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우리나라 반도식민사관자들은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강성(强盛)한 때, 강한 병력(兵力) 백만(百萬)으로 남으로 오(吳)와 월(越)나라를 없앴고, 북으로는 유·연·제·노나라를 제거하고 그 나라들을 지배했던 나라에게 크게 위협이 되었다는 「삼국사(三國史) 권46」의 그 원문(原文), (高句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을 잊고 있다.
우리나라의 저명한 역사학자라고 하는 단재(丹齊) 신채호 선생은 위의 사실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저서 「한국사연구초(韓國史硏究草)p33~p43」, 「삼국사기 동서양자 상환교고(三國史記東西兩者相換考)p33~p39」와 「삼국사동이열전교정(三國史東夷列傳校正)」에서 “지명(地名)을 바꿔서라도 우리 역사를 반도 안에 넣도록 하였다”는데 이는 천추(千秋)에 한(恨)을 남긴 결과가 되었다.
이로 인해 선생은 씻을 수 없는 반도사관자로 낙인이 찍히고 선생의 명성은 뒤바꿔 졌다. 이것은 일제의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동조(同調)한 것과 다름이 없는 대학자로서 오점(汚點)을 남겼다. 필자 역시 신채호 선생에게 크게 실망하였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은 그 명성과는 달리 삼국시대의 역사사실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삼국사기」도 가치가 없다”고 하며, “몇 푼어치도 못 되는 역사라고” 함으로 우리 역사를 폄하하고 대륙의 역사를 반도(半島) 안에 국한하려고 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오점(汚點)을 남기었다
이로 인해 선생의 제자들과 후학들도 이를 맹종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 것일 뿐 아니라 역사왜곡을 조장하는 단서를 중국과 일본에 제공함으로서 자의든 타의든 간에 역사왜곡에 기여한 비극적인 역사 참극을 자아내었다. 참으로 애석하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Cervantes)는 “역사가는 정확하고 충실하며 공평해야 하며, 득실(得失)도 애증(愛憎)도 역사가가 진실을 벗어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에 반했다.
오늘은 삼국시대에 우리가 대륙에 대제국(大帝國)을 건국한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고 져 한다.
고대 중국이 대국(大國)이 되지 못했던 이유
상고사가 없는 중국은 하(夏)·은(殷)·주(周)의 삼왕조(三王朝)를 성스럽게 여기며 이상적(理想的)인 왕국(王國)으로 실재(實在)한 왕조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 동이족에게는 맥을 못 추는 약한 왕조로 비춰지고 있다. 그것은 동이족의 압박을 받아 왕조의 지탱이 어려워져서 그 수도(首都)를 호경(鎬京)으로부터 낙읍(洛邑:낙양(洛陽)으로 옮긴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주(周)나라는 서기전 1121년~서기전 248년으로 873년간 지속(持續)했다고 하지만 이는 서주(西周)와 동주(東周)를 합친 연수이다. 서주(西周)는 서기전 1100년경~서기전 770년으로 351년 간이고, 동주(東周)는 서기전 770년~서기전 248년으로 522년간 유지되었다.
그런데 이 동주시대(東周時代)인 서기전 770년~서기전 403년 까지를 ‘춘추시대(春秋時代)’라 부르고, 그 이후 서기전 403년~서기전 221년까지를 ‘전국시대(戰國時代)’로 부르는데, 이 시대는 주왕조(周王朝)의 권위는 이름 뿐으로서 사실상 제후(諸侯)들이 들어와서 대혼란의 시대이며 대난세(大亂世)가 계속된 시대였다.
이 춘추전국시대의 후반에 공자(孔子)를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로 불러지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전쟁(戰爭)의 전술(戰術), 처세술(處世術)를 주장해서 제후들이 성행한 시대였다.
그런데 그 당시 동주(東周)의 도읍인 낙읍(洛邑-오늘의 낙양부근(洛陽附近)은 소위 중국문화(中國文化)의 땅으로 산물(産物)도 풍부한 하남성(河南省), 황하유역(黃河流域) 지역(地域)이다.
이곳은 고도의 중국문화가 유포(流布)돼 있어서 ‘중원(中原)’이라는 별명(別名)으로 말해지는 땅으로서 주시대(周時代)에는 수많은 제후(諸侯)가 이 중원주위(中原周圍)에 주(周) 외에도, 정(鄭)·송(宋)·위(衛)·노(魯)·조(曹)·진(陳)·채(蔡) 등의 나라들이 밀집해 있었다.
이 나라들은 모두가 경쟁적으로 ‘원교근공정책(遠交近攻政策)’에 의해서 주변국과 전쟁을 반복함으로 각국은 모두 재정적으로도 피폐(疲弊)하여 그 어느 나라도 대국(大國)되지 못하였다.
