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를 보면 고대부터 이 지구상에서는 25만 번 이상의 전투가 있었고 크고 작은 전쟁이 6000년 간에 1200번 이상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전쟁상태에 있는 나라가 수십 개국에 이르고 있는데 전쟁은 많은 인명과 재산은 물론 인간이 빚어내는 재앙이요 참극(慘劇)일 뿐이다.
1939년 제2차 대전을 일으킨 히틀러(Hitler)는 5천5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잃게 하고 2억500만 명의 부상을 입혔다. 이로 인하여 세계 인구는 2%가 감소했다. 이같이 전쟁은 너무나 꿈직한 비극을 낳는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은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이 진리임을 역사는 말한다. 이 전쟁을 발발(勃發)시킨 히틀러도 그 종말이 비극으로 끝난 것은 심은 대로 거둔 것이다.
그는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천인공노할 전쟁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전쟁기간 ‘인간청소’라는 명분으로 유태인 600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蠻行)을 자행한다. 허나 역사는 전쟁의 참상은 절대로 잊지 않은 상흔(傷痕)을 남기며 그 대가로 보복도 수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류(人類)의 역사(歷史)가 전쟁(戰爭)의 역사라 할 만큼 평화(平和)가 지속한 기간은 전쟁과 비교하면 너무나 짧음도 알 수 있다. 이런 전쟁은 고대(古代)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이 발발(勃發)하면 그 끝은 거의 비극적 종말을 맞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한 예로 은(殷)나라(서기전 1766~서기전 1121)와 주(周)나라(서기전 1121~서기전 248)는 중국 역사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들이다 이 고대국가들은 모두 동이족의 나라였으며 몇 번 이나 천도(遷都)를 반복했다. 그 이유는 티베트계 유목민인 강족(羌族)의 침입과 압박 때문이었다.
당시 은(殷)나라 시대 강족(羌族)은 강한 족속(族屬)으로 티베트고원으로부터 양(羊)을 치면서 동남으로 이동해 일부는 위수(渭水)를 따라서 동점(東漸)했으며 또 다른 일부는 황하를 건너서 산서성(山西省) 방면으로 가고 다른 일부는 양자강 중류로부터 하류지역(河流地域)에 진출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강성(强盛)한 동이(東夷)인 강족(羌族)은 은(殷)나라의 존망(存亡)을 위협하리만큼 그 위력이 강하여 철기(鐵騎)로 무장한 기마군단인 강족(羌族)이 침략함으로서 은(殷)나라는 이를 감당하기 어려워 피하는 천도(遷都)를 몇 번이고 거듭하는 일이 일어났다
.
이로 인하여 은(殷)나라는 강족(羌族)의 압박에 의해 수차례 천도(遷都)를 하게 돼 원한이 깊었다. 그 원한은 제단의 희생공물(供物)로 양(羊)대신 강족(羌族)의 목을 바치게 하였다.
이 일은 유명한 은허(殷墟)나 옛 수도(首都)를 발굴하면 반드시 강족(羌族)의 목 없는 유체(遺體)가 나타나는 것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은허(殷墟)의 서북부에서 제사갱(祭祀坑)이라고 하는 묘가 250개 정도 발견되었는데 모두 목 없는 유체(遺體)가 나왔다.
하나의 갱(坑)에 8~10개의 인골(人骨)이 쌓여 있었으며 대부분이 목이 절단돼 있었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총수는 2000체(體)가 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오늘은 살육(殺戮)을 좋아하는 자들은 그 말로가 ‘심는 대로 거둔다’는 사실과 중국역사서(中國歷史書)에 나오는 나라들의 존속기간과 상황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강족(羌族)의 원한(怨恨), 은(殷) 멸망의 원인이 되다
은(殷)나라는 제단 희생공물(犧牲供物)로서 양(羊) 대신 강족(羌族)의 목을 제물로 사용했다. 이 원한으로 인해 돌아온 것은 은(殷)나라의 멸망을 초래(招來)했다는 사실이다.
은(殷)을 계승한 주족(周族)은 고고학과 인류학적으로 보면, 몽골의 초원지대로부터 양을 몰고 계속 남하여 황하 동쪽 분수(汾水) 가까운 곳에 정주(定住)해 씨족연합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은(殷)시대 후반 주(周) 13대 고공단부(古公亶父)시대가 되어서 은족의 침공을 받았기 때문에 황하 서쪽을 건너서 섬서성(陝西省) 기산(岐山)으로 피(避)하여 도시국가연합을 형성했다.
