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 지명 이동 변조한 중국과 반도사학

입력 2018-09-08 19: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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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중국과 일본이 우리 역사를 자기들의 역사로 변조 왜곡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열등의식이 원인이다. 또 식민사관사람들도 우리 역사를 반도에 맞추려하나 그 거짓인 것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반도에 가둘 수 없다. 우리가 상고시대부터 대륙의 주인이고 대륙에 산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삼황오제가 다 우리의 선조이고 일본의 천황가도 그 역사를 보면 모두 우리 선조가 세운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가 모두 우리 선조이다. 삼황의 한분인 헌원(軒轅)은 김유신의 선조이다. 일본의 오진왕(應神王)은 단군의 73대 손임을 숨길 수 없다.
 
그러기기에 그들은 지명(地名)과 지도(地圖)를 고치고 지역을 여러 번 옮기면서까지,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는 그들이기에 깊이 유의해서 살펴봐야 한다. 한 예로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태산(泰山)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살펴봐도 그들의 진면목을 잘 알 수 있다.
 
사기(史記) 권6(卷六)에 한(漢)(25~1126) 시대로부터 송(宋)(1060)까지도 태산(泰山)으로 불렀음에도 후진(後晋)(936~946 )때는 태산(太山)으로 부르고, 송(宋)(1060) 때는 태산(泰山)으로 불렀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도 대(垈)와 태산(泰山)이 같이 기록 되어 있고, 현재 까지도 태산(泰山)으로 2000년 동안 불렀다. 그렇다면 그동안 다른 이름이 불러서는 아니 됨에도 후진(後晋) 때는 태산(太山)으로 사용하고, 한(漢) 때와 송(宋) 때까지 태산(泰山)을 대산(垈山), 대산(大山), 태산(太山), 태산(泰山)으로 기록하고 있음은 태산(泰山)이 동이(東夷)의 땅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우리 조선 땅 대륙서화(西華)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배달국의 제14대 자오지천황(慈烏支天黃)인 치우천자(蚩尤天子)와 순(舜)과 기자(箕子)가 살던 곳이고 백제(百濟)와 사로신라(斯盧新羅;서신라(西新羅), 고구려의 관계지명이 이 산동성(山東省)의 태산(泰山) 주변에 다 있다.
 
또한 신라와 당(唐)의 교역항인 신라의 땅 항성(項城)의 동쪽에 태산(泰山)이 있으니 태산은 상고시대부터 사로신라(斯盧新羅);(西新羅)때까지 우리의 땅이고 이곳에 자오지천황(慈烏支天黃)과 견비(肩髀) 황후 묘(墓)가 모셔져 있다. 이곳이 동이(東夷)의 영역임이 다 입증된다.
 
또한 태산(泰山)은 대륙 여러 곳에 있음도 알 수 있다. 예컨대, 고구려의 점령지인 산서성의 태원(太原)과 하남성의 광주(光州)의 동쪽에도 태산이 있고 백제의 진성(晋城)과 황산(黃山), 동명(東明), 항성(項城), 독산(獨山), 동성(桐城), 잠산(岑山), 덕안(德安)의 동쪽에 태산이 있다.
 
이외에도 청하(淸河), 평원(平原)의 남쪽인 백제(百濟)의 영역(領域) 내에도 태산(泰山)이 있다. 삼국사(三國史)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태산(泰山)이 대산(大山)으로 바꿔서 나타난다. 오늘은 우리 역사가 상고시대부터 고대에 대륙에서 펼쳐진 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의자왕의 전투지역은 대륙의 대산(大山)이었다
 
우리나라 역사 교재에는 의자왕(義慈王)이 662년 반도에서 있었던 것 같이 왜곡하나 의자왕이  싸운 곳은 대륙 웅진(熊津) 동쪽 대산(大山;태산(泰山)에서 전투를 하였다. 이는 신구당서(新舊唐書)의 내용과도 동일(同一)하다. 참고로 그 당시 대산(大山) 주위 지역을 보면, 아래와 같다. 
 
