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대륙 역사는 어느 누구도 허물 수 없다

입력 2018-08-18 11: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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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는 우리의 역사가 뒤집어진 것을 모르고 있다. 국회의원에게 질의를 하며 우리 역사가 5천년 역사라고 하는데 이는 역사무지(歷史無知)의 소치다. 고려 이후 조선조 때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배우고 익혔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우리 역사는 1만년이 넘는 역사이다.
 
우리 역사가 1만년이 넘는다는 것은 외국인들도 아는 사실이며, 이를 가장 잘 알아야 할 우리가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수치임을 통감해야 한다. 동남아 스리랑카에서도 코리아의 역사는 1만년이 넘는 역사라 하며 학교와 사찰에서도 우리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전한 바 있다.
 
우리 역사는 단군 이전에 배달국(倍達國)과 환국(桓國)이 상고시대(上古時代)에 있었음을 제대로 알고 말을 해야 한다. 중국과 일본이 우리 사서들을 다 없앴으나 우리 역사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라시아를 지배한 우리 족속의 역사를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상고시대인 환국시대부터 배달국시대 고대시대도 대륙의 주인이었지 반도가 아니다. 우리는 상고시대의 환국, 배달국, 고조선 등 옛 동이(東夷)와 예맥,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倭 )등의 동이가 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터전을 잡고 대륙을 누빈 것을 숨길 수는 없다.
 
고조선 이전에는 구리(九黎)라고 국호를 부르기도 했는데 한족(漢族)들은 이를 동이(東夷)의 국명(國名)이라고 하였다.(史記 40). 이 구리(九黎)의 배달(倍達國), 제14대 자오지천황(慈烏支天黃)이 청동(靑銅)투구와 갑옷을 입고 천하를 호령하던 치우천자능(蚩尤天子陵)도 대륙에 있지 여기 없다.
 
치우천자(蚩尤天子)께서 잠들고 계신 곳이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山東省 東平郡 壽長縣)이고 황후인 견비(肩髀)의 묘(墓)는 산양군 거야현(山陽郡 鉅野縣)에 있다고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이 반도인가! 우리의 조상들은 상고시대부터 반도가 아닌 대륙이 본거지다.
 
치우천자(蚩尤天子)가 김유신의 선대조인 화하족(華夏族)의 왕 헌원(軒轅)과 73회의 전투를 한 곳도 대륙이었다. 우리나라 상고, 고대의 주인공의 활동무대가 대륙이었지 반도가 아니다. 그리고 5천년 역사도 아니다. 1만년이 넘는 역사이지 5천년역사라면 치우천황(蚩尤天黃)은 어느 나라 천황인가!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몰라 조상을 욕보이는 짓이다.
 
이번에 다루려는 치우천자의 시대나 의자왕(義慈王)시대의 백제영역(百濟領域)과 김유신 등 우리 역사 주인공들의 활동 무대 역시 대륙으로 배달국치우천자(蚩尤天子)시대 영역과 동일한 지역이다. 때문에 우리 역사를 반도에 맞추려는 것은 우리 민족에 크나큰 죄악임을 알아야 한다.
 
중국 사서는 양자강 북쪽~장성 근처까지 백제로 기록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한다는 반도식민사관의 사람들은 백제 역사자체를 경기, 충청 전라도지역에 맞추려하나 이는 제 정신이 아니다. 오늘 말하려는 백제 역사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역사의 원전(原典)도 제대로 연구해야 한다. 수박겉핥기식 연구는 아니 된다.
 
우리나라 역사서라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들고 있으나 그 밖의 몇 권 되지 않은 사서도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중국의 사서들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역사가 반도역사라고 하는 것은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삼국사기’와 중국 ’남제서(南齊書)’에도 분명히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라(가야)가 중원(中原) 땅을 정벌하고 지배하여 통치했다고 하였는데도 이마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삼국을 나타내는 기록으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유일한 사서(史書)로 ‘삼국사기’를 부정(否定)하면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료였다. 필자 역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단군(檀君)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여 부정(否定)하였던 적이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1145년 편찬되었으나 백제가 패망한지 485년만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발간된 지 700년 간 휴면(休眠)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무시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삼국사(三國史)'권 46의 기록인 백제가 유연제노오월(幽然齊魯吳越)을 통치한 사실은 숨길 수 없다.
 
더욱이 중국의 사서인 '남제서(南齊書)'권(卷) 58에 기록된 백제가 유연제노오월(幽然齊魯吳越)을 평정하고 통치한 기록은 양(梁)나라 시대 소자연(蕭子顯;489~537)이 기록한 것으로 백제가 패망하기 140년 전의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거기에는 백제(百濟)가 위(魏)나라와 전투를 한 이야기와 태수(太守) 임명에 관한 기록이 있다. 우리가 삼국사(三國史)에서 말한 '남으로 오월(吳越)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노(幽然齊魯)'의 범위를 능가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지명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광양태수, 조선태수, 청하태수, 광릉태수 등 다양한 직책을 기록하여 그 범위를 분명히 하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도 위(魏)와의 전쟁이 짤막하게 기록돼 있다. 동성왕 10년 위(魏)나라가 백제를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魏遺兵百濟擊 魏百濟所敗)했다. 영명왕(英明王) 6년 12월에도 침입했으나 이기지 못함으로 그들은 구체적으로 기록을 피했다.
 