그런데 주(周) 15대 문왕(文王)은 서방 강족(羌族)의 지도자인 태공망 여상(太公望呂尙)을 스승으로 맞아, 은(殷) 타도(打倒)를 준비한다. 여기에 일족을 사용한 것에 대한 원한이 깊은 여상(呂尙)은 주(周) 16대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을 파하고 서기전 1100년경 주(周)나라를 수립하였다.
여상(呂尙)은 이때의 공적(功績)으로 산동성(山東省)의 땅을 받아 ‘제(齊)나라’를 건국(建國)했다. 이 제(齊)나라는 제물(祭物)로 바쳐진 강족(羌族)의 원한(怨恨)이 여상(呂尙)에 의하여 복수(復讐)를 한 동이족(東夷族) 강족(羌族)이 산동성(山東省)에 세운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원한(怨恨)은 원한(怨恨)을 낳아 비극으로 종말을 고(告)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고대에서나 현대에도 변함이 없다. 현대의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 제2차 대전 중에 독일 나치스에 의해 희생된 원한을 철저히 복수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나치협력자처벌법’을 제정하고 유태인 600만 명의 학살을 지휘한 아돌프 아히만(Adolf Eichmann(1905~1962)를 잡아 들였다. 그는 아르헨티나로 도망가 가명으로 시민권을 얻어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의 자동차 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은신해 있었다. 이를 이스라엘 모사드가 끈질기게 추적해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로 압송해 1962년 5월 31일 처형하였다.
고대 은(殷)이 강족(羌族)의 압박에 의해 천도(遷都)를 한 원한이 있다 해도 그 원한 때문에 제단의 희생공물(犧牲供物)을 양(羊)대신 강족(羌族)의 목을 제물(祭物)로 했다는 것은 고대나 현대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 복수가 복수를 낳은 것이다.
은(殷)도 동이족이 세운 나라이기에 한족(漢族)의 역사라기보다는 우리의 역사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서역(西域) 방면으로부터 황하와 위수(渭水)를 끼어서 동진(東進)해 온 한족의 조선(祖先) 중에 어떠한 민족이나 부족이 있었는지는 은(殷)나라 시대가 되기까지 전혀 알 수 없다.
세계학자가 주장하는 학설은 흥미가 깊으나 결정적인 것은 아직까지 모르고 있다. 옥스퍼드대학의 박스톤 교수는 한민족의 조선은 다림분지에 살던 사람이라고 하고, 프랑스학자 라크베리는 바빌로니아에서 온 셈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독일인 학자 리히도 호휀은 백인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이란이 동시에 한족(漢族)의 발생지가 아닌가?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고대 황하유역에는 은족(殷族) 이외에 50개 정도의 씨족집단(氏族集團)이 후에 국가가 된다. 이 집단 이외에도 여러 민족의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의 씨족사회(氏族社會)와 부족사회(部族社會)의 상황은 기록이 없어 불명(不明)하기 때문에 오늘날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족(漢族)이라는 민족집단(民族集團)이 서방에서 사막을 건너 황하(黃河)와 위수(渭水)를 끼어서 동진(東進)해 와 씨족연합체(氏族聯合體)를 형성해서 정착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적이라 사료된다. (以上은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34面~36面 參照, 引用)
진(秦) 멸망, 인간존엄무시, 조군(趙軍) 40만 생매장이 원인
위에서 은(殷)의 멸망 원인이 인명(人命)을 경시한데서 온 것임을 살펴봤는데 중국을 처음 통일한 진(秦)나라 의 경우도 인간의 원한을 사면 그 원한이 개인과 국가도 멸망에 이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조교체기(王朝交替期)에 수천만의 인구가 크게 격감(大激減)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보면 첫째로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는 전쟁으로 살육(殺戮)과 국내의 정부군과 반란군과의 항쟁(抗爭)에 의해서 농업 노동의 주역인 남자 인구가 군인으로 차출되기 때문에 농지(農地)가 황폐하게 돼 대기근에 빠지는 것이 원인이었다.
둘째는 전란(戰亂)에 의해서 전사자(戰死者)의 수가 수십만으로부터 수백만의 규모가 되는데 여기에는 대의사상(大義思想)이라는 유교와 얽힌 독특한 사고가 크게 관계하고 있다.
