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 우리의 문물과 제도 전수(傳授)받은 나라

입력 2018-09-15 11:12:03

원문 링크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일본이 우리 역사왜곡에 앞장섰던 동경대학교 교수인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는 식민지의 정당화이론(正當化理論)을 펼친 인간으로 일본의 치욕사(恥辱史)를 만회하려 했던 자이다. 그는 식민사관에 앞장서 우리 민족이 긍지를 갖기 못하게 하기 위해 고대부터 근대까지 독립과 자유가 없는 보잘 것 없는 답보(踏步)의 역사로, 타율성(他律性)·부용성(附庸性)·정체성(停滯性)의 민족으로 서술했다.
 
또한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인 신라(新羅)의 김춘추는 당(唐)의 힘을 빌려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자로, 왕이 된 후도 사대주의로 우리 민족에게 말할 수없는 오점(汚點)을 남긴 왕이었다.
 
그는 신라의 과거시험(科擧試驗) 과목(科目)도 자국(自國)의 역사를 부정하고, 중국의 ‘사기(史記)’를 출제하는 국왕(國王)이었다. 이는 오늘의 식민사관자와 진배없는 사대주의자라 할 수 있다.
 
이들로 인해 우리 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의 역사가 만연(漫然)되게 되었다. 우리는 이 무열왕(武烈王)의 행위도 용서(容恕)할 수 없는데도, 아직도 이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못하고 있으며 반성도 하고 있지 않다. 이제는 크게 반성하고 가야 할 때이다.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많은 백제인과 고구려인을 학살하고 고구려인 22만 명과 백제인 또한 이에 못지않은 민족을 끌고 가게 한 일은 용납(容納)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인류사상 최초로 등장한 문화민족으로 모든 문물제도가 한국에서 나왔음을 세계석학은 말한다. 천자(天子)의 문물제도(文物制度), 공자의 유교, 강태공(姜太公)의 군사학과 그 외 주역철학 홍범구주(洪範九疇)도 물질문명도 우리 민족에게서 나왔고 중국은 우리에게 이를 배웠다
 
고조선은 170개가 넘는 제후국(諸侯國)들에 대해 직접 통치가 아닌 간접 통치를 했다. 그 부족의 장이나 그 수장(首長)에 대해 관료 작위(爵位)를 준 후에, 그 민족의 풍습에 따라서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는 간접 통치 방법을 사용했다. 즉 고조선의 왕조로부터 이반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기미정책(羈縻政策)’을 썼다. 이로 인하여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두었던 것이다.
 
북사(北史)에 보면 ‘동이(東夷)에게서 수입할 것은 궁시(弓矢)뿐 아니라 기타 문화도 수입한다’고 기록하였다.(北史, 卷94 末尾). 중국 문화의 중핵(中核)인 황제제도(皇帝制度)도 우리에게서 나왔고, 만 가지 만물제도(萬物制度)가 동이(東夷)에서 창조되었다고 한 것이다.(周易 卷之24 說掛傳).
 
이에 관하여서는 이미 다 살펴보았음으로 오늘은 중국의 역사가 삼황오제(三皇五帝)부터 모두 우리의 선조(先祖)를 가져다가 모시고 있는데 이런 중국의 역사도 우리가 알아야 역사왜곡에 대처할 수 있기에 오늘은 중국 고대 역사가 어떠하였는지 그 실체를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이 내세우는 중국 문화의 지주(支柱) 삼황(三黃)
 
중국의 성립을 말하는 데 있어 그들이 가장 내세우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그것은 ‘황제(黃帝)’, ‘황하(黃河)’, ‘황토(黃土)’이다. 여기서 먼저 중국 민족의 조상이라고 숭앙(崇仰)하는 황제제도(黃帝制度)부터 말한다면, ‘황제라는 것은, 여러 가지 도구(道具)와 제도(制度)를 정해서 중국인에 문화생활(文化生活)을 향수(享受)시킨 최초의 제왕(帝王)’이라고 되어 있다.
 
이 제왕(帝王)들은 모두 우리 선조(先祖)들인데도 중국의 ‘서경(書經)’, ‘시경(詩經)’ 등의 고문헌에서는 그들 이름들을 숨겨서 볼 수 없다. 그 전설(傳說)이 성립한 것은 한(漢)나라의 초(初)기로 본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난 1911년 초에는 황제기원전(黃帝紀元前) 4609년이라고 말했다. 이에 의하면, 황제 즉위는 기원전 2698년이 되나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제멋대로인 계산인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황제의 존재가 있었다고 믿고 역대 왕조의 황제(皇帝)는 새로 등극하면 반드시 황포(黃袍)를 입고 황제묘(皇帝墓)에 참예(參詣)하여 왕조의 발전을 기원해왔다.
 