대산(大山)의 주위에는 평원(平原), 황산(黃山), 독산(獨山), 동성(桐城), 잠산(岑山), 덕안(德安) 항성(項城), 동명(東明), 백마(白馬), 박산(博山), 제성(諸城)등이 있어야 하는데 반도에는 없다.
 
하북성(河北省)에 평원(平原)이 있어야 하는데 반도에는 없다. 산동성(山東省)에 황산(黃山), 백마(白馬), 박산(博山), 제성(諸城)이 있다. 항성(項城)은 하남성(河南省)이 있고, 안휘성(安徽省)에 독산(獨山), 동성(桐城), 잠산(岑山)이 있다.
 
강서성(江西省)에 덕안(德安)이 있다. 백제의 대산(大山)은 태산(泰山)으로 신구당서(新舊唐書)도 같은 내용으로 이를 증명하는 것은 668년 (보장왕) 태산(泰山)에서 제사를 지냈고 866년(경문왕) 반역자가 대산군(垈山郡)으로 도망갔다고 했다. 이 군(郡)이 반도에 없고 대륙에 있다.
 
또한 885년(헌강왕)~894년(진성왕)기간 최치원(崔致遠)이 태산군(太山郡)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구당서(舊唐書)가 후진(後晋936~946) 때, 편찬되었는데 태산(泰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최치원(崔致遠) 시대에 태산(泰山)이 대산(大山)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三國史)에도 분명히 산동성(山東省)에 대산(大山)이 대산(垈山)·대산(大山)·태산(太山)·태산(泰山)으로 불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태산(泰山)은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9세기까지 동이민족(東夷民族)의 영산(靈山)임을 잘 알 수 있다.
 
태산(泰山)의 주위에 고구려, 신라, 백제(百濟)지명이 있다. 북쪽으로 석문(石門), 청하(淸河), 평원(平原), 창해(滄海), 신성(新城), 고대인성(古大人城), 용도(甬道), 북평(北平), 은산(銀山), 역성(力城), 석성(石城), 서안평(西安平)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황산(黃山), 동명(東明), 진성(晋城), 고평(高平), 숭산(崇山)이 있다. 이곳은 다 대륙이지 반도가 아니다.
 
남쪽으로는 항성(項城), 광주(光州), 독산(獨山), 동성(桐城), 잠산(岑山), 덕안(德安), 신안(新案), 사(泗), 연수(漣水)등이 있으며 동쪽에는 박산(博山), 제성(諸城), 래(萊)가 있다. 이곳은 환국, 배달국 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加羅);가야(伽倻))시대까지 동이영역(東夷領域)으로 우리가 지배한 대륙임을 알 수 있다.
 
이 태산(泰山)이 대산(垈山)·대산(大山)·태산(太山)으로 불린 명칭변경(名稱變更)에 대한 연구는, 우리 역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서기 669년과 672년에 나침반(羅針磐)을 만들었던 자석(磁石)과 침(針)의 생산국가 서신라(西新羅)인 사로신라((斯盧新羅);강회신라(江淮新羅))를 밝히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 태산(泰山)은 대륙 웅진(熊津)의 동쪽에 대산(大山), 즉 태산(泰山)인 것이다. 이곳은 한반도가 아니다. 바로 대륙임에도 반도식민사학자는 이곳을 반도(半島)라 말하고 있다.
 
태산(泰山) 등, 대륙 입증하는 기록 제대로 알아야
 
태산(泰山)은 현재도 태산(泰山)이라 하는데 서기 660년에는 당서(唐書) 권(卷) 120에는 태산(泰山)으로, 삼국사(三國史) 권 22와 구당서(舊唐書) 권 199에는 태산(太山)으로 했고, 한(漢)나라 때는 대(垈)로 나타내고 있다. 삼국사권 46 상대사시중장에는 고구려 백제영역 내에 있는데 이곳은 반도가 아니다.
 
의자왕(義慈王) 패망 때인 662년에는 웅진 동쪽의 대산(大山)으로 구당서(199)와 삼국사(권28)에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바로 태산(泰山)으로 함께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음(音)이 같고 모양이 비슷할 때 태산(泰山)을 나타낼 때 태산(泰山)을 대산(垈山)·대산(大山)·태산(太山)· 태산(泰山)을 이중 하나를 사용하는 것에 유의하고 이 산은 하나임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의 4국 시대를 알기 위해서 그 시대의 기록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막연히 중국과 일본의 왜곡한 역사를 신주(神主)같이 믿고 있는 우리나라 사학자(詐學者)들의 역사 지식수준(知識水準)으로는 우리 역사를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
 
이미 고대사를 깊이 연구해온 사학자(史學者)들에 의해서 삼국지명(三國地名)이 어디에 존재했고, 삼국시대의 일식관측 지(日蝕觀測地)가 과연 어디였으며, 어찌해서 행성(行星) 및 천체현상(天體現像)은 중국과 일본이 말하는 사실과 다른가! 등에서도 다 판명(判明)된다.
 
또한, 한반도에는 홍수가 6~7월인데 반하여 대륙은 왜 4~5월인가? 홍수 때 백제와 신라의 큰비 기록은 하나도 일치되는 것이 없는데 왜인가? 가스 분출이나 황충(蝗蟲)의 출현, 지각변동(地殼變動), 적조현상(赤潮現像)이 어찌해서 중국에서 발생하는 것이 우리삼국과 같은가!
 
한반도와 맞지 않은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삼국의 수도를 찾을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은 무엇인가? 태수(太守)의 낙랑군(樂浪郡)과 왕(王)의 낙랑국(樂浪國)역사는 왜들 모르는가? 삼국시대 조공소요 일수는 얼마나 되었을 가? 이에 대한 연구를 제대로 했다면 우리역사가 반도가 아닌 대륙사(大陸史)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도 유독 반도식민사관자들은 왜 이를 모르는가!
 
우리나라 사서(史書)도 제대로 연구 검토도 없이 고대 우리나라 영역(領域)이 한반도(韓半島)만을 삼국강역(三國疆域)으로 보는 무지는 이제 그만 거둬야 한다. 도대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중국 사서를 어느 정도 연구하고 황당한 거짓 역사를 우리 역사로 말하는가! 기가차고 한심하다.
 
필자가 추적해온 ‘삼국사기’만으로도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지명이 현 중국 대륙에 있는데 한반도에는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지명이 없다. 김부식(金富軾)도 모른다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및 왜의 360여의 지명이 대륙에 다 있다. 고구려, 백제가 사라진 후, 신라-고려-조선으로 바뀐 한반도보다 당(唐) 오대십국, 송(宋), 원(元), 명(明), 청(淸)으로 변화가 많았던 중국에는 삼국시대 지명이 다 있다. 그것도 한반도에서 진출했다고 하는 지역에는 있는데 본토라고 주장라고 하는 한반도에는 어찌해서 없는가! 이제는 더 이상 거짓 역사는 통하지 않음을 정신을 차리고 말들을 해야 한다. 우리 역사는 반도가 아니라 대륙사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위치 추정
 
학자는 적어도 양식 있는 양심(良心)이 있어야 하는데 이 나라 반도식민사관자들은 자기 양심마저 팔아먹고 있는 행적(行蹟)은 봐 줄 수가 없다. 지금도 중국에는 같은 지명이 있는데 이들은 ‘우리 민족이 이동을 해 와서 그렇다’고 말한다고 한다. 이도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이동(移動)을 하였다면 서로의 지명(地名)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같은 지명(地名)은 동서남북의 위치까지도 같은 것이 있다. 이것은 이동(移動)에 의해서 그렇다고 보기보다는 사서(史書)를 인용(引用)하였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채거서목 삼국유사(三國遺事)편에, 조선시대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찬(纂)할 때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인용(引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중국사서(史書)를 인용하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원본(原本)은 중국사서(史書)가 되는 것이다. 중국사서(中國史書) 동이전(東夷傳)에 등장하는 지명(地名)이 중국에 있고, 송(宋)나라 때 만든 ‘우적도(禹跡圖)’와 ‘송본지리지장도’에도 있으니 동이전(東夷傳)의 위치는 현 중국 대륙 내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동이(東夷)의 위치배열도(位置配列圖)에 지명을 삽입하여 보면, 고구려, 백제의 패망시대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가 동일하기 때문에 중국 ‘25사’ 동이(東夷)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
 
삼국시대 지명이 한반도(韓半島)에는 없으나 지금 중국대륙에는 있다. 송(宋)나라가 제작(製作)한 고지도(古地圖)에도 동이지명(東夷地名)이 황해서쪽에 있어, 동이위치는 중국대륙에 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삼국시대 지명(地名)이 중국에 다 있고 김유신(金庾信)의 선조(先祖)인 소호 금천 씨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신위(神位) 중 첫 황제(皇帝)로 매김하여 모신 헌원(軒轅)의 능(陵)이 중국에는 있어도 반도에는 없다. 김유신도 선조 때부터 대륙의 사람이다. 반도(半島)의 김유신(金庾信)이 아니다. 그가 전쟁한 지명이 대륙에 다 있음은 이를 입증한다. 
 
지금 산서성에 태원(太原)이 있고, 성하북성(河北省)에 북평(北平), 태백산, 은산(銀山), 신성(新城), 고대(古大人城), 광양(廣陽), 청하(淸河), 대방(帶方), 석문(石門), 서안평(西安平), 평원(平原)이 있다.
 
산동성(山東省)에는 성양(城陽), 청(靑) 래(萊), 광능(廣陵), 하수(下水), 동명(東明), 황산(黃山), 백마하(白馬河), 제성(諸城), 사성(蛇城), 박성(薄城)이 있다. 여기가 반도인가? 대륙(大陸)이다.
 
하남성(河南省)에는 항성(項城), 숭산(崇山), 광주(光州)가 있고, 안휘성(安徽省)에 동성(桐城), 잠산(岑山), 독산(獨山), 사(泗), 마두(馬頭)가 있다. 강서성(江西省)에는 덕안(德安), 무녕(武寧)이 있고, 강소성에 해(海), 연수(漣水), 주류성(周留城), 서주(徐州)가 있다. 절강성에 진해(鎭海)등이 있는데 이곳들이 반도인가! 도대체 연구를 어떻게 했기에 헷갈리는 말을 하는가!
 
백제(百濟)의 패망(敗亡)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史)’,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가 공통으로 대륙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반도에는 없고 대륙에만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가 동일한데, 반도식민사관 그대들은 어떤 근거로 반도를 고집하는지 그 해답을 제대로 해야 한다. 우리의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加羅);가야(伽倻))는 물론 왜(倭)도 대륙에 있었음을 제대로 알고 말하기 바라진다. 오늘 세계는 거짓이 용납되지 않은 시대이다.
 
그대들이 제 아무리 거짓을 말하여 역사를 혼란스럽게 말해도 진실은 숨길 수 없다. 상고시대부터 고대에까지 우리는 대륙에 있었지 반도가 아니다. 배달국의 제14대 치우천자와 기자능, 부여융(夫餘隆) 묘비(墓碑)와 김유신, 장보고, 관계 지명이 대륙에 있음을 연구하고 말해야 한다. 
 
자연현상에서 보는 백제와 신라의 위치
 
우리나라의 장마는 6월~7월에 있다. 그런데 사로신라(斯盧新羅)의 경우는 이른 때는 3월에 홍수가 있으나, 대체로 4월~5월에 장마가 있는 기록을 볼 수 있다. 4~5월에 큰비가 내려 홍수를 이룬 것을 100여 년의 기록만을 봐도 우리와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서기 56년 5월, 유리왕(瑠璃王) 33년의 폭우(暴雨)를 시작으로 108년의 큰비와 114년 큰비, 131년과 160년 4월의 큰비, 174년 1월의 흙비, 192년 5월의 큰비, 198년 5월의 홍수 212년 내해왕 17년의 큰비, 290년 5월 유례왕 7년의 큰비, 350년 4월 흘해왕 41녀의 큰비, 366년 4월 내물왕 11년의 홍수, 720년 4월 선덕왕 19년의 큰비 등 이 비가 내린 곳이 대륙이지 반도가 아니다.
 
여기서 홍수는 양자강의 범람을 말하는 것으로 신라 5세기 전의 홍수 지역은 양자강 지역이었다. 이 기록에서 5월 이전의 기록은 한반도의 기록으로 볼 수 없다. 이 기록들은 모두가 대륙 의 서신라(西新羅) 즉 사로신라((斯盧新羅);강회신라(江淮新羅))의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대륙 서신라((西新羅);사로신라(斯盧新羅))의 홍수, 큰비, 큰물이 범람한 기록 등이 나와 있다. 서기 500년 이전에 24회, 500년 이후에도 24회가 다 5월 이전에 그 기록들이 나와 있다. 6월 이후의 기록은 15회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百濟) 기록도 3·4·5·6월에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황해 서쪽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서기 19년 6월 온조왕(溫祚王) 37년에 기록을 시작으로 660년 의자왕(義慈王) 20년까지 폭풍, 폭우의 기록을 볼 수 있는데, 홍수 기록만 보면 3월에 1번, 4월에 2번, 5월 5번, 6월에 5번 7월에 1번으로 나와 있다. 여기서 신라와 백제의 위도가 다른 백제는 신라 북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도라면 전라도와 경상도 다 같이 장마로 들어가는데 백제의 큰비나, 홍수의 기록은 신라와 일치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은 백제, 신라의 5세기 이전 홍수지역은 중국 양자강 지역임을 분명히 말해주는 것이다.(以上, 吳在成,‘百濟는 中國에 있었다.’30面~33面 參照引用)하다.)
 
또한 자연현상으로서 반도에서는 볼 수 없는 황충(蝗蟲)의 피해가 있다. 신라의 북쪽에 있는 백제는 서기 208년인 초고왕(肖古王 43년)과 서기 211년 46년 8월에 있었고, 서기 321년 비유왕(毘有王) 18년 7월에만 있는데 반하여, 백제 남쪽에 위치한 신라는 서기 18년 남해왕(南解王) 15년을 시작으로 서기 921년 경명왕(景明王) 5년, 8월까지 24회나 그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신라와 백제의 북쪽에 있는 고구려도 서기 55년 태조(太祖 3년)과 서기 62년 8월과 서기 118년 7월과 서기 388년, 고국양왕(故國壤王) 5년 8월 및, 서기 406년 7월 광개토태왕 15년과 502년 문자왕(文咨王) 11년 8월과 서기 536년 안원왕(安原王) 6년 8월에 황충(蝗蟲)의 피해기록이 나와 있다. 이 기록들은 대륙의 자연현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 한반도가 아니다.
 
한반도에서는 황충(蝗蟲)의 피해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대륙의 피해와 같은 기록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이 메뚜기나 황충(蝗蟲)의 피해가 발생하는 곳은 대륙에서 활동이 강한 것을 볼 수 있다. (以上, 吳在成,‘百濟는 中國에 있었다.’44面 參照引用).
 
오늘날 역사도 왜곡하고 거짓으로 조작한 것은 다 밝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메뚜기와 황충(蝗蟲)과 같은 곤충의 피해는 거의 없다. 반도식민사관자들은 자연현상도 연구하지 않고 우리의 찬란한 역사를 메뚜기와 황충(蝗蟲)과 같이 우리 역사를 황패화(荒敗化)시키고 있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라하며 왜곡하는 일본과는 너무 대조를 이루고 있음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다음에 계속)
 
(以上, 주 참고서는 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百濟本紀.’ ‘百濟는 중국(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윤진영, 編集 ‘三國史. 參照,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李民民樹,'朝鮮傳‘.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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