대의사상(大義思想)이란, 일단 신하(臣下)로서 군주(君主)에 쓰임을 받는 자는 군신(君臣)의 대의(大義)앞에 자신(自身)을 돌보면 아니되고, 자신을 무(無)로 해서 군신(君臣)의 명분(名分)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사상이다. 일제도 이 사상을 가지고 태평양전쟁을 벌였다.
즉, 군주(君主)를 위해서는 죽는 것도 미학(美學)으로 보는 것이다. 때문에 왕조교대기(王朝交代期)에는 관료·일반인, 더욱이 군대의 병사에 이르기까지 신왕조에 끝까지 저항했다.
한편, 신왕조(新王朝)로서도 대의사상(大義思想)이 있기 때문에 반항하지 않아도 전 왕조의 사람들을 철저하게 살육(殺戮)하였다. 이 사상은 20세기까지도 중국과 일본에서 반복(反復)되었다. 때로는 전 왕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일반시민도 살육의 대상으로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대의사상(大義思想)은 유교의 ‘춘추(春秋)’에 유래하고 송(宋)나라 시대의 주희(朱熹)에 의해 ‘대의명분론(大義名分論)’으로 완성한 것이다. 중국사(中國史)에 있어서 대의사상(大義思想)은 2천년 이상에 걸쳐서 자민족(自民族))에게까지 대학살에 이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서기전 5세기~서기전 3세기에 걸친 대륙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문자(文字) 그대로 전국(戰國) 세상이었다. 때문에 많은 살육(殺戮)이 사실(史實)로서 ‘사기(史記)’에 남기고 있음을 본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진군(秦軍)과 조군(趙軍)이 대회전(大會戰)을 한,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진군(秦軍)이 대승을 해서, 조군(趙軍)의 40만이 항복했다. 그러나 진시황(秦始皇)은 이들을 포로로 대우하지 않고 모두 다 생매장(生埋葬)하는 있을 수 없는 참극을 자아냈다.
그뿐만 아니라 진시황은 13세에 즉위하자 바로 여산(驪山)에 자신의 궁전과 같은 능묘(陵墓)의 공사를 시작하고 이 공사가 끝나자 비밀유지를 위해 공사한 전원을 능묘 내에 가두어 죽였다.
이로 인하여 진시황(秦始皇)은 그의 마차를 감호하는 신하 중의 한사람인 여후영이 진시황 마차를 박살내고 진시황을 살해한다. 이는 창해(滄海)사람인데 가족과 나라를 잃은 원한에 의해 서기전 210년 진시황은 죽임을 당하고 진(秦)나라는 4년 후인 그의 아들 대에 와서 진(秦)은 멸망한다. 이같이 살육을 좋아하는 나라의 군왕은 물론 장성들도 그 종말은 같은 운명이었다.
항우(項羽)의 경우, 후위(後魏)시대의 서(書)에 의하면 시황제 능묘(陵墓)에 재보(財寶)를 도굴하고 진시황이 세운 궁전들을 3개월간 불사르며 황족(皇族)을 학살한 그 잔학(殘虐)이 극심하여 인심을 잃음으로 항우(項羽)의 한신을 비록한 유능한 부하들이 유방(劉邦)의 진영으로 넘어가 항우는 유방(劉邦)과의 해하(垓下)싸움에서 유방에게 패하게 된 이유이다.
중국 왕조의 존속기간(存續期間)은 몇 년인가
여기서 필자는 중국역사서(中國歷史書)에서 나오는 나라들에 대하여 그 존속기간을 살펴봤다. 중국(中國) 왕조(王朝)의 건국과 그 존속기간을 보면 어느 족이 대륙주인인가 자명(自明)해진다.
진(秦)이 41년, 한(漢) 230년, 수(隨) 37년, 당(唐) 289년, 송(宋) 319년, 북송(北宋) 167년, 남송(南宋)이 152년이다. 이 왕조들은 송(宋) 319년을 제외하면 모두 300년 이하의 나라들뿐이다.