이 습관은 제2차 대전 후 모택동(毛澤東)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국가 원수가 취임하면 변하지 않고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황제(黃帝) 능(陵)은 서안시(西安市)로부터 동북으로 약 18km 섬서성황능현성(陝西省黃陵縣城)의 한적한 교산(橋山)의 산록(山麓)에 있다.
 
중국은 역사를 조작, 왜곡하고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자기들의 시조(始祖)라 하며 중국 56민족의 공통의 조선(祖先)이라 한다. 연진족의 금조(金朝), 몽골족의 원조(元朝), 한족(漢族)의 명조(明朝), 만주족의 청조(淸朝)는 다 이를 자랑으로 매년 제전(祭典)을 열며 이를 답습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를 계기로 현재의 56민족은 모두 동일(同一)의 선조(先祖)를 가진 형제와 같다고 하며 결속(結束)을 호소하면서, 동시에 소수민족 압박의 구실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극소수 한민족(漢民族) 이외의 국내 55민족 중, 이를 받아들이는 자는 거의 없다.
 
중국인이 황제(黃帝)를 가지고 한민족(漢民族)의 조선(祖先)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중국 역사의 골격(骨格)이 빠지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이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 56민족 원래의 조선(祖先)이 아니다. 우리의 선조(先祖)인 것이다.
 
그러나 환국시대부터 대륙을 지배한 우리 민족과 고대부터 서로 교류하고 혼인함으로 우리 영역의 10%에 불과했던 중국 산악지대의 한족(漢族)도 지금은 조선(祖先)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황하(黃河)는 세계 5대문명의 마지막 문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양자강 다음 제2의 긴 강으로 길이 5464km의 장류(長流)이다. 그 시원(始原)은 청해성(靑海省) 중부의 아납달택산록(雅拉達澤山麓, 5242m)에 있는 약고종열분지(約古宗列盆地)의 샘물이다.
 
황하(黃河)는 중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서기전 602년의 주(周)의 정왕(定王) 5년~2600년간에 1590회의 범람(氾濫)을 일으키고 있는데 범람 때, 넓어진 강폭(江幅)에는 대량의 흙인 니토(尼土)가 침전(沈澱)해서 퇴적(堆積)이 거듭하면서 황하(黃河)를 중심으로 하는 중유역(中流域)과 하류역일대(下流域一帶)에는 황토층(黃土層)이 거듭 쌓이며 넓혀졌던 것이다.  또, 중국 문화의 특색이 되는 것은 황토층(黃土層)이다. 이 황토층은 서(西)는 청해성(靑海省), 감숙성, 남(南)은 섬서성(陝西省), 북(北)은 산서성(山西省), 내몽골, 산동성(山東省), 하북성(河北省)까지 넓혀져 있다. 이 황토는 화학적으로 알카리성인데 철분이 대량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이 토양은 건조(乾燥)시에는 단지 황색의 땅이나 물이 포함되면 비옥한 토양이 되기 때문에 농경에 최적의 환경이 된다. 이 비옥한 땅은 황하가 범람해서 이뤄진 땅이다. 원래 산동반도(山東半島)도 섬이었으나 이 퇴적된 흙이 쌓여 지금은 대륙의 반도가 형성된 것이다.
 
동이(東夷)가 황하 유역에 국가를 탄생시켰다
 
역사시대인 단군시대가 되니 갑골문자에 의해서 수많은 대륙의 국가는 수백의 부족국가들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우리 동이국가들이 번성한 곳으로 상고시대부터 고대까지 지배한 곳이다.
 
중국사는 동이가 세운 주(周)와 은(殷)나라도 자기들의 나라라고 하나 동이의 나라이다. 이 나라들도 세력(勢力) 확대(擴大) 방향에서 서주(西周)의 예를 보면, 낙읍(洛邑,낙양(洛陽)이나 호경(鎬京) 후에 장안(長安-현재의 서안(西安)으로부터 동방(東方)으로 확대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살기 좋은 평야지대로 교통이 편리하고 교역이 편리한 이곳은 우리 동이족이 사는 터전인데 이곳을 탐해 한족(漢族) 집단이 서쪽의 척박한 사막을 넘어서 황하(黃河)나 위수(渭水;감숙성위헌원(渭源縣)에서 황하로 흐르는 강)에 와서 정착하려고 배달국 시대부터 화하족(華夏族)의 우두머리가 된 헌원(軒轅)과 치우천황(蚩尤天黃)과의 영역을 차지하려는 73번 싸움은 유명하다.
 