그런데 '남제서(南齊書)'에는 백제(百濟)의 여러 태수(太守) 임명(任命)이 구체적이다. 백제가 존재했을 때의 기록으로 이보다 명확한 기록이 없을 것이다. 과연 이 당시 백제(百濟)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에 있었는가? 이때는 대륙에서 대국으로 천하를 호령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백제의 수도(百濟)의 (首都)에 대한 연구도 유연제노오월(幽然齊魯吳越) 및 '남제서(南齊書)'의 백제와 반도(半島) 서남부의 백제를 대입하여 분명한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반도사관(半島史觀)에 얽매어 이 땅에서 백제(百濟)가 건국하고 패망했다는 결론을 먼저 규정하고 백제사(百濟史)를 연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 위와 같은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국사서 '남제서(南齊書)'에도 백제(百濟)의 강역(疆域)은 양자강 북쪽에서 장성(長城)근처까지가 백제의 영역임을 말하고 있다. 중국의 저명한 학자 임해상(林海祥)은 그의 저서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서 동이는 진(秦)나라 이전에는 산동, 강서, 안휘성 등에 있었고 진(秦)나라 이후 판도가 만주, 조선, 일본, 유구까지 확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林海祥, 中國民族史 第4章).
 
당서(唐書)에 나타난 백제(百濟)의 영역(領域)은 대륙의 동명(東明), 덕안(德安), 제성(諸城), 박성(博城), 백강(白江), 대산 주류성(周留城), 치청(淄靑), 내해萊海) 지역으로 북으로 고구려(高句麗), 남으로 왜(倭-倭奴國)지역으로 나와 있다. 이곳은 반도인가! 아니다. 모두 대륙이다.
 
지명은 변경할 수 있어도 제후국명은 지나(支那)에서 한국으로 이동할 수 없는데 어찌 반도에서 찾으려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의자왕 때 지명들은 대륙에 있고 반도에 없다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였으나 공주(公州), 부여(夫餘)근처에서는 의자왕(義慈王)때의 지명(地名)이 없다. 이 지명은 백제 패망 후 백제의 영역(領域)을 신라(新羅)와 발해(渤海), 말갈(靺鞨)이 나누어 가졌다는 데서, 발해말갈의 곳에서 찾으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중국은 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이곳 지명(地名) 수백 개를 다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고쳐서 그 지명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백제의 지명들은 치우천자(蚩尤天子)께서 활동하던 그 지역이다.
 
즉 유연제노오월(幽然齊魯吳越)인데 이곳 지명(地名) 이동(移動)과 변경(變更)으로 '삼국사기' 집필자들도 360여개 지명을 찾을 수 없다고 삼국유명미상지방(三國有名未詳地方)으로 분류했었다.
 
그러나 지금도 이 유연제노오월(幽然齊魯吳越)의 지역에서 40여 곳의 지명(地名)이 남아 있어서 찾을 수가 있다. 의자왕(義慈王)때 웅진(熊津), 사비(泗沘) 때 지명(地名)이 백제(百濟) 진출 지역의 곳곳에 남아 있어서 백제가 대륙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의자왕이 서기 642년~662년까지 전쟁터에서 등장하는 지명(地名)으로 대야성 등 40여 개 성(城)이 있다. 즉 당항성․무산성․평원․감물․동잠․요거 등 10여 성과 옥문곡․석토 등 7성, 침현․백마강․기벌포․황산․대산․독산․동잠․웅진․마한․동명․금련․덕안․주류성․제성․임존성이 있는데 이 성과 지명들이 반도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단 몇 개를 반도에 옮겨 놓았을 뿐이다.
 
웅진 동쪽에 지라성․윤성․대산․사정등과 진현성․치주․청주․내주․주 등이 있는데 이는 중국이 위서․송서․양서․주서․수서․당서․신당서에 고구려 백제가 있었던 대륙에 다 있다.
 
여기서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은 백제가 패망한 660년 6월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의 군사가 13만이고, 신라가 5만 명으로 나온다. 백제 의자왕(義慈王)이 웅진 성주의 배신으로 인하여 다른 성(城)에 가서 저항하지 못하고 660년 7월 18일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 했다.
 
그때 백제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열흘 동안 흩어진 백제 군사 3만(萬)여 명을 다시 모우고 정비하여 소정방이 공격해오자 이를 막아 물리쳐 승리(勝利)하여 200여 성을 다시 탈취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의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백제군을 이길 수 없었다.(三國史記百濟本紀). 백제가 패망할 때의 인구가 76만호라 하였는데 200성을 다시 되찾으니 웅진 이외의 모든 성이 백제부흥군에 합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부흥군 토별을 위하여 40만 당병이 증원된다.
 