한편,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도 아래와 같이 몇 십 년에 불과하다. 전조(前趙)(304~329)가 25년, 전촉(前蜀)(304~347) 43년, 후조(後趙)(319~350) 31년, 전량(前涼)(324~376) 31년, 전연(前燕)(337~370) 33년, 서진(西秦)(385~431) 46년, 후량(後凉)(386~403) 31년, 남연(南燕)(398~410) 33년, 서량(西涼)(400~420) 20년, 북량(北涼)(401~439) 38년, 하(夏)(407~ 431) 24년이다.
50년도 안 되는 나라들로 우리와 비교도 되지 않는 나라들인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인물들도 한족(漢族)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우리 동이족(東夷族)이란 것이다.
삼국지의 초(楚)나라의 경우만을 봐도 관우(關羽)는 고구려인이고, 장비(張飛)는 백제인,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신라인(新羅人)이다. 그 외 고대 중국의 왕족은 거의가 동이족이고, 중국 한(漢)나라 시대의 뛰어난 지략가 장량(張良)과 한신(韓信)등도 모두 우리의 동이족(東夷族)이다.
우리나라 반도식민사관들은 중국과 일본의 왜곡된 역사를 말하며 그 역사를 신봉하나 이들은 어느 나라 족속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족속들인 것 같다. 그들의 양식이 의문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은 상고사가가 없고 고대사도 불실하여 우리 역사를 깎아내기 위해 1403년 명(明)나라는 우리의 왜인전(倭人傳)을 일본에 줘버린다. 일본은 이것을 받아서 역사를 제멋대로 조작 왜곡하기 시작하나 거짓 역사는 다 들통이 나기 마련이다. 일본은 우리가 가서 세운 나라이다.
그들은 왜(倭)가 하남성에서 고구려·백제·신라·가야(伽倻)의 지배를 받았던 사실을 숨기고 제멋대로 일본 역사와 우리 역사를 조작, 왜곡한 사실을 모르고 이를 가르치는 것은 역사 무지이다. 우리 역사는 대륙의 역사이지 반도의 역사가 아니다. 따라서 반도식민사관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역사는 대륙사관으로 그 실체(實體)를 바로보고 남은 원전(原典)에서나마 그 진실을 바로 보아야 한다. 지금 가르치고 있는 역사는 왜곡된 역사로 우리의 역사를 망치고 있음을 제대로 알아야한다.
주(周)나라는 서기전 770년에 서방의 견융(犬戎)의 침공을 받아 호경(鎬京)을 버리고 수도를 동쪽의 낙읍(洛邑)에 옮겨서 이후 호경(鎬京)에서 약 330년간을 서주(西周)라 칭하고, 서기전 256년, 진(秦)에 멸망할 때까지 낙읍(洛邑)에서 514년간을 칭해서 동주(東周)라 부르고 있다.
주(周)는 서주(西周) 351년과 춘추전국시대의 동주 522년을 합치서 873년간 이라고 하며 중국 역사상 가장 최장(最長)이라고 하나 이는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나라도 포함된 연수(年數)이다.
여기서 논외이나 중국왕조(中國王朝)의 건국(建國)과 존속기간(存續期間)을 보면, 중국 한족(漢族)이 정권을 잡은 것은 1000여년 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는 이방 민족이 잡았을 뿐이다. 즉, (秦) 41년, 한(漢) 230년, 수(隨) 37년, 당(唐) 289년 송(宋) 319년(북송 167년 남송 152년)이다.
한(漢)도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이 합쳐야 396년이다. 후한(後漢)의 역사도 200년이 안 된다. 실은 동이족(東夷)족이 세운 은(殷)이 645년으로 최장(最長) 국가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중국은 300년 이상 존속한 나라가 하(夏)나라 441년과 송(宋)나라 319년을 들 수 있으나 우리의 유구하고 위대한 역사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환국 3301년, 배달국 1565년, 고조선 2096년, 북부여+고구려 907년, 백제 678년, 가야 620년, 고려 475년, 조선 519년과 대조를 이룬다.
중국은 우리 역사를 말살하려고 동북공정도 시도하나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동북공정은 제아무리 추진해도 성공할 수 없다. 역사는 사실과 진실의 기록만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 사실을 보고도 우리 역사가 반도 역사라고 하는 자는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중국과 일본의 조작되고 왜곡한 역사만을 우리 역사로 보기에 반도사관에서 못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 역사는 대륙사관으로 제대로 봐야 우리나라의 역사 실체를 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윤진영 編集 ‘三國史’.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문화열차’. 이강민 ‘대학국고대사’.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外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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