이는 황하 중유역(中流域)인 낙읍(洛邑)이나 위수(渭水)부근에 있는 호경(鎬京)이 어찌해서 이곳에 고대국가가 성립하였는가를 보면, 이곳은 농경지(農耕地)로서의 매력(魅力)보다도 교역(交易)을 위한 거점(據點)으로서 국가경영에 가장적합한 곳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족(漢族)도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고 탐(貪)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황하(黃河)는 한족(漢族)에 있어서도 오랜 숙원이었고 이곳은 황하문명(黃河文明)의 모체(母體)가 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족(漢族)이 어떻게 이곳에 출현했는가? 에 관해서 고고학서(考古學書)를 보고 풀이해서도 한민족(漢民族)의 정의(定義), 그 자체가 애매모호(曖昧模糊)하기 때문에 명해(明解)한 정답을 얻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외국 사학자(史學者)들도 말할 정도다.
 
그러나 중국은 역사를 왜곡하며 한자(漢字)는 자기들이 화북지방(華北地方)에 있는 동안 만든 양 중일(中日)의 사학자라는 자가 말하는 자도 있으나 한자(漢字)도 우리가 만든 것이다. 모든 문물제도(文物制度)며 문화(文化)가 우리 동이(東夷)에 의해서 전해진 것을 숨길 수 없다.
 
황하문명도 그 이전에 요하문명을 비롯해서 세계 5대문명이 동이족에 의해 주도(主導) 되었다. 고대 중국의 한족(漢族)은 그들의 문물제도와 영역(領域)도 우리 동이(東夷)를 따를 수 없었다.
 
중국 한족(漢族)이 중국영역(中國領域)내에서 영역을 변경(邊境)으로 진출하였다 하나, 변경은 아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1949년 건국한 이후의 일이다.
 
일반적으로 한민족(漢民族)이란, 현재 중국 정주{(正州);(본토)}에 거주하는 황색인종(黃色人種)으로 중국어(中國語)를 말하고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민족을 말하나, 한민족(漢民族)은 원래 중국 정주(正州)에서 발생하여 그 후 점차 발전 확대(擴大)해갔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미 밝힌바 대로 고인류학적(古人類學的), 고고학적(考古學的)으로 조사해가면, 중국 한족(漢族)의 시조(始祖)는 단일(單一)이 아니라 거의 모두가 중국을 정벌(征伐)하고, 정복(征服)하여 지배(支配)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주종(主從)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중국이 조상(祖上)으로 모시고 있는 삼황오제(三皇五帝)에 대해서도 일치하는 학설이 중국에 없다. 그들이 말하는 수인씨(燧人氏-여기서 씨(氏)는 신(神)을 말한다.)는 우리 선조(先祖)임은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태호복희(太皥伏犧),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 소호(少昊),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 모두는 다 우리 동이족(東夷族)이다.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상고시대부터 수렵(狩獵)을 하다가 고대에 와서 농업을 하며 대륙에 정착하고 시대가 흐름에 따라 비옥한 토양(土壤)인 황하유역(流域)에 이미 정주(定住)해 있었다. 이후 이 동이족은 타민족과도 융합(融合)되면서 오늘의 중국이 이뤄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고대 은(殷)국가 성립과 국호(國號)의 의미(意味)
 
고대 중국 은(殷)의 건립과 당시 상황을 보면 우리와 판이함을 알 수 있다. 사서에 의하면 은(殷)의 시조인 계(契)는 전설의 왕조, 하(夏)의 우왕(禹王)에 의한 황하의 치수사업을 도운 공적에 의해 제순(帝舜)의 시대에 하남(河南)의 상(商)의 지(地)에 봉(封)해졌다고 말해고 있다.   은(殷)의 명칭은 상(商) 왕조의 유렵지(遊獵地)로부터 취했다고 하는데 국호(國號)인 상(商)이라는 글자는 실은 여성이 애를 낳는 다리사이 혈(穴) 즉 여음(女陰)을 나타내는 문자(文字)이다.
 