반면, 우리는 천자(天子), 황제(皇帝)의 국가로 등장(登場)한 시대(時代)로, 석기시대(石器時代)에 석기(石器), 철기(鐵器)를 파괴하는 고시(楛矢), 석족(石鏃)을 발견한 민족이다. 우린 사방원시민족(四方原始民族)을 정벌하고 정복하여 대륙에서 대국(大國)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석족(石鏃)은 석기(石器), 철기(鐵器)를 파괴하는 신비성이 있어 지구상의 다른 데는 없고 오직 우리에게만 생산되었다. 이것을 고대 중국인은 동주(東周)시대부터 2천년 동안 우리의 고시(楛矢), 석족(石鏃)을 수입하면서 이를 보물(寶物)이라고까지 말하였다 한다.
이 석족(石鏃)은 석기(石器), 철기(鐵器)를 파괴하는 무기의 수출로 우리는 자주(自主) 자존(自尊)의식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천민사상(天民思想)과 천자(天子), 황제(皇帝)의 문물제도를 창안하고 고대부터 이민족(異民族)을 지배하고 제후국(諸侯國)을 거느린 대국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부여·구려·백제·신라·가야가 황제를 칭하고 일본도 우리가 전해준 황제(皇帝)를 지금도 쓰고 있다. 중국은 이 황제제도가 진시황(秦始皇) 때부터라고 왜곡하나 진시황은 우리 제도를 도용(盜用)하였던 것이지 진시황이 황제제도를 만든 것이 아니다. 이는 이미 밝혔다.
한·중·일, 역사 갈등 원인을 제대로 밝혀야
1988년 중국은 동이족의 신농염제(神農炎帝)를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하고 또한 김유신(金庾信)의 조상(祖上)이기도 한, 헌원(軒轅)을 중국의 시조(始祖)로 편입시킨다. 이들은 우리의 엄연(奄然)한 조상들이지 중국이 내세우는 조상(祖上)이 될 수 없는 우리의 선조(先祖)들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제일 심한 욕이 ‘성(姓)을 갈을 놈’이라는 말이 있는데 중국은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조상들까지도 제멋대로 바꿔 놓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로서 아예 자기들의 조상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일을 예사로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중국은 자기들의 역사를 꾸미는데 부끄러운 장수(將帥)나 중국에 치욕을 준 장수는 역사(歷史)에 기록하지 않은 이해할 수 없는 나라이다. 예컨대 백제 침공 시(侵攻時) 당(唐)나라 군대의 행군대총관(行軍大總官)은 소정방(蘇定方)이었다.
당나라 군대의 수장(首將=사령관(司令官)인 소정방(蘇定方)은 행군대총관(行軍大總官)으로 백제에 진격하였다. 이때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게 급습(急襲)을 당한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은 서기 660년 7월 18일 대륙(大陸)의 웅진성(熊津城)에서 저항하다 성(城)에서 나와 항복하게 된다.
소정방(蘇定方)은 백제가 패한 후 항복한 의자왕(義慈王)과 많은 포로들을 데리고 동년 9월에 당(唐)으로 돌아가서 당고종(唐高宗)에게 백제 의자왕(義慈王)으로 하여금 항복(降伏)하게 한 장수로 백제 멸망에 큰 공(功)을 세운 장군이었다.
그러나 이후 백제의 영토를 차지하려는 소정방(蘇定方)을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이를 용납하지 않고 백제 영역에서 소정방(蘇定方) 군대를 축출(逐出)한다. 이후, 소정방(蘇定方)의 이름은 중국역사서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중국사의 필법이 ‘휘치필법(諱恥筆法)’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안시성(安市城)에서 당태종(唐太宗)을 물리친 양만춘(楊萬春) 장군의 기록도 찾기 힘들다. 이것도 중국이 패한 것을 숨기기 위해 중국역사에서 지웠다. 이와 같이 소정방(蘇定方)과 양만춘(楊萬春)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중국의 역사가 제멋대로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백제가 건국하고 망한 곳도 반도가 아니고 대륙임은 이미 말하였는데 소위 강단학파라는 이들은 반도식민사학(半島植民史學)자들이 말하듯 백제가 반도에서 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해서 중국의 25사 동이전의 지명이 반도에 없는가? 백제가 대륙에서 패망한 기록이 왜 중국사서에 나와 있는가!
백제의 지명이 중국에 있고 송(宋)나라 때의 지도인 우적도(禹跡圖)에도 현재 중국에 동이지명들이 있는데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백제는 징평이군(晉平二郡)에 양서·남사·성양(城陽)·광양(廣陽)·광능(廣陵)·대방(帶方)·조선(朝鮮)·청하(淸河)·낙랑(樂浪)이 적혀 있다.