이때 백제가 반도에 있지 않았던 것은 인구로 봐서도 알 수 있다. 백제 패망 때의 인구를 76만호라고 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많은 인구이다. 중국의 인구 변천사를 보면 수(隨)나라가 508년 9백만 명이었다. 수(隨)나라가 대업을 이룬 때 4,600만이었고 당은 626년에 1,652만이었다.
 
당(唐)이 주변국을 정복하면서 그 후의 755년에야 52,919,309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인구이기에 백제부흥 군을 제압하기 위해 40만 명을 바로증원 할 수 있었듯 백제가 100만 대군으로 유연제노오월(幽然齊魯吳越)을 정벌하고 정복하여 지배한 것은 반도인구로는 불가능하다.
 
태조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인구가 30여 만이고 태종 때도 37만이었다. 그리고 당나라가 수로로 백제를 침범했다는 것도 모두 허구이다. 반도에 배로 왔다면 당시 배가 수천척이 와야 하고 서해가 온통 배로 뒤덮였을 것이다. 당병을 증원한 곳은 대륙이지 한반도가 아니다.
 
백제가 대륙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당시 백제는 37군(郡) 200성(城), 75만호(萬戶)이다 이 호수(戶數)는 유연제노오월(幽然齊魯吳越)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식민사가(詐家)들이 말하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서 200성(城)이라는 성(城)도 없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도 대륙에서 건국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가야(伽倻) 등이 반도에서 건국하고 이곳에서 패망한 것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역사무지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역사는 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출발하고 있다.
 
필자 역시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그렇게 배워서 이게 사실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서들이 지금도 이 같은 이론을 펴고 있으나 이는 사학자들의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김유신(金庾信), 장보고(張保皐), 최치원(崔致遠), 의자왕(義慈王), 계백(階伯)장군, 역사 인물들도 한반도에서 출생하고 여기서 그 일생을 마친 것으로 가르치고 있으나 전혀 아니다. 이들은 그 선조부터 모두 대륙에서 출생하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고 무덤들도 다 그곳에 있다.
 
일본은 '세계사의 정리(世界史の整理)'에서 우리의 역사가 반도에 없는 ‘기자조선(箕子朝鮮)’부터 시작이라고 왜곡하고 있다. 우리의 반도 식민사가(詐家)들도 우리 역사가 다 반도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으로 매도하고 있는데, 기자(箕子)가 산 곳도 대륙 서화다. 기자는 한반도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중국의 사서(史書)에서도 고대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加羅);가야(伽倻), 왜(倭)는 동이(東夷)로 기록되어 있는데 동이(東夷)는 동철(東鐵)의 뜻이니 동쪽에서 철을 사용하던 우리민족을 말하는 것이다. 이 동이족들은 대륙에서 문명을 일으키며 살아 왔다.
 
이 동이(東夷)의 나라들은 모두 대륙(大陸)에서 출발하고 한반도(韓半島)로 진출(進出)한 기록(記錄)을 볼 때, 처음부터 반도로 옮길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동이(東夷)의 나라들과 그 조상이 상고시대부터 대륙에서 출발해 대륙에서 그 일생을 마쳤다는 것이다. 상고시대부터 삼국시대 주인공들의 영역은 변화는 있었지만 같은 지역으로 분명히 대륙의 주인이었음을 자타가 인정한다. 숨길 수 없다.
 
신라는 소호금천 씨의 후예이고 고구려는 고신 씨의 후손이며 삼국 묘(苗)의 후예(後裔)로 구리(九黎)의 후예라는 뜻이다. 소호금천 씨나 고신 씨의 구리(九黎)의 천자능과 기자의 무덤이 모두 요(遼)의 동쪽이며 하남성(河南省), 서화(西華)의 동쪽에 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도 5000년 전에는 우리나라 국호(國號)를 구리(九黎)라 하고 우리나라 국호가 구리(九黎)니 구리족(九黎族)이라 하였다. 구리(九黎)는 상고시대를 말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고대 우리를 가리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백제의 웅진(熊津)은 태산(泰山)의 서쪽고, 백제의 한성(漢城)은 하북성(河北省)에 있었다. 백제의 패망시 지명이 위의 남북에는 있으나 반도에는 어디에도 없고 찾아볼 수 없다.
 
우리 역사는 이미 밝힌바 대로 김유신(金庾信)의 조상 소호금천씨 능(陵)도 곡부에 있다. 서화(西華), 몽성(蒙城), 곡부 주위에 김유신과 관련된 전쟁 지명이 현존하고 우적도(禹跡圖)와 송본지리지장도 현 지도에서 '25사' 동이관계 지명이 현 중국에 있다. 이를 반도로 옮길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는 대륙에서 시작하고 대륙에서 찬란한 역사를 이루며 살아온 것을 숨길 수 없다. 우리역사를 조작 왜곡된 역사로 전할 게 아니라 국가원리에 일관한 1만 1천년의 역사를 국제적 시각으로, 구체적이고 합리적으로 바로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以上, 主로 參考한 書物은 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윤진영, 編集 ‘三國史. 參照, 本文引用)하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李民民樹,'朝鮮傳‘.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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