정확한 위치에 대한 설명도 없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하고 수상한 일이다. 그러나 대륙 조선의 경계 지역임이 틀림없다. 한나라가 직할 군(郡)을 장안에서 7천리나 되는 반도를 직접 통치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銘心)할 것은 중국과 일본사가(史家)들의 무리한 조작(造作)을 그대로 번역(飜譯)하는 것은 우리 민족을 말살(抹殺)하는 대 오류(大 誤謬)임을 간파(看破)하여야 한다. 허구(虛構)의 조작을 제멋대로 하는 이들의 속성을 알면서도 그에 추종은 노예일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한무제(漢武帝)가 조선(朝鮮)을 멸(滅)하고 한사군(漢四郡)을 한반도(韓半島)에 두었다는 것도 모두 조작(造作)되고 왜곡(歪曲)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가 대륙 역사임을 실증적으로 의자왕, 김유신 등 역사인물을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다음에 계속)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李民民樹,'朝鮮傳‘.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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