또한 「남제서(南齊書)」에는 항성(項城)·백마(白馬)·대산(大山)·웅진(熊津)·동명(東明)·덕안(德安)이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석문(石門)·제성(諸城)·하수(河水)·숭산(崇山)·백마(白馬)·황산(黃山)·평원(平原)·동명(東明)·항성(項城)·덕안(德安)·독산(獨山)·동성(桐城)·잠산(岑山)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이 반도인가! 이곳은 대륙의 지명이다. 반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고증에서 밝혀진 대륙역사 바로 알아야
고구려, 백제도 대륙에서 건국(建國)했고 그 지명(地名)들이 다 대륙에 있다. 「후한서(後漢書)」에 보면, 우북평(右北平), 어양(魚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서안평(西安平)이 고구려라 했다.
「위서(魏書)」에는 광주(光州)와 섭라(涉)羅)가 고구려 땅이라 하고, 「신구당서(新舊唐書)」에는 은성(銀城)과 신성(新城)이 고구려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들은 모두가 다 대륙의 땅들이다. 백제와 신라와 가야 및 왜(倭)도 대륙에 있음을 이미 밝혔기에 중복을 피한다.
우리나라 반도식민사관의 사학자(詐學者)들은 우리역사를 무조건 한반도에만 맞추려는 발상부터 잘못되었다. 이를 제대로 알려면 「삼국사(三國史)」와 중국의 18사부터 제대로 연구하고 말을 했으면 한다. 「삼국사」 50권 중 「삼국사」 권46의 4면에 기록만이라도 보고 말을 하였으면 한다.
우리가 상고시대부터 대륙에 선주(先住))해서 문명을 꽃피우고 삼국시대에도 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하여 지배한 역사를 바로 살펴보면, 우리역사는 반도사가 아니고 대륙사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의 18사(史)인 「사기(史記)」·「삼국지」·「진서(晉書)」·「위서(魏書)」·「송서(宋書)」·「남제서(南齊書)」·「양서(梁書)」·「주서(周書)」·「진서(陳書)」·「수서(隨書)」·「북사(北史)」·「남사(南史)」·「당서(唐書)」·「구당서(舊唐書)」·「구오대사(舊五代史)」·「오대사(五代史)」를 연구하면 우리역사가 대륙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도대체 대륙의 역사를 반도에 맞추려는 그 반도사관 발상자체가 얼마나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는 대륙사이기 때문에 대륙사관으로 보면 다 알 수 있다. 잘못된 반도사관으로 반도에 맞추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우리 역사가 대륙사이기 때문이다.
「삼국사」 권46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의 “고구려와 백제(百濟=(맥제(貊濟)가 강성할 때 남으로 오(吳), 월(越)을 정벌하고 북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정복하여 장안(長安)의 큰 두통거리였고, 수(隨)나라가 망한 이유도 요(遼)의 동쪽을 정벌한 때문이다”고 했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은 지금 한반도에는 삼국시대(三國時代) 지명(地名)이 존재하지 않고 역사왜곡을 위해 몇 곳에 지명을 갔다 놔서 역사를 말 할 때 서류상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삼국시대 지명이 지금도 중국에는 「삼국사」 권46지역에 다 있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이 지명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오(吳)나라, 월(越)나라와 북으로 유(幽)지역과, 연(燕)나라, 제(齊)나라, 노(魯)나라 지역에 다 있고 한반도에는 「삼국사」 권46지역의 지명(地名)이 없다.
이미 밝힌바 대로 인구적으로나, 봄에 장마가 져 홍수가 나고, 메뚜기 떼의 피해, 일식과 월식의 관측 등의 자연현상이 「삼국사」 권46 지역대륙에서 행해진 것을 반도에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반도식민사관자들은 백제 건국도 반도라 하나 아니다. 한반도에는 삼국시대 지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도의 지명은 서류상의 지명으로 몇 개를 옮겨서 삼국시대 백제의 지명이라 하나 아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삼국시대 지명과 삼국 미상(未詳)의 지명까지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당(唐)나라가 패망한 이후 송(宋)나라가 제작된 우적도(禹跡圖)가 「중국역사도설」에 소개되어 있고 중화민국이 발행한 「중화민국지도집(中華民國地圖集)」과 일치하고 있다.
이래도 우리역사가 반도역사(半島歷史)인가!? 참으로 한심한 인간들에 의해서 위대하고 찬란한 우리나라 역사가 망가지고 뒤엎어져 있는데 이를 좋다고 한다면 정상인이 아니다.
삼국시대 역사인물 활동한 곳도 대륙이다
우리 최치원(崔致遠)·장보고(張保皐)·김유신(金庾信)·계백(階伯)장군·원광(圓光法師)·원효대사(元曉大師)등, 이 모든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나서 살았다. 나당영합군도 한반도에서 전투한 것처럼 황산벌판을 말하나 이모든 역사의 주인공과 지역은 모두 대륙에 있었고 한반도에 없었다.