더욱이 은(殷)이라는 문자도 상형문자(象形文字)인 신(身)과 어느 행위를 행하는 의미의 수(殳)를 합친 회의문자(會意文字)로서 여성의 태아를 숨기는 의미의 문자인 것이다. 즉, 은(殷), 상(商)의 문자는 원시시대 회임의 기쁨과 부족발전이 오래되기를 바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은(殷) 역시 동이족으로 서기전 1600년경, 부족국가의 연합체(聯合體)로서 화북일대(華北一帶)를 지배했으나 이 민족이 출현이 다름 아닌 우리 동이(東夷)의 유목민(遊牧民)이었다. 이를 유추(類推)시키는 중요한 증거(證據) 자료(資料)가 있어 입증이 된다.
 
하나는, 은(殷)나라의 수도가 시조(始祖)부터 11대탕왕(湯王)에 이르기까지 8회나 천도(遷都)를 하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더욱이 탕왕(湯王)으로부터 19대에 해당하는 반경(盤庚)의 대까지 5회나 천도(遷都)했다고도 되어 있다. 이는 그 시대 외침(外侵)이 심한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은(殷)나라에서는 각종이 축제(祝祭)때 반드시 동물을 제단 앞에 희생의 공물(供物)로서 올린다는 것이다. 그것도 당초에는 양(羊), 소, 돼지였다가 시대가 내려오면서 은(殷)과 적(敵)이 된 강족(羌族)의 사람을 붙들어 와서 희생의 제물(祭物)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소(牛)나 돼지(豚)는 식용으로서 이용되나 양(羊)은 털을 생산하기 위해서 유목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물이다. 신(神)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 양(羊)을 희생의 제물(祭物)로 쓰고 있었다는 것으로부터 은(殷)의 탄생은 원래는 유목민(遊牧民)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은(殷)은 서기전 1300년 경에는 이미 정교한 청동기를 제작하고 한자의 조형(祖型)인 갑골문자(甲骨文字)를 발명하고 있었다. 갑골문자(甲骨文字)는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소돈촌(小旽村) 은허(殷墟)로 전해지고 있는 곳으로 1899년에 발견되었다.
 
이 문자는 신석기시대의 범주(範疇)에 들어가는 순수한 회화문자(繪畵文字)로부터는 상당히 진보한 것으로서 이 문자가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요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출토한 문자 3000자 중, 800자 정도는 해독(解讀)되었다고 한다.(이상 眞實の中國四千年史’.24面~39面,參照 引用.)   
 
그런데 문자는 은시대(殷時代)보다 먼저 이미 “신시배달국시대(神市倍達國時代)부터 녹서(鹿書), 녹도문(鹿圖文)이 있었으며, 복희의 용서(龍書), 치우(蚩尤)의 화서(花書), 자부선생(紫府先生)의 우서(雨書)라는 문자가 있었고 고조선 시대에는 전서(篆書), 또는 진서(眞書)라는 문자가 서기전 2181년의 을보륵(乙普勒)이 지은 38자(字)가 있었는데 이를 ‘가림토’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왕문의 부예(符隸), 왕차중의 해서(楷書)등이 있었다. 이와 같은 문자는 은(殷)시대의 제사(祭祀), 사회(社會), 정치(政治), 경제(經濟) 등이 해명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는 전설(傳說)의 범위를 못 벗어났던 은(殷)의 존재가 역사시대(歷史時代)로서 인식(認識)하게 되었다.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41面, 參照 引用.)  
 
또 우리가 만든 한자(漢字) 수는 이후 계속 증가(增加)하여 송(宋)나라 시대인 990~1053년에 사마광(司馬光) (1019~1088년)이 편집한 자서(字書)는 53,525자(字)에 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고대 특히 당(唐) 때부터 송(宋), 명(明), 청(淸)나라에 와서 역사왜곡이 더 심했음을 우리가 주시(注視)하고 그 왜곡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고대 강역도 대륙으로 우리는 대륙사관(大陸史觀)이어야지, 반도사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사대사관(事大史觀)이고, 식민사관(植民史觀)이다. 이 조작, 왜곡된 사관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고대부터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영역에 있어서 우리의 제도와 문물, 기술을 전수(傳授)받은 나라임을 제대로 알고 말을 해야 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윤진영 編集 ‘三國史’.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문화열차’.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이강민 ‘대학국고대사’,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外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이을형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8
감동이에요
6
화나요
8
슬퍼요
2
댓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