최치원(崔致遠)도 신라인이 아니고 고구려 사람이라는 것도 이미 밝혔다.(唐書 卷60 禮文志.;又 桂苑筆耕). 최치원은 장보고 사후(死後) 12년 뒤의 인물인데 장보고(張保皐)도 반도에 살았다는 기록은 없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金庾信傳). 그런데 이들을 반도에 가져다 놓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도 「당서(唐書)」도 장보고 정년(政年)이 신라(新羅)에 돌아와 살았던 곳이 서화(西華) 동쪽의 영해(寧海:강소성(江蘇省)으로 강회신라(江淮新羅) 사람임을 숨길 수 없다.
우리는 왜곡된 역사를 배워서 머리에 각인(刻印)돼 있어서 신라가 반도에 있었다고 믿고 있으나 중국의 사서(史書)와 신구당서(新舊唐書)」에 강회(江淮)에 신라(新羅)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1060년 편찬된 「당서(唐書)」에 최치원(崔致遠)이 고구려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장보고(張保皐)에 관해서도 「삼국사기(三國史記)」가 반도에서 편찬되기 이전에는 반도에선 장보고(張保皐)의 소문조차 없었다. 유명한 장보고가 300년 동안 소문도 기록도 없던 장보고였는데 대륙에서 활약한 장보고를 반도에 가져와서 서라벌 신라에 있었다는 것은 허구이다.
우리는 우리 역사가 반도에서 다 이뤄진 것 같이 배웠으나 백제와 고구려는 반도에서 건국하지 않았다. 반도에는 낙랑국(樂浪國)이 있다가 낙랑국(樂浪國)이 고구려에 멸망한 후, 고구려(高句麗) 제후(諸侯)로 칸(干)이 다스리는 신라(新羅)가 있었다. 왕이 다스리는 신라는 반도에 없었다.
이 신라(新羅)는 서기 32년~서기 500년 간 서라벌(徐羅伐)에서 왕(王)이 아닌 칸(干)이 다스리는 신라로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다. 왕(王)의 신라로 된 것은 지증왕(智證王) 때에 왕의 신라가 된다.
신라도 이미 밝힌 대로 대륙과 반도에 2개가 있었다. 대륙의 신라는 중국 25사(史)에 나오는 는 것을 이미 밝혔다. 중국 서화(西華)의 동쪽에 강회신라(江淮新羅)가 있었다.(三國志, 韓의 泗盧國;斯盧國=駟盧國), 梁書, 北史, 南史, 舊唐書, 唐書, 後漢書의 江淮事件-滄海郡 記錄 參考)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교과서(歷史敎科書)에서는 지금도 한반도에서 있었던 것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중국도 우리가 대륙에 있는 것을 다 알고 말하고 있다. 태산(太山)과 사(泗)와 연수(漣水)의 남쪽에 진해(鎭海)가 있는데 남쪽에 영파(寧波)가 있다.
이곳에 ‘고려사관유지(高麗使館遺址)’라는 박물관이 있다. 이것은 이곳이 우리 최치원(崔致遠), 장보고(張保皐)등과 함께 서신라(西新羅)와 백제, 고구려의 역사를 새로 강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대륙의 역사임을 밝혀줄 것이다.
계백장군의 5000의 결사대가 신라군과 싸운 황산(黃山)이라는 곳도 한 곳이 아니라 10곳에 가까운 황상이라는 지명이 있다. 반도에 없는 황산(黃山)을 말하며 반도에서 나당연합군과 싸웠다는 것도 다 거짓의 허구임을 알고 더 이상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김부식(金富軾) 시대에도 반도에서는 알 수 없었던 지명(地名)들이 대륙에 있음은 얼마나 중국이 우리 역사를 변조하고 왜곡하며 없애는데 적극적이며 국가적 차원에서 조작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역사는 왜곡하고 조작, 위조된 기록으로 바로 정립할 수 없다. 역사는 고증(考證)을 통해서 바로 입증(立證)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의 장래도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서 출발하여야 국가장래가 빛날 수 있고 고대에 위대했던 국가로 복원한 후에 우리나라는 더 위대해 질 것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외 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편저(編著), 「지도로 보는 우리역사」. 윤진영 編集 「三國史」. 우찬 「한국사의 쟁점」.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헌식 「천년만에 밝혀진, ‘안시성과 살수’」.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황순종 「동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井上 淸 「日本の歷史」. 日本國書刊行會,‘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文定昌 「國史の延長-,‘古代日本史」. 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 編著, ‘世界歷史の基礎知識(1)